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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파이트 클럽 (4)
개혁파 vs 혁명파 갈등 반복 ... 적당한 협상으로 끝나지 않아
목표 상충, 누군가는 물러서야 … 정부-의료계 갈등 풀 수 있을까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영화 ‘파이트 클럽’ 초반에 꽤 흥미로운 ‘갈등과 협상’ 장면을 배치한다. 생각과 이해관계, 상황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면 서로 부딪히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주인공인 ‘화자’도 영화 속에서 두번의 갈등 상황에 봉착하는데, 첫번째 갈등은 협상을 통해 무난하게 해결한다. 하지만 2번째 갈등은 해결하지 못하고 파국을 맞는다.

 

 

# 갈등➊ = 주인공인 화자는 타인들의 극심한 고통을 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시나마 잊고 숙면을 취하기 위해 타인들의 고통 ‘눈팅’에 나선다. ‘고환을 제거한 남자들의 모임’ ‘말기암 환자들의 모임’ ‘알코올 중독자 모임’ 등등이 그 대상이다. 

그렇게 ‘고통의 메카’를 순례하던 주인공은 어느날 자신이 순례하는 온갖 고통의 메카에 말라(Marla)라는 저승사자 같은 눈화장을 한 여자가 자신과 똑같이 고통을 ‘눈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인공은 갑자기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김이 새버리고 도무지 몰입이 안 된다. 짜증난 주인공은 말라를 붙잡고 협상을 시도한다. 

주인공은 ‘우리 자꾸 마주치면 너도 불편할 테니 각자 모임 방문 요일을 정해서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자’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말라는 선선히 동의한다. 굳이 번거롭게 요일을 바꾸지도 않고 주인공이 눈팅하는 모임에 아예 안 나타난다. 그렇게 말라의 협조와 양보를 통해서 갈등은 해소되고 주인공은 다시 타인들의 고통에 몰입하고 숙면을 취한다. 

말라가 양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천사여서가 아니라 굳이 주인공과 마주치는 모임이 아니어도 다른 ‘고통의 모임’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고통의 현장들이다. 아마도 그 도시에 고통을 눈팅할 수 있는 장소가 그곳들뿐이었다면 말라도 그렇게 순순히 양보할 수는 없었을 듯하다. ‘대체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대상은 애초에 갈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 갈등➋ = 주인공은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 주도하는 상점에 불을 지르고 도시 조형물을 무너뜨리는 ‘도시 테러’에 의기투합한다. 그러나 더든이 미국의 모든 금융기록과 신용카드 회사 ‘서버’를 파괴한다는 테러의 최종목표를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려 하자 펄쩍 뛰고 더든과 대립한다. 

더든의 테러는 자본주의 사회 근간을 뒤엎는 일이다. 이 서버에는 어느 돈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밝혀주는 모든 자료가 저장돼 있다. 이 서버를 없애버리면 모든 부자의 동산, 부동산 소유의 근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빚쟁이들의 족쇄도 사라진다.
 

 

옛날로 치자면 어느 노비가 누구의 소유인지 밝혀주는 노비문서가 보관돼 있던 고려시대의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이나 조선시대의 ‘장예원(掌隸院)’을 불질러버리는 가장 궁극적인 체제전복 행위이다. 

주인공이 도시 테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 잠재된 모순의 개혁을 꿈꿨다면 더든은 아예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리셋’을 꿈꾸는 혁명가다.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갈등이다. 역사적으로 숱한 고비에서 개혁파와 혁명파의 대립은 누구 한쪽이 죽어야 끝나지 적당한 협상으로 마무리된 적이 없다. 

‘갈등(葛藤)’이라는 말의 ‘갈’은 칡이고 ‘등’은 등나무다. 모두 줄기식물이지만 칡은 오른쪽으로만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왼쪽으로만 감아 올라간다. 결국 칡과 등나무가 한곳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면 뒤엉켜 죽고 만다.

각자의 목표나 상충하는데 어느 한쪽도 ‘갈등➊’에서의 말라처럼 순순히 자신의 목표를 바꾸거나 물러설 수 없으면 뒤엉켜 서로 괴롭힐 수밖에 없는 것이 갈등이다. 한쪽이 죽거나 함께 죽어야 끝난다. 

의대 2000명 증원 문제를 놓고 대립 중인 정부와 의료계가 쉽사리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주인공과 말라 사이의 갈등은 다른 ‘대체재’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쉽게 양보를 통해 해결했지만, 의대생 2000명 증원문제는 서로 물러서면 달리 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치명적인 갈등인 모양이다.

칡과 등나무처럼 죽어라 하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휘감고 누가 먼저 죽나 한번 해보자는 기세로 뒤엉킨다. 파이트 클럽의 1인자와 2인자가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는 모습과 닮았다. 그들을 지켜보는 파이트 클럽 회원들만큼이나 ‘의료 대란’을 지켜보는 국민들도 당혹스럽고 심란하다. 

‘협상 기술’의 입문서이자 교과서쯤으로 읽히는 「예스를 이끌어내는 협상법(Getting to Yes·1981년)」에서 저자인 로저 피셔(Roger Fisher)와 윌리엄 유리(William Ury)는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 edagreement·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의 대안)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협상이 결렬됐을 경우 택할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을 마련한 쪽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고, 결국 승리를 거머쥔다는 거다. 

로저 피셔가 제시하는 BATNA 확보 전략은 ‘다른 협상 파트너로 전환’ ‘법정에 제소’ ‘파업’ ‘다른 형태의 동맹 형성’ ‘협상의 연기’ 등이다. 협상이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함께할 수 있는 다른 파트너가 있거나, 법정으로 가면 이길 확률이 높거나, 파업을 통해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거나, 시간을 끌어도 손해날 것 없을수록 협상력이 높아진다. 
 

 

갈등의 당사자인 의료계와 정부 쪽 모두 열심히 로저 피셔가 제시한 자신들의 BATNA 분석을 하는 모양인데 제대로 분석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일단 정부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질 좋고, 저렴하고, 한국말도 유창한 해외 의사 1만명쯤 대기시켜 놓은 것이 아닌 다음에야 다른 파트너 찾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여기에 도저히 타협이 안 돼서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도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듯하니 의료계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모양이다. 혹시 협상학의 대가라는 로저 피셔에게 이 사태 해결 용역을 맡긴다면 그가 어떤 보고서를 제출할지 궁금하다. 

아마 지금처럼 계속 밀어붙이라고 할 것 같지는 않다. 어찌 됐든 서로 뒤엉킨 팔뚝만 한 칡 줄기와 등나무 줄기에 온몸이 휘감겨 질식할 지경에 몰린 국민들만 딱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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