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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역사' 거대한 성벽 깬 그들의 고통, 이제 '정의의 역사'로 가자

 

1948년. 제주읍 아라리에서 살던 김평국 할머니(88)는 그해 가을 피난해온 삼도동에서 영문도 모른채 끌려갔다.

 

“매만 죽게 맞았다. 별 기억도 안나고 매 맞은 게 아프기만 했다. 맞기만 죽게 맞았지 죽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때 매 맞은 곳이 아프다.”

 

김 할머니는 그해 12월 5일 불법 군사재판에서 형법 제77조(내란죄)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로 끌려갔다.

 

서귀포 하효동 출신 오희춘 할머니(88)는 17살의 나이에 같은 마을에 살던 한 해녀가 내민 "육지 물질을 가자"는 서류에 사인을 했다. 

 

하지만 그게 기나긴 고통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 오 할머니는 “그게 사단이 돼 서귀포경찰서에 잡혀갔고, 그후 전주형무소에 끌려갔다. 징역 1년형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보냈다. 어린 처녀가 형무소 갔다 왔다는 사실로 인해 도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농사를 지으며 살던 조병태 할아버지(88)는 4.3 사건이 터지자 전신주 보수공사에 동원됐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직후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

 

조 할아버지는 “많이 맞았고 고문도 원 없이 받았다. 형무소 갈 때 입은 옷은 피로 범벅이 됐는데 10개월 복역 후 그 옷을 다시 찾으니 피로 굳어 있었다. 내가 한 것이라곤 전신주 보수공사에 동원된 것 뿐이다. 이것이 죄인가"라고 되물었다.

 

오계춘 할머니(95)는 1948년 11월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갓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등에 업고 집을 나섰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리곤 전주형무소와 안동형무소를 거쳐 10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등에 업고 있던 아이는 전주형무소로 가던 배에서 죽었다.

 

“죽은 아이를 묻어야 했다. 경찰관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경찰은 길가에 그냥 두라고 했다. 참으로 억울하고 아이에게 미안하다. 기막힌 세월이었다.”

 

기막힌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16세에서 27세까지-. 71년 전 꽃다운 나이였던 그들은 4.3의 광풍 속에서 불법 군사재판으로 사형과 무기징역,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범죄자의 낙인이 찍힌 이가 2530여명다.

 

국가는 그들을 수백명씩 거대한 강당에 몰아넣고 ‘유죄’를 선고했다. 물론 적법한 절차는 없었다.

 

그들은 왜 유죄를 선고받았는지, 죄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형무소로 보내졌다. 그 형무소에서 수백명이 숨을 거뒀다. 살아남은 이들은 짧게는 10개월, 길게는 무려 2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왜 맞는지도 모르고 매를 맞아야 했고, 왜 고문을 당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구타와 고문 속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어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몸의 상처는 아물었어도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감옥에 다녀온 사실을 자식과 남편, 부인에게도 숨긴 채 살았다.

 

그 상처를 안고 살았던 71년이다. 18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2017년 4월19일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했다.

 

 

그로부터 1년 5개월이 지난 지난해 9월3일 제주지방법원은 이들의 4.3재심청구에 대해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흐른 지난 17일 제주지법은 71년 전 재판이 '불법'이란 걸 확인해줬다. 제주지법이 '공소기각'을 선고하는 순간 법정에서는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1948년 국가는 이들을 감옥에 가뒀지만 71년이 지난 지금의 국가 법정은 죄가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4.3수형생존자들의 변호를 맡았던 법무법인 해마루의 임재성 변호사는 지난해 11월 피고인심문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다시 묻는다. 내란죄가 맞는가? 불법구금도, 고문도 없는 자유로운 법정에서 4.3수형행존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자유의 법정은 그들의 억울한 목소리를 들었다. 법정은 그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들은 “고맙다”고 말했다. “판사님 고맙습니다,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기자님들과 도와주신 도민여러분들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작 한 없는 감사의 말을 들어야 할 이들은 바로 그들이다.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팠고 길었던 비극’ 속에서 그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성벽 같았던 '거짓의 역사'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겼다.  

 

영웅들은 불굴의 의지와 끈기, 강인한 힘, 곧은 마음으로 싸운다.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보이던 상대와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해 낸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18명의 4.3수형생존자들은 바로 그 영웅이다. 늦었지만 그래도 정의는 정의다. 오랜 시간이 흐를지언정 어김없이 제주4.3은 정의의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 

 

영웅들의 위대한 역사에 무한 찬사를 보낸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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