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반미술에서부터 20세기 일본 미술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 유신과 함께 찾아왔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의 신구(新舊) 세력이 새롭게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한다. 1889년은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 해이고 이어서 이듬해 교육칙어가 발포되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이렇듯 일본의 근대적인 미술은 곧 그런 근대체제 위에서 피어난 것이지만 일본의 근대미술은 메이지 유신과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부터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의해 에도 막부에 서양화(西洋化)의 시작을 알렸고, 쇄국정책의 붕괴와 함께 바야흐로 일본근대체제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일본의 개항 항구 요코하마에는 미국, 러시아, 영국의 상선들이 빈번히 왕래하면서 외국인 거류지로 정비되어 갔다. 요코하마는 국제도시로써 서양의 문물과 기술, 예술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1) 일본미술사에서 서양 풍경화의 일본 유입은 1571년 최초의 포르투갈 배가 나가사키에 입항하면서부터 서서히 점화되고 있었다. 1639년(寬永 16)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행하기까지 약 70년간 외국 무역 상관(商館)이 운영되고 있었고 기독교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쇄국정책이 시행되는 1639년 이후에는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를 기점으로 네덜란드 선박과 중국 선박에만 유일하게 열리게 된다. 이로부터 나가사키는 남반미술이 유입되게 된다. 1549년 8월 가고시마에 예수회 선교사 자비에르가 도착한 이후 일본으로 서양 문물이 안착되고, 이후 조선의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의 서양화 전개 과정은 모두 5기로 나눌 수 있다.2) 1기는 16~17세기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유럽문화가 소개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 미술에서는 난반병풍(南蠻屛風)과 같이 유럽 사람이 일본에 도착한 사건이 그림으로 그려진 시기이다. 2기는 18~19세기에 네덜란드 학문인 난학(蘭學)이 유입되면서, 일본 전통회화에 유럽의 원근법과 음영법이 결합된 시기이다. 제3기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유럽의 화가들이 일본으로 와 일본인 화가들을 가르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제4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인 화가들이 직접 유럽으로 가서 서양화를 배워 온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제5기는 20세기 초에 일본제국주의의 아래 일본서양화가 한국, 대만, 만주 등 동아시아에 전파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모두 5기의 구분 가운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국 서양화의 유입시기라고 할 수 있는 제4기와 5기이다. 제4기에서 프랑스에서 유학한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의 존재이다. 구로다 세이키는 리파엘 콜랭에게서 인상주의 외광파(外光派) 화풍을 배워, 1896년 도쿄미술대학 서양화가를 설립하여 최초 서양화과 주임교수가 된 인물로 그후 일본 서양화의 주류 화풍을 이끌었다.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도쿄미술대학 출신이며, 뒤이어 평양 출신 김관호도 그 학교를 졸업한 인물이다. 또 변시지의 스승인 데라우찌 만지로는 구로다 세이키가 설립한 백마회연구소 출신이고,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 23회 서양화 심사위원이었다. 2. 일제강점기의 제주풍경화 일본제국주의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실 아래 아시아 전역을 식민통치했다. 특히 일본은 조선에 대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부산, 제주에 직항로를 설치하여 식민지 시장을 경영하면서 일본을 쉽게 오갈 수 있었다. 일본인 화가들은 조선 전역을 내지처럼 다닐 수 있었고, 제주인들은 오사카항을 통해서 값싼 임금의 노동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일본인 화가의 풍경화를 보면, 1935년 츠루타 고로(1890~1969)가 그린 '제주도'와 '서귀포'라는 제하의 연필 스케치 작품이 있다. '제주도'는 한라산이 보이고 밭담길에 앞서서 가는 두 마리 등짐 진 소를 따라 머리에 수건을 쓰고 허벅을 진 아낙네가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서귀포'라는 작품은 서귀포 앞바다 문섬을 뒤로 하고 초가 돌담 사이 오르막 길을 흰 수건 쓰고 등짐 지고 가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제주도 돌담과 초가가 매우 인상적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도 풍경을 스케치한 츠루타 고로는 도쿄 출신으로 백마회연구소(白馬會硏究所)를 거쳐, 태평양화회연구소(太平洋畫會硏究所)에서 나카무라 후세츠(中村不折)에게 사사를 받고, 1912년 경성일보사에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30년, 1935년에 걸쳐 조선 뿐만아니라 전세계로 사생 여행을 다녔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전쟁기록화를 그렸다. 나카무라 후세츠는 태평양미술학교 출신 제주화가 고성진의 스승이기도 했다(고성진 증언).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제주인 화가의 서양화 풍경 작품들은 보기가 매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풍경화를 남긴 화가로는 김인지, 변시지 등이다. 김인지의 호는 심석(心石)이며, 1907년 서귀포시 중문면 하례리 출신으로, 1925년 제주공립농업학교 졸업, 1929년 전남공립사범학교(현재 광주교육대학)를 졸업하고, 1934년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동광회도화강습회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식민지문화통치의 기구로 설치된 조선미술전람회 14회(1935), 15회(1936), 17회(1938) 등 세 번에 걸쳐 서양화부 입선을 수상했다. 비록 일제강점기 문화기구였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거푸 입선하며 등용한 서양화가로서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화부문 수상자가 되었다. 김인지의 풍경화 작품으로는 기정 아래에서 흐르는 물에서 두 아낙네가 빨래를 하는 장면을 그린, 1935년 제14회 선전 입선작 '애(涯)'와 서귀포항을 차분하게 그린 1936년 제15회 선전 입선작 '서귀항'이 있다. 그리고 서귀포의 해녀를 그린 1938년 제17회 선전 입선작 '해녀'를 비롯해 초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연도 미상의 '제주향교', 1940년대 '제주항' 풍경, 성산일출봉 아래 항구를 그린 제목미상의 풍경화, 서귀포 항구를 그린 '서귀항' 등이 해방전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김인지의 작품에서는 일본의 송진파 영향이 배어난다. 송진파란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갈색과 청록을 사용하여 탁한 색조의 마티에르와 검은 색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고전적인 화풍이다. 변시지가 그린 풍경화는 1943년 주황색의 주조로 그린 '농가'라는 작품이 있다. 또 해방 이듬해 일본에서 그린 1946년작 위트릴로 화풍을 연상하게 하는 '백색가옥과 흑색가옥', 1947년작 나목의 숲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모습을 그린 '겨울나무'가 있다. 세 작품 모두 물감을 두텁게 발라서 질감을 살리고 있는데 '백색가옥과 흑색가옥'은 흑백의 대비를 통해 묵직한 느낌으로 화면의 중심으로 균형을 잡고 있으며, '겨울나무'는 추운 겨울 앙상한 가지뿐인 숲의 삭막함을 따스한 햇살이 김싸주듯이 비추면서 평화로운 공간을 만들고 있다. 변시지는 서귀포 서홍동 출신으로 오사카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여 일본 광풍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귀국전 한 때 좌파계열의 미술가 단체에 몸담기도 했으나 그 단체가 급진적인 행보를 보이자 탈퇴하고 1957년 서울로 귀국하여 1975년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서양화 교수가 되었다. 일본 유학생 가운데, 제주인 서양화가 고성진은 서양화 작품이 소실돼 버려 삽화만 전해오고, 송영옥과 양인옥도 일제강점기에 그린 풍경화 작품들을 볼 수가 없다. 김광추는 1930년작으로 추정되는 '정지(庭池)'라는 풍경화 소품이 전해온다. 화가에게 작품은 자신의 내면적 발언과도 같다는 점에서 색채의 시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꼭 해당 작가의 정신세계와 의미론적인 가치가 따를 것이다. 그러기에 풍경화는 작가의 인생에서 얻은 경험적 해석에 다름 아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山下裕二‧高岸 輝, 『日本美術史』, 株)美術出版社, 2014. 2) 국립중앙박물관도록, 『일본근대서양화(日本近代西洋畵)』, 국립중앙박물관, 2008.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피난하다가 위(衛)나라를 경유할 때, 중이가 예전에 위나라가 건도(建都)하는 데에 진나라가 지지하지 않았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원조를 거절하였다. 중이의 무리가 오록(五鹿)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배고픔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민에게 구걸했으나 농민은 진흙을 담아 주었다. 어쩔 수 없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과 말 모두 지쳐 기진맥진하게 되었다. 중이가 지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여 수행인 앞에 쓰러졌다. 수행인들이 산나물을 캐다가 탕을 끓여 허기를 채우려고 할 때 개지추(介之推)가 자신의 허벅지의 살을 베어다 탕에 넣고 끓여 중이에게 바치자 감격해 눈물 흘렸다. 이후 그들은 또 여러 번 방랑하며 평탄치 못한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진목공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636년에 국군이 되었다. 바로 문공이다. 문공은 9년 동안 재위하면서 진(秦)나라와 결맹하였다. 역사상 유명한 ‘진진지호(秦晉之好)’다.1) 이후 왕자대(王子帶)2)의 난을 평정하고 주(周)양왕(襄王)을 받아들였다. 초(楚)나라를 치고 송(宋)나라를 구하여 춘추오패의 하나가 된다. 『좌전』은 ‘하늘이 도와’(天助)서 성공했다고 했으나 사실은 19년 동안 유랑하면서 구걸하고 남에게 얹혀살았던 어려운 경험이 뛰어난 모략과 재지를 갖춘 그를 만들었다. 귀공자 출신이라는 허위, 일시적 안락을 구하는 습성, 유약하고 겁이 많은 본인의 본질을 개조해 일대의 재능을 가진 성숙한 정치가로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어떤 군주도 중이와 비교되는 공업을 쌓지 못했다. 그 잠재된 기틀은 무엇이었을까? 중이가 만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었기에 가능하였다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유랑하며 걸식 생활 하면서 단련하여 뜻을 이룬, 끝내 대업을 이룬 한 시대의 제왕이된 거지 이야기이다. 북제 후주, 황음무도해 걸식하는 것으로 유희를 삼다. 당나라 기록3)에 따르면 북제(北齊)의 어린 군주 고항(高恒)은 융화(隆化) 2년(577)에 즉위하여 황제가 됐는데 8세에 불과하였다. 승광(承光)으로 개호하고 후주(後主) 고위(高緯)를 태상황제로 높였다. 그러나 황제 자리에 앉은 지 1년 만에 멸망한다. 나라가 멸망하는 데 8세 황제가 무슨 책임이 있을까? 다른 여러 원인은 논하지 않고 직접적인 책임을 묻는다면 역시 태상황에게 잘못이 있었다. 후주 고위는 우매하기 그지없었고 황음무도 했으며 부패하였다. 그가 집정할 시기에 간신이 권력을 장악해 작당하고 사리사욕을 꾀했다. 정치를 어지럽히고 백성에게 해를 끼쳤다. 고위는 그런 정세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무엇을 했을까? 모든 시간을 사치와 낭비로 허비하였다. 육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고위는 궁중의 하녀를 군군(郡君)으로 봉했다. 궁녀에게 호화롭고 비싼 옷을 입게 했으며 고급스런 음식을 먹게 하였다. 그 수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 치마 한 벌이 만 필 가격이었다. 거울 하나가 천금에 달했다. 모두가 다투어 사치했다. 허영을 다퉜다. 아침에 입었던 옷조차 저녁이면 버려버리고 다시는 찾지 않았다. 황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황제 자신은 궁원(宮苑)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고 언무수문대(偃武修文臺)를 건축하였다. 여러 비빈은 각자 경전(鏡殿), 보전(寶殿), 독모전(蝳蝐殿)을 세웠다. 단청하고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더 기막힌 것은 진양(晉陽)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12원을 세웠다는 점이다. 고위는 항심이 없었다. 오늘 건축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헐고 다시 세웠다. 공인들에게 밤 세워 지으라고 하였다. 겨울에는 더운 물로 진흙을 이기라고 하니 곤궁한 공인들은 하루도 쉬지 못했다. 진양의 서산을 파서 불상을 건조하는 데에 하룻밤에 불을 밝히며 소모한 기름이 만 대야나 되었다. 불빛이 황궁까지 비췄다. 또 호(胡) 소의(昭儀)를 위하여 대자사(大慈寺)를 건조하였다. 완성되기도 전에 다시 목(穆) 황후를 위한 대보림사(大寶林寺)로 개축하였다. 지극히 정교하였다. 돌을 나르고 우물을 파면서 소비한 금액이 수만에 이르렀다. 사람과 짐승이 셀 수 없이 죽어나갔다. 고위 황제의 말이 먹는 식물은 10여 종에 달했다. 발정 나 교배할 때에는 특별히 청려(靑廬)를 세워 친히 감상하기도 했다. 고위의 개는 양식과 고기로 배를 채웠다. 말과 매에게는 각기 다른 의동(儀同), 군군(郡君)의 봉호를 하사하였다. 닭싸움, 경마 어느 하나 좋아하지 않는 게 없었다. 각지에서 전갈을 구해오라 독촉하니 하룻밤 사이에 그 양이 3승이나 되었다. 가장 가증스럽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천자에 자리에 앉아있는 자가 후궁의 화림원(華林園)에 황폐한 마을을 조성하고 쓰러져가는 초가를 만들었다. 황제의 의복을 벗어던지고서 낡은 옷을 걸쳐 자기 스스로 거지처럼 가장하고 걸식하러 다녔다. 배고파 불쌍한 모습으로 분장하고 상점에서 장사하기도 하였다. 고위는 사람에게 검은 옷을 입혀 강(羌)족 병사로 분장시켜서 달아나게 한 후, 북을 치며 쫓아 수치감을 주고 자신이 친히 활을 쏴 맞추기도 하였다. 진양 동쪽으로 순유하면서 단기필마로 내달리고 돌아올 때는 낡은 옷에 산발하였다. 한 왕조의 천자가 된 인물이 백성의 생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치를 일삼고 육욕을 채우는 데에 싫증 느낀 나머지 거지와 같이 곤궁해 어쩔 수 없이 걸식하는 비극의 세상사를 가장하여 유희로 삼아 즐겼다. 애환을 기쁨으로 삼는 그런 비정상적인 변태 놀이를 일삼았다. 고위는 실로 중국 역대 제왕 중에서도 진기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이에 대하여 역사가는 평론하였다. “근친과 속물에게 조정을 맡기고 위장 사이에서 과도한 사치를 일삼으니 멸망의 징조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제나라의 패망 역시 사람이 만든 것이지 하늘의 이치에 따른 것이 아니다.”4) 어느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만민의 우두머리가 된 자가 백성의 고통을 살피지도 않고 오히려 거지로 분장해 걸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니, 어찌 민심을 얻겠는가! 멸망 이외에 다른 결과가 어디 있으랴. 중국역사상 북제의 후주가 거지가 된 것은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구걸할 수밖에 없어 된 진짜 거지가 아니라 변태 심리에 의하여 세상 사람을 농락한 것이었다. 거지 무리 중에서 지금까지 그것을 영예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풍자 편달의 힘을 갖춘 역사의 메아리일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진진지호(秦晉之好), 진진지의(秦晉之誼), 진진지연(秦晉之緣), 진환진애(秦歡晉愛)라고도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의 권위가 쇠퇴하고 제후들이 중원의 패권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춘추시대 초기에 진(晉)나라 헌공(獻公)은 진(秦)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자기 딸을 목공(穆公)에게 시집보냈다. 진(晉)나라는 헌공이 죽은 뒤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태자인 신생(申生)이 살해되었고 동생 중이(重耳)는 국외로 도피하였다. 중이는 이후 19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다 마지막으로 의지한 곳이 진(秦)나라였다. 목공은 중이가 재능이 출중하며 충후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일족의 딸과 혼인을 맺게 하였다. 얼마 뒤, 중이는 목공의 도움을 받아 조국으로 돌아가 폭군을 주살하고 군왕에 올랐다.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고 진(秦)나라 왕실의 딸과 혼인시키면서 부자(父子) 모두 진(秦)나라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목공과 문공은 나라를 강대국으로 키워 춘추오패(春秋五覇)에 속한다. 열국(列國)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강대국인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혼인을 맺음으로써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유래하여 ‘진진지호’는 두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2) 숙대(叔帶, ?~BC635), 자대(子帶), 왕자대(王子帶), 태숙대(太叔帶)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주(周)나라 사람으로 주혜왕(周惠王)의 소자(少子)이고 주양왕(周襄王)의 이복동생이다. 감(甘)에 식읍(食邑)이 있어 감소공(甘昭公)으로도 불린다. 혜공이 태자 정(鄭)을 폐하고 태자로 삼으려고 하다가 제환공(齊桓公) 등의 제지를 받았다. 혜왕이 죽은 뒤 태자 정이 양왕이 되었다. 융적(戎狄)과 양왕을 칠 것을 모의하고 왕성을 공격했다.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와서 구원하자 제나라로 달아났다. 나중에 주나라로 돌아왔다. 양왕 16년에 적(狄)이 주나라를 공격하고 그를 세워 왕을 삼았다. 양왕은 정(鄭)나라로 달아나고 제후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다음 해 진문공(晉文公)이 양왕을 주나라로 보내 그를 살해하도록 했다. 3) 이백약(李百藥)이 편찬한 『북제서(北齊書)』 8권 「제기제팔(帝紀第八)」 4) 이백약(李百藥)의 말, 『제기(帝紀)』卷8.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조끄뜨레 하기엔 하영 먼 당신" (가까이 하기엔 머나먼 당신) “You are too far away to get close to m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풍경화(landscape painting)는 자연의 경치를 그린 그림, 혹은 자연과 함께 생활하는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거기에는 산, 숲, 들판, 바다, 강, 호수, 개울, 계곡, 마을 등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관능적인 감정이 깊숙이 숨어있다. 풍경화는 회화의 한 장르로써, 르네상스 시기에 독립적으로 생겨난 개념이다. 물론 풍경화라는 장르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풍경 그림들은 동‧서양에 존재했다. 서양의 풍경화를 동양에서는 ‘산수화(山水畵)’라고 불렀지만, 두 지역이 종교적 세계관이 달랐고, 기름으로 그리는 유화와 물로 그리는 수묵이라는 재료가 다른 만큼 그 기법 또한 달랐으며, 특히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독립적인 풍경화가 나타나기 전, 순수한 미적 관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은 B.C. 30~20년경 ‘리비아의 저택(Villa of Livia)’에 프레스코로 그려진 아름다운 정원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 그려진 풍경 그림으로 아름다운 숲속에 과일나무와 자유롭고 노는 여러 마리 새가 그려졌다. 장소가 지하실 실내 윗벽에 초록과 청색의 싱그러운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도록 시원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의도에서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이언 자체크, 2019). 그렇다면 풍경화라는 장르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5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부유한 사람들은 점차 개인적인 종교적 헌신을 위해서 예술 작품을 이용하는데 끌리게 된다. 예술 작품들은 대개 자연세계와 일상생활을 그린 작은 패널화와 채색된 필사본 그림들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거기에서 풍경화와 초상화, 정물화 등 장르화의 독립된 조짐이 일고 있었다. 그즈음 부르고뉴 공작의 후원 아래 훌륭한 몇몇 필사본 그림들이 플랑드르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허버트 리드, 2006). 거기에는 분명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발명도 한 몫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대로 그림을 그릴 때 사용되는 원근법은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대상이 눈으로부터 멀어질 때 작아지는 이유와 관련이 있는데 축소원근법(prospettiva diminvtiva), 또는 선 원근법(prospettiva liniale)이 있다. 두 번째는 멀리 있는 대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색채를 연한 농담으로 처리하는 색채원근법(prospettiva di colone)이 있으며, 세 번째로 대상이 거리에 따라 비례하여 윤곽선이 흐려지거나 색채가 감퇴하면서 사라지는 소멸원근법(prospettiva di speditione)이 있다(다빈치 노트북, 2015). 풍경화의 등장에는 이러한 원근법이라는 미술기법의 혁신이 있었으며, 이것이 풍경화의 기원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허버트 리드(Read. Herbert, 1893~1968)는 유럽의 풍경화는 ‘르네상스의 창안물’이라고 하면서 인물 위주의 평범한 회화의 배경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말한다. 또한 허버트 리드는 풍경화를 회화의 독립 장르로 처음 언급한 화가는 알프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이고, 그 뒤러가 1521년에 요아킴 파티니르(Joachim de Patinir, 1485~1524)를 ‘훌륭한 풍경화가 요아킴’이라고 말한 바 있어서 요아킴을 근대 풍경화의 기점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허버트 리드는 풍경화의 특질을 확고하게 추구한 화가를 로랭(Lorrain. Claude 1600~1682), 코로(Corot. Jean Baptiste Camille, 1796~1875), 컨스터블(Constable. John, 1776~1837)보다도 루벤스(Rubens. Peter Paul, 1577~1640)로 여겼는데 누구의 작품보다도 풍경화 장르의 고유한 특질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루벤스가 그린 <달빛 풍경>이라고 했다. 풍경화는 처음에는 파티니르가, 뒤이어 루벤스, 그리고 나중에는 푸생, 로랭, 코로, 콘스터블이 자신의 감성을 전달하려고 힘을 기울였다. 허버트 리드에 의하면, 풍경화는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적 예술이며, 자신들만의 풍경을 갖지 못한 저지대 사람들이 창안한 예술이다. 특히 17세기 후반에는 화가 엘스하이머(Elsheimer), 베르햄(Berghem)에 의해 낭만주의적 풍경화가 본격적으로 그려졌다(허버트 리드, 2006). 그러나 견해가 다른 사람이 있다. 케네스 클라크(Clark. Kernneth, 1903~1983)는 '풍경이란 예술이 아니라 예술이 되는 것'이라고 그의 저서 『풍경에서 예술로』에서 담겨있는 주장이다. 클라크는 '풍경화는 19세기 주요한 창조물'이며, 19세기 미술의 정확한 이해없이 현대회화에 대한 평가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풍경화란 자연에 대한 우리 생각의 여러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세 이래 풍경화의 발단과 발흥의 역사는 인간 정신이 다시 그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려는 일련의 시도라는 것이다. 클라크는 인간의식의 발전에서 풍경화를 네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상징적 풍경, 사실적 풍경, 환상적 풍경, 이상적 풍경을 말한다. 인상주의 시대에 풍경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데 우리나라인 경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유행하던 일본식 인상파 한 갈래인 보라파와 일본식 고전주의인 송진파가 유입되면서 아카데미 교육을 점유하기에 이르렀고, 여전히 회화는 사실주의 주류 경향으로 오늘에 이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한동안 거지로 전락했던 제왕은 한둘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배경과 우연적 개인의 환경 아래서 제왕과 거지의 인연은 재미있는 조건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전기적인 일문(逸聞) 일사(逸事)가 발생하고 발전 변화하였다. 그런 사례를 통하여 역사를 증명할 수 있고 사회를 고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민족문화전통 중의 관념 전승과 개별적인 여러 가지 고유의 갈등, 모순을 분석하고 투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비교적 명확하면서도 깊게 새로이 사회를 인식하고 역사를 평가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역사와 문화를 심도 있게 다시 고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비정상적인 상태 속에서 근원을 판별하고 왜곡된 사실 속에서 바른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양하면서도 어지러운 사회세태 중 한 부분이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정사 기록이든 야사나 필기소설이든, 지금까지 진귀한 사료로 남아있다. 정사에서 다루어진 거지 문제와 상응하는 정책, 대책을 제정한 것 이외에 제왕과 거지의 일문 전설은 여러 가지가 뒤엉키어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간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인생살이에 있어 물질이나 정신생활 상의 빈부는 고정돼 있거나 불변하지 않는 게 아니다. 제왕도 세상에서 살아가며 거지도 세상에서 살아간다. 서로 다른 삶의 기회가 있다. 서로 다른 경험, 서로 다른 시대의 사회문화 환경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세상사이다. 많고 많은 세상사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을 수밖에 없다. 어디에나 있는 예증이다. 만민 위에 앉았던 ‘천지교자’(天之驕子, 하늘의 총아) 천자도, 하구류(下九流)1) 속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했던 천민 중에 천민인 거지와 여러 가지로 관련을 맺고 있다. 실로 천지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진문공, 유랑하며 걸식하다가 패업을 이루다 중국 역사에 19년 동안 유랑하면서 걸식했던 유명한 제왕이 있다. 바로 춘추시기 기원전 636년부터 9년 동안 진(晉)나라 국군(國君) 자리에 앉았던 문공(文公) 중이(重耳)다. 중이는 진나라 헌공(獻公) 희궤제(姬詭諸)의 아들이다. 여희(驪姬)와 결혼하기 전에 헌공에게는 3남 1녀가 있었다. 신생(申生), 중이(重耳), 이오(夷吾), 목희(穆姬)다. 나중에 헌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여융〔驪戎, 서융(西戎)의 일파〕을 공격할 때 여희와 결혼하여 아들 해제(奚齊)를 낳았다. 여희는 헌공의 총애를 받아 부인(夫人)에 책봉되자 해제를 태자에 앉히려 하였다. 여희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해 장래에 해제가 국군의 자리를 계승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우환을 없애기 시작하였다. 먼저 헌공에게 남은 아들 세 명을 변경으로 보내 방비토록 청했다. 중상모략으로 신생을 죽이고 이오와 중이를 죽이려고 군대를 파병하고 자객을 보냈다. 이오는 전쟁에서 패하자 양국(梁國)으로 피난하였다. 중이는 자객을 피해 호모(狐毛), 호언(狐偃) 등 측근 몇을 데리고 창황하게 자신의 생모가 태어난 적족(狄族) 봉지인 적(狄)나라로 피난하였다. 진나라에서는 거대한 정변이 계속 일어났다. 이오, 중이가 다른 나라로 피신한 후 해제가 세자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헌공의 병이 위중하게 되니, 대신 순식(荀息)에게 보좌케 하고 해제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헌공이 죽자 11살밖에 되지 않은 해제가 즉위해 국군이 되었다. 순식을 상경(上卿)에 앉히자 이극(里克), 비정(邳鄭)등의 강렬하게 반대하였다. 몰래 경호대에 자신의 사람을 심은 뒤 헌공의 장례식을 이용해 해제를 암살해 버렸다. 여의는 다시 자기 누이동생의 아들 탁자(卓子)를 국군으로 옹립하고 비밀리에 자객을 사서는 장례식 때에 이극과 비정 2명을 척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극 등은 상대편의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장계취계를 이용해 상대방의 계략을 역이용하여 여희를 공격하였다. “태자의 억울함을 씻고 중이를 국군으로 영립한다”라고 하면서 여희의 측근 동관오(東關五)를 없애고 탁자를 던져 죽여 버렸으며 순식을 내리찍어 죽였다. 여의는 채찍 형벌을 내려 때려 죽였다. 나라에는 하루라도 국군이 없어서는 안 되며 집안에는 하루라도 가장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이오는 토지를 할양하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진(秦)목공(穆公)의 도움을 받아 귀국 후 즉위해 군주가 되었다. 바로 진(晉) 혜공(惠公)이다. 혜공은 신의를 저버렸다. 공이 있는 신하와 뛰어난 장수를 남살하는 한편 자객 발제(勃鞮)를 보내 중이를 암살하려 하였다. 중이가 귀국해 왕위를 찬탈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정보를 들은 중이는 어쩔 수 없이 12년 동안 살았던 적(狄)나라에서 제(齊)나라로 도망쳤다. 피난하려 준비할 때에 곁에서 의복과 여비를 관리하던 관리 두수(頭須)가 모든 재물을 말끔히 거두어 도망쳐 버렸다. 중의 일행은 한 푼도 없는 곤궁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하구류(下九流), 옛날 사회적 지위가 낮은, 하등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현대적인 연예인·짐꾼·취고수 등을 일컫던 말이다. 고대에 시정(市井)에서 사회 각 계층을 귀천고저로 9단계 계급을 나눴다. 중국 고대의 시정문화로 사대부 문화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1류 연극배우. 광대. 연극쟁이(戱子), 2류 심부름꾼. 졸개〔추(推), 주졸(走卒)〕, 3류 본바닥불량배. 노름꾼〔왕팔(王八)〕, 4류 잡일꾼〔귀(龜)〕, 5류 멜대를 매고 돌아다니는 이발사〔체두(剃頭)〕, 6류 때밀이〔찰배(擦背)〕, 7류 몸을 파는 사람〔창녀(娼)〕, 8류 도둑〔도(盗)〕, 9류 수연, 물 담뱃대로 피우는 살담배를 파는 사람〔취회(吹灰)〕이다. 나중에 사회가 복잡해지자 상구류(上九流), 중구류(中九流), 하구류(下九流) 관점이 나타났다. 상, 중, 하로 나누는 일반적인 분류법은 다음과 같다 : 상구류(上九流) : 1류 부처님(佛祖), 2류 신선(仙, 원시천존元始天尊, 태상노군太上老君, 팔선八仙 등), 3류 황제(皇帝, 진룡천자, 봉건제왕), 4류 관리(官), 5류 양조장(燒鍋, 봉건시대에 최대 공장), 6류 전당포(當), 7류 상인(商), 8류 장원주(客, 莊園主), 9류 농부(莊田). (이 관점은 도교의 영향인 듯 보인다) ; 중구류(中九流) : 1류 거인(擧), 2류 의사(醫, 낭중郎中, 약방선생), 3류 풍수(風水, 지관, 음양선생), 4류 점쟁이(批, 사주팔자批八字), 5류 서화가(丹青), 6류 관상가(相), 7류 승려(僧), 8류 도사(道), 9류 문인(琴棋, 고금, 바둑) ; 하구류(下九流) : 1류 무당(巫, 부적 등을 사용하는 무당), 2류 창녀(娼, 명창明娼, 암창暗娼, 가기歌妓), 3류 무당(大神, 굿을 하면서 병을 치료하는, 신이 몸에 들어온 신무神巫), 4류 야경꾼(梆), 5류 멜대를 매고 돌아다니는 이발사(剃頭), 6류 취고수(吹手, 喇叭匠), 7류 연극배우(광대, 戱子), 8류 거지(叫街), 9류 물엿을 불어서 각종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파는 사람(賣糖)이다. 물론 상중하와 ‘9류’가 합쳐지니 27개의 직업군이 있어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72개의 직업군이 그 속에 포함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하구류의 제5류 ‘이발사’에는 발마사지, 급사, 수레꾼, 안마사, 점원, 무녀, 끄나풀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부류가 포함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바당 속이 몱으민 날 좋곡, 어둑으민 날 궂나" (바다 속이 맑으면 날씨가 좋고, 어두우면 날씨가 나쁘다) “If it's clear under the sea, the weather is good, if it's dark, the weather is bad.”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경허믄, 이거 호나에 얼마우꽈?" (그럼, 이거 하나에 얼마입니까?) "So, how much would one of these cos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바로 걷는 자는 잘 넘어지지 않는다. 비열한 자를 칭찬하는 것은 선한 자를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이다. 우리가 평소에 운동을 하는 것은 무언가에 대비하고자 함이며, 생명은 움직임에 의해서 존속된다.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굳어버린다. 생명활동은 부단하게 움직여 열에너지를 만들며 굳지 않게 살아가려는 것이다. 만사가 그렇듯 하나 이상의 대상과 접촉하면서 부딪치민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주 만물과 자연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공동체 사회도 생명체 개인들이 살아가려고 모여든 인간종의 무리일 뿐 자연적 존재이면서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부딪치며 나아가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2024년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정치가 탁해서 당장 눈앞의 내일이 불안할 지경이다. 민의와 반대로 가는 지도자가 연일 국민과 다투고 있는 하수의 리더쉽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버티다가 포기한 시민들은 최후의 결단처럼 마치 적자생존에 내몰린 생물마냥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가고 있다. 민주주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행위 ‘각자도생'(各自圖生,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한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풍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지금,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풍경 앞에서 조난당한 꼴이다. 기대했던 아름다운 풍경은 보이지 않고, 메마른 내천과 밭, 황량해진 숲에는 비비대는 벌레도 재잘되는 새소리도 그친 지 오래고, 도시의 거리는 한숨 소리와 분노, 통탄만 가득하다. 21세기 한국의 사회적 풍경에는 시커먼 먹구름만 잔뜩 끼어있다. 우리는 폭풍우를 몰고 오는 풍경 앞에 서 있다. ◇ 풍경의 3가지 의미 풍경(風景), 혹은 경관(景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자연의 모습’이다. 영어 ‘랜드스케이프(landscape)’라고 한다. 1590년대에 네덜란드어 ‘란츠합(landschap)’ 또는 ‘란츠킵(landskip)’에서 차용되다가 1605년에야 영어에 ‘landscape’라는 철자가 도래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풍경이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으로서 ‘풍경화’, 토지로서 풍경(경관), 그것의 인간적 확장으로서의 ‘문화풍경(경관)’이 그것이다. 1) 그림으로서의 풍경 16세기 풍경이라는 단어는 네덜란드에서 '세련된 판에 그림을 덧붙인다'라는 의미로써 회화에 특화된 전문 용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풍경화(landscape painting, landscape art)라는 회화 장르의 용어가 나오기 전에, 풍경을 그린 그림의 태동은 B.C 15세기 미노스 문명에서 풍경의 요소들을 찾을 수 있으며, 또 B.C 30~20년경 리비아의 저택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의 정원 풍경은 오늘날의 현대회화처럼 경쾌하고 발랄한 색채로 가득하다. 그리고 완벽한 풍경화의 모습은 A.D 1세기 로마 알바니 별장 벽화에 아름다운 전원(田園)의 풍경으로 나타난다. 서양에서 풍경을 그린 그림들은 세계 곳곳에 있으나 독립적인 회화 장르로서 풍경화는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2) 풍경은 경작지 풍경이라는 말의 의미는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가 ‘계곡과 언덕과 들판’을 분명하게 독자적인 땅의 모습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또 1630년대 존 밀턴(1608~1674)의 시에, 주변의 풍경((landskip)을 살피는 사이에, 황갈색 잔디밭, 회색 휴경지, 새 떼가 모이를 쪼며 돌아다니는 곳. 이라고 하여 눈앞에 펼쳐진 풍경(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이때 풍경(landscape)은 땅(土地), 또는 경작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landscape는 ‘land’와 ‘–scape’라는 접미사를 모아 만든 말이다. 이때 land는 용도가 있고 경계선이 그어진 소유권 있는 토지를 가리키는 말이고, –scape는 어떤 단위가 모여서 ‘한 덩어리를 이루는 상황’을 말하는 자격을 뜻하는 접미사이다. 그러므로 원래 풍경의 의미가 회화에서 토지로 바뀌면서, 그것도 ‘농촌의 경작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사실상 경치보다는 환경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지리학에서는 풍경(경관)을 어떤 물리적, 문화적 특징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한 덩어리의 토지, 또는 지역이라고 여기므로 이것으로 볼 때 환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황기원, '토지에서 경관으로', 1999년). 3) 문화풍경(경관)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이라는 말은 20세기 초 인류학자 크레뵈스의 영향을 받은 지리학자 칼 사우어가 주창한 말이다. 사우어는 경관의 형태학을 말하면서, 자연경관(natural landscape)과 문화경관의 상관관계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연환경이란 시간이 변화함에 따라 특정 문화를 지닌 인간이 매개체가 되어 인간에 의해 변화되며, 결국 인간에 의해 변화된 자연경관은 문화경관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자연 경관은 인간에 의해 전혀 고쳐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경관으로, 토양, 기후, 지하자원, 해안, 하계망(河系網), 식생 등이다. 이러한 자연경관은 특정 문화를 지닌 집단이 그 지역을 어떻게 경영하는가에 따라 가시적으로 나타나며, 경관은 처음의 자연경관과는 다르게 표현되는데, 바로 이렇게 인간에 의해 달라진 경관을 문화경관이라고 한다. 문화경관은 토지이용, 가옥, 인구분포, 도로망 등 인간이 만들고 인간에 의해 이용되며 경영되는 모든 요소들의 총체적 집합이며 그 지역을 점거하고 있는 인간 집단의 사고, 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자연경관이 변하는 요소란 다름 아닌 인간의 행위에 달린 것이다. 그것이 원시적 자연이 아닌 인간의 출입이 시작되는 순간 문화경관으로 변해버린다. 제주도 대개의 풍경이 문화경관임을 알 수가 있다. 영국의 역사가 사이먼 샤마(Simon Michael Schama, 1945~)는 “풍경은 자연이기 이전에 문화이며, 숲과 물과 바위에 투사된 심상(心象)의 산물이다”라고 하여 자연을 문화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풍경에 인간 개인의 마음이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프리드리히 니체가 “미에는 관능이 깊숙하게 숨겨져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사물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있어, 대상이 아름다우면 여러 가지 욕망이 생긴다. 이제 풍경은 자연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인간과 관계된 문화풍경(경관, cultural landscape)에 다양한 집단들의 경쟁이 일어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거지와 마의(馬醫) 전국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가난 때문에 곤경에 빠지자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가 미움을 샀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여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게 되자 거지는 전(田) 씨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마의(馬醫, 수의사)의 조수 일을 하면서 연명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비웃으며 말했다.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어먹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거지가 답했다. “천하에 거지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겠소? 내가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어찌 거지보다 못하다는 말이오?” 당시에 마의의 지위는 비천하였다. 봉건사회에서는 역대로 비천한 직업군에 속했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싫어해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되자 마의를 도와 노동하며 입에 풀칠하면서라도 살아가는 것은 원래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도 비웃음을 받고 조롱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거지를 다시 길거리로 내몰아 비럭질하며 살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거지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세속의 편견은 가난해 마의를 도우며 살 수밖에 없는 거지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열선전』 속 거지, 한음생 위진(魏晉)시기에 장안(長安) 위교(渭橋) 아래에 거지 한음생(漢陰生)이 살았다. 늘 거리에 나가 걸식하였다. 시장사람들은 거지를 매우 싫어해서 그에게 똥을 뿌리기도 하였지만 이튿날 한음생이 걸식할 때면 의복은 예전처럼 어떤 오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관리가 그를 붙잡아다 형벌을 가했지만 한음생은 여전히 시장에서 걸식하였다. 다시 잡아다가 사형을 내리려고 할 때에서야 한음생은 시장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하였다. 그런데 이전에 한음생에게 똥을 뿌렸던 사람의 집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허물어졌고 1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장안에는 일시에 통속적이 말이 떠돌았다. “거지를 만나거들랑 미주를 주시구려, 집이 망하는 흉사를 피하시게.” 무슨 말인가? 거지를 만나거들랑 먹을 것을 나주어 주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당한다는 협박(?)까지 하였다. 이 이야기는 『열선전(列仙傳)』에도 보이고 불교 경전인 『법원주림(法苑珠林)』에도 보인다. 민간고사다. 인과응보설을 이용해 세상 사람에게 거지를 무시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어쩌면 정말로 한음생이 암암리에 자기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에게 복수해 살해까지 했을 수도 있을 터이고. 상서령(尙書令), 어린 시절에 구걸했다가 모욕당하다 남북조(南北朝)시기 남조 양(梁)에 유명한 문학가 심약(沈約, 441~513)은 상서령이라는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였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친구에게 부탁해 쌀 백 곡(斛)을 얻었다. 그러자 집안어른이 모욕을 주었다. 심약은 화내며 얻어온 쌀을 쏟아버리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심약이 입신출세한 후에는 그 일에 개의치 않았다. 당시 친속에게 먹을 것을 구했을 뿐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던 심약이 그런 경멸과 치욕을 받은 것을 보면, 가난해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게 된 거지들이 받았을 냉담과 치욕의 정도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세속관념은 그랬다. 이와 반대로, 역대로 의롭지 못한 부자를 죽여 빈민을 구제한 많은 의협의 거사가 기록되어 있다. 부자가 되기를 빌고 가난을 없애려는 여러 가지 풍속습관이 형성되었다. 어느 날엔가는 빌어먹어야 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그런 음험하고 악랄하게 사람을 해치는, 편견의 족쇄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러한 심리는 본래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련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을 이끌어내어 거지에게 즐거이 베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세속관념에 순응해 거지를 부끄러워하고 욕되게 하면서 경멸하는 것이 능사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거지는 슬퍼하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했던 대상으로, 이중 심리의 표상이었다. 중국 민족문화 전통 중 그런 모순된 심리 현상, 모순된 논리 관념은 실제 많고도 많다. 중국의 민족문화는 그러한 기묘하고 특이하게 보이는 모순 상태에서 발생하였고 발전했으며 오랫동안 누적되어 형성되었다. 장(張) 씨 거지, 교묘하게 농짓거리하다 오대시기 후량(後梁)의 마지막 황제 주진(朱瑱)이 권력을 누리던 용덕(龍德) 연간(921~923)에 장함광(張咸光)이라는 거지가 걸식하며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에 유월명(劉月明)이라는 거지도 있었다. 그 둘은 걸식하면서 많은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고 다니는 공통적이 특징이 있었다. 권세가 집에 가서 걸식할 때에 식기를 뺏기게 되면 재빨리 소매에서 다른 것을 꺼내곤 하였다. 부마인 간의(諫議) 온적(溫積)이 개봉부사를 맡고 있을 때 장함광이 부호 가문을 한 집도 빠짐없이 돌아다니면서 자신은 온적에게 의탁하러 간다며 하직인사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누구 소개로 가는 것이냐고 묻자 장함광이 답했다. “기록을 보자면 이번 거행은 분명 후한 대우를 받을 것이요. 대간에서 만든 『갈산잠룡궁상량문(碣山潛龍宮上梁文)』를 보면 ‘만두는 그릇과 같고 빵은 채와 같다. 제멋대로 유월명 주부를 죽였고 기뻐하며 장함광 수재를 죽였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분명 환영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는 주변 사람 모두 배꼽 잡고 쓰러졌다. 이것을 보면 당시 거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하면서 모욕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법도를 벗어나는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간혹 이판사판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상점이나 마을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물론 한음생처럼 그렇게 집을 부숴버리고 사람을 죽여 보복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또한 절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지키려고 한 행동이었을 뿐, 구걸하면서 나쁜 길로 빠진 무리는 아니며 불량배나 악한이 참여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건달이나 불량배도 부끄러움 없이 거지 무리에 끼어들기도 했지만 극소수였다. 실제로 거지의 도리를 지키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총괄적으로 말해, 당시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나쁜 짓을 저지르며 해악을 끼친 거지의 사례는 극히 적었다. 이 점이 나중에 거지〔걸(乞)〕와 의협〔협(俠)〕을 서로 연결시켜 받들며 지키는 덕의(德義)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중에 거지 구성원이 불량배 범죄 집단으로 전락해, 깃발을 세우고 단체를 결성해 이용하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후에는 거지 이름을 빈 집단은 나날이 타락해갔다. 사회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전이하면서 만연되었다. 떼어 내야 하는 악성 종양으로 변질되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빈곤의 역사와 내재적 모순이 가득한 중국민족의 문화전통을 감안해보면 거지라는 그러한 공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현상, 즉 거지를 없애기에는 손바닥 뒤집듯 하루 이틀에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회를 개조하고 사회가 끊임없이 문명으로 향해나갈 수 있도록 촉진하면서, 발전 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고쳐나가야 하는 중대하면서도 종합적인 숙제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인공인 ‘화자(話者)’는 타인의 고통을 ‘눈팅’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는 ‘부끄러운 짓’을 하던 중, 자신과 마찬가지의 ‘고통 눈팅족’인 말라(Marla)를 발견하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치부’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치부를 남들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말라는 주인공에게 치부를 들키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말라의 등장으로 느꼈던 수치심은 당연히 말라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져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주인공 ‘화자’는 그제야 남들에게 들키지 않은 치부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혼까지 갈아 넣는 노동의 대가로 장만한 ‘이케아’ 가구로 채워 넣은 작은 아파트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지를 절실하게 느낀다. 남들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울 ‘치(恥)’는 누구에게 들켜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心)’에 ‘귀(耳)’ 기울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부끄러움이다. 남미 오지로 선교하러 간 사제들은 남미 원주민들이 벌거벗고 산다고 같이 벌거벗지 못한다. 주인공은 결국 이케아로 채워 넣은 안락한 아파트로 상징되는 ‘물질’에 얽매여 살았던 자신의 삶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는 아파트를 불 질러버리고 모든 물질적 욕망과 단절된 타일러 더든의 ‘파이트 클럽’에 합류한다. 파이트 클럽에서 매일 밤 누군가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으깨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을 학대하면서 부끄럽게 살아온 자신의 ‘참회록’을 쓰는 것 같다. 그곳에서 자신이 정말 욕망해야 하는 것이 ‘이케아 가구’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는 것을 알아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톨스토이(Tolstoy), 그리고 루소(JJ. Rousseau)의 참회록은 세계의 3대 참회록이라고 불린다. 모두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낱낱이 들추고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배반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톨스토이는 “나는 신을 믿었다기보다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이며,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지혜롭고, 정직하고 솔직하고 도덕적이었다”며 “나는 그들보다 더 잔인하고, 비도덕적이고 교만했다”고 고백한다. 루소의 참회록은 압권이다. 루소는 거룩한 교육사상을 설파하면서 정작 자신은 변태적인 ‘바바리맨’ 짓을 되풀이하고, 동거녀와 낳은 다섯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내던져버렸던 치부를 숨김없이 고백한다. 루소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수치심이 죽음보다, 범죄보다,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땅속으로 들어가 질식해 죽고만 싶었다. 억누를 길 없는 수치심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그 수치심이 나를 뻔뻔하게 만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톨스토이, 루소 모두 ‘뻔뻔함’으로 수치심을 감추기를 거부하고 용기를 내어 ‘참회’를 통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릭 그로(Frédéric Gros)는 신간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꼬집는다. “권력을 쥔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 무례가 이 세계를 점령하며 곳곳에서 ‘수치도 모르는 것들’이란 분노의 외침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은 수치심을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정신적 유아에 머물러 광적인 자기애로 자기의 무가치함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런 저열함을 타인의 탓으로 쏟아내기에 수치심이 이들의 내면에서 어떤 조심성이나 신중함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이는 권력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수치심을 아예 못 느끼거나 그 수치심을 ‘뻔뻔함’으로 뭉개는 개인이나 사회는 질곡에 빠져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윤동주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부득이 창씨개명을 신청하기 5일 전에 썼다는 ‘참회록’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톨스토이, 루소의 참회록보다 더 절절하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창씨개명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거나, 느껴도 뻔뻔하게 뭉개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혼자 죽도록 괴로워하고 참회한다. 그들의 그런 수치심과 참회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독립이라는 혁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 속 말라처럼 수치스러운 모습을 들켜도 수치심을 느끼지도 못하든지, 뻔뻔함으로 뭉개는 사람들이 ‘별종’이 아닌 ‘정상인’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말라도 ‘사치스럽게’ 수치심을 느끼는 주인공을 별종 보듯이 한다. 지극히 당연한 참회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나 톨스토이, 루소, 그리고 윤동주 모두 별종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온갖 부끄러운 모습을 이미 모두 들켜버린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선거에 너무도 당당히 나선다. 그들에게는 수치심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든지 아니면 수치심을 뻔뻔함으로 뭉개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열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거나 뻔뻔함으로 뭉개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혹시 목욕탕에서 다 같이 발가벗은 것처럼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프레데릭 그로의 말처럼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게 맞다면 참으로 우울한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국민 최애(最愛) 애송시(愛誦詩)라는 것이 왠지 민망한 오늘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다음 달(2024년 5월 1일)부터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한 위기 단계가 가장 낮은 ‘관심’으로 하향되면서 코로나19는 본격적인 엔데믹(endemic) 상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치명적인 감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팬데믹(pandemic, 대유행)이라면, 엔데믹은 코로나19 감염병이 풍토병화되어 계절 독감처럼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더라도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빠른 진단과 백신 접종을 통해 팬데믹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엔데믹을 맞아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를 진단하는 PCR 검사와 신속항원 검사에 대해 돌아보고, 연이어 여러 종류의 코로나19 백신의 특징과 차이에 대해 두 편의 글로 나누어 다뤄보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말은 바이러스의 생김새를 일컫는 것이다. 원래 코로나(corona)는 개기일식 때 달 그림자 밖으로 환하게 보이는 고온의 빛(플라즈마)을 말한다. 태양 코로나와 유사한 모양을 가진 바이러스를 통틀어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하고, 과거 우리를 괴롭혔던 사스(SARS)와 메르스(MERS) 바이러스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따라서 2019년에 발생하여 전 세계로 퍼진 코로나 바이러스를 다른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 COVID-19(corona virus disease 2019,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바이러스 또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고 부른다. 코로나19 초창기에는 치료제도 없고 백신도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염자를 빠르게 찾아내어 격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당시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를 찾아내는데 PCR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국민 대부분이 PCR이란 용어에 매우 익숙해졌다. PCR은 polymerase chain reaction의 약자로 우리 말로는 중합효소 연쇄반응이라고 한다. 중합효소를 이용하여 유전자의 증폭(복제) 과정을 연속하여 반복함으로써 분석 대상자의 목적 유전자(개체 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유전자)를 다량 확보하는 것이다. PCR법은 감염병 진단뿐만 아니라 과학수사, 농·수·축산물의 원산지 확인, 친자 확인 등에도 사용된다. 우리는 머리카락 한 올만 있어도 유전자 분석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에 들어있는 DNA의 양은 너무 적어서 분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면 물 한 컵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고 혀를 대면 단 맛이 감지되지만,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은 후 혀를 대면 단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욕조 물에도 한 숟가락의 설탕이 들어 있지만 농도가 너무 낮아 혀라는 분석 방법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설탕이 욕조에서 증폭되어 한 숟가락이 한 가마니가 된다면 충분히 감지하고도 남을 것이다. 설탕은 증폭할 수 없지만, 유전자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복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충분한 양으로 증폭시킬 수 있다. PCR 검사에서 대상자의 모든 유전자를 증폭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유전자는 약 1%만 차이가 있고,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98% 이상 일치한다. 범죄 현장에서 나온 범인의 유전자 모두를 증폭시켜 분석한다면 98%의 확률로 모든 인간과 침팬지가 용의자가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를 증폭하되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유전자 부위만 증폭해야 한다. PCR은 개체 간에 차이가 나타나는 목적 유전자만 다량 증폭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인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유전자의 PCR에는 몇 가지 기술이 더 들어간다. 원래 PCR은 유전자 DNA의 특정 부분을 복제하는 것인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DNA 대신에 RNA를 유전자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RNA를 DNA로 바꾸어주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를 역전사라고 하고, 이때 얻어진 DNA를 cDNA라고 한다. 또한 사스, 메르스 등의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전자 부위를 증폭시키면 안되고, 오로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유전자 부분만 증폭해야 한다. 고전적인 PCR은 목적 유전자를 증폭시킨 후에 유전자 분석 과정을 거치는데 이 때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감염 의심자의 시료를 채취하여 PCR로 목적 유전자를 증폭한 후 유전자 분석까지 하게 되면 시간이 많이 걸려 감염자를 조기에 찾아내어 격리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실시간(real time)-PCR이 사용되는데,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특정적인 목적 유전자가 복제됨과 동시에 형광 물질이 색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실시간으로 유전자 증폭 과정에서 감염되었는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분석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다만 실시간-PCR도 전문 장비를 사용하여 유전자를 증폭하면서 분석을 수행하다 보니 아무리 시간을 단축했다 하더라도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감염 여부를 통보받을 수 있었다. 팬데믹이 지속되면서 감염자가 폭증하여 실시간-PCR의 검사 역량으로 검사 수요를 따라잡기 어려워지는 상황에 놓이다 보니 신속항원 검사를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신속항원 검사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특이 단백질(항원)을 감지하는 방법으로 15~30분 내에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빠르고 편리한 방법이다. 검사 키트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단백질(항원)에 대한 항체가 있어서 항원과 결합 시에 ‘T’ 부분에 붉은 색 띠로 나타나 양성 판정을 내리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항원 단백질이 없으면 ‘T’ 부분에는 띠가 나타나지 않고, ‘C’ 부분에만 붉은 색 띠를 나타내 음성 판정을 받게 된다. 감염자의 체내에 바이러스가 미량 존재하더라도 PCR 검사에서는 유전자를 증폭하기 때문에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항원 단백질은 증폭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바이러스의 양이 적으면 음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잠복기에 있는 무증상자는 PCR 검사에서 양성으로 찾아낼 가능성이 높지만, 신속항원 검사에서는 음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PCR 검사나 신속항원 검사 모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감지하는 정확도는 높지만 민감도(얼마나 적은 양을 감지할 수 있는지)에서 차이가 난다. 만약 백신과 치료제가 전혀 없던 코로나 유행 초기에 신속항원 검사를 통해 감염자를 찾아냈다면 분석 시간은 줄일 수 있었겠지만, 민감도가 낮기 때문에 아직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감염자를 음성으로 판정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었다. 즉 무증상 감염자로 하여금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고 잘못 판단하게 함으로써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바이러스를 여기저기 확산할 가능성이 커지는 문제가 있어 치명률이 높은 코로나 초기에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실시간-PCR 검사로만 감염자를 찾아낸 것이다. 현재는 실시간-PCR 검사와 함께 기침, 열, 인후통 등의 코로나 의심 증세를 보이는 사람을 대상으로 신속항원 검사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실시간-PCR 검사로 감염자를 조기에 찾아내어 격리함으로써 감염자수와 치명률을 낮추면서 백신 접종까지의 시간을 벌었고, 높은 백신 접종률로 코로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백신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있었고, 의료인, 자영업자, 소상공인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어서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에 대해 다뤄볼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제주엔 참 존거 많수다양" (제주엔 참 좋은 것이 많이 있군요) "There are so many good things about Jeju."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