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오승익은 제주대 미술학과 강사로 한라산을 주제로 줄곧 작업하고 있다. 마음에 깊이 남은 트라우마를 한라산을 보면서 치유하는 심정으로 가족과 지역 공동체의 삶의 기억을 되새기며. 역사속의 사계절을 마음속에서 흐르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식하여, 마치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속살로 시작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에게 한라산은 어머니이자 제주의 상징이 되었다. 2025년 1월 22일부터 2월 3일까지 서울 인사동에 있는 제주갤러리에서 개인전 '그 자리 한라산'을 열었다. 그곳이 내 마음이 사는 곳이다 우리는 평생 장소에 귀속돼 산다. 장소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활동공간을 말하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 몸소 겪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최소한 한 곳 이상에서 살면서 그곳의 경험을 몸으로 습득한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이라는 실존의 현실적 ‘겪음’을 의미한다. 내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곧 내 몸이라는 시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재다. 나의 현재는 나의 모든 과거의 기억과 공동체의 상황적 관계들, 사건, 경험, 그리고, 그것들의 기억을 쌓아놓은 의식 속의 지층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내몸의 현재를 이룬다. 그 현재는 미래에는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그 미래만은 가리킨다, 나는 존재하므로 현실에 살면서 생각한다. 자리(place)는 처소(處所)라는 의미의 곳, 장소를 가리키는 공간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리는 어떤 대상이 차지하거나, 차지할 수 있는 표면에 있는 공간을 말한다. 또한 자리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거나 작용이 생기는 곳인 현재의 시간에 놓여있거나, 어떤 대상이 있었던 곳으로써 과거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 좁은 의미로써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고, 그리고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자리는 시공간을 감싸고 있는 특정한 장소를 지칭한다. ‘그’는 이미 알려진 대상을 가리키는 관형사이다. 그 자리란 꼭 집은 점을 말하는 ‘그곳’으로, 지리학적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곳’은 공간의 어느 일정한 점이나 부분을 말하며, ‘그곳’은 그런 특정한 위치를 지명(指名)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곳은 한라산이다. 우리는 평생 많은 것을 가리켜왔다. 방향이란 상징적으로 목표를 나타내기도 한다. 한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은 삶의 이유, 살아가는 지향점을 표현함으로써,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게 된다. 서양화가 오승익에게 그 자리는 한라산이었다. 하나의 상징인 한라산은 그에게는 인식의 대상이자 직간접적인 역사 경험의 장소가 된다. 한라산은 바다의 피라미드이다. 타원형의 섬 가운데 솟아난 삼각형의 피라미드가 마냥 제주인의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사랑과 슬픔, 기쁨과 희망, 좌절과 절망마저도 그대로 쌓아 올려버린 섬 공동체의 산이다. 최초로 한라산이라고 한 사료는 1374년 최영이 탐라에서 목호를 토벌할 때 '여러 장수가 한라산(漢拏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諸將屯漢拏山下休兵)'라는 『고려사』 「열전」 최영의 기록에서부터이다. 또 1388년 산방산에 살아서 산방법승(山房法僧)이라고 불렸던 혜일(慧日) 선사(禪師)의 시에 '한라산의 높이가 어느 만큼인가(漢拏高幾仍).'라는 시에도 나오고, 조선 초기 권근의 시에도 '푸르르고 푸른 한 점의 한라산(漢拏山)이, 만경창파 아득한 속에 멀리 있네.'라는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한라산이라는 지명의 계보를 알 수 있다. 한라(漢拏)라는 말은 ‘은하수를 끌어당길 만한 산’을 말한다. 흔히 한라산을 진산(鎭山)이라고 하여 탐라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한라산은 바다에서 솟아오른 화산이며, 곧 한라산이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바로 한라산이다. 삶에서의 희망의 원리 세상은 형태이고 색으로 표현된다. 자연이 모든 미의 근원이었으며, 우리의 실체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단지 시간의 길을 헤쳐 나가는 한 점 나그네일 뿐이다. 우리는 그 자연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사회적 존재란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리를 지어야만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리 지음이 종국에는 또 다른 욕망의 공포를 만들어낸다. 그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 무리 짓고 살아가는 자들의 오랜 역사였다. 역사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관계일 것이다. 자유롭기는 개인처럼 자유로운 것이 없지만, 남과 여의 삶이 가족을 이루면서 살아감으로써 운명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경제적 분배가 수반함으로써 이해관계는 복잡해진다. 부와 빈의 차이란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의 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경제적인 표현으로써 최고의 단계가 전쟁이라는 이름의 약탈과 방어의 수단으로 나타나게 된다. 어쩌면 역사는 전쟁과 평화가 오가는 두 줄의 다리라고 할 수도 있다. 두 다리 사이에서 욕망하는 자들이 벌이는 탐욕과 그것을 인내하는 관계가 역사의 실체일 것이다. 이 두 다리에서 역사는 고민 끝에 개인으로 사는 것처럼 자유로운 삶을 꿈꾼 것이 오늘날 인류가 찾아낸 민주주의 체제일 것이다. 사회는 서로서로 인정하는 관계일 때에만 평화롭다. 인간은 이성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을 판단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만들어내어 급진적인 상황들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인 법을 만들었다. 물론 법도 다양한 체제의 사회적 스펙트럼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체제라도 그것의 목표는 잘 사는 것이며, 안전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얻을 수 있을 때 그 체제의 존속성이 유지되고 희망의 원리로써 인정된다. 변화하는 자연의 몸, 화산의 마음 약 200만 년에 달하는 한라산의 몸체에도 여전히 자연은 오고 가기를 반복한다. 자연의 본질이 변화에 있지만 결코 무란 없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다른 형체에 녹아있어서 그 녹아있는 것이 만물을 이루는 것이다. 만물이 자연의 실체이다.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동등하여 그대로 머무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길고 짧은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서로 교감하면서 자연히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일어난다. 물과 불, 흙이, 고체와 액체, 기체가 하나인 순환 체계이며,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도 원소의 원자가 된다. 우리의 세계에서 빛으로 표현한 색에서 가장 오래된 색상은 RGB라는 3원색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색은 Red(빨강), Green(초록), Blue(파랑)라는 3원색을 가산혼합한 색으로 구현된다. 이 3원색(RGB) 공간에서는 이 RGB색 모두가 0인 지점에서는 검은색이 되고, 반대로 RGB색 모두가 최대인 지점에선 흰색이 된다. 현재 RGB색은 0에서 255까지 256단계의 색가(color value:色價)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색상의 수는 RGB색에서 만들어진 1677만6216(R256xG256xB256)가지가 된다. 색은 빛의 작용으로 감지된다. 자연에서 보이는 만물의 색은 바로 우리 눈이 감지하는 스펙트럼에 의한 색들이다. 우리 눈은 파장이 400~700nm 영역인 가시광선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눈의 시각세포를 통해 들어온 색 정보를 뇌가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 뇌가 구분할 수 있는 수만 가지의 색의 이름을 말할 수 없으므로 우리 눈이 가장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는 대표적인 3원색만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모든 색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한원택 2022). 그러나 색은 빛의 물리적 작용으로 차이를 나타낼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색이 감정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아는 색의 감정을 보면, 빨강은 뜨거움:정열, 녹색은 자연:상쾌함, 파랑은 차가움:냉정 등으로 상징화되었다. 물론 색은 국가나 지역마다, 혹은 관습과 풍속의 역사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또는 지역 풍토에 따라 표현되기도 한다. 오승익인 경우 제주의 색은 역사와 자연이 함께 숨 쉬고 있는 색으로 인식한다. 붉은색을 보면, 4·3역사의 색으로 인식하거나 화산암재인 스코리아(scoria)와 그리고 갈옷의 색깔을 연상하며, 초록은 한라산의 자연과 밭의 작물을 떠올리며, 파랑은 4계절 변하는 푸른 바다와 산호사(珊瑚砂)의 비취색의 해안을 떠올린다. 흰색은 눈이 덮인 오름과 한라산을, 그리고 갈색에선 잠자는 대지의 평원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색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과 그 취향을 형성시킨 사회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한마디로 색의 상징들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심리적인 경향성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특히 만물에 밴 색에 따라서 사실적으로 불리는 이름 아래 감정이입을 시킨 경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하늘색은 파란 하늘에서 비롯되고, 살색은 피부색을 말하며, 살구색, 복숭아색 등 자연물의 색깔을 따오기도 했다. 검정색은 사회적으로 권위와 위엄의 제복으로 상징되거나, 까마귀처럼 흉조라는 의미에서, 혹은 어둠이라는 암흑이 두려워 죽음의 색으로 상징화되어 애도의 색이 되기도 했다. 색은 본래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색과 연결되는 물질 속성의 색채와 사회적인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적 상징에서 불리기도 한다. 한라산을 지질적인 색으로 보면, 바탕에는 검은색과 적색, 변화된 갈색, 청색 등 돌이라고 하는 매재가 있으며, 기후 조건에 따라 그 위를 덮는 4계절의 변화무쌍한 생태 자연의 색과 더불어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계절의 색이 있다. 그러나 화가 자신의 색은 자신의 환경적 조건에서 자기의 역사적인 경험과 성장 과정에서 받아들인 삶의 인상을 투사한 색의 감정으로 표현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이외에 그들은 또 길거리 쓰레기를 청소하거나 관방 측간의 똥오줌을 치우고 길거리에서 죽은 시체를 치우는 일도 담당하였다. 화재 등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책임도 졌다. 1918년 포두 지역에서 흑사병이 유행하여 3000여 명이 죽었는데 그들이 책임지고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후 화장하였다. 죽은 시체를 피하려 할 때에는 그들이 나서서 운반하여 매장하고 검시관의 검시를 돕기도 했다. 주인이 없는 사형수의 시체가 있을 때에는 그들이 옷을 벗겨내고 깨끗이 빨아 헌 옷 파는 노점상에게 팔았다. 심지어는 시체에서 심장이나 뇌를 꺼내어 약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평상시에는 공업계, 상업계의 노동조합이 양산에게 일상용품이나 노임 등을 공급하였다. 매년 사대 명절이 되면 여러 상점에서 그들에게 따로 선물을 보냈다. 그 외에도 ‘부수입’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분수에 만족하여 본분을 지키면서 입에 풀칠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양산을 삶을 돌보아주며 평생 의지할 수 있는 집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양산에 가입하면 항방(行幇) 규칙을 반드시 따라야 했다. 일반적으로 업종을 바꾸어 다른 일을 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항방의 비밀도 엄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각 거리에 밀정으로 파견된 거지가 제때에 양산으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하지 않으면 ‘괴정(拐挺)’으로 죽도록 얻어맞았다. 봉건주의 가부장적 통치방식을 따르는 항방에서 때리거나 욕설을 퍼붓는 것은 일상사였다. 흉년이 들면 사회 기부금과 관방의 구제 물품 대부분은 양산의 우두머리가 중간에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버렸다. 최전성기 때에는 우두머리가 첩을 두기도 했고 주방도 두어 개가 있는 집에서 살기도 했다. 산서방(山西幇)의 은행업계가 자금 유통이 원활하지 않는 기간에는 이자를 갚으려고 양산의 우두머리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20년대 전후로 양산의 많은 사람이 가로회(哥老會)1)에 가입한 후에 토비로 전락하면서 다년간 ‘사인구’에 똬리를 틀었던 흑사회였던 개방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다가 4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와해되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가로회(哥老會), 청(淸)나라를 몰아내고 명(明)을 부활시킬 목적으로 활동한 비밀결사 조직 중의 하나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통치력이 점차 쇠퇴하자 궁핍한 농민이 서로 돕고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일종의 투쟁 단체였다. 처음에는 농민끼리 모여 부자를 타도하고 명나라의 대의를 따르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차츰 정치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그 뿌리는 명나라가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일어설 즈음 청나라에 맞서 명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결집한 비밀세력인 홍문(洪文)이었다. 홍문에 뿌리를 두고 일어났던 비밀결사조직으로는 가로회, 백련교(白蓮敎), 의화단(義和團) 이외에도 천지회(天地會), 배상제회, 삼합회(三合會), 홍화회(紅花會), 삼점회(三點會), 첨제회(添弟會), 소도회(小刀會) 등이 있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내몽고자치구에 속해있는 포두(包頭, 바오터우)의 옛 시가지역 초시가(草市街) 북쪽에 ‘자인구(慈人溝)’라는 지역이 있다. 근 반세기 이전에는 그 지방을 ‘사인구(死人溝)’라 불렀다. 본래 관을 놓아두던 곳이었다. 많은 거지가 그곳에 구멍을 파서 모여 살았다. 그래서 점차 포두의 유명한 빈민굴로 변했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그곳에 범인을 잠시 구류하는 ‘흑방(黑防)’이 있었다고 전한다. 포두(包頭)에서 체포한 범인과 오원(五原), 동승(東勝), 싸라치(薩拉齊) 뒷산 지역에서 압송해 온 범인은 모두 그곳으로 이송하여 구류했다가 다시 싸라치의 큰 감옥으로 호송하였다. 포두의 흑사회 조직 ‘양산(梁山)’의 대본영 ― ‘충의당(忠義堂)’ ― 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양산(梁山)’이라는 말은 ‘쇄(鎖)’와 ‘리(里)’ 양 가문의 병칭이다. 어김없는 깡패 집단이었다. ‘쇄가(鎖家)’는 건륭 연간에 귀화성(歸化城) 공주부(公州府)에서 야경을 돌던 마삼홍(馬三紅)과 농사를 짓던 진사해(秦四海)가 창립했다고 전한다. 명나라 영락제 주체(朱棣)를 조사(祖師)로 모셨다. 마 씨, 진 씨 가문의 인원은 모두 취고수(구식 혼례나 장례식을 할 때의 악사)와 교자꾼이 골간이었다. 그들의 정상적인 생계 방식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각자 활동 근거지가 있었다. 근거지를 ‘방장(方場)’이라 부르고 어느 누구도 그 경계를 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포두 ‘쇄가’의 방장은 동으론 사르친(莎爾沁)진, 서로는 마지(馬池)진, 북으로는 석괴구(石拐溝), 남으로는 대수만(大樹灣)까지였다. 이것이 홍방(紅幇)의 ‘반청복명(反淸復明)’〔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움〕 의식이 유래한 항방이다. 이렇게 추측한다. “당시 옹정 황제가 자기의 통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방회(幇會)의 ‘반청복명’의 민족혁명역량을 약화시키고 그의 종실과 가권에게 자기 의견을 알려 반대 되는 두 개의 하층 사회집단을 따로 조직하면서 분화되고 와해되었다.”〔유영원(劉映元)〕 ‘리가(里家)’의 우두머리는 처음에 북경성 팔기 중에서 가난해진 왕야(王爺) 여덟이라고 전한다. 나중에 장(張), 고(高), 한(韓) 3문으로 나뉘었다. 리가의 성원은 모두 거지였다. 「연화락(蓮華落)」을 연주하거나 「수래보(數來寶)」를 부르며 구걸하면서 곳곳을 돌아다녔다. 범염(范冉)〔범단(范丹)〕을 조사로 모셨다. ‘쇄(鎖)’, ‘리(里)’ 양대 가문은 힘을 확대하려고 ‘양산(梁山)’과 합쳤다. 쇄 가의 각 고방(鼓房) 단장 중에서 양산의 우두머리를 천거했기에 ‘충의당’은 해당 고방에 설치했다. 문 앞에 ‘대행(大行)’이라 쓴 호두패(虎頭牌)와 소가죽 채찍을 걸어두었다. 당에는 ‘쇄’, ‘리’ 두 가문의 조사를 모셨다. 우두머리가 밖을 나서면 호위가 따랐다. ‘괴정(拐挺)’이라 부르는 나무 몽둥이로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평상시에는 괴정을 조사의 신탁 위에 놓아두었다. 그것을 이용하여 항방의 규칙을 집행하여 장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양산의 권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쇄가의 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리가의 거지는 모두 주어진 세력 범위 내에서 구걸하였다. 자기 구역이 아닌 곳에서는 잔치나 장례식이 있어도 동냥할 수 없었다. 현지에서 일반 집안에서 큰일이 생길 때에는 양산 사람을 청해서(실제로는 고용) ‘준문(蹲門)’, 즉 대문을 지키고 거지들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하루에 은화 1원이었지만 떠날 즈음에는 구걸하지 못하고 양산에 남아있던 거지에게 1원을 더 얹어 주었다. ‘준문’하는 거지와 리가 거지는 고장(鼓匠) 막에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탁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양산의 규칙을 어기게 되니까요.” 양산의 거지는 어떤 때에는 점포 취사장에게 탄 재를 퍼내주거나 개숫물을 버려주거나 하면서 남은 밥을 얻어먹었다. 생일, 회갑, 개업, 이사, 승진, 연말에 해당 집에 가서 축하노래를 불러주면 신선한 술과 음식을 얻을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사인구로 돌아가 아편을 흡연하는 거지가 많았다. 평상시에 길거리에서 구걸할 때도 리가의 사람은 어렵지 않게 동냥할 수 있었다. 리가는 토비와 암암리에 결탁해 있었고 관부의 밀정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거지들에게 미움을 사서 재난을 초래할까 두려워했다. 다시 말해 양산 현지는 안팎이 결탁되어 있었다. 그들은 관부에 도적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훔친 물건이나 돈을 도적과 나누었다. 외지에서 포두까지 도망쳐 온, 죄를 지은 도적은 먼저 양산에 가서 등록해야 했다. 야간에 도둑질하는 거지는 ‘빨간 줄 뛰는 자’라 불렀고 낮에 도둑질 하는 거지는 ‘청색 줄 뛰는 자’라 했으며 아침과 저녁에 도둑질하는 거지는 ‘등미(燈謎)놀이1) 하는 자’라 불렀다. 야간에 도둑질할 때 망을 보며 휘파람을 부는 거지를 ‘막대에 올라간 자’라 불렀고 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는 거지는 ‘못에 뛰어는 자’라 했다. 장물을 나눌 때에는 후자가 전자보다 많이 가졌다. 낮에 도둑질하는 거지는 일반적으로 4부류로 나뉘었다. 상점 소매를 터는 거지를 ‘고매(高買)’라 하고 시장 행상인을 터는 거지를 ‘노점을 쓸다’라고 불렀다. 농민의 수레, 나귀바리를 터는 거지를 ‘바퀴 굴린다’라고 하고 큰길의 행인을 터는 거지를 ‘자루 집다’라고 했다. 등록된 여러 도둑질은 이 중에 하나만 할 줄 알면 되고 양산이 지정한 지역을 벗어나서는 안 됐다. 그렇지 않고 규칙을 위반하다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발견되면 윗선에 보고되고 양산에서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 체포했다. 경범(예를 들어 초범)이면 곤장을 맞는 선에서 끝나지만 누범자는 사라치(薩拉奇)의 큰 감옥으로 보내졌다. 도둑이 현지에 발을 붙이려면 반드시 양산 기준에 맞는 약속을 받아들여야 했다. 도둑질한 장물은 3일 이내에는 마음대로 처분해서는 안 됐다. 잃어버린 물건이 지방 세력자의 것이면 양산에서 분실물을 찾아내어 돌려줘야하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물을 판 후에는 30%를 꼭 양산에 헌납해야 했다. 이후에 우두머리가 경찰과 개인적으로 나누어 가졌다. 양산에 속한 거지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권법이나 봉술을 하는 사람, 본바닥 불량배 등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인간들은 다 모여 있었다. 당시의 공업계, 상업계, 경찰도 그 강호 세력이 현지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기꺼이 이용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밤에 포두 전 지역의 순찰과 야경을 책임졌다.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행인을 단속하고 심지어 체포할 수도 있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가 도박하려고 성 밖으로 나갈 때에는 성문의 열쇠를 그들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그들도 야간을 이용해 성문을 열고 행상의 통행을 허가하면서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등미(燈謎), 타호아(打虎兒), 문호(文虎)라고도 하는데 음력 정월 보름이나 중추절 밤, 초롱에 수수께끼의 문답을 써넣는 놀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북경의 ‘강방(杠房)’ 업종은 한때 흥성하였다. ‘강방’이란 전문적으로 장례(葬禮) 의장(儀仗)을 세주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관을 덮는 수놓은 단자 덮개, 의장대용의 길을 여는 징, 우산, 부채, 깃발, 패, 수레, 가마 등을 빌려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의례하고 관을 메고 의장을 드는 인원을 대신하여 고용하기도 하고 관을 짜는 데에 필요한 목재 등 필요한 물품을 대신 구매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강방은 장례를 청부 맡아 처리하는 전문 직업이었다. 관을 메고 의장을 드는 것과 같은 막일은 비록 당시에 대단히 중히 여기는 의식 중 하나였기는 했지만 결국은 비천한 일에 속했다. 그래서 거지에게 임시로 일하여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때의 품삯은 행하(行下)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방에 교부하는 금전을 빼더라도 평상시에 구걸하는 금전보다도 많았다. ‘효자(孝子)’에 충당되어 길을 따라가면서 지전을 뿌리기도 했다. 그래서 강방은 또 ‘화자두(化子頭)’라는 명칭이 붙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실제로 북경의 이른바 화자두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북경에서 과거에 푼돈을 구걸하는 것은 대부분 외지에서 온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겨울이 되면 올라와 적은 돈을 구걸해 갔다. 봄철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목돈을 벌 수 있었다. 진정한 북경 토박이 화자두는 패거리를 이루어 대놓고 구걸했다. 그러한 사람들을 ‘간상인(竿上的)’이라 통칭했다. 노동력을 팔려고 하면 개인은 방법이 없었다. 항방에 가입해야 했다. 먼저 ‘간자(竿子)’에게 절하고 ‘간상(竿上)’에 가입해야만 나중에 일이 있으면 일을 맡겼다. 돈을 벌면 먼저 일정한 비율을 떼야했고 동시에 우두머리가 명령하면 반드시 따라야 했다. 민국 이후에 ‘간상인’의 세력은 다소 감소하기는 했지만 강방의 업종에서 행했던 관을 메는 사람과 의장을 드는 사람은 여전히 구시대의 유풍이 되어 행해졌다. 현 중국이 성립한 이후에야 정부는 그런 노동인민을 조직하여 장례업 공회에 가입시켰다. 일이 있으면 돌아가면서 출근하고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했다. 노임도 강방과 협상한 후에 결정하였다. 나중에 그런 사람들은 모두 정식적으로 기중(忌中)조직에 가입하였다.”〔장관정(張官鼎)〕 옛날에 북경의 강방(杠房) 업종을 ‘화자두(化子頭)’라고하기도 했는데 항상 거지를 고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거지를 고용하면 현지 거지 항방과 왕래해야 했다. 그래야 아무 때나 필요할 때 어려움 없이 고용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정한 범위 내에서, 일정한 정도에서 필요한 지역 질서를 유지할 수 있어서 경영 과정 중에 생기는 의외의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두 거지 항방 세력을 빌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문화가 쌓여온 과정을 보면 여러 가지 항방은 선천적으로 탄생 시기부터 봉건 색채가 침투되어 있다. 거지 항방은 직업이 없는 유민으로 이루어진 오합지졸이라, 유랑민 의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크고 작은 흑사회(黑社會, 폭력조직) 단원이기도 했다. 이것이 중국 거지 단체가 타락하고 변질된 기본 이유 중 하나였다. 항방은 관방이나 토비와 결탁하여 서로 이용하고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하며 불법 세력(조직)이 되었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 즉 50년대 이전에 불법조직이 된 거지 항방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활략하였다. 심지어 8,90년대에 이르러서도 범죄 집단이 된 거지 항방 세력이 또다시 대두하여 해악을 끼치기도 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옛날 동북지방에 또 다른 거지 항방(行幇)이 있었다. ‘이거(二柜)’가 그것이다. 그들은 1년에 두 계절에 대량으로 양식을 구걸하는 대광과는 달리, 여러 방식으로 흩어져서 각지를 유랑하면서 구걸하였다. 예를 들어 이른바 요구하는 ‘요적(要的)’, 즉 밥을 구걸하는 것은 2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밥을 담는 밥통을 들고 길거리에서 애걸하며 구걸하는 것, ‘찬밥 그릇을 요구하는 거지’였다.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구걸하는 부류가 있었다. 예를 들어, 농사꾼으로 분장해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느니 병을 치료해야 한다느니 말하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고기와 쌀을 구걸하거나, 길가는 사람으로 위장해 여비가 부족하니 도와달라느니 하며 구걸하는 사람으로 ‘밥을 구하는 거지’1)였다. 이것보다 더 많은 부류는 노래를 하며 구걸하는 부류였다. 예를 들어 ‘죽림(竹林)을 먹는 거지’로, 고달판(呱哒板, 박자를 맞추는 목판)을 치며 다녔다. ‘화상(華相)을 말하는 거지’로 사랍계(沙拉鷄)2)를 연주하고 다녔다. ‘검은 막대기를 가지고 노는 거지’로 담배설대를 치며 다녔다. ‘평고(平鼓)를 치는 거지’로, 합라파(哈拉巴, 소의 견갑골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며 다녔다. ‘자기를 때리는 거지‘로, 밥그릇을 때리며 다녔다, 위에 열거한 거지는 모두 ‘이거(二柜)’에 속했다. ‘이거’의 두목은 마음대로 개방의 거지를 때리고 욕할 수 있었다. 죽으면 명이 짧을 것을 원망할 뿐, 두목은 독점해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질렀다. 밖에서 온 거지는 모두 먼저 두목을 예방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구걸할 수 없었다. 강호의 불법 선착장이나 다름없었다. 두목을 예방하는 것이 강호 항방의 규칙 중의 하나인 ‘배마두(拜碼頭)’이다. 예를 들어 현지의 ‘화상을 말하는 거지’가 사라계를 치면서 밥 좀 달라며 돌아다니는 외지에서 온 동업자를 보면 곧바로 본지 사라계 치는 거지에게 먼지 통지하고 즉시 나아가 노래하였다. “죽판을 치니 딸랑딸랑, 상부(相府)는 어디에서 오셨소?” ‘상부’란 강호에서 밥을 얻어먹는 사람의 통칭이었다. ‘대광’ 개방 중의 맹인 거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외지에서 온 동업자가 만약 항방의 규칙을 알고 있다면 곧바로 노래로 답했다. “지금 막 도착해서, 겨를이 없었네요. 곧바로 거상을 찾아갈 거외다.” 그러고는 즉시 이거를 찾아갔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두 손으로 밥통을 떠받들고 말했다. “여러 부상님들, 밥통을 점검하소서!” 구걸해온 돈이 모두 밥통 속에 있으니 여러분이 살펴보라는 말이다. 이거 중의 한 사람이 상황을 보고 앉으라고 청하면 외지에서 온 거지는 밥통 속에 있는 돈을 쏟아내어 세면서 말했다. “오늘은 괜찮았습니다. 적지 않은 부스러기〔사자(渣子), 동전의 은어〕를 얻었고 나는 호랑이〔비호자(飛虎子), 지폐의 은어〕도 있습니다요. 여러분이 쓰십시오!” 이거의 사람이 답한다. “같이 써야지요.” 그러고서는 사라계와 밥통을 벽에 걸어두고 차를 마시면서 물었다. “상부, 상부는 어디에서 오셨소?” “상부라 부를 정도는 아닙니다. 사부를 만난 건 늦었기도 하고 사부를 일찍 떠나보냈습니다. 종종걸음 치는 놈일 뿐입니다.”(자기는 강호를 강중거리며 다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하는 말이다) 연이어 물었다. “어느 집안의 밥을 먹소?” 그러면 자신은 모 문 모 가〔정(丁), 곽(郭), 범(范), 고(高), 제(齊) 5가로 나뉘고 외문으로는 한(韓) 3문으로 나뉜다고 전한다〕 출신이고 모모 인의 발(사부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로 뛰고 있으며 모모 인의 밥주걱〔표파자(瓢把子), 사형이 누구냐를 말하는 것〕을 가지고 다닌다고 말한다. 연이어 사부와 태사부 등등을 묻는다. 대답하는 데에 오류가 없으면 본 가문의 사람(본 항방의 동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특별히 친하게 지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사부를 데리고 오라고 말한 후 물건을 압류하였다. 외부에서 와서 가문이 없는(항방에 가입하지 않은) 자는 그들에게 분명히 설명한 후에 믿음을 얻어 관례대로 밥을 빌어먹는다 하여도 항방에 가입되어 있는 거지처럼 그렇게 친밀해지지는 않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원래는 ‘쓸모없는 부채에 의지하다’(靠死扇子)인데 은어(암호)다. 뜻은 ‘要飯的化子’로 밥을 구걸하는 거지를 가리킨다. 2) 사랍계(沙拉鷄), 악기의 일종이다. 왼손에 두 줄기 판목을 연결시켜 만든, 판의 밑 부분이 보검 모양, 길이 약 30센티미터 넓이 약 2센티미터, 밑 부분은 3개의 얇은 철판이 드리워진 판(板)을 들고 흔들면 딸랑딸랑(叮叮当当) 듣기 좋은 소리가 난다 ; 오른손에 길이 40센티미터 넓이 2.5센티미터 되는 대나무로 만든 판을 든다. 양측에 각각 29개의 끝이 원추형인 톱니가 있다. ‘salaji’, 곡예계(曲藝界)에서는 ‘수래보(數來寶)’의 박자를 맞추는 악기의 하나라는 것이라 한다. 발음을 빌린 것이라 한어가 제각각이다. ‘撒拉机’, ‘撒拉鸡’, ‘沙拉鸡’. ‘撒拉姬’, ‘撒拉击’, ‘撒拉笈’, ‘萨拉鸡’, ‘萨拉机’, ‘萨拉基’, ‘萨拉击’, ‘撒拉基’, ‘仨拉机’, ‘仨拉吉’, ‘仨拉击’ 등이 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실제로 옛날에 궁가항 부류의 거지 항방(行幇)은 중국 어디에나 존재하였다. 일정한 지역을 각자의 기본 활동 영역으로 산재되어 있었고 연결되어 있었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길림(吉林) 해룡(海龍) 일대에 ‘대광(大筐)’과 ‘이거(二柜)’ 두 종류의 거지 항방이 활동하였다. 이른바 ‘대광’은 거지 집단이었다. 절름발이, 소경, 병자와 같은 거지가 평일에는 도시에 살다가 봄과 여름에 향촌으로 내려가 양식을 구걸하였다. 양식을 구걸할 때 ‘낙자두(落子頭)’가 무리를 이끌었다. ‘순자(順子)’라 부르는 작은 몽둥이나 ‘흘미(吃米) 팻말’을 손에 들고 갔다. 그 팻말은 지현(知縣)이 준 것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양식을 구한다’라는 증좌였다고 전한다. 이유가 충분하니 하는 말이 당당했다. 양식을 구할 때 쓰는 도구는 유관(柳罐, 버드나무 잔가지로 엮은 두레박 형태의 용기)이었다. 그래서 ‘대광(大筐)’이라 하였고 우두머리는 ‘광두(筐頭)’라 불렀다. 낙자두는 유관을 들고 무리와 함께 향촌으로 내려갔다. 주로 돈이 있는 천석꾼에게 양식을 요구했다. 그의 조수를 ‘방락자(幇落子)’라 불렀다. 낙자두는 조리 있게 말을 잘했고 대담했다. 황상이 효수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양식을 구할 때에는 사람을 보고 접시를 내놓듯이, 상대의 상황을 보고 행동하였다. 일반 집에 가면 유관을 집문 앞 반석 옆에 놓고 이상한 소리로 내질렀다. “주인님, 절름발이, 소경이 왔소, 먹을 양식 좀 주시오!” 그런데 세력 있는 향신 대문 앞에 가면 유관을 대문에서 3척 떨어진 곳에 놓았다. 세속은 권력이나 재력을 따지는 성질이 있다. 강자를 두려워하고 약자를 업신여긴다. 사회 하층에 속한 거지가 사람에게 구걸할 때에도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랐다. 분수에 따른 것일 터이다. 구걸해온 양식은 모두 광두가 분배하였다. 안으로는 개방의 가문을 관리하고 밖으로는 관부와 왕래하였다. 일종의 지방의 ‘인물’이었다. 매번 얻어온 양식은 대광에 속한 거지가 반 년 동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였다. 큰 수레를 이용하여 도시로 끌고 간 후 광두가 등급에 따라 분배하였다. 광두는 우두머리이니 도리로 보아 당연히 두 몫을 가져갔다. ‘선자(扇子)’는 한 손에 죽통〔竹筒, 송대의 범중화(范仲華)가 남긴 것이라 전한다〕을 들고 다른 손에는 신발바닥을 들고 애처롭게 부르짖으며 갈비뼈를 때리면서 구걸하는 거지다. ‘요자(舀子)’〔‘회자(擓子)’라고하기도 한다〕도 있다. 벽돌을 들고 자기 머리를 치며 먹을 것을 구걸하는 거지다. ‘파두(破頭)’도 있다. 칼로 자기 머리를 찍고 구걸할 집의 대문 앞에 드러누워 양식을 구걸하는 거지다. 그들은 낙자두와 한 통속이었다. 대광이 향촌으로 내려가 양식을 구걸하는 골간으로 각자 일정한 양을 분배받았다. ‘상부(相府)’(맹인 거지), ‘소락자(小落子)’(평상시에 작은 유관을 어깨에 메고 일반 집에 가서 간장, 짠지와 같은 것을 구걸하는 미성년의 어린 거지), ‘흘미적(吃米的)’(여성 맹인 거지)은 공헌이 그리 많지 않고 능력이 많지 않아 각자 반씩 분배받았다. 분배할 때 먼저 함께 먹을 양식을 남겨두고서 모두에게 입을 옷을 제공하였다. 남포(藍布) 옷 밖에 낡은 옷을 걸치는데 ‘음양저(陰陽底)’라 불렀다. 이런 절름발이, 병자, 맹인인 거지는 서로 운명을 같이 했고 서로 협력하였다. 큰 대오가 향촌으로 내려가 양식을 구할 때 개를 끌고 길을 안내하는 맹인 거지는 ‘연간(軟杆)’이라 불렀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다가 구덩이를 만나면 ‘공(空)’이라 외치며 뒤따라오는 맹인 거지에게 다리를 높이 들라고 알려주었다. 그를 ‘경간(硬杆)’이라 불렀다. 그들이 대부호에게 양식을 구걸하는 근거는 궁가항의 조사 숭배 전설과 비슷했다. 옛날에 공자가 진(陳)나라에서 곤경에 빠지자 안회(顔回)를 보내어 범단(范丹)에게 산처럼 쌓인 쌀과 밀을 빌린 후에 후세에 대련을 붙인 집에서 빚을 대신 갚도록 했다는 게 구걸하는 근거였다. 대광 구성원 중에 사람이 죽으면 관 안에 흑사 사발을 4개 넣어주었다. 말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마 한 가닥을 넣었다. 말꼬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내포하는 뜻은 이렇다. 죽은 자가 죽기 전에 한 평생 집집에서 밥을 얻어먹었기에 다음 생에는 역참 사이에서 편지를 전달하는 역마로 태어나 전생에서 입은 은혜를 갚으려 한다는 의미였다. 민국 초기에 정부가 대광을 금지하면서 사라졌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활념자는 소매치기하거나 닭을 훔치는 등 소도둑과 같은 부류다. 그 조사(祖師)는 둘이 있다고 전한다. 사(梭) 씨와 이(李) 씨로, 통주(通州) 상촌(上村)의 탈곡장에서 살았다. 어느 날, 둘이 집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술을 마셨다. 깨진 그릇에 가득 담긴 짠지가 전부였다. 깨진 주전자로 술을 따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가정〔嘉靖, 혹은 ‘가경(嘉慶)’, 구전이 정확하지 않아 애매하다〕 황제가 그곳에 몰래 방문하여 세 명이서 함께 술을 마시고 짠지를 안주로 먹었다. 나중에 황제는 하급 관리 자리를 줄 테니 일을 하라했으나 거절하자 둘에게 철포죽(鐵炮竹) 3개를 선물로 주고 군문(軍門, 청대에 제독에 대한 존칭)에 봉했다. 이후 사(梭)·이(李)는 한 파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이(梭李)는 믿을 수 없다’라고 했는데 그들이 궁가항의 정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사념자는 그들을 업신여겨 그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그들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만 전했고 사람 수도 적었다. 활념자는 아문의 포졸과 결탁해 훔쳐온 물건을 포졸 등에게 뇌물로 주고 암암리에 보호를 받았다. 훔친 물건의 주인이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포졸을 찾아오면 포졸은 활념자에게 물건을 돌려주라고 했다. 훔쳐온 물건은 곧바로 장물로 처분할 수 없었다. 며칠이나 한 달 정도 보관하면서 상황을 본 후에나 처분이 가능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닭이나 음식을 훔쳐오는 것은 예외였다. 아무 때나 처분할 수 있었다.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이른바 ‘간상(杆上)’은 포수(炮手, 전문적으로 폭죽을 터뜨리는 사람)다. 사념자는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혼례나 장례를 치르는 집이 있으면 ‘간상’을 초청해 폭죽을 터뜨리게 하고 비교적 많은 돈을 받아내었다. 그 사이에 구걸하러 오른 사람이 있으면 간상이 나서서 상대하였다. 실제 간상은 사념자 중의 능력 있는 사람이나 악질분자였다. 외지의 사념자나 활념자가 현지에 와서 활동할 때에는 간상에게 이로움이 있었다. 간상을 불러 자신들을 보호하도록 하고 보상하였다. 사념자와 활념자는 통칭 ‘유방(游方)’이라 하고 간상은 ‘좌방(坐方)’이라 불렀다. 유방이 모처에 가서 혼례나 장례에서 구걸하려면 좌방을 찾아가야 했다. 좌방이 그들을 데리고 가서 돈을 요구하고 구걸하여, 그들을 만족시키기 때문이었다. 만약 좌방이 유방의 요구에 만족시키지 못하면 유방은 길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시비를 가렸다. “당신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요? 사부가 당신을 똑바로 가르치지 않았단 말이요? 밥 한 그릇을 가지고 둘이 나누어 먹겠다는 거요?” 즉시 그의 폭죽통과 만두 등을 뺏어버리며 말했다. “당시 사부에게 직접 와서 찾아가라 하시오!” 간상은 도제 간에 승계했기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직무를 이어받았다. 총결하면, 사념자는 궁가항의 주체다. 궁가항의 큰 수령을 ‘당가(當家)’라 부르고 밑에 각각 ‘염(捻)’이 있었다. 서너너덧이 1념이고 그 두목이 누자두(簍子頭)이다. 누자두는 거지들이 얻어온 것 중에서 대략 10%를 거두어 들여 자신이 사용하였다. 거지가 쓰는 먹는 소금은 모두 누자두가 공급하였다. 궁가항에 가입하려면 반드시 고개 숙여 절하며 스승으로 인정하여야 했다. 스승으로 인정하는 것을 ‘배간(拜杆)’이라 한다. 배간할 때에는 3명이 있어야 했다. 사부(師傅), 명사(明師), 인사(引師)다. 면전에 1척 길이의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된 막대기를 설치했다. 붉은색은 위로 향하고 검은색은 아래로 향해야 했다. 술잔 없이 술 주전자를 가지고 돌아가면서 두 손으로 들고 마셨다. 사부에게 절하면 알려주었다 : 너는 몇 대이고 어떤 문파에 속하며 명사, 인사 각각 무슨 문파이고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세세히 알려주었다. 추천한 사람을 불러 조직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겠다고 보증을 받은 후에 세워둔 막대 주위에 빙 둘러 서서 술을 뿌렸다. 스승을 인정하는 데에 어떤 사람은 타판, 소뼈, 소쿠리, 취사그릇 등을 나열해서는 똑같이 주위를 돌며 술을 뿌렸다. 이때부터 궁가항에 가입했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다. 조직에 들어간 후 구걸할 때에는 ‘춘전(春典)’을 익힌다. 은어(隱語), 즉 암호(暗號)다. 예를 들어 유(柳), 월(月), 망(望), 재(在), 중(中), 신(神), 흥(興), 장(張), 애(愛), 거(居)는 1부터 10을 세는 암호다. 양(陽), 흑(黑), 도(道), 첩(妾)은 남, 북, 동, 서를 가리킨다. 이외의 암호는 다음과 같다 : 구걸할 때 어깨에 거는 도구인 탑자(搭子)는 노회(老灰), 머리를 찌르는 용도의 낫은 경자(輕子), 길가의 가을에 수확한 농작물을 훔치는 것을 타락재(打洛栽), 폭죽은 돈자(蹾子), 신관은 화묘자(火苗子), 화약은 피(皮), 불을 붙이는 용도의 화향(火香)은 화구(火邱), 야채를 써는 칼은 사도(師刀), 목청은 환두(喚頭), 등은 양자(亮子), 성냥은 진성자(進星子), 돈은 저(杵), 문머리에 붙이는 길상 도안은 간저(干杵), 해가 보이지 않은 흐린 날씨는 상만자(上漫子) 또는 타붕(打棚), 탁상용의 술병(주전자)은 용두(龍頭), 그릇은 봉미(鳳尾), 안을 댄 중국식 저고리는 칭길(稱吉), 양말은 왕(汪), 신발은 노언(蘆言), 밥을 먹는 것을 상간(上啃), 술을 마시는 것을 포병(抱甁), 개는 피자(皮子) 등등 대부분 강호 잡류의 은어(암호)와 상통한다. 동업자를 만나면 먼저 ‘고생하십니다’ 말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 ‘사람은 큰데 다리는 짧구먼’(올라가려 하나 높이 올라가지 못한다는 뜻)라고 말했다. 길에서 동종의 말을 주고받는 동업자를 만나면 반드시 사부, 명부, 인부의 이름을 말해야 했다. 항렬에 따라 좌석 배열이 다른 것이 규정이었다. 그들 내부에서는 좌석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서열을 구분하였다. 윗사람은 사부, 사숙이라 불렀고 항렬이 같은 사람은 형제라 불렀다. 등급에 따라 서열이 뚜렷하였다. 옛날에 영진현에서 초하루, 보름이면 궁가항의 ‘누자두’가 나서서 각 점포에서 돈을 구걸하고 얻은 돈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누자두가 있는 지역에서는, 설에는 각설이 타령을 부르며 재신(財神)을 맞이하고 보내며 예를 올리거나 신년을 축하하는 방식으로 재물을 구걸하였다. 평상시에는 여러 거지가 시장이 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흩어져 있는 노점상에게서 재물을 구걸하였다. 하는 김에 부잣집에서 솥이나 노잣돈 얻었다. 밀 수확할 때나 추수할 때마다 누자두는 여럿을 거느리고서, 무리를 결성해 일륜차를 밀고 지주 부농을 찾아가 양식을 요구하는 ‘개설거(開踅去)’를 두 번 행했다. 갈 때에 말을 잘하는 누자두를 ‘장설(掌踅)’로 추천하였다. 장설인 누자두는 잠겨있는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갔다. 안에는 성인부(聖人府)가 발행한 증명서와 황릉(黃綾) 바탕의 용봉기(龍鳳旗)가 놓여있었다. 상대방이 “내가 당신에게 빚진 게 있소?”라고 말하면 장예는 곧바로 받아쳤다. “내게 빚진 것은 당신은 갚지 못할 거요! 당신, 성인의 책을 읽어봤소? 당신이 대련을 붙이면 내게 빚을 갚아야 하오.” 필요할 때에는 증명서와 용봉기를 꺼내들었다. 응대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생떼를 쓰며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작은 지방에서나 효과가 있었다. 무사를 양성해 집안을 보호하거나 현지의 ‘간상’을 이용하는 호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런 ‘개설(開踅)’로 양식을 요구하는 이론 근거는 실제 가난한 집안이 조상 숭배 전설을 믿는 행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의지하는 것은 많은 사람의 숫자다. 억지로 빼앗는 구실이요 핑계일 뿐이다. 빈부 격차가 현저하고 계급 갈등이 첨예했던 역사 조건 아래서는 거지의 생성과 존재에 일정한 ‘합리’적 요소가 있다고 할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 그런 역사 배경이 아니라면 완전히 ‘불합리’한 현상으로 바뀌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산동성 서북부에 인접한 하북성에 영진(寧津)현이 있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궁가항(窮家行)’이라는 명칭의 방대한 개방(丐幇)이 존재하였다.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현 중국 정권이 들어서서야 사라졌다. 통상적으로 궁가항을 ‘염상(捻上)’이나 ‘염자(捻子)’라고 불렀다. 돌아갈 집이 없어 곳곳으로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들이 그 조직에 들어갔다. 금전이 생기기만 하면 먹고 마시고 도박에 탕진하였다. 헤프게 다 써버리고 저축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만년궁(萬年窮)’이라 불렀기에 ‘궁가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스로 ‘이정항(理情行)’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사리, 인정을 강구하는 항방(行幇)이라는 뜻이다. 궁가항에는 ‘사념자(死捻子)’, ‘활념자(活捻子)’, ‘간상(杆上)’의 구분이 있었다. 그중 ‘사념자’가 정통이며 소속된 거지가 가장 많았다. ‘사념자’는 속칭 ‘규화자(叫化子)’라는 거지로, 푼돈을 구걸하는 거지였다. 동한(東漢) 말기의 곤궁하기로 유명한 명사 범염(范冉)1), 일명 범단(范丹)을 조사(祖師)로 모셨다고 전한다. 『후한서·범염전(范冉傳)』에 “환제(桓帝) 때에 범염은 내무장(萊蕪長)이 됐는데 모친 조상을 당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저자에서 점을 치며 살다가 당인(黨人)이 금고를 당하자 조그만 수레에 처자를 싣고 밀고 다니면서 물건을 주워서 살림 비용으로 삼았다. 여관에서 쉬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 의지하여 살기도 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살다가 풀로 집을 얽어 머무니 누추한 곳이었다. 때로 양식이 떨어져 궁하게 살면서도 태연하였고 언행과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이 ‘시루 속에 먼지가 생기는 범사운(范史雲)이요, 솥 속에 물고기가 생기는 범래무(范萊蕪)라네’라고 노래하였다.” 항방에서 전해오는 조사의 전설을 보면 범염을 나이 차이가 수백 년이나 있는 공자(孔子)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 당시에 범염이 홀로 방 두 칸짜리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주의에 49과의 수수깡 다발을 묶어 만든 마당이 있었다. 공자가 양식이 다 떨어지자 제자 자로(子路)를 범염에게 보내어 양식을 꾸어오도록 하였다. 자로가 오니 범염이 물었다. “세상에 무엇이 많고 무엇이 적소?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괴로움이요?” 자로가 대답을 못하여 빈손으로 돌아갔다. 공자가 다시 안연(顏淵)을 보냈다. 안연이 대답하였다. “세상에는 사람은 많으나 군자는 적소. 빌릴 때는 기쁘나 갚을 때는 괴롭소.” 그러자 범염이 각각 1아령(鵝翎, 거위 깃)의 관에 쌀과 밀가루를 담아 보냈다. 안연이 가지고 가서 공자에게 건넸다. 관을 뒤집으니 쌀과 밀가루가 쏟아져 나와 산을 이루었다. 일이 끝난 후 공자가 범염을 찾아가 감사를 전하며 말했다. “빌린 쌀과 밀가루를 다 갚을 수 없겠습니다.” 범염이 말했다. “나중에 내 도제들에게 갚으시지요.” 공자가 답했다. “그럽시다! 나중에 내 도제들에게 명심하여 갚으라고 하리다. 문에 대련이 붙여있는 집은 모두 들어와서 구걸해도 되도록 하겠소이다.” 또 다른 전설은 말한다. 어느 날, 범염과 공자가 정오까지 바둑을 두다가 범염이 물었다. “세상에서 어느 것이 가장 귀중합니까?” 공자가 답했다. “당연히 금전이지요.” 범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세상에 사람이 살아있는 보물이지요. 당신은 돈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다 사지 못하잖소. 나는 돈이 없어도 내 도제들이 먹을 것을 준다오.” 공자는 머리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사념자’는 한문(韓門), 제문(齊門), 곽문(郭門) 3대 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궁가론(窮家論)』에는 관련 전설과 항방 규칙이 기록되어 있다고 전하지만 고찰하기 어렵다. 중일전쟁 기간에 역사학자 영맹원(榮孟源)이 영진현 대류(大柳)진 누자두(簍子頭)2) 유마자(柳麻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염상의 조사는 범염이라 하였고 염상은 공자의 도제에게 외상값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로 소주양조장, 기름공장, 염전이라 하였다. 50년대 이후 영맹원은 또 대류진의 누자두 낙대개자(雒大個子)를 찾아가 조사하였다. 그는 스스로 유문(柳門)이라 하면서 유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1982년 6월, 영진현 사무소 직원이 정장(程莊)에 가서 이미 63세가 된 쌍확(雙確)공사 양노원에 머물고 있던 정준복(程俊福)을 찾아가 조사하였다. 정준복은 16세 때에 창주(滄州)에서 궁가항에 가입하였고 곽문의 17대 손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사념자 3대 지파 이외에 범문, 유문 2문이 더 있었다. 곽문의 정준복은 창주에서 가입했다는 것을 보면 궁가항 조직은 산동에 가까운 영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하북성 창주도 활동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념자는 일반적으로 ‘화탑자(花搭子)’, ‘무탑자(武搭子)’, ‘규가(叫街)’ 3부류로 더 나눌 수 있다. 화탑자는 수래보3)로 구걸한다. 노래할 때 소뼈로 만든 악기를 가지고 노래하는데 살랍봉(撒拉棒)이라 한다. 죽판(竹板)을 치는 것은 살봉자(撒棒子)라 한다. 내나무 틀에 사발을 메달아 다니는 것은 살랍계(撒拉鷄)라 한다. 무탑자는 위협해 겁주는 방식으로 구걸하는 형태다. 손에 식칼〔채도(菜刀)〕를 들고 흉부를 치는 것, 살랍분(撒拉笨)이라 한다. 신발 바닥으로 흉부를 치는 것, 잡양자(砸瓤子)라 한다. 낫으로 자신의 앞이마나 정수리를 치면서 선혈이 낭자하게 하는 것, 자파두(刺破頭)라 한다. 규가는 절름발이, 소경, 팔다리 한 쪽이 없는 사람 등 신체장애자가 구걸하는 것을 말한다. 사찰 시장이나 번화한 도시 시장에서 구걸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범염(范冉, 112~185), 단(丹)이라고도 한다. 자는 사운(史雲)이다. 후한 진류(陳留) 외황(外黃) 사람이다. 남양(南陽)에서 번영(樊英)에게 수학했으며, 삼보(三輔)에서 몇 해 동안 마융(馬融)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환제(桓帝) 때에 내무장(萊蕪長)이 되었지만 어머니 상을 당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나중에 태위부(太尉府)로 불렀다. 시어사(侍御史)로 삼으려 하자 숨어살며 시장에서 점복(占卜)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가난했다. 나중에 당고(黨錮)를 당하여 궁핍하게 살면서도 의연했고 언어나 태도도 고치지 않았다. 당금(黨禁)이 풀리자 삼부(三府)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절선생(貞節先生)이다. 2) 개방(丐幇) 중에는 개방 방주라고 불리는 우두머리 이외에 작은 우두머리(소두목)이 있었다. 그런 소두목을 일반인은 ‘누자두(簍子頭)’라 불렀다 모든 개방에서 일정한 지위가 있었다. 3) 수래보(數來寶), 혹은 수백람(數白欖), 중국문화 특유의 곡예(曲藝)다. 예술표현 형식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혼자서 하거나 둘이서 함께 하기도 한다. 진행의 방식은 ‘낭독’ 방식이다. 낭독하는 내용은 일이 생기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나 현장에서 순간순간 반응하는 두 가지가 있다. 공연하는 사람은 매구마다 통하는 숫자, 박자, 유머를 적절히 섞는다. 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청중을 즐겁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공연한다. 간단히 말해 장타령으로, 두 개의 골판이나 참대쪽에다 방울을 달고 그것을 치면서 하는 타령이라 이해하면 쉽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나라 때에는 대체로 현(縣)을 중심으로 다스렸다. 각 지역의 거지를 관리하는 항방의 수령을 거지 두목이라는 뜻인 ‘개두(丐頭)’라 불렀다. 개두는 대부분 암흑가 흑사회(黑社會) 방회(幇會)의 핵심 인물이나 본바닥 건달, 불량배가 맡았다. 아문의 인가를 받았더라도 세력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패권을 다투는 중에 각종 수단으로 여럿을 굴복시킨 후 자리를 차지하는 이도 있었다. 개두는 이른바 ‘몽둥이(杆子)’를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사실은 구걸할 때 가지고 다니는 타구봉(打狗棒)의 추상적 숭배에 불과하지만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개방에 속한 사람은 몽둥이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간상인(杆上的)’이라 불렀다. 방주(幇主)의 ‘몽둥이’는 ‘상방보검’1)과 같아서 개방의 규율인 ‘방규(幇規)’를 위반한 거지를 징치하여 ‘때려죽여도 원망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가졌었다. 신임 방주는 먼저 조사(祖師)와 ‘몽둥이(杆子)’에게 제사를 지내어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명시하였다. 새로 개방에 가입한 거지는 반드시 방주에게 몽둥이를 증송해 관할에 복종을 표시하였다. 사실, 중국전통문화의 배경 속에는 ‘몽둥이(杆子)’는 타구봉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호한(好漢)〕들이 거의(擧義)하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사기·진시황기(秦始皇紀)』에 진섭(陳涉)의 봉기를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들어 깃발로 삼았다.”라고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나중에 농민봉기를 ‘장대를 높이 들어 일어났다.’라고 표현하였다. 명나라 때에 녹림이 뜻을 모아 봉기한 사건이나 단체를 ‘납간자(拉杆子)’2)라 한 것도 그러한 표현 습관의 연장이다. ‘간(竿)’이 ‘간(杆)’이 된 것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은 별칭이다. 청나라 때에 경사(京師)에서 활동하는 개방에는 황간자(黃杆子)와 남간자(藍杆子)로 나뉘어 있었다. 만청팔기(滿淸八旗)에서 유래하였다. 황간자는 전문적으로 종실 팔기 중의 거지를 관할한 고급 개방(丐幇)이었다. 황간자 구성원은 팔기 중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인물이나 시정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개두는 할 수 없이 그중 권위가 높거나 세력이 큰, 포악하고 고집이 센 왕공 버일러(貝勒)3)가 맡았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거지를 관할할 수 없었다. 황간자 개방의 거지는 평상시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지 않았다. 단오절, 중추절, 연말에 여러 점포를 돌아다니며 구걸하였다. 명절 때가 되면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노래 부르고 고판(鼓板)〔박자판〕을 두드리며 다녔다. 노래 부르는 거지는 손등을 위를 향하게 하고 판을 두드리는 거지는 고판을 평평하게 들고 다녔다. 보시하라는 의사표시였다. 점포 문 앞에 다다르면 상점 점원이 나와서 최소한 고액화폐 5매 이상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공손하게 고판 위에 올려놓았다. 거지가 다섯 구절을 노래하기 전에 보시하는 돈을 꺼내야만 했다. 그런 규칙을 어기는 점포가 있으면 거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이튿날에는 더 많은 사람이 들이닥쳤고 그 다음날에는 더 많은 거지가 모여들었다. 점포 문을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거지 무리는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못된 장난은 치지 않았지만 돈을 내지 않으면 영업할 방법이 없게 만들었다. 주변 사람과 상점 주인에게 황간자를 잘못 건드리면 화를 초래해서, 사서 고생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 주는 행동이었다. 그러면 상점 주인은 중재해줄 사람을 초청하여 화친을 청하고 수천이나 되는 돈을 건네야 했다. 적게 주면 끝이 없었다. 더 많은 돈을 방주에게 주고 조정하면 빠르고도 순조롭게 해결이 되었다. 경사(京師)의 남간자는 일반 거지를 관할하는 개두(丐頭)〔거지 우두머리〕였다. 새로 온 거지는 3일 이내에 구걸한 물건을 모두 개두에게 보내야 했다. ‘헌과(獻果)’라고 한다. 헌과가 많으면 많을수록 빛이 났다. 평상시에는 구걸해서 얻는 물건의 20%정도만 떼어 내어 개두에게 헌납하면 됐다. 규정에 따라 개두가 걷는 일반적인 수입이었다. 명절이나 설, 결혼식이 있거나 장례식이 있으면 상점 주인이나 상주는 정액 이외에 더 많은 돈을 개두에게 주었다. 개두는 지역을 관할하는 거지 우두머리였다. 밖에서 온 거지가 관내에서 구걸하려면 지역 개두에게 복종하여야 했다. 상점들도 거지의 소란을 피하려면 많은 돈을 개두에게 뇌물로 주고 표주박 형태의 종이를 얻어서 문에 붙여놓았다. ‘조문(罩門)’이라 한다. 어떤 곳에는 ‘모든 형제는 소란을 피우지 마라.’라는 문구를 써놓기도 하였다. ‘조문’이 붙어있으면 거지는 그곳은 건너뛰고 구걸하러 가지 않았다. 개두가 거둔 돈의 일부를 여러 거지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었다. 그 규칙을 위반하는 거지가 생기면 상점 주인은 개두에게 알려서 조정하고 징치하도록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조문’이 붙여진 상점에는 다시 가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없었다. 거지가 병이 나거나 죽으면 개두는 의무적으로 적당한 위로금을 주거나 조직에 있는 구성원이 분담하였다.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감당한다.’라는 ‘고락을 함께 하는’ ‘동고동락’의 의식 중에 실행된 것은, 패주 방식의 봉건 가장 제도였다. 개두는 내부의 권리와 지위를 상징하는 몽둥이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굵고 긴 담뱃대를 늘 사용하면서 거지 내부에서 자신의 신분을 명시하였다. 30년대 초에 여대생 두 명이 거지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상해(上海) 칠백 거지에 대한 사회 조사」를 발표하였다. 그중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청대에 이르러 거지에게 개두(丐頭)가 생겼다. 대체로 횡포하고 세력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졌다. 지방마다 지현(知縣)이 임명하여 파견했는데 구역을 나누어 관할하였다. 개두는 각 구역 내에 있는 거지를 관리하는 절대적인 권위가 주어졌다. 새로 온 거지는 먼저 개두가 있는 곳에 가서 그를 위하여 복무한다고 보고하여야 했다. 매일 수당을 지급하거나 호되게 맞아야 했다. 그가 견뎌내면 그 구역 내에서 구걸할 수 있었다. 개두가 거지가 길에서 구걸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까닭에 매월 상점에서 ‘개연(丐捐, 거지에게 주는 물품)’을 거두고 도장 찍힌 홍색 종이를 건네주어서 문에 붙이면 거지들은 다시는 그곳에 가서 구걸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지에게 돈을 나누어 줄 때에 개두는 자주 이자를 받았고 여전히 거지들을 내버려두어 길거리에서 구걸하게 하였다. 이렇듯 개두는 거지를 통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거지를 착취하였다. 그런 개두는 세습 되는 까닭에 그들의 권위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여전히 지방에서는 세력이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상해 개방의 대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상방보검(尚方寶劍), 지고무상의 황제를 상징한다. 고대 중국에 황제가 ‘상방(천자가 쓰는 기물을 맡았던 벼슬이나 기구)’에 수장한 검이다. 한(漢)대에는 ‘상방참마검(尚方斬馬劍)’, 명대에는 ‘상방검(尚方劍)’이라 하였다. 황제 어용 검으로 상방보검을 가진 대신은 형을 먼저 집행하고 나중에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처럼 황권의 권력을 대표하였다. 보검을 보면 천자를 만난 것처럼 하였다. 상급자가 특별히 허락한 권력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2)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다 : 참목위병(斬木爲兵) ; 장대를 높이 들어 깃발로 삼았다 ; 게간위기(揭竿爲旗) ; 녹림(綠林) : 화적이나 도둑의 소굴을 이르는 말로, 후한 말 왕광(王匡), 왕봉(王鳳) 등 망명자가 녹림산에 숨어 있다가 도둑이 되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 납간자(拉杆子) : 패거리를 모아 도당을 만들다, 비적이 되다. 3) 패륵(貝勒), 즉 ‘버일러’로, 본래 부족의 수장을 의미였고 구사(gusa, 旗)의 주인을 의미하였다. 청대에는 친왕(親王), 군왕(郡王) 아래, 버이서〔패자(貝子)〕 위에 있는 세습 작위가 되었다. 경우에 따라 특정 관서의 수장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다. 명나라 말기에는 한(汗)의 아들, 조카 등을 버일러로 지칭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황제 아래에 친왕과 군왕을 두면서 그다음 지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다에 주목한 특별한 그림 공필화 전통은 현대를 통해서만 제대로 보인다. 현실의 시대 정신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전통은 빨리 사멸(死滅)한다. 전통은 시간적 개념을 넘어서는 지금-시간의 공간에 대한 생동감 있는 적응일 것이다. 당대성이 없는 전통은 고리타분한 골동품과 같다. 전통은 신제품처럼 새롭고 세련되고 신선해야 한다. 지금 세대가 이해하는 미감이 요구되기도 한다. 역시 해석자로서 화가의 몫이 된다. 이미선은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여성 공필화가이다. 비단에 그려지는 까다로운 공필화 기법을 다루는 일은 ‘장인으로서의 작가’라는 개념에 더 어울린다. 그만큼 공필화는 시간과 공력(功力)을 들이는 싸움이기에 집중력과 정확도가 요구됨으로써 장인들의 태도를 쉽게 버릴 수가 없게 만든다. 이미선의 장인적 태도는 이미 중국 원나라 때 영락궁 삼청전에 그려진 대형 벽화<조원도(朝元圖)>의 모사를 통해 오롯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담력(膽力)을 키울 수 있었고 장인적 배포는 그때 몸에 밴 것이다. 2024년까지 이미선은 이중섭 미술관, 서울 제주갤러리, 평화센터 등 개인전과 초대전을 통틀어 모두 16회의 경력이 있는 중견 작가로써 성장했고, 지속적으로 한국 공필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작가라는 이름의 인생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노정(露呈)에 서 있는 것인 만큼, 중국화의 기교로써 한국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한묘중기(韓描中技)’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선은 고향(故鄕)이 제주도 서귀포여서 그에게 한국성은 곧 제주 로컬리티가 되며, 제주가 밑바탕이 깔린 한류를 지향하는 것이 그의 미학적인 특질이자 목표가 되고 있다. 제주 아일랜드, 치유의 정원 제주도, 바람마저 울고 가는 외로운 아일랜드. 구로시오 해류(黑潮流)에 스치는 섬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화가는 붉은 화산섬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름다운 자연 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고난의 연대를 지나 왔던 수많은 제주사람들의 숨비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들숨 날숨’의 그 파람 소리가 단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로만 알 뿐, 섬땅에 기록된 지문(指紋)이자 거친 숨결의 역사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 예술은 기억의 환기작용이기도 하여, 아름다움도 고통을 치유하는 하나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이미선은 지난 2022년 제주 서울 갤러리, ‘제주 아일랜드-치유의 정원’이라는 주제로 공필화의 전통을 제주의 바다를 대상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일상은 늘 자연에 가까이 있는데, 이미선은 그간 자연의 언저리에서 공존하는 일상의 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사물과 풍경들을 즐겨 다루면서 여전히 ‘치유의 정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주제로 제주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삶의 중심이 제주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선에게 ‘치유의 정원’은 관람자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살이에서 새롭게 보듬어야 할 대상들의 상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마음이 후련하거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치유의 정원’은 자아의 그늘에 새 빛을 쏘이고, 타자에게도 심리적 위안을 줌으로써 삶에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선의 그림은 매우 안정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 예술의 기능이 복잡한 혼돈 속 일상을 정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제주 아일랜드-치유의 정원’은 제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과 소재로 구성되었다. 한라산, 오름, 들판, 밭, 섬 속의 섬, 폭포, 바다 등의 정경 아래 소재들은 말, 나비, 밭, 돌고래, 꽃, 탑, 의자 등이 있다. 이미선이 전통 공필화의 기법을 현대적 해석으로 보여준 것은 오름이나 섬, 그리고 한라산의 묘사에서 보여준 면 분할 방식이다. 작은 모자이크처럼 색면을 분할하면서 쌓아가듯 형태를 붙이는 묘사 방식은 제주의 전통 민화에서 전해오는 것이기도 하다. 넓은 면을 채색하면서 작은 블럭과 같이 면분할 방식으로 다른 기법을 동시에 한 화면에 배치하는 것은 칠한다는 것보다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 화면에서 또 다른 공간 개념들로 다르게 보여주는 것은 마치 암석의 입자 구성과도 같이 구조화된 층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미선이 보여준 소재들 가운데 그가 오랫동안 몰두해온 대상은 바다에 등장하는 나비이다. 나비는 상징적으로 섬과 육지의 매개, 자연과 청정이미지로서 건강한 생태의 증거, 동물과 곤충이 영속적으로 공존할 자유, 몸과 정신의 교감 상태를 말하고 있는 상징이며, 영혼의 매개자로 인식되는 ‘나부(나비)의 신화적 초현실성이기도 하다. 또 나비는 섬 주위를 유영(遊泳)하는 남방 돌고래의 벗인 해녀처럼, 돌고래의 새로운 친구가 되기도 하고, 궁국적으로 제주의 생태적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이때 돌고래와 함께 등장하는 나비는 의인화로 길을 가는 인생의 동반자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 동행이 비록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이것을 보는 관람자들은 새로운 기분으로 우리 세계에 대한 신비로운 감정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는 나비는 무려 1000km를 날아 육지에 도달하는 제주 왕나비의 전설적인 행보를 먼길(長程)이라는 상징으로 그린 것이다. 부드러움은 억셈을 이길 수 있는데 연약한 날개로 거친 바다 위를 날아오르는 그것의 강렬한 에너지는 생명의 힘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생명체에게는 개체마다 희망적인 삶의 목표를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의지는 본능적 생명작용일 것이다. 이미선은 마치 나비가 된 듯이 육지로 나들이 한 것이 어느덧 16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난 2022년 육지 나들이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하는 일이어서 다른 때보다 의미가 새롭다고 했다. 제주도 자연과 바다가 육지 사람들의 치유의 정원이 된다는 의미가 되면서, 또 그간 해협을 건너지 못했던 여행이기도 했다. “나의 막힌 마음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나비와 돌고래의 평화로운 동행처럼 이 동행은 치유를 위한 평화의 길이며, 평화는 결국 인류에게 되돌려 줄 때 진정한 평온이 찾아올 것이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제주 아일랜드-치유의 정원’은 세계가 더욱 혼돈으로 치닫는 지금에 바다로 이어진 지구촌의 상처받은 세계시민을 향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가는 작가의 마음이 투사된 돌고래의 나아감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시간은 갈 것이고 사회는 쉬지않고 변화의 바람을 탈 것이다. 돌고래는 약자가 되었고, 멸종 위기로 치닫고 있다. 앞으로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예상 앞에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육상의 대지는 황폐해지고 물은 오염되고 있으며, 재난은 끊이질 않고 커져만 간다. 남은 바다는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과 제조물 폐기물에 환경이 병들고 있다. 문명을 창조했던 인간은 그것을 생산한 만큼 버려야 할 것도 총량이 같을 것이다. 기후 열대화는 전지구의 생태를 교란시키고, 식량난과 기후 재앙이 빈번해지고 있다. 인류가 갈길은 더 약한 생물들의 수난으로 이어져 미래가 어둡기만하다. 어쩌면 이제 예술은 우리의 미래인 암울한 시대를 그리야 할 지도 모른다. 돌고래가 길을 잃고 있다면 우리 인간들도 똑 같이 길을 잃고 있을 것이다. 공필화가 이미선은 50대 여성 중견작가로서 동덕여대 회화과, 중국 노신미술대에서 중국화 공필화를 공부하고 경인미술대전 우수상, 제주도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고 제주대 출강, 전업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다각도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통의 공필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정통 공필화가로서 제주의 자연을 치유의 정원이라는 개념으로 접근, 아름다운 생태적 자연을 화폭에 담는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공필화는 비단에 채색으로 그리는 중국화의 화법이다. 우아하고 화려한 것이 공필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중국과 인접한 우리나라는 채색화는 도화서 화원이나, 서민의 민화에 발달했고 문인화는 양반 사대부가 즐겨 그렸다. 제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섬으로, 공기가 맑고 숲의 향기가 감미로우며, 비단결 같은 바다가 푸르게 열려 있어서 그 곳에 가면 누구라도 지친 일상의 병을 자연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이 제주도가 치유의 정원이 되는 까닭이고, 그 그림이 마음의 위안이 되는 이유가 아닐까. 마왕퇴, 고개지에게서 비롯되는 공필화 공필화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기원은 동기창이 북종화라는 장르로 분류하기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공필화라는 말이 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공필호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매우 자세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회화 기법으로 외형묘사에 치중하여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세필(細筆)가 화려한 색채를 공들여 사용한다. 화원화가(畫員畫家)나 직업화가들이 그리는 그림으로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문인화와는 상대적 개념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공필화는 채색 중심의 화법인 북종화로 정립되면서 더욱 정교하고 섬세한 경치와 사물을 표현하는 중국화의 표현방법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도화서 화원들의 기록화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다. 중국 채색화의 전통은 이미 서한(西漢) 시대 마왕퇴 무덤에서 출토된 백화(帛畫)에서 보이는데 미왕퇴 벡화는 말 그대로 비단에 그려진 화려한 채색화이다. 천상세계의 풍경, 무덤주인의 승천, 장례식장의 모습, 지하세계의 풍경 등 T자형 명정(銘旌)에 4가지 장면으로 그려졌다(趙力·院晶京.2020). 또 중국 불화의 시조로 여기는 조불홍(趙弗興),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高愷之,313~406, 또는 348~409)를 공필화의 초기 화가로 유추할 수 있다. 특히 조불홍의 ‘제자의 제자’에 해당하는 고개지는 화가 이름이 정확히 전하는 작품들을 남겼는데 조식(曺植)과 견씨(甄氏) 부인의 사랑을 그린 <낙신부도(洛神賦圖)>, 여성에게 덕행을 권장하는 <여사잠도(女士箴圖)>와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 등 빼어난 채색 인물화가 그것이다. 고개지는 화가이자 미술이론가로서, 『화론(畵論)』, 『위지승류화찬(魏晉勝流畫贊)』,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 등을 저술하여 바깥 사물의 형상을 빌려 내면의 정신을 표현한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 그리고 생각을 옮겨서 오묘함을 얻는다는 ‘천상묘득(遷想妙得)’ 이라는 회화이론을 내놓아 중국 회화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공필화의 화가이자 문인화의 시조로도 추앙되고 있다. 이는 형사(形似:사실성)와 정신(情神:사의성)을 하나의 몸체로 보는 그의 관점 때문일 것이다. 고개지의 생각대로 “인물화는 정신의 오묘함을 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눈(阿堵)”에 있다고 하여, 한나라, 위나라의 고졸한 기풍에 반대하면서 정신을 전달하는 것을 중요시 여겨 눈동자를 그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任道斌, 2022).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거나 ‘눈의 정기(精氣)’라는 표현이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프랑스 조각가 로댕이 무엇보다도 눈의 표현을 최고로 중요시 여긴 시각과 일치한다. 공필화는 동양화의 두 갈래의 하나인 남종화에 대비되는 북종화 화풍의 양식에서 그 회화의 발전 과정을 말할 수가 있다.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명나라 말기의 문인이자 화가로서 그의 화론서 『화안(畵眼)』에는 남·북종화의 유래가 나온다. “선가(禪家)에 남종(南宗)과 북종(北宗) 두 종파가 있으니, 당나라 때 처음 나뉘어졌는데 그 사람 출신이 남북이라는 것은 아니다. 북종은 이사훈(李思訓) 부자(父子, 당대의 화가)의 착색산수(着色山水:彩色山水)에서 전해져 송나라 조간(趙幹:오대 남당의 화가)·조백구(趙伯駒:남송의 화가)·조백숙(趙伯驌:남송의 화가)이 되었고, 마원(馬遠:남송의 화가)·하규(夏珪:남송의 화가)에 이르렀다. 남종은 왕마힐(王摩詰:王維:당대의 화가)이 처음으로 선담(渲淡:淡彩)을 사용하여 구연(拘硏)의 법을 일변(一變:한가지 다른 기법을 확립)하였는데 그것이 전해져 장조(張璪,당대 말기의 화가)·형호(荊浩:오대의 화가)·관동(關同:오대의 화가)·동원(東源:오대의 화가)·거연(巨然:오대 북송초의 화가)·곽충서(오대 북송초의 화가)·미가의 부자(米家父子:아버지 米芾(북송대의 화가), 아들 米友仁(남송대의 화가)의 화법에 이르렀고, 이것이 육조(六祖:보리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이후 마구(馬駒)·운문(雲門)·임제(臨濟) 등의 자손이 성하고 북종이 쇠미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화론이란 하나의 양식적 표현 방식이자 창작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화론에는 시대의 상황과 시대정신의 주제와 형식이 따른다. 즉 화론은 그림의 방향, 의미, 화가의 자연관, 사회상, 아비투스 등 세계관을 표현하는 총체적 방식이다. 그래서 화론은 그 시작이 있으나 시대마다 계승되더라도 변형되고 해석이 달라진다. 어제 사람의 뜻이 오늘 사람의 의미가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식이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은 화론이 어떻게 당대에 적응하고 진보하느냐에 따라 소멸되거나 확장되기도 한다. 이미선과 공필화와의 만남 중국 심양의 노신미술대학 쑨언룽 교수는 1996년 당시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미선을 “공필(工筆) 인물과 화조화 방면에 재질(才質)이 뛰어났다‘라고 회고하면서 중국화를 그리는데 있어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당부하였다. 첫째 전통이고, 둘째 삶의 체험이고, 셋째가 작가의 수양(修養)이 그것이다. 창작을 하는 화가에게 있어 지녀야할 이 세 가지 요소는 비단 중국화만의 국한 된 것이 아닐 것이다. 전통은 저마다 자신의 속한 나라의 문화적인 패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고, 삶의 체험은 실존하는 사회적 장소에서의 자신의 삶을 말하며, 수양은 작가라면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최고의 테크닉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요소 모두가 중첩되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이라는 공간의 관계틀 속에서 그 문화적 공감대를 같이해온 지 무척 오래됐고, 현재에도 여전히 이웃의 문화적인 소통관계가 유지되는 정서적 공동체(emotional community)로 생각되고 있다. 이미 두 나라는 대륙과 한반도라는 지정학적인 관계로 서로 간 곡절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역사를 같이 이어오면서 우리의 의식에서는 중국을 멀고도 가까운 나라로 여기고 있다. 이미선이 낯설음을 마다하고 중국행을 택한 것은 오로지 새로운 그림을 찾아 나선 때문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그림이란 단연 중국화였고 중국화를 바르게 알아야 동양의 정신과 한국화의 문화적인 배경도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통을 알아야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나름의 의미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중국 채색화의 기법인 공필화인데 공필화(工筆畵)는 결이 고운 비단에 매우 정교하게 그리는 중국 채색화의 한 분야로 그 품격이 높으면서도 우아한 것이 특징이다. 앞서 말했지만 중국미술사에서 백화(帛畵), 즉 비단 그림은 이미 2500년 전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 나라 때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서한(西漢), 동진(東晉)에 이르러 고개지(顧慨之)의 비단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어 공필화의 깊은 연원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사잠도(女史箴圖〉는 군주에게 충성하는 궁중 여인들의 덕행을 널리 알리는 세필(細筆)의 그림으로, 비단 그림이 고고하고 기품이 있는 궁중화의 중요한 분야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A.D 6세기 서위시대 돈황 막고굴 벽화 <오백강도성불도>, 당나라 장희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45~684)의 묘도 벽화 <객사도>, 송나라 염입본(閻立本. ?~673)의 <보련도(步련輦圖)>,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 중당시기 장훤(張萱, 712~781)의 <도련도(搗練圖)>, 원대(元代)의 전진교(全眞敎)의 중심지였던 영락궁 삼청전(三淸殿)의 <조원도(朝元圖)> 등의 벽화가 공필화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회화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원도> 중의 신선 행렬은 여덟 명의 주요 신선을 중심으로 각종 인물 280명을 그렸다. 다양한 인물의 형상은 그 규모가 매우 크게 그려졌으며, 금분으로 장식하여 원나라 벽화의 웅장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삼청전의 벽화는 화공인 마군상(馬君祥) 등이 그렸다고 한다. 특히 이미선은 이 영락궁의 벽화에 감화되어 공필화를 수련하고자 2m 이상 크기의 도교 신선 그림을 실제로 세 점을 1년 가까이 모사하여, 화려한 채색의 깊이와 선묘의 유려함을 익힐 수 있었다. 미술의 기본기는 누가 뭐래도 손의 자유로운 표현에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머리로만 그리는 개념적인 작업도 성행하지만, 그 바탕에는 형태와 색채, 선묘를 통해 내면적 정신이 살아나야 하는 조형 정신이 녹아있어야 한다. 대상없는 생각만으로 새로움을 찾을 수 없고, 새로움과 상상력은 삶의 경험과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유추해서 만들어진 변형된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서 다시 재발견되는 것이다. 창작은 넓게 보면 재발견이며 해석이고, 재구성이다. 어떤 때는 은유와 반전과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현재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을 보면 이른 시기에 출현한 중국 개방(丐幇) 형태를 기술한 문헌기록은 송원(宋元) 화본(話本)소설 중 『김옥노봉타박정랑(金玉奴棒打薄情郞)』〔김옥노가 박정한 낭군을 몽둥이로 때리다〕에 나타난 ‘단두(團頭)’다. 단체 우두머리라는 뜻인 ‘단두’는 개방의 방주(幇主)다. 이야기는 송대 항주에 7대까지 세습한, 도시 전체의 거지를 통할하는 단두 김노대(金老大)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거지가 구걸해 온 음식과 돈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거지에게 고리대나 일숫돈을 놓아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착취까지 일삼았다. 명나라 때 풍몽룡(馮夢龍)이 편찬한 『전상고금소설(全像古今小說)』 제27권 『김옥노봉타박정 랑』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때는 송나라 소흥(紹興)1) 연간에 임안(臨安)은 비록 건도(建都) 지역이요 부유한 고향이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거지가 적지 않았다. 거지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자를 ‘단두’라 부르며 거지 무리를 관리하였다. 거지 무리가 구걸해 오면 단두는 ‘일두전’2)을 받았다. 비나 눈이 올 때면 단두는 멀건 죽을 쒀서 구걸할 곳이 없는 거지에게 먹였다. 낡은 옷도 단두가 관리하였다. 그래서 거지들은 자신을 낮추어 노예처럼 단두에게 복종하고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단두는 창기와 놀지도 않았고 도박도 하지 않았다. 의연하게 모두를 위하여 일했다. 단두는 관례적으로 구걸한 물건을 받아내어 거지에게 고리로 착취하였다. 단두는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며 한시도 직업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단지 한 가지, ‘단두’에 대한 시중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여 농지를 마련하고 몇 대에 걸쳐 뜻을 얻었더라도, 결국은 거지 두목 출신이었다. 일반 백성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존중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서만 으스대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양천(良賤)’ 두 글자로만 헤아린다면 창녀, 배우, 관아의 하인, 졸개 4부류를 비천하다 했지만 거지는 그 축에는 들지 않았다. 거지는 돈이 없을 뿐 몸은 헌데가 없지 않던가. 예를 들어 춘추시기에 오자서(伍子胥)는 환란을 피하는 와중에 오시(吳市)에서 퉁소를 불며 걸식하였고 당나라 때에 정원화(鄭元和)는 가랑(歌郎)3)이 되어 『연화락(蓮花落)』을 부르다가 나중에 뜻을 이루어 비단 이불을 덮지 않았던가. 모두 능력이 특출하였던 거지였다. 그렇기에 거지는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기는 했지만 창녀, 배우, 하인, 졸개의 비천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 지금부터는 항주에 있는 단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노대(老大)다. 조상에서 그까지 7대에 걸쳐 단두를 지내어, 완전한 가문을 이루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밭에서 농사지으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었다. 곡물 창고에 곡식이 가득했고 주머니에는 여윳돈이 많아 아랫사람들에게 변돈을 놓았다. 갑부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부자 축에는 들었다. 김노대는 기개가 있어 단두 자리를 족인(族人) 김라자(金癩子)에게 넘겨주었다. 자신은 이미 모든 걸 향유했다며 거지에게 달라붙지 않았다. 그렇다하더라도 동향사람들은 습관대로 그를 단두라 불렀다. 김노대는 50여 세로 아내를 여의고 아들 없이 옥노(玉奴)라는 외동딸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김옥노가 박정한 낭군을 때린’ 민간 전설이 생겨났다. 줄거리는 이렇다. 김노대는 딸이 재능과 용모가 뛰어난 것을 이용하여 사인(士人)에게 시집보낼 생각을 했다. 중매를 거쳐 가난한 수재 막계(莫稽)가 데릴사위로 김 씨 집안에 들어갔다. 돈 한 푼도 쓰지 않고 사람과 재물 모두 얻은 셈이었다. 김옥노의 권유와 지지아래 막계는 급제 후 무위군(無爲軍) 사호(司戶) 관직을 받았다. 급제는 하였으나 이웃의 어린아이가 손가락질하며 “김 단두의 사위가 관원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막계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오늘과 같은 부귀를 누릴 수 있다면 왕후 귀척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지 못할 게 뭬 있겠는가. 단두를 장인으로 모셔야 한다면 평생 치욕이지 않은가! 자녀를 낳아 키워도 역시 단두의 외손이니 이야깃거리로 전해지지 않겠는가. 이제 단호히 끊지 않으면 안 되겠다. 재삼재사 숙고하지 않으면 결국은 후회하게 될 게다.” 이렇게 나쁜 마음을 먹고 밤중에 부임하는 배에서 처를 밀어 강에 빠뜨려 버렸다. 다른 좋은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강물에 빠진 김옥노는 죽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회서(淮西) 전운사(轉運使) 허덕후(許德厚)의 양녀로 들어갔다. 그런 후에 막계를 다시 데릴사위로 불러들였다. 동방화촉을 밝히는 밤에 막계는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욕을 먹었다. 그런 후에는? 둘은 다시 사이좋게 되었다. 단두 김노대를 임지로 데리고 가 죽을 때까지 봉양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은 남송 고종(高宗) 조구(趙構)의 두 번째 연호다. 32년가량 사용하였다. 고종(高宗)이 양위하고 난 후에 효종(孝宗)이 융흥(隆興)으로 개원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건염(建炎) 5년 1월 1일(1131년 1월 31일)에 연호를 소흥(紹興)으로 개원하였다. 소흥(紹興) 32년 11월 16일(1162년 12월 23일)에 연호를 융흥(隆興)으로 정하였다. 2)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내는 돈, 옛날에 거지는 매일 구걸해 온 소득에서 일정 분분을 상례적으로 거지 우두머리에게 납부하였다. 매일매일 납부했기에 ‘일두전(日頭錢)’이라 불렀다. 3) 옛날 장례식 때 만가(挽歌)를 부르는 사람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