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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연의 '욕망의 섬, 에리시크톤의 반격'(9) 박흥식은 친일파인가

 

박흥식은 친일파인가

 

박흥식이 생산하려던 キ79丙 고등연습기가 여차하면 히엔으로 전환 가능한 기종이었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이번에는 김수남의 두뇌가 금속 절삭기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불꽃을 튀겼다.

 

해방 후에 박흥식은 자신이 조선비행기공업을 경영했다는 사실만이 부각되어서 ‘매판자본가 제1호’라는 오명과 함께 ‘저주받은 삶’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단지 목철혼합 시작기 1대를 제작했을 뿐, 결과적으로 약 2500여명의 조선인 청년들에게 강제징용의 피난처를 제공했다고 박흥식을 두둔하는 학자도 있다. 전시체제 말기 박흥식의 기업행동이 명백한 군수협력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반역자로 단정하기에는 과정보다 결과가 썩 괜찮았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었다.

 

박흥식이 반민특위에 끌려가서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쳤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1945년 8월 이후 일본인 조선군사령관이 일본 망명을 권유하면서 비행기까지 내주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던 이유도 이러한 신념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지점이 있다. 교래리 비밀비행장은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던 1945년 7월에 완공되었고, 그 땅의 주인은 박흥식이었다. 혹자는 그 땅이 조종사 훈련장 목적으로 불하받은 땅이라고도 주장한다. 엄혹한 일제 말기에 조선비행기공업 안양공장 건설 과정에서 “뭐든지 요구하는 것을 즉각 해결해주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즉시 공장 건설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배짱을 튀기던 박흥식이, 어째서 자신의 사유재산인 녹산장 땅만큼은 일제의 가미카제 비행장으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의문이 든다. 전쟁 말기였으므로 훈련용 비행장이란 말은 성립이 안된다.

 

거기다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하나 더 있다. 박흥식이 사장이었던 조선비행기공업이 생산하려 했던 キ79丙 목철(木鐵)혼합기가 일제 최후의 광기라 평가받는 가미카제 자살특공기로 전환이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일제는 즉시 항복했다. 미군은 오키나와의 비극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일 수 없지만, 일제의 예상대로 ‘만약’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제주에서는 ‘오키나와 그 이상’의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옥쇄를 강요당한 제주도민이 중산간지대 곳곳에서 집단 학살당하고, 제주의 젊은이들은 히엔에 올라 일왕이 내린 식어빠진 사케 한 잔과 목숨을 맞바꿔야 했을 것이다. 그 자살특공의 핵심기지가 박흥식 소유의 녹산장 터에 있었다. 박흥식은 이러한 혐의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해방 이후 박흥식은 녹산장 토지소유권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만약’ 박흥식이 반민특위에서 ‘매판자본가 제1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벌받았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가지고 있던 녹산장 땅은 몰수되어 국가로 귀속되지 않았을까.

 

국립송당목장

 

해방 이후 제주도에서 박흥식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도백열전』에서였다. 『도백열전』은 제1대 박경훈 도지사로부터 제30대 김문탁 도지사까지 1946년부터 1995년까지 역대 도지사의 행적을 기록한 제주도 정치 역사서였다.

 

국립송당목장을 민간에 불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주도사람 안정립이 재일동포의 자금지원을 받아 목장을 매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김영관 도지사는 송당목장만큼은 제주도사람이 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음 해인 1963년 2월 농림부에 적극 추천했다.

 

혁명정부에서 안정립을 낙찰자로 검토하고 있을 무렵, 서울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사장이 일본 제국인견(帝國人絹)과 합자해서 송당목장을 불하받고 싶다고 의사를 타진해왔다.

 

김영관 도지사는 안정립에게 불하하기로 거의 결정된 마당에 박흥식이 뒤늦게 끼어들자 입장이 난처했다. 박흥식은 제주도내 녹산장 일대에 수백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으며 송당목장 부근에도 목장으로 개발할 대규모 목야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들어 자신이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5․16쿠데타가 발발한 후 혁명위원회는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예비사단 사단장들을 전국 시도지사로 발령한다. 김영관은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설치되어 있다는 이유로 해군 제독이 도지사로 기용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김영관 준장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대학 총장 등을 거쳐 국방연구원에서 교육을 받던 중 제주도지사(1961.5.24.~1963.12.16)로 전격 발탁되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박흥식은 녹산장 외에도 송당목장 인근에 대규모의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흥식은 이 사업을 위해 제주 실정에 정통한 길성운 전제주도지사를 사업 고문으로 기용했다. 길성운은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제7대 제주도지사로 역임했으며 국립송당목장 설치를 주도했던 사람이었다. 길성운은 송당목장을 불하받으면 면양 50만 마리를 사육하여 외국 수입 원모의 1/3을 제주에서 생산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송당목장은 “우리 국민도 이제는 쇠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창하며 이승만이 각별한 애정을 쏟아부었던 국립목장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선을 긋고 싶었던 박정희는 송당목장을 정상 궤도에 올리려고 수많은 공을 들였으나 적자 경영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성과 없이 현상 유지에 급급할 거면 송당목장을 민간에 팔아버리라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전 정권 실세였던 길성운 제주도지사가 송당목장을 불하해달라고 나섰으니 탐탁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결국 송당목장은 제주도사람 안정립에게 불하되었다. 그러나 안정립은 자금을 대주기로 한 재일동포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두 달 후 삼호그룹에 운영권을 넘겨주게 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조중연= 충청남도 부여 태생으로 20여년 전 제주로 건너왔다. 2008년 계간 『제주작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탐라의 사생활』, 『사월꽃비』가 있다. 제주도의 옛날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이를 소재로 소설을 쓰며 살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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