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호꼼만 이십서게" (조금만 기다리세요) “Please stay for a whil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사납고 거친 거지를 만나면 첫 번째 하류 인물 부류와 비교해보면 된다. 마음 씀씀이를 보자.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강도나 도둑이 되어 깊은 밤에 남의 집에 뛰어든다면 집안 재물을 말끔히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 생명조차도 그들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 어찌 돈 1·2 문, 밥 한두 사발에 그치겠는가. 어찌 그들에게 은덕을 베풀지 않고 핍박해 강도가 되게 하는가. 사람마다 이런 마음으로 그런 부류를 관대하게 대우하여야 관계가 친밀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귀를 누릴 수 있으며, 후세에 거지가 되는 자손이 없게 되고 창녀와 배우들이 점점 적어지며 도적과 강도가 점차 희소해진다. ……하물며 예부터 거지 중에서 충신 의사가 많이 나왔고 문인 묵객이 그중에 숨어있었으니, 대충대충 봐서는 안 될 일이다.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후 혁명의 초기에 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 충신 목양국〔牧羊國, 소무(蘇武)〕, 의사 채미산〔采薇山,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 되고 문인 묵객이 갱유(坑儒)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았는가. 무릇 머무를 집이 없고 돌아갈 나라가 없는 사람은 이렇게 빌붙어 산다. 세상의 도의에 마음 있는 사람은 마땅히 초현납사(招賢納士)의 예로 밥 한 끼에 세 번 토하고1) 감던 머리 세 번이나 꽁꽁 싸매어 나아가2) 초청하여 높여야지, 어떻게 버리는 차나 남은 밥으로 그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이어의 거지에 대한 측은지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여러 연고로 거지로 전락한 불운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있다. 이어가 나눈 여러 가지 거지의 부류는 본질적으로 아직 타락하거나 변질되지 않은, 가난에서 비롯된 인물들이다. 그러기에 “가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면 되고 거지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하면 된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단도직입적으로 예부터 있어온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라는 전통 가치 관념을 부정하고 있다.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는 명나라 무종(武宗) 주후조(朱厚照)가 황제 자리에 앉은 정덕(正德) 연간(1506~1521)에 재물을 하찮게 여기고 의리를 중하게 여겼던 산동 명문세가의 자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재물을 내어놓아 의로운 일을 하다가 불공정한 일로 여러 차례 소송하면서 천금의 재산을 소진한 후, 지팡이 하나와 그릇 하나만을 가지고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로 전락했음에도 품성이 변하지 않았다. 조상과 친척에게 욕될까봐 이름을 숨기고 호를 ‘궁불파(窮不怕, 가난해도 두렵지 않다)’라 하였다. 그는 걸식으로 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항상 “도의를 행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도를 중얼거렸다.” “거지가 된 사람조차 그럴진대 어찌 사람이 거지보다 못할 수 있는가?” 무슨 말인가? 부르다〔규환(叫喚)〕할 때의 ‘규(叫)’, 탁발하다 뜻인 모화(募化)의 ‘화(化)’인 거지〔규화(叫化)〕를 배움을 권하다 뜻인 권교(勸敎)의 ‘교(敎)’, 변화하다의 ‘화(化)’〔거지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교화(敎化)’다〕가 되게 했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경계 하게 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실로 꽤 높은 식견을 가진 인의덕행을 행하는 사람이 거지 즉 규화자(叫化子), 규화(叫化), 화자(化子), 교자(敎化)가 됐다는 말이다. 오래지 않아 ‘궁불파’는 북경, 하남, 산동, 산서 등지에서 협골(俠骨)로 유명한 거지, 명사가 되었다. 어느 날, 고양(高陽)성 거리에서 걸식할 때 ‘궁불파’는 어느 향신(鄕紳)의 집 문 앞에서 절하면서 “천관(天官) 어르신 내 딸 돌려주세요.”라며 애걸하고 있는 중년부인을 보았다. 며칠 동안 계속 그렇게 하자 ‘궁불파’는 측은지심이 생겨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부인은 묻는 사람이 거지인 것을 보고 퉤! 침을 뱉고는 떠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궁불파’는 집까지 쫓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전후는 이랬다. 그 부인에게는 용모가 수려한 16살 난 딸이 있었다. 3년 전에 남편 주(周) 씨가 세상을 떴다. 어머니와 딸은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갔다. 생각지도 않게 지방 불량배가 예쁜 딸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딸을 자신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며 거짓말하면서 자기가 데리고 가겠다고 집에 찾아왔다. 어머니가 반대하자 고발하겠다며 위협하였다. 그때 그 지방 향신이 집사를 보내 말했다. “우리 집 어르신이, 지역 깡패가 당신 딸을 거저 데려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는 옳지 않다고 여겨, 나에게 나서서 해결하라고 했다네. 당신이 거짓으로 매도계약을 맺어 우리 집 어르신에게 팔았다고 말하면, 그가 자연스레 망상을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그가 당신을 찾아오면 우리 어르신이 계약서를 현청에 보내어 그 개 같은 놈의 인대를 잘라버릴 거요. 일이 마무리 되고 나서 1년 반 정도 지나면 당신에게 딸을 돌려줄 거요. 그때 좋은 짝을 찾아 결혼시키면 되지 않겠소.” 부인은 호의를 철석같이 믿었다. 몸을 판다는 계약서에 30량 은자의 허위 가격을 쓰고는 딸을 향신의 집으로 보내면서 여러 번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지금, 시비는 가라앉았고 딸도 다 자랐다. 부인이 딸을 데리고 와 사위를 맞이하고 여생을 보내려 했다. 생각지도 않게 향신이 불량한 마음이 생겨, 딸을 첩으로 삼으려 했다. 부인은 그제야 자신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따르려 했다. 그런데 그 향신의 부인은 고양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질투가 심한 여인이었다. 갖은 방법과 수단으로 부인의 딸을 괴롭혔다. 부인이 딸을 데려가지 않으면 매일 가죽 회초리로 100대를 때린다는 규정을 정하여 핍박하였다. 부인이 데려 오려하자 이번에는 향신이 놓아주지 않았다. 계약서상에 허위로 기록된 30량 은자의 원금과 이자를 지불해야 가능하다고 억지 부렸다. 거금을 모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매일 문 앞에서 절을 하면서 간청하였다. 향신이 자비심을 내서 딸을 돌려보내주도록 애걸할 심산이었다. 어제 딸이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지금까지 만 대 이상의 회초리를 맞아 온몸이 짙은 심홍색으로 변했다고, 멀쩡한 데가 한 곳도 없다고 하였다.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부인은 하소연할 데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일반삼토포(一飯三吐哺)’, 주공(周公)이 어진 사람을 구함에 있어 한 끼의 식사에 세 번이나 입에 넣은 밥을 도로 뱉고 일어나 객(客)을 맞아들였다 한다.(『사기(史記)·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2) ‘일목삼악발(一沐三握髮)’, 한 번 머리를 감는 동안에 세 번이나 이를 중지하고 머리를 묶어 쥔 채로 찾아온 사람을 맞이한다. ‘어진 사람을 정성껏 대우함’을 이르는 말이다. 토포악발(吐哺握發)이라고도 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어디서 옵데가?" (어디서 오셨습니까?) “Where are you from?”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해 되묻기 우리는 생각을 하며 산다. 어느 오름이라고 이름을 들으면, 벌써 그곳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갈 것인가? 하고 아는 만큼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그 곳이 이름만 들어 알 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면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장소가 외국이면 그곳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우리는 어디? 어떤 곳인지 몰라 매우 당황하게 된다.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분명 알지 못하는 것에 늘 긴장한다. 우리 문명은 지금껏 알지 못하는 것들을 소통시켜 온 것에 다름 아니다. 이름이라도 있으면 유추하거나 짐작을 할 수 있을 텐데, 또 그 이름 자체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찾으려고 할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름은 의미를 쉽게 구분하거나 찾으려는 행위의 결과다. 어떤 이름인 경우 생긴 모양이나 혹은 어떤 사람의 사건과 관련이 있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는 이유가 있을 때 명명된다. 결국 이름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서로 알 수 있도록 공동 사용하기 위한 소통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이름에는 나름대로 스스로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우리는 한글에 많은 한자를 병행해야만 이해하는 글이 많다. 이는 한글도 한자에게 많은 힘을 빌리고 있다는 말이다. 점심은 ‘點心’이라고 하여 낮 시간에 먹는 끼니를 말한다. 제주어로 알고 있는 ‘예점’이라는 말은 아마도 “짬을 내다”는 의미로 豫點(예점)일 것이다. “예점 갔다오켜(간편하게 다녀올게).” 하나만 더 말한다면 정신없게끔 부산떨면서 시끄러운 모습을 일러 ‘왕왕작작’이라고 한다. 한자어 조합으로 아마도 ‘往往灼灼’ 쯤 되겠다. “뜸하다가 갑자기 요란스런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헤르만 헷세의 ‘나는 별이다’라는 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시에는 대상에 빗대 우리 인간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철학이 있다. 나는 별이다 헤르만 헷세 나는 먼 지평선에 홀로 떠 있는 별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펴보며, 세상을 경멸하다가 스스로의 격정에 못 이겨 불타버리고 만다. 나는 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다. 묵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바다. 그러면서 새로운 죄를 쌓아가는 바다이다. 나는 당신들의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자존심 하나로 자랐고, 자존심 때문에 속았다. 나는 국토가 없는 왕이다. 나는 침묵하는 정열이다. 살림도구 없는 집에서, 살육이 없는 전쟁에서, 나의 타고난 기력이 쇠약해진다. 자신을 분명히 표현하는 언어의 본질 미술은 형상적 인식의 열매로서 오랜 연원을 갖는 예술의 한 유형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가 자신이 경험에서 얻은 자기 인식의 형상을 가지고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인 것이다. 거기에는 회화, 조각, 공예, 디자인, 사진, 영상, 설치미술 등 시대마다 만들어진 미술 언어가 나타난다. 미술은 예술가의 지성적인 결과이며, 그 표현에는 세계관에 바탕을 둔 미학, 이념을 머금은 시대정신 위에서 상징으로 반짝인다. 예술의 유형을 사람들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로 구분한다. 이 분류에는 고귀한 왕실 사대부의 귀족예술과 속되고 하찮은 민중예술의 차별적 시선이 들어있다. 물론 둘 다 향유층이 다르겠지만 한 지역, 한 사회, 한 시대, 혹은 해당 사회 전체의 문화상징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민족성향을 보여주는 것은 민중의 미의식일 것이다. 물론 이견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은 속성이 언제나 반체제적이며, 시대 전복적이어서 기술 진보와 더불어 사람들의 인식과 목적도 달라진다. 요즘에는 예술의 개념도 모호하게 돼 전통과 현대, 시간과 공간, 인간과 물질의 관계 개념이 뒤섞이며 혼성적이고, 주체가 분명하지 않은 문화 변동과정을 겪고 있다. 시대의 문화변동은 사실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있어왔다. 지금의 시대에는 빠르게 우리의 예술이 인간의 기억과 욕망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자유분방하게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검열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는지 명작이 없는 시대가 돼버렸다. 이 경우 예술의 비극일 수밖에 없다. 작품은 한 시대의 얼굴을 담고 있다. 시대가 지나면서 양식적인 스타일을 갖게 되고 어떤 패턴을 보이게 된다. 이 스타일이 도상(圖像) 언어의 의미체계가 어떤 형식을 갖추면서 전승되고 현재에 해석되거나 소통·소비되는 것을 우리는 전통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의 양식, 즉 정리된 패턴을 의미체계의 계보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전 유물로 볼 때 15세기경 육지의 계회도(契會圖) 스타일이 18세기 <탐라순력도>와 19세기 <영주십경도>, <제주문자도>로 이어지는 것이 그렇다. 우리는 잠녀라는 기원의 언어가 시대의 권력관계 스펙트럼에 의해서 해녀라는 담론으로 바뀌는 과정을 알고 있다. 언어는 사물을 분류하거나 행위를 지시함으로써 만들어지는데 이 언어야말로 인간관계의 정치적 기호가 되고, 계급의 표정을 담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를 바꾸는 것은 개인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힘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능하게 된다. 언어에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사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개인 표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현실이나 마음을 사실적으로 담으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잠녀와 해녀 잠녀(潛女)라는 말에는 '潛(잠길 잠)‘ 물에 잠기는 의미가 있다. '자맥질 하는 여자'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매우 특수한 일인 것이다. 사실적으로도 ‘물속으로 들어가서 노동하는 여자’를 말하는데 우리는 이를 ‘물질’이라고 한다. 물질은 ‘물일’의 발음상 변음이 된 것이지만 사실은 천한 행위를 나타내는 신분 비하된 의미를 띠고 있다. 잠녀라는 표현은 왕족 유배인 이건(李健,1614~1662)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1626)에 처음 나오는데 ‘미역 캐는 잠녀와 전복 따는 잠녀’가 있다. 그리고 허목(許穆, 1595~1682)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해처(海妻)’라는 말이 있는데 포녀(浦女), 어부(漁夫)의 처에 대한 육지식 표현이다. 잠녀라는 말의 계보를 보면, 1694년 숙종 때 제주목사로 왔던 이익태(李益泰, 1633~1704)가 지은 『지영록(知瀛錄)』에 점점 포작인이 줄어들자 미역 따는 잠녀를 전복 따는 잠녀로 대체하는 기록이 있으며,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1703년에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병담범주(屛潭泛舟)」에 ‘潛女’라는 표기와 함께 다섯 명의 잠녀가 물질하는 광경을 그림으로써 최초의 제주 풍속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형상의 「제주민폐장(濟州民弊狀)」에 ‘이 섬의 풍속은 남자가 전복을 채취하지 않고, 그 책임이 잠녀에게 있을 뿐입니다’라면서, 포작인의 역할이 잠녀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夫)은 포작(鮑作)에 곁꾼(船格) 노릇을 하고 있고, 부인(妻)은 잠녀로서 1년에 바쳐야 할 미역과 전복 때문에 그 고역(苦役)이 말테우리보다 10배나 됩니다”라고 하여 이형상은 잠녀의 비참한 처지를 지적하고 있다. 유배인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 제주에 두 번 왔었다. 첫 번째는 아버지 김진구(金鎭龜)의 유배살이를 도우러 1689~1694년에 동천(東泉) 물가 적거지에서 체류했다. 두 번째는 자신마저 유배인 신분이 돼 1706~1711년까지 산지(山池)에 적거했다. 김춘택의 『북헌집(北軒集)』(1760)은 대부분 두 번째 제주 유배인 신분으로 왔던 6년 동안 쓰인 글들이다. 그가 「잠녀설(潛女說)」에서 '어떤 잠녀(潛女)라는 사람이 물에 잠겨 미역을 채취하거나 혹은 전복을 따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라고 ‘잠녀’라는 용어가 나온다. 제주 유배인 정헌(貞軒) 조정철(趙貞喆, 1751~1831)은 정조(正祖) 시해(弑害) 사건에 연루돼 1777~1782년 2월까지 제주목과 정의현에서 유배 생활 중 지은 시문집 『정헌영해처감록(貞軒瀛海處坎錄)』 「탐라잡영(耽羅雜詠)」 기(其) 십칠(十七) 주(註)에, '잠녀(潛女)는 천(布)으로 작은 바지를 만들어서 음부(陰部)를 가리는데 제주어(俗謂)로 소중의(小中衣)라고 한다. 알몸(赤身)으로 바다 속을 들고 난다'라고 했다. 이렇듯 잠녀는 물에서 잠수물질을 하는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해녀라는 말은 문헌에서 언제부터 등장하는 것일까? 해녀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숙종 40년(1714) 8월 '왜관(倭館) 관문 앞에 매일 아침 촌가의 부녀자들과 해녀(海女)들은 채소와 생선을 가지고 와서 시장에서 서로 사고팔고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해녀라는 말은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1791년에 쓴 『존재전서(存齋全書)』 「금당도선유기(金塘島船遊記)」에 ‘해녀채복(海女採鰒)’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후 고종 때의 기록들과 20세기 초 일본인 지리학자 마수다 이치지(桀田一二)가 '제주 해녀(海女)의 출가지로 가장 오래된 곳은 도쿄부(東京府) 미야케지마(三宅島)로 메이지 36년(1903) 김녕의 사공 김병선(金丙先) 씨가 해녀 여러 명을 데리고 출가한 것이 시초'라고 했다. 그 무렵 일본 신문에서는 제주 ‘해녀’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 테면 1906년 신호신보(神戶新報), 1908년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의 보도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대거 해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이 있는데 잠녀라는 용어는 주로 유배인이나 제주 목사, 제주 어사들에 의해서 현지에서 불렸던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해녀라는 용어는 왜관(倭館) 가까이에 있는 어부의 아내를 부르거나 남해안 섬에서 사는 포녀들을 부르고 있고 빈도수도 매우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가 되면 해녀라는 말은 일본인 학자, 기자, 문필가, 조선의 문인들까지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가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인다. 해녀라는 말이 대세가 되면서 일제강점기, 해방후 제주 미술인들의 시각도 당연하게 잠녀라는 말보다는 해녀라는 말에 익숙하게 되었다. 1971년 제주도에서 관광을 위해서 잠녀라는 어감이 ‘잡녀’처럼 상스럽게 들린다는 평가로 인해 일시에 ‘해녀’라는 용어를 공식 채택하면서 언어 교란이 일어난 것이다. 만약 세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제주 잠녀가 일본 해녀(あま)와 함께 제주해녀로 세계문화유산에 공동 등재되면서 일제식민지였던 한국이 그 영향으로 해녀가 있는 것으로 세계인들이 착각하게 된다. 참으로 지식인이란 누구이고, 참된 학자가 과연 있는가라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 없다. 사실 해녀 채택의 여파가 우리의 토착어인 잠녀(ᄌᆞᆷ녜, ᄌᆞᆷ녀)라는 용어를 사어화(死語化)시키면서 생활 속에서만 풍전등화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잠녀들이 숫자가 빨리 줄어들면서 머지않아 잠녀와 함께 용어마져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운명에 있다. 하기야 유기체는 영원한 것이 없고 그들이 만든 문화 또한 영속되지 않는다. 미술작품에서 잠녀와 해녀 미술은 때로는 나약하고 때로는 힘차다. 그 기운은 사상과 의지의 힘에 따라 결정된다. 엽해(獵海, 바릇잡이) 그림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화는 1703년 김남길의 <잠녀(潛女)>이다. 이 그림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병담범주(屛潭泛舟)」의 하단 오른쪽에 작게 그려졌다. 각각 동작이 다른 다섯명의 잠녀들은 물소중이를 입고 한 손에 빗창을 들고, 테왁을 의지하여 이동하거나 잠수하며 물질하는 모습을 구륵담채(鉤勒淡彩)로 그려 321년 전 제주 물질 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서양화 화가였던 김인지(金仁志,1907~1967)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이하 鮮展)에서 세 번을 입선했다. 1935년 제14회에 처음 입선함으로써 전라도에서 선전 입선 수상자로는 처음이었다. 1938년 제17회 선전 세 번째 입선작이 바로 <해녀>였다. 1948년 해방공간에 잠녀들을 그린 작품으로는 조병덕(趙炳悳)의 <해녀>라는 작품이 있는데 물소중이를 입고 불턱에 모여 앉아서 불을 쬐고 있는 잠녀들을 그리고 있다. 조영호(趙英豪, 1927~1989)는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하여 해방이 되자 귀도(歸島) 후 여러 번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전해 오는 조영호의 잠녀 소재 작품으로는 낭만주의 화풍으로 여인들의 공동물질 후 쉬고 있는 모습을 그린 <해녀들의 휴식>이 있다. 그리고 장리석(1916~2019)의 원시주의적인 시선은 잠녀들을 야성미 넘치는 여인들로 탄생시켰는데 대표작으로 1957년 유화로 그린 <해조음(海潮音)>이 그것이다. 고영만(1940~)의 물질을 마치고 온 잠녀들이 불턱에서 그날의 성과가 어땠는가 서로 말하는 장면을 그린 <하영 조물안디야(많이 잡을 수 있었느냐)>, 김택화(1940~2006)의 ᄉᆞ살(射殺)을 가진 <두 해녀>는 마치 비장한 전사처럼 서 있다. 청년화가 김산의 사회적 리얼리즘 시선으로 다가선 서촌 잠녀를 그린 <잠녀 김난춘>은 마치 한 화면에 음과 양의 가족사를 깊숙히 담고 있다. 야외 벽화의 운명이 단명이듯이 지금은 철거돼버렸지만, 1995년 제주항 여객선 터미널 1호 벽에 그려진 대형 벽화 <잠수도>는 리얼리즘을 구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스케일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기획에 미술평론가 김유정이, 주필에 박경훈이 맡아 MBC 본사에서 후원하고 탐라미술인협의회 소속 회원들로 구성된 벽화팀 10명, 특별참여에 강요배가 얼굴 그리는 것에 참여했다. 잠녀를 중앙에 배치하여 전방위적으로 잠녀들의 생활 모습을 그렸는데 주대종소(主大從小)의 배치법에 따라 마치 연환화적인 방식으로 잠녀들의 애환이 깃든 삶의 노래를 보여주는 벽화였다. 한국화가 강동언의 국전 특선작 <해녀의 꿈>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물질을 준비하는 제주 갯ᄀᆞᆺ의 잠녀를 그리고 있다. 공공미술 조각으로는 1982년 문기선, 송종원이 공동제작한 화강석 조각 <잠녀 군상>이 있는데 세 명의 잠녀들이 마치 물질의 전개과정을 보여주듯이 세 방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춘배의 <ᄌᆞᆷ녀>는 희망을 품고 바다로 나가는 젊고 발랄한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젊은 미술가들이 채색조각, 철망조각, 브론즈 조각의 형식들로 제주 잠녀를 상징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조형미술은 내용과 형식, 재료에 따라 느낌, 분위기, 표현력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미학에 대한 관점 또한 미술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선명하게 말해줄 수 있으며, 표현기법은 어떤 의미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의 작품은 한 시대의 상징이며, 예술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방법론이라는 사실에서 총체적인 사회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시대정신인 것이다. 대개 육지 출신 화가들이나 요즘 세대들의 작품에는 <해녀>라는 제목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고, 제주 출신으로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는 작가들은 <잠녀>, <ᄌᆞᆷ녀>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MZ세대인 경우 해학적이고, 경쾌한 생활리듬으로 다가서는 <해녀>작품들이 많은 데 경험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표현방법 또한 바다 물질하는 여성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대원수 팽덕회, 소년시기 걸식했던 옛 일을 잊지 않았다 역사는 결국 역사다. 허식으로 덮어씌울 필요가 없다. 이 점은 현대중국의 혁명가, 군사전문가 팽덕회(彭德懷, 1898~1974)의 공명정대했던 성격과 비교하면 사실과 평가 사이에 천양지차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원훈, 탁월한 영도자라 평가받는 팽덕회는 자신이 젊었을 때 구걸하고 다닌 거지 출신이라는 사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거지 생활은 그의 일생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팽덕회는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 내가 만 10세가 됐을 때 모든 벌잇줄이 끊어져 버렸다. 정월 초하루, 이웃 부잣집에서는 연일 폭죽을 터뜨리며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밥 지을 쌀 한 톨이 없었다. 둘째동생을 데리고 처음 구걸하러 나섰다. 유마탄(油麻灘)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진(陳)선생님 댁을 찾아가 구걸하였다. 선생님은 초재동자(招财童子, 민간에서 재물을 불러온다고 믿는 신)이냐고 묻자 나는 그냥 거지라고 대답하였다. 내 둘째동생 팽금화(彭金華)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밥 반 사발, 조그마한 고기 쪼가리를 얻었다. 우리 형제 둘은 황혼이 돼서야 집에 돌아갔지만 쌀 2승조차 구걸하지 못했다. 나는 배고파 혼미해졌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둘째동생이 오늘 형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말하자 할머니께서 나물국을 끓여 내게 먹이셨다. 정월 초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초이틀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4명이 함께 나가 쌀을 구해오자.” 나는 문지방에 서서 쌀을 구걸하는 것은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할머니가 말했다. “가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 어제 내가 가겠다고 했을 때도 네가 반대하지 않았느냐. 오늘은 네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 가족 모두 산채로 굶어죽으라는 말이냐?!” 찬바람이 살을 에듯 불어오고 눈꽃은 흩날렸다. 나이 70이 넘은 호호백발 노부인이 조그만 발에 손자 두 명(셋째동생은 4살이 채 되지 않았다)을 데리고 지팡이 짚고 비틀거리며 나섰다. 그걸 보는 나는 예리한 칼로 심장을 찌르는 듯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나는 낫을 들고 땔나무 하러 산에 올랐다. 10문(文)을 받고 땔나무를 팔아 소금 한 포와 바꿨다. 땔나무 할 때 마른 나무 그루터기에 자생한 버섯을 발견하고 캐왔다. 한 솥에 넣고 끓여 나와 아버지, 큰할아버지가 먼저 먹었다. 할머니와 동생들은 저녁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밥 한 봉지와 쌀 3승을 구걸해 왔다. 할머니는 밥을 버섯탕에 넣고 끓인 후 큰할아버지, 아버지, 나에게 주었다. 내가 먹지 않으려 하자 할머니는 울면서 말했다. “얻어온 밥을 네가 먹지 않겠다고 하니, 먹는다면 우리 같이 살 것이고, 먹지 않는다면 우리 같이 죽자!” 그 일을 기억할 때마다 지금까지도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난다. 오늘도 역시 그렇다. 더 이상 쓰지 않으련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어찌 몇 백 번에 그치겠는가! …… 동년, 소년 시절에 겪은 그런 빈곤한 생활은 나를 단련시켰다. 이후 삶에 있어 나는 유년의 어려움을 추억하면서, 스스로 타락하지 않도록 채찍질하면서 가난한 인민의 생활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나는 유년의 생활 경험을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솔직하고 성실하며 감동적인 자술서를 읽으면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탁월한 공적을 쌓은, 사심 없고 두려울 것이 없는 숭고한 팽덕회의 품격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유감인 것은, 그러한 개국공신을 중국은 그의 일편단심에 마땅히 보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지보다도 못한 대우를 해, 처참한 노년을 맞게 했다. 어릴 때에 거지가 되지 않으려 했었고 사람들을 거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려고 목숨 걸고 혁명에 참여했었다. 거지에서 대원수가 되어 많은 거지를 구원했음에도 자신은 결국, 거지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 역사의 참극이요 중국의 치욕이다. 자, 이제 다시 원래 주제인 ‘제왕과 거지’로 돌아가자. 거지와 황제의 인연 :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 명 왕조 개국 황제가 거지 출신이라는 역사 때문일까, 명·청 이래로 민간에는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참인 양 구전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희곡가 겸 희곡이론가로 유명한 이어(李漁)은 그 민간고사를 바탕으로 통속소설1)을 썼다. 소설 첫머리 창사 「옥루춘(玉樓春)」은 이렇다 : “호한(好漢)은 여태껏 배부르기 어려웠고 가난은 거지가 되어도 해결하지 못했다. 돈을 얻어도 예전과 다름없이 건너기 위태로우니 기꺼이 도랑에 빠져 죽어 아사자 되기를 원하나니. 거지가 동전을 구하기는 쉬워도 거지 명성이 좋아지기는 어려웠어라. 누가 그 무리를 유명하게 했는가, 그저 벼슬한 이가 적은 까닭이네.” 말하는 바는 ‘명 왕조 정덕 연간에 거지 한 명의 장점’이다. 이어는 말했다 : “세상 사람들은 거지는 비천하고 더러워 높은 곳까지 발전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어찌 그들을 칭찬하는 것인가? 모르긴 해도 밥을 얻어먹는 것은 부끄럽지만 실패한 영웅이 뒷걸음질 친 것이요 실의에 빠진 호한(好漢)이 뒤처진 것이라, 다른 나쁜 짓하는 것과는 다르기에 그렇지 않을까. 세상 직업을 끝부터 거꾸로 세면 세 가지 종류의 인물이 있다. 첫 번째 하류 인물은 강도 도둑이요, 두 번째 하류 인물은 기생과 배우, 심부름꾼이요 세 번째 하류 인물이 거지 무리다. 거지는 강도질이나 도둑질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생과 배우, 심부름꾼을 하찮게 여기는 까닭이다. 신중하게 교류하며 직업을 골랐기에,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상에 돈 있는 사람은, 거지를 만나서 가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면 되고 거지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하면 된다. 무기력한 거지를 보면 두 번째 종류의 하류 인물 부류와 비교해보면 된다. 마음을 헤아려 보자. 거지로 전락한 사람들이 기생, 배우, 심부름꾼이 되려한다면 어찌 먹을 밥을 구하지 못하고 쓸 돈을 구걸하지 못하여 그런 고뇌의 생애를 살아가겠는가. 하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 모두는 그런 일을 못할 사람이 아니다. 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퉁소를 불었던 오상국〔伍相國, 오자서(伍子胥)〕이나 영락해 실의에 빠졌던 정원화(鄭元和)가 아니라 하겠는가. 많든 적든 간에 몇 문(文)으로 그들을 구제하면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모욕하면 절대 안 된다. 독한 말로 욕설을 퍼부어도 안 되고 고함지르고 발길질한 음식으로 그들을 깔보면 안 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乞兒行好事,皇帝做媒人)』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컴퓨터가 정보를 처리하고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 에너지가 필요하듯이 사람도 생명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컴퓨터를 작동하는데는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 에너지가 사용되고, 일반 자동차는 휘발유나 경유와 같은 연료를 태워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생명체도 섭취한 먹이를 연료로 사용하여 생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한다. 사람과 자동차를 비교해 보면, 자동차는 휘발유를 연료로 사용하여 공기 중에 있는 산소와 반응시켜 에너지를 만들고, 사람은 섭취한 음식을 호흡으로 확보한 산소와 반응시켜 에너지를 얻는다. 마치 사용하는 연료만 다를 뿐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과 자동차의 에너지 생산 과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자동차는 휘발유를 태워 에너지를 만드는데 그 과정이 한 단계로 아주 간단하다. 휘발유에 산소를 공급하고 연소시키면 폭발과 함께 열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연료의 폭발 과정의 힘을 이용하여 엔진을 돌리고 이때 강력한 열이 발산되는 것이다. 자동차의 엔진은 쇠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열에 강하지만 냉각수가 부족하여 엔진에 불이 붙은 자동차도 뉴스를 통해 종종 보게 된다. 만약 생명체가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 자동차와 같이 한 단계로 일어난다면 밥을 먹을 때마다 몸에서 불이 붙을 것이고, 생명체의 구성 성분은 쇠처럼 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여 타서 죽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는 여러 단계를 거쳐 에너지를 만듦으로써 충격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 다단계로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10층 빌딩 꼭대기에서 볼링공을 떨어뜨리면 강력한 에너지로 인해 공과 충돌한 바닥이 파손되겠지만, 10층에서부터 볼링공을 한 계단 한 계단씩 내려오게 하면 총 에너지의 합은 같지만 충격은 크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볼링공을 꼭대기에서 떨어뜨리듯 한 단계로 에너지를 만들게 되면, 떨어지는 볼링공이 원래 위치로 돌아갈 수 없는 것(비가역적)처럼 그 과정을 중단시키거나 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 하지만 볼링공이 계단을 차근차근 내려오듯 에너지를 만들 경우, 에너지가 충분하면 그 과정을 멈출 수 있고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거나 중간에 다른 층으로 나갈 수도 있다. 즉 에너지 만드는 과정이 가역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에너지가 충분하면 다른 물질로 바꿔서 저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멈춰 있더라도 시동을 끄지 않는 한 휘발유가 계속 타서 필요 없는 열로 소모되는 반면, 사람은 에너지가 충분할 경우 연료를 그냥 태워버리지 않고 에너지 만드는 과정을 중단하고 에너지원인 포도당을 글리코겐이나 지방으로 전환시켜 저장한다. 즉 연료인 음식을 많이 먹고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지방이 축적되어 살이 찌는 것이다. 여기서 생체 에너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자동차는 연료를 태워 열 에너지를 만드는데 비해 생명체는 연료를 다단계로 연소시키는 과정을 통해 생체 고에너지 물질인 ATP(생체 배터리)라는 것을 만든다. 일상 생활과 비교해 보면, 우리도 집에 충전이 가능한 배터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 배터리를 라디오에 넣으면 소리가, 램프에 넣으면 빛이, 손 선풍기에 넣으면 바람이, 손 난로에 넣으면 열이 발생한다. 충전 배터리에 저장된 에너지를 소리, 빛, 운동 및 열 에너지로 바꿀 수 있고, 사용하여 방전되면 다시 충전하여 재사용할 수 있다. 이렇듯 생체도 음식을 연소시켜 생체 배터리인 ATP를 충전하는데 이 ATP가 체온 유지를 위해 열 에너지로, 성대에서는 소리 에너지로, 신경 세포에서는 전기 에너지로, 근육에서는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어 쓰이고 나면 방전되는 것이다. 아래 그림처럼 충전이 세 눈금 되어있는 배터리를 ATP라고 한다면, 두 눈금 충전된 것은 ADP, 에너지가 한 눈금인 것은 AMP라는 물질이다. 우리가 음식(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을 섭취하여 다단계의 에너지 생산 과정을 거치면서 AMP→ADP→ATP로 배터리를 충전하게 되고, 이 ATP는 생체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쓰이면 ATP→ADP→AMP로 방전되고 다시 음식을 연소하여 재충전하게 된다. 우리가 집에 충전 배터리를 수백개씩 가지고 있지 않듯이 생체에서도 AMP/ADP/ATP를 합한 전체 배터리 개수가 아주 많은 것이 아니라 적정하게 일정량으로 유지된다. 완전 충전된 배터리인 ATP가 많다는 의미는 방전된 배터리인 ADP나 AMP가 적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아 빈 배터리인 ADP나 AMP가 없기 때문에 음식을 연소시켜도 충전할 빈 배터리가 부족하게 된다. 이 때는 음식을 연소시키는 과정을 중단하고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저장해 놓아야 한다. 사람의 주된 에너지원인 포도당이 남게 되면 글리코겐(포도당을 묶어 놓은 물질)으로 전환시켜 근육이나 간에 저장해 놓는데 간이나 근육은 공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다 차게 되면 무한히 늘어나는 공간인 피하 조직에 지방으로 전환시켜 저장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넘쳐나는 먹거리로 인해 대사증후군으로 상징되는 성인병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일부 국가는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게 된 것은 인류의 역사로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야생에서 사냥을 하고 과일을 채취하던 시대에는 먹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굶어야 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섭취하고 남는 에너지원을 체내에 저장해 놓는 것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음식 섭취량에 비해 살이 잘 찌는 사람이 생존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연료인 먹거리가 충분한 반면 사냥을 하기 위해 들판을 누빌 일도 없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힘든 일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섭취한 연료에 비해 에너지 소비가 적은 경우가 많다. 그러면 혈액에 포도당이 잘 소모되지 않아 혈당이 올라가는 당뇨병의 위험도가 증가하고, 지방으로 전환되어 복부의 피하 조직에 축적되므로 복부 비만이 될 뿐만 아니라 고지혈증, 고혈압과 같은 각종 성인병에 노출되게 된다. 당뇨, 고지혈증, 고혈압 등이 동반되는 대사증후군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더 다뤄 볼 것이다. 비만이나 대사증후군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연료가 되는 음식 섭취를 줄이거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여 지방이 축적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 칼로리가 높은 음식의 섭취를 줄이고, 적절한 운동을 통해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도 똑같이 먹어도 전혀 살이 찌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만 먹어도 살로 간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물만 마셔서는 살이 찔리 없지만 기초대사량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기초대사량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의 열량을 말하는데, 우리가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숨 쉬는데, 체온을 유지하는데, 심장이 뛰는데도 에너지가 소비된다. 기초대사량이 높은 사람은 기본적인 에너지 소비가 많아 살이 덜 찌는 것이다. 기초대사량을 높이려면 근육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근육 운동과 단백질 섭취가 필요하다. 근육은 우리 몸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인데다가 근육량이 늘어나면 포도당을 묶어놓은 글리코겐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커지기 때문에 혈당 조절에도 유리하고 지방으로의 축적도 줄일 수 있다. 건강을 유지하는데 특별한 방법이라는 것은 없다. 타고난 체질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한 식생활과 운동을 통해 조절해야 한다. 정제된 탄수화물(당, 흰밥, 밀가루)과 지방의 섭취를 줄이고, 단백질과 식이섬유를 충분히 섭취하면서 운동을 하는데 근육 운동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걷기, 가벼운 달리기, 자전거 타기, 수영 등)을 병행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왕 봥 갑서" (와서 보고 가세요) “You can come look around and then leav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주원장이 3년 동안 구걸하며 지냈던 거지 생활이 그의 사상에 미친 영향은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주원장은 근신 송렴(宋濂, 1310~1381)에게 말한바 있다. “진시황(秦始皇), 한무제(漢武帝)는 신선을 좋아하고 방사를 좋아했다. 장생을 헛되이 바라다가 끝내 허사가 되었다. 그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나라가 어찌 다스리지 못할 바가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군(人君)은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욕심을 줄여 백성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먹을 밥이 있고 입을 옷이 있어 백성이 행복하게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선이다.” 주원장은 빈한한 농민 출신일 뿐만 아니라 3년 동안이나 걸식으로 삶을 엮은 경험이 있어 자연스레 하층민 백성의 마음을 잘 이해하였다. 그래서 황제 보좌에 앉은 후에 여전히 ‘비교적 소박한 생활을 하였고 절약을 강구했으며 술을 즐기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본래 구걸하는 행각승이었던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 같은 거지 출신인, 미친 도사 주전(周顚)을 중용하기도 했다. 주원장 본인이 편찬한 『주전소선전(周顚小仙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주전은 14세 때에 간질을 얻어 남창(南昌)에서 구걸하면서 살았다. 30여 세 때, 원 왕조 말기에 새로운 관리가 부임하면 면회를 신청하여 ‘태평을 아뢴다’(告太平)라는 말만 하였다. 주원장이 남창을 접수하자 주전은 또 실성한 듯 찾아가 ‘태평을 아뢴다’라고 하였다.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자 주원장이 화를 참지 못했다. 소주를 입에 부어도 취하지 않았다. 항아리에 담아 땔감으로 태운 후 죽었겠거니 하고 뚜껑을 열어 확인하여도 땀 몇 방울만 흘릴 뿐 멀쩡했다. 나중에 주전을 장산묘(蔣山廟)로 보내어 기식하도록 했다. 스님이 찾아와 주전이 사미승과 먹을 것을 다투다 화가나 보름 가까이 밥을 먹지 않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주원장이 직접 찾아가 연회를 베풀고 주전에게 식사하도록 했다. 그러고서는 빈방에 가두어 한 달 동안 먹을 것을 넣어주지 않았는데도 주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멀쩡했다. 그 이야기가 전해지자 여러 장병이 앞 다퉈 주전을 초대하여 식사를 제공했는데 주전은 먹지 않았다. 억지로 먹이면 그대로 뱉어버릴 뿐이었다. 그저 주원장이 주는 밥만 먹었다. 주원장과 함께 있을 때에만 단정하고 예의를 차렸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주전이 진짜 신선이라 받아들였다. 주전이 주원장을 만나서는 “산동에는 어쩔 수 없이 성 하나를 세워야한다”라고 노래 불렀다. 손으로 땅에 지도를 그리고서는 주원장을 가리키며 “당신이 통〔桶, 통(統)과 해음(諧音)〕을 깼으니 통을 하나 만들어야 하오”라고 말했다. 주원장이 서쪽으로 구강(九江)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주전에게 물었다. “이번 출정은 가능한가?” 대답하였다. “가능합니다!” 또 물었다. “우량(友諒)1)이 이미 칭제했는데 그를 소멸시키기는 그리 쉽지 않겠지?” 주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위에는 그가 없습니다.” 안경에서 해군이 출발하려 했으나 바람이 일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얼마든지 행할 수 있고 얼마든지 바람을 부를 수 있습니다. 담력이 없어서 행하지 못하고 바람을 부르지 못할 따름입니다.” 과연 얼마 없어 큰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이니 곧바로 소고산(小孤山)까지 항해하였다. 10여 년 후에 주원장이 열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적각승(赤脚僧) 각현(覺顯)이 약을 보내오면서 천안존자(天眼尊者)와 주전 선인(仙人)이 보냈다고 말했다. 주원장이 그 약을 복용하니 당일에 완쾌하였다. 오함(吳唅)은 말했다. “이상의 영험한 기적은 모두 주원장 자신이 말했고 서술하였다. 모든 말이 다 허튼 소리다. 한 마디도 들을 것이 없다.” 어쩌면 주원장이 자신과 같은 거지 출신의 주전이라는 미친 도사를 편해한 것은, 동병상련의 내재된 의식과 정감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한 명은 불문에 들어섰다가 거지가 되었던 인물이고 한 명은 구걸하는 미친 도사다. 한 명은 천하의 주인이 되었고 한 명은 빌붙어 존귀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세상에는 기연이 존재한다. 천지는 크면서도 작지 않던가. 거지가 불교, 그리고 도교와 인연을 맺고 있지 않는가. 히틀러, 거지에서 나치의 우두머리가 되다 동방문명사상 주원장과 같은 거지 출신 황제가 출현했다면 서양에는 그런 유사한 경우가 없는가라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존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나치의 원수, 전쟁광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그이다. 젊었을 때 히틀러는 모습이 고상하고 우아했지만 온갖 방법을 동원해 예술대학의 나체 모델을 훔쳐보기도 하였다. 그런 불량배 같은 악습은 젊었을 때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여 거지로 전락한 경험과 직접 관련이 있다. 현대 서양의 거지사회는 중국 근대 이후의 거지 집단과 마찬가지로 불량배 집단으로 변질되어 범죄의 근원이 되었다. 주원장은 집권 후 유랑하며 걸식하였던 거지 경험과 관련이 있는, 질투심이 강하고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난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여 방랑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깊이 통찰하게 되면서 중국역사상 농민혁명의 우두머리에서 천자의 보좌에 앉아 명 왕조를 개국한 황제가 되었다. 역사상 여러 봉건 제왕과 비교하면 주원장은 탁월한 인물에 속한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어떤가? 독일의 원수라는 보좌에 앉은 후 나치 독재 통치를 실행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하여 전쟁이란 구정물을 뿌린 살인광이 되었다. 둘을 비교해보면 장단점이 명확해진다. 교차문화비교를 통하여 거지 역사를 고찰해보면 분명 과학적 가치가 존재할 것이다. 1909년, 20세의 히틀러는 비엔나에서 국가예술대학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불합격하여 실업자, 거지로 전락하였다. 어쩔 수 없이 기차역에서 짐을 날라주거나 양탄자를 빨거나 쌓인 눈을 쓰는 등의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할 일을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거나 무료급식소에서 구제 식품을 얻어와 배를 채웠다. 길에서 술에 취한 신사에게 구걸하다가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저녁이 되면 공원이나 인가의 대문 옆에서 밤을 보냈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유태인이 만든 수용소에서 기숙하였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슬프고 애절한 시기’였다. 히틀러는 ‘자신과 맞서는’ 환경을 저주하였다. 자신을 그렇게 불행하게 만든 것에 책임을 져야하는 죄인을 찾아 나섰다. 나중에 ‘하늘을 날아오르는’ 날을 갈망하였다. 히틀러는 자서전 성격의 저작에서 그 경험을 회피하여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 거짓말은 역사 사실을 덮어 감출 수 없다. 구걸하고 유랑하면서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냈던 경험은 나중의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자술하였다. “나는 일마치고 남은 시간을 일분일초도 소홀이 하지 않고 모두 학습에 투입하였다. 그렇게 나는 짧은 몇 년 사이에 지식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해 나에게 이익을 주고 있다. 그 시기 나는 세상을 보는 인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지금 내 행동의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젊었을 때 이룬 그 견실한 기초는, 사소한 보충 학습을 더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말해서 어떤 커다란 변동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 거지의 삶이 히틀러 일생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진우량(陳友諒, 1320~1363), 원명은 진구사(陳九四), 호북(湖北) 면양(沔陽) 사람으로 원(元) 왕조 말기 군웅 중 한 사람이다. 농민봉기의 수령으로 진한(陳漢)의 개국황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의 역대 제왕 중에 거지 출신 황제가 있다. 바로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거지가 아니라 행각승 면모로 사방을 돌아다닌 어린 거지였다. 용의 씨, ‘용종’으로 대어난 북제의 고위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주원장의 행각 경력은 나중에 입신양명해 황제 보좌에 앉고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중요한 복선이 된다. 얻기 어려운 잠재된 기회였다. 주원장은 원나라 천력(天曆) 원년(1328) 9월 정축에 호주(濠州) 종리〔鍾離, 현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고장(孤莊)촌의 빈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봉양현은 중국역사상 가난하기로 이름난 마을이다. 지금까지도 화고희(花鼓戱)1)로 유명할 뿐 아니라 거지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러한 지리 문화 환경 속에서 거지 주원장이 나타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거지가 나중에 천자 자리에 올라 명 왕조의 개국 황제가 되었다. 중국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이요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보아야 할 사건이다. 지정(至正) 4년(1344)에 주원장은 17세였다. 당시 호주 지역은 심한 가뭄, 누리의 해, 돌림병 등으로 기아와 질병이 한꺼번에 닥쳤다. 농민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게 되었다. 주원장의 아버지, 어머니와 형 한 명은 병을 얻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둘째형도 타향으로 피난하였다. 주원장은 어쩔 줄 몰라 형제 둘이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그때 이웃집 왕(汪) 할머니가 주원장의 아버지 주오사(朱五四)가 일찍이 황각사(皇覺寺)에서 부처님께 발원하여 주원장을 고빈(高彬)법사의 도제로 출가시키려고 했었던 일을 떠올렸다. 원래 주원장은 태어나서 3,4일이 됐어도 젖을 먹지 않았다. 배도 탱탱하게 부풀어 올라 살아나기 어려울 지경에 빠졌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다가 밤에 자기 아들이 죽다가 보살을 만나서야 살아나는 꿈을 꾸었다 : 앞길이 막막한 상황까지 됐으니 깨끗하게 아이를 사찰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사찰에 도착했으나 스님을 만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때 애기 울음을 듣고 꿈에서 깨어났다. 애기가 젖을 먹는 게 아닌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푼 배도 가라앉았다. 아이는 자라서도 병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 주오사는 그해의 몽조(夢兆)를 생각해내고는 황각사에 가서 주원장을 사신하기로 발원하였다. 실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지 않던가. 그해에 발원도 했으니 지금 사찰에 들어가 스님이 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몸을 편안케 하고 밥도 줄 곳이 생기니 굶어죽지는 않지 않겠는가! 둘째형의 동의를 얻은 후 왕 할머니는 향과 초 등 예물을 준비하고 고빈 법사를 찾아가 아이를 받아들여 스님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심부름하는 아이, 행동(行童)으로 삼아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처럼 단장하지만 하루 종일 청소하고 향 올리고 세탁하고 밥 짓는 잡무를 하는 자리였다. 그렇더라도 머물 곳이 있고 먹을 거친 밥이라도 주니 다행이었다.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주원장이 절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된지 50여 일,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에 사찰을 떠나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게 되었다. 행각승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거지였다. 원래 황각사는 주로 토지에 물리는 세금, 지세를 받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그해의 재난으로 지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사찰의 스님은 대부분 처와 가족이 있었다. 먹여야 할 사람은 많은데 양식은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잇따라 나가 걸식, 즉 탁발하며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치로 말하면 사찰은 그래도 괜찮았다. 주원장은 가장 마지막에 탁발하러 내보내졌다. 주원장은 사찰에 들어간 지 2달도 안 된, 잡역만 했던 젊은이일 따름이었다. 염불도 못했고 불사도 할 줄 몰랐다. 허름한 가사를 걸치고 목어 사발을 들고 다닌다하여도 실제로는 여지없는 낡은 삿갓 쓴 거지였다. 그렇게 주원장은 안휘의 합비(合肥), 하남의 신양(信陽), 고시(固始), 귀여(歸汝), 회양(淮陽), 녹읍(鹿邑)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고 다시 안휘 박현(亳縣), 부양(阜陽)2) 등지로 돌아다녔다. 3년 동안 풍찬노숙 하였다. 길거리에서 문에 기대어 걸식하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업신여김을 얼마나 당했을지 어찌 모르겠는가. 나중에 주원장은 『어제황릉비(御製皇陵碑)』에서 회상하였다. “여럿이 각자 계획을 잡고 운수(雲水)처럼 유랑하였다. 나는 어떤 성과도 없었다.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었다. 친척과 친우를 따르려 했으나 스스로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한없이 넓은 하늘을 바라볼 뿐. 의지할 곳 없으니 내 그림자와 동행하였다. 아침에 연기가 나는 곳이 있으면 급히 달려갔고 저녁에 낡은 사찰에 들어가 투숙하였다. 어떤 때에는 높이 솟은 험한 절벽을 바라보았다. 낭떠러지에 의지해 달 아래에서 원숭이 울음소리를 들으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혼백은 요원하고 부모는 안 계시니, 넋을 잃고 곳곳을 거닐었다. 가을바람, 학의 울음, 서리 흩날려 우수수 떨어지나니. 몸은 껍질처럼 바람에 한없이 날리고 마음은 끓는 물처럼 견디기 어려웠다.” 만백성의 우두머리가 된 후에 그 3년간의 걸식하던 처지가 여전히 역력히 눈에 떠오르는 듯, 자신이 받은 깊은 인상을 표현하였다. 거지 신세로 전락한 절절한 경험이 젊은 주원장의 시야를 넓혔다. 여러 강호 친구를 사귀면서 식견을 넓혔다. 동시에 용감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형성하였다. 질투심 강하고 잔인한 성격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중에 성공을 거두는 데에 소질과 조건을 다지게 만들었다. 거지는 많고도 많다. 천하에 수도 없이 널려있다. 그러나 거지 출신 황제는 고금을 통틀어 주원장 홀로 혁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의 소질과 역사의 좋은 기회를 제대로 포착한 능력에 따랐다고 하겠다. 주원장이 거지가 돼 구걸하다가 귀향하니 때마침 곽자흥(郭子興)의 홍건군(紅巾軍)이 봉기해 있었다. 갈 곳 없던 주원장은 홍건군에 입대했다. 의병 군기 아래의 보졸이 되었다. 2개월여 만에 곽자흥에게 발탁돼 친병 구부장(九夫長)으로 승진하고 사령관 부서로 편입되었다. 심복이 되었다. 곽자흥은 양녀 마(馬) 씨를 주원장에게 시집보냈다. 나중에 마황후가 된 여인이다. 이를 바탕으로 주원장은 뜻을 이루었다. 여러 차례 순탄치 못한 과정을 겪기는 했지만 이겨내어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계속)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화고희(花鼓戱), 중국 지방 희곡이다. 중국 지방 희곡 중 같은 이름이 가장 많은 전통극 종류로 일반적으로 호남화고희(湖南花鼓戱)를 가리킨다. 호북(湖北), 안휘(安徽), 강서(江西), 하남(河南), 섬서(陝西) 등지에 같은 이름의 지방 희곡이 있다. 가장 이름이 많은 ‘화고희’ 증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영향이 큰 지방 희곡은 역시 호남화고희이다. 일반적으로 날라리와 징, 북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가무희라 이해하면 된다. 2) 나열된 지명은 현재의 지명이다. 당시 지명은 순서대로 하면 합비(合肥), 고고(固姑), 신양(信陽), 여주(汝州), 진주(陳州), 녹읍(鹿邑), 박주(亳州), 영주(穎州)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이녁을 소뭇 소랑 햄수다" (당신을 무척 사랑합니다) “I love you so much”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안영, 제경공에게 어린 거지를 거두어 기르라고 권하다 중국 역대 제왕 중에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혼용(昏庸)의 무리가 적지 않았으나 그래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대부분은 덕이 있는 정치, 어진 정치를 힘써 실행하였다. 혹간 하는 짓이 장식장 속 장식과 같은 수준에 불과하더라도 한번이라도 노력하기는 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고위는 특히나 어리석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춘추시기에 제(齊)경공(景公)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어린 거지를 보고는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구나 말했다고 전해온다. 곁에 있던 재상 안영(晏嬰)은 황제께서 계신데 저 아이가 어찌 돌아갈 집이 없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사람을 파견하여 저 어린 거지를 맡아 기르게 한다면 모두가 그 일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라고 권했다.(『안자춘추』) 무슨 뜻인가? 큰 힘을 들이지도 않고 어린 거지를 거두어 기른다면 백성의 찬양을 받게 되고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며 인정을 베푸는 국군이라는 미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다. 송 태종, 거지를 죽이는 계책을 실행하다 976년, 송(宋) 태종(太宗) 조경(趙炅)1)은 황위를 계승하여 국호를 태평흥국 원년으로 바꿨다. 그는 늘 어떻게 하면 내외의 사람을 자신에게 복종시킬 것인가 고민하였다. 어느 날, 경성의 거리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재물을 얻지 못하자 상점 문에 기대어 욕을 해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점 주인이 재차 사과했다. 그래도 그치지 않고 계속 함부로 욕해대니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위에서 구경하다가 어떤 사람이 갑자기 덤벼들어 칼로 거지를 찔러 죽이고는 욕지거리 한 후 칼을 버리고 사라졌다. 저녁 무렵이라 날이 어두워 흉수를 쫓았으나 체포하지 못했다. 이튿날,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은 풍속을 어지럽히는 오계(五季)2)의 악습이라며 대노하였다. 대담하게 백주대낮에 살인을 저질렀으니 기일 내에 체포하여 사건을 마무리 지으라고 명했다. 기한을 넘겨 벌을 받을까 두려웠던 관리가 애써 규명하다가 상점 주인이 화를 참지 못하여 거지를 죽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건 결과를 보고하자 태종을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가 이처럼 심혈을 기울여 직무를 수행하여, 나를 위해 공을 세웠구려. 그 자를 죽인 칼을 내게 건네라.” 며칠 지나지 않아 공술한 내용과 칼을 황제에게 올렸다. 태종이 물었다. “심문하였는가?” 답했다. “심문을 마쳤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곁에 있던 내시에게 자신의 칼집을 가져오라 하고는 칼을 칼집에 넣고서 옷소매를 툭툭 털며 일어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함부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닌가?” 그렇다, 이 사건에는 비밀이 있었다. 태종이 거지를 죽인 일을 분노에 쌓인 척 엄하게 추궁했던 것은, 교활하게도 그것을 빌미로 민심을 얻는 한편 무력으로 백성에게 위협하려던 의도였다. 일전쌍조(一箭雙鵰), 무고한 거지(아마도 변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를 죽였을 뿐 아니라 관리에게 추궁당하다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상점주인도 살인죄로 극형에 처해질 게 분명할 지니, 무고한 원귀가 둘이나 생긴 게 아닌가. 거지의 피로 권위를 세웠다. 거지와 같은 천민이 죽임을 당하는 것조차도 천자는 분노하고 용납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백성에게 심어주었으니, 실로 자식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태종은 머리를 헛되이 쓰지 않았다. 송나라 간신 채경(蔡京)의 아들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 채조(蔡縧)가 나서서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고 태평성세처럼 꾸미는 것을 주제로 한 필기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에 그 일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천추의 공과는 후인이 중의를 거치는 법이다. 식견이 있는 사람은 이 역사상 보기 드문, 일부러 지어낸 원죄, 날조, 오심 사건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터이다. 태종 조경이 인정을 베푼다는 위선의 얼굴 뒤에는 원귀의 선혈과 한이 서려 있다. 재주 피우려다 일을 망친 것이요,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 되었다. 혁혁한 천자의 눈에 초민의 생명이 뭬 그리 대수이랴. 하물며 거지와 같은 천민은 더 말해 무엇 하리! 제 경공, 송 태종과 같은 군주 앞에서, 똑같이 한 시대 군주로 군림했던 고위이지만 격이 크게 뒤진다. 그럼에도 송 태종하고 비교해보면 고위는 거지처럼 분장해 구걸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을 뿐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조광의(趙匡義, 939~997), 북송(北宋)의 제2대 황제(976~997 재위),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본명은 조광의(趙匡義)로, 형 태조가 황제가 되자 피휘하여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에는 경(炅)으로 고쳤다. 송 태조 조광윤의 동생으로 즉위 과정과 연이은 친족 숙청은 상당한 의문점이 남지만, 나라를 잘 다스렸다. 요(遼)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978년 오월(吳越)에게 항복받고 이듬해 북한(北漢)을 멸망시켜 오대십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2) 오계(五季)는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로 이전 글(1)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를 찾아내는 실시간-PCR 검사와 신속항원 검사에 대해 다뤘는데 여기서는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코로나19감염증이 한창이던 팬데믹 시기에 백신 접종을 하면서 우리 국민들은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로 제네카, 노바백스 등과 같은 많은 제약 회사의 이름을 접하게 되었고, 백신패스(코로나 예방접종 증명서)에 어느 회사에서 제조한 백신을 맞았는지 표시하기도 했었다. 백신 접종 시에 바이러스를 그대로 주사하면 진짜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병원성이 없는 바이러스 유사 물질을 백신으로 사용한다. 주로 바이러스의 단백질(항원)이나 죽은 불활성화 바이러스를 백신으로 사용하는데 유전자가 없기 때문에 감염력은 없지만 우리 면역 체계를 자극하여 항체를 만들어낸다. 백신을 맞은 이후에 진짜 코로나19바이러스에 노출되더라도 백신에 의해 만들어진 항체가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바이러스를 제거하므로 감염되지 않는 것이다. 코로나19 백신 중에서 노바백스 백신은 유전자 재조합 기술로 만든 단백질 백신이다. 유전자가 설계도라면 단백질은 설계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건물에 비유할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스파이크 단백질의 유전자(설계도)를 분리하고, 이 설계도를 다른 생물의 세포에 넣어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건물)을 대량 생산한 후 나노 입자화하여 백신으로 사용한다. 설계도 역할을 하는 유전자를 우리 몸에 직접 넣어 줌으로써 우리 세포가 그 설계도에 따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을 스스로 만들어내게 하는 방법도 사용된다. 아스트로 제네카와 얀센의 백신은 인간에게 감염되지 않는 아데노 바이러스를 유전자 운반체로 사용한 바이러스 벡터 백신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스파이크 단백질의 유전자 부위를 분리하고 이를 DNA로 바꿔 대량 생산한 후 아데노 바이러스의 유전자 사이에 끼워 넣는다. 이것을 백신으로 접종하면 아데노 바이러스가 인체 세포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 유전자를 집어넣고 인체 세포는 스스로 스파이크 단백질을 만들어 방출한다. 이 스파이크 단백질은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체는 이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들게 되고 실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체에 들어오면 공격하여 제거한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은 신기술이 적용된 RNA 백신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RNA 유전자에서 스파이크 단백질에 대한 유전자 부위를 분리하고 이를 대량 복제한 후 리포좀이라는 지방질로 코팅한다. 이후 백신 접종을 통해 리포좀이 인체 세포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부위를 집어넣어 주면 인체 세포는 스스로 스파이크 단백질을 만들어 방출한다. 역시 스파이크 단백질은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항체가 만들어져 면역을 갖게 된다. 재조합 단백질 백신은 오랫동안 사용해 온 전통적인 방법으로 안전성이 높다고 볼 수 있고, 보관이나 취급이 비교적 쉽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스파이크 단백질의 구조가 바뀔 때마다 이에 상응하는 단백질 백신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유전자를 설계도로, 단백질을 건물로 비유하자면 설계도에 돌연변이가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건물을 계속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이러스 벡터 백신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에 대한 유전자(설계도)를 아데노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인체에 전달하는 것이다. DNA를 설계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RNA 보다는 안정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체가 아데노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생겨 들어 온 아데노 바이러스 자체를 제거해 버리면 그 안에 실린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인체에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RNA 백신은 매우 불안정하고 특히 높은 온도에 취약하기 때문에 영하 20도(또는 영하 70도) 이하에서 보관 및 운송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데노 바이러스 벡터 백신이나 RNA 백신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나더라도 설계도인 유전자만 수정하면 되기 때문에 돌연변이에 대처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 코로나19 백신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임상 시험을 통해 안전하다고 인정되었기에 사용이 승인된 것이다. 우리 몸에 원래 존재하는 물질이 아닌 것을 인체에 넣기 때문에 발열과 피로감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증상은 경미하고 지속 시간도 짧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여전히 코로나19백신의 부작용에 대해 걱정하고 있고,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논란이 심해지면서 당시 정부에서도 알레르기 반응, 접종부위 통증·발적·부기, 발열이나 오한 등의 전신 증상, 두통 등 신경계 증상, 근육통·관절통 등 근골격계 증상, 메스꺼움·구토·설사 등 위장관계 증상은 '일반 이상반응'으로 분류하고, RNA 백신과 바이러스 벡터 백신 접종과의 인과성을 인정하였다. RNA 백신의 경우 심장 근육에 염증이 생기는 심근염 및 심장을 둘러싼 얇은 막에 염증이 생기는 심낭염과의 인과성이, 바이러스 벡터 백신은 혈소판 감소 혈전증과의 인과성이 인정되었다. 인류는 사스, 메르스, 신종플루, 코로나19와 같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주기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가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바이러스는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심하게 일어나고 유전자 복제 방법, 인체 세포에 침투 방법과 탈출 방법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각 바이러스에 적합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이 올 때마다 치료제 개발도 중요하지만 인류는 백신을 빠르게 개발하여 대처할 수 밖에 없다. 그때마다 백신의 부작용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한다면 인류는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 백신 접종에 따른 부작용이 심할 수도 있지만 백신을 맞았을 때의 사회적 이익이 부작용보다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다. 백신 접종을 통해 집단 내에 면역을 가진 개체수가 많아질수록 전염의 고리가 끊어져서 백신을 맞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호할 수 있다. 따라서 백신 유통, 보관 및 접종 과정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함은 물론 백신 접종 시에 부작용이 나타나면 원인을 파악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 달부터 코로나 19감염병에 대한 위기 단계가 가장 낮은 ‘관심’으로 조정된다. 감염병 발생 시에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사회적·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위기단계를 정도에 따라 심각-경계-주의-관심의 4단계로 구분하는데, 가장 높은 ‘심각’은 ‘국내 유입된 해외 신종 감염병의 전국적 확산 징후’를 보이는 단계로 범정부적 총력 대응이 필요한 위험 상황이다. 코로나19의 경우 감염병 재난 위기단계가 2023년 6월에 가서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 조정되면서 확진자의 ‘7일 격리 의무’가 해제되고, ‘5일 격리 권고’ 조치가 취해졌었다. 이어 2023년 8월에 코로나 19의 감염병 등급이 계절성 독감(인플루엔자)과 같은 4급이 되었고, 지난 1일부터는 위기단계까지 가장 낮은 ‘관심’으로 낮아진 것이다. 코로나19가 ‘관심’ 단계로 조정되면서 병원급 의료기관과 요양병원과 같은 입소형 감염취약시설에 적용되던 마스크 의무 착용이나 감염취약시설 입소자 대상의 선제 검사 의무도 권고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개개인 마다 병원과 같은 의료 기관이나 사람이 밀집되어 있는 밀폐된 공간에 갈 때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고 손씻기, 기침 예절 지키기와 같은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