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에 ‘주강호(走江湖)’라는 말이 있다. ‘강호(江湖)를 떠돌다’라는 뜻이다. 사전에는 ‘곡예사·떠돌이 의사·점쟁이 따위가 생계를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다’라고 돼있다. 중국 문화전통의 세속관념으로 보면,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부류는 하층민, 더 나가서는 천민들의 일이었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회포를 풀다(遣懷)』1) 시에서 읊었다. “실의에 빠져 강호에서 술 마시고 다닐 때는 미인들 가는 허리 손바닥에 가벼웠네.” 실의에 빠져 곤궁해질 때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강호 사회에 전락하고 사회 하층으로 빠져든다는 말이다. 송(宋)대 원채(袁采)의 『원씨세범(袁氏世範)』 「자제당습유업(子弟當習儒業)」에 있는 기록이다 : “사대부의 자제가 일시적으로 세록을 받을 수 없고 의지할 재산이 없으면, 어버이를 섬기고 처자를 보살피기 위해서는 유생이 되는 것이 낫다. 자질이 뛰어나면 진사과를 공부할 수 있기에 위로는 과거 급제하여 부귀를 얻을 수 있다. 다음으로는 글방을 열어 가르치면서 속수(束修, 옛날 스승을 처음 찾아뵐 때 드리던 예물, 개인 교수에게 주는 사례금)를 받을 수 있다. 진사과 공부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위로는 서찰을 써주는 일을 하여 서신을 대신 써 주거나, 다음으로 글 읽는 법을 배워 초학자의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다. 만약 유생이 될 수 없다면 무당, 의사, 승려, 도사, 농민, 상인, 기술자 등 모두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면서도 조상에게 욕을 먹이지 않으니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제가 떠돌아다니다가 거지가 되거나 도적이 되면 이것은 조상을 가장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 사대부의 정통 관념이다. 어찌 모르겠는가. 고아함과 속됨, 즉 아속(雅俗)이란 모두 상대적이다. 홍구(鴻溝)와 같이 큰 틈이 있어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예부터 많은 아사(雅士)들이 강호에 빠져들었을 뿐 아니라 강호 속에 있는 사람도 자연히 전통 인격의 도덕, 미학, 가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확고한 강호 정신 체계를 이어받아 그 복잡한 세계를 지탱하고 유지하였다. 거지 사회는 강호 사회의 한 계통이다. 여러 부류와 서로 의존하면서, 비교적 큰 측면에서 맑고 혼탁함이 진면목을 숨기고 끼어들어 섞인 ‘강호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거지의 ‘단체 인격’이 드러난 ‘의협(義俠)’과 ‘부랑자, 불량배’라는 이중인격, 그리고 그것과 ‘강호정신’의 본질적 연계성을 얘기하고자 한다. 한비자(韓非子)는 오래전에 말했다. “협(俠)은 무력으로 금령을 범한다.” 초기 무협(武俠)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말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빈곤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어진 사람의 자세다. 믿음을 잃지 않고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의로운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다.” 이것이 협의(俠義)에 대한 중국 최초의 관념이다. 이를 근거로 사마천은 『사기』에 「유협(游俠)열전」을 썼다. 「유협열전서」에서 사마천은 의협의 인물과 그 행동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 말은 믿을 수 있고 그 행동은 반드시 결과가 있으며, 한 번 승낙하면 반드시 성실하게 이행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뛰어든다. 다른 사람의 곤경에 뛰어들면, 이미 자신의 생사존망을 초월한다. 자신의 생사존망을 초월하나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덕으로 원한을 해결하고 후하게 베풀고서도 그 대가는 적게 바랐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이 주를 달았다. “의협의 기질과 풍모는 이렇다 : 반드시 우의를 중하게 여기고 신의를 강구하며 즐겁게 사람을 돕고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린다. 말을 하면 행하고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며 굳세고 정직하다.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며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덮어놓고 싸움을 벌이거나 제멋대로 흉포하게 굴며 힘을 믿고 폭력을 휘두르고 함부로 날뛰는 것은 결코 의협이 할 일이 아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고 시비가 불분명한 강호 문파들 간에 서로 원한을 가지고 살해하는 것도 의협의 행동이 아니다.” 거지의 ‘집단 인격’은 마침 ‘협의’와 ‘부랑자, 불량배’라는 이중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마천 『유협열전』 중의 여러 ‘협(俠)’은 대부분 외딴 시골, 민간의 포의(布衣), 즉 필부다. 출신이 비천하다. 유럽 중세기에 고정적인 경제력을 가진 기사 계층의,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던 구성원들과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어쩌면 당시 거지가 아직 하층 사회의 구체적 단체를 이루지 못한 까닭에 사마천의 『유협열전』 중에는 의로움을 행하는 협객과 같은 거지 열전이 없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행방이 일정하지 않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유협(游俠)’의 ‘유(游)’는 거지가 강호에서 유랑하는 행적과 상통한다. 근대와 현대 사회에서, 거지가 단체를 결성하여 내부의 인적 교류 관계를 유지하는 신조는 ‘강호 의기(義氣)’다. 사회에서 거지가 비천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의협(義俠)의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은 바로 중국 문화전통이 그 특수한 인격에 영향을 끼친 결과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견회(遣懷, 회포 풀다)」〔두목(杜牧)〕 : 落魄江湖載酒行(낙백강호재주행),楚腰纖細掌中輕(초요섬세장중경).十年一覺揚州夢(십년일각양주몽),贏得青樓薄倖名(영득청루박행명) : 실의에 빠져 강호에서 술 마시고 다닐 때는 미인들 가는 허리 손바닥에 가벼웠네. 십 년 만에 문득 양주의 꿈 깨니 청루에서 박정한 사내라는 이름만 얻었구나. ; 제목은 ‘회포를 풀다’ 뜻으로, 두목이 환락에 빠져 지내온 생활을 자책하면서 지은 시이다. ‘초요(楚腰)’는 가는 허리를 뜻한다. 옛날 초(楚)나라 왕이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하니 궁중 여인들이 저마다 허리를 가늘게 하려다가 굶어 죽기까지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장중경(掌中輕)’은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던 조비연(趙飛燕)의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출 정도였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양주(揚州)는 당나라 제일의 환락가였다. ‘양주몽(揚州夢)’은 환락에 빠져 지내온 덧없는 세월을 뜻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련하게 위장하거나 벙어리 흉내 내며 구걸하는 것에 비해 더 나간 것이 형사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기술도 인위적으로 불구로 만들어 구걸하는 것과 비교하면 작은 무당이 큰 무당을 만난 것처럼 비교도 안 된다. 일부러 불구자로 만드는 것이 ‘채생절할(采生折割)’1)이다. 청나라 건륭 시기에 향시에 합격해 소문(昭文), 봉현(奉賢) 지현을 역임했던 상휘(常輝)〔자는 의운(衣雲)〕가 건륭 34년(1769)에, 소주(蘇州) 부랑중항(富郞中巷)에서 머무를 때 쓴 『난방필기(蘭舫筆記』) 기록이다. “내가 도중(都中)에 있을 때 매번 괴인이 돈을 버는 것을 보았다. 이삼 척밖에 안 되는 사람도 있고 윗몸은 있으나 아랫몸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팔이 한 쪽이 없거나 다리 한 쪽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기형(畸形)이 다 모여 있었다.……경인(庚寅) 봄(1770)에 진택(震澤)성 중시교(中市橋)에 15세의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 아이가 다리가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꿇어앉아 구걸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하여 날이 어두워지자 울면서 구걸하였다. 혼자서 울면서 오늘은 분명 맞아 죽을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몹시 슬픈 목소리였다. 마음씨 좋은 사람 오륙 명이 관찰하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건장한 사내가 달려들어 업고 갔다. 몰래 성 밖 강 아래까지 따라가 봤다. 배 안에는 손이 없거나 발이 없는 동남동녀 서너 명이 있었다. 상앗대질하는 사람 오륙 명이 있었다. 모두 건장한 사내였다. 즉시 순찰대와 함께 체포하러 갔다. 우두머리는 물에 뛰어들어 도망쳤고 한 사람만 붙잡혔다. 앞에서 말한 여자아이에게 물으니 본래 현지 세도가의 딸이었다고 했다 : 팔구 세 때에 혼자 밖에 놀러갔는데 실종되었다. 해가 거의 보이지 않는 산으로 겹겹이 막혀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깨어나서 울었더니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나중에 약을 칠한 후 다리를 칼로 잘랐다고 했다. 얼마나 아팠는지……. 여자애의 부모에게 알렸다. 딸을 잃어버린 지가 7년이나 됐지만 만나자마자 알아보았다. 관부로 보내어 여러 차례 심문했으나 확실한 자백을 받지 못했다. 끼워 고문하는 형틀을 아무 것도 아닌 양 대했다. 안건이 종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북쪽으로 돌아왔다.” 인위적으로 불구자로 만들어 구걸하게 만든 거지는 개방이 저지르는 범죄 중 하나다. 옛날에 어린이를 유괴하여 잔혹한 방법으로 불구자로 만들거나 기형으로 만들어 구걸케 하면서 재물을 편취해 전사회적 해악이 되었다 또 다른 기록2)도 있다 : 강호 악당이 ‘채생절해’로 이득을 얻으려고 어린 아이를 유괴한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강요하고 모략을 쓰기도 한다. 악랄한 악당은, 사기꾼과 한통속이다. 건륭 때에 장사(長沙)시에 두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났다. 개는 일반 보통 개보다는 조금 컸다. 양쪽 앞발 발톱은 개보다 길었고 뒷발은 곰과 닮았다. 꼬리는 있으나 작았다. 귀와 눈은 사람을 닮았다. 결코 개 종류는 아니었는데 개털이 온몸에 나있었다. 사람 말을 할 줄 알고 박자에 맞춰 노래할 줄도 알았다. 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노래 한 곡 하라면서 돈을 던져주었다. 현령 형(荊)모가 그들을 만났다. 의사에게 보여주면 후한 상을 내리겠다며 병졸에게 명하여 데려오게 하였다. 먼저 개를 아문에 들여보낸 뒤 개에게 물었다. “그대. 사람인가, 개인가?” 답했다. “나 역시 사람인지 개인지 모릅니다.” 물었다. “함께 다니니 어떤가?” 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평소에 무얼 가르치는가 따져 물으니 답했다. “낮에는 나를 끌고 시내에 나가고 밤에는 돌아가 통에 들어갑니다.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루는 비가 와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게 먹을 것을 주려고 통 밖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두 사람이 상자를 여니 상자에는 목인(木人) 수십이 있었습니다. 눈과 손, 발 모두 자동으로 움직였습니다. 갑판 아래에는 노인이 누워있었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저도 모릅니다.” 형모가 두 사람을 체포해 심문하였다.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다. 명을 내려 달군 침으로 귀곡혈(鬼哭穴)을 찌르는 극형으로 심문하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 3살 어린이로 만들었다. 먼저 약으로 피부를 흐물흐물하게 만들고서 다 벗긴 후, 개털을 태운 재와 약을 먹였다. 약을 복용시켜 병세를 가라앉히니 몸에 개털이 나기 시작하고 꼬리가 생겨나 개와 닮았다. 그런 방법으로는 열에 하나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개로 만들 수 있다면 평생 돈을 벌 수 있다. 무수한 어린이에게 실험하고서야 저런 개가 생긴다고 답했다. 목인은 어디에 쓰느냐고 물으니 답했다. “아이를 유괴해 스스로 목인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절름발이, 소경, 팔 없는 장애인 모두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 돈을 구걸해 오도록 했습니다.” 형모가 상황을 알고 병졸을 데리고 가 배를 수색하였다. 배에는 가죽만 남은 노인이 있었다. 등 쪽을 갈라내 속에 짚을 넣어 만든 상태였다. 어디에 쓰느냐고 묻자, 답했다. “그것은 90세가 넘은 노인의 가죽입니다. 가장 얻기 힘든 겁니다.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약과 함께 사람 몸에 침으로 찌르면, 그 사람 혼이 곧바로 와서 부역하게 됩니다. 수십 년을 찾다가 이제야 겨우 얻었습니다. 피부가 습하게 되면 가루로 만들 수 없기에 발각됐습니다. 하늘의 뜻입니다. 하늘이시어! 이제 빨리 죽기 원할 따름입니다.” 형모가 대노해 명을 내려 차꼬와 수갑을 채워서 시가로 끌고 나갔다. 죄상을 낱낱이 알린 후 사형을 집행하니, 관중들이 쾌재를 불렀다. 개도 오랜 시일이 지나니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굶어 죽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채생절할(采生折割)은 직업 거지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흉악한 형태다. 인위적으로 불구자를 만들거나 ‘괴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세인의 동정을 받으며 길가는 사람들에게 많은 재물을 구걸한다. ‘채(采)’는 취하다, 수집하다. ‘생(生)’은 원료, 일반적으로 정상으로 발육한 어린 아이. ‘절할(折割)’은 칼이나 도끼로 자르다 뜻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살아있는 정상적인 사람, 특히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칼이나 도끼로 자르거나 다른 방법으로 불구를 만든다거나 형상이 기괴한 괴물로 만드는 방법이다. 2) 『청패류초(淸稗類鈔)·곤편류(棍騙類)·채생절할(采生折割)』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거지는 틈만 있으면 사기 친다. 구걸할 때만 눈에 띠는 모습이 결코 아니다. 다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청나라 모 년 모 월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가마를 타고 종복과 함께 전당포에 갔다. 팔찌 한 쌍을 벗어 건네며 저당 잡히겠다고 했다. 주인이 받아서 자세히 검사해보니 누런 금색을 띠는, 진짜였다. 중량은 5량이었다. 팔찌 주인이 경전(京錢)1) 500관(串)을 요구하자 전당포 주인은 맡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다. 한 바탕 가격 흥정을 한 후, 300관에 저당하기로 하고 숫자대로 돈을 지불하는 전표를 발행해 주었다. 그 사람이 떠난 후 옆에 서있던 거지가 낡은 저고리를 벗어서 건네주면서 20관에 저당 잡히겠다고 하자, 전당포 주인이 고소한다고 난리를 쳤다. 거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짜 금팔찌를 300관이나 주었잖소. 내 이 저고리는 비록 낡기는 했어도 가짜는 아니잖소? 어찌 20관 가치가 없다는 말이오?” 그제야 전당포 주인이 의심이 들어 다시 팔찌를 꺼내 보았다. 금도금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알아챘소?” 거지가 답했다. “그 인물은 유명한 사기꾼이오. 그가 사는 곳까지 내가 알 정도니까.” 전당포 주인은 돈 2관을 보상해 줄 테니 자신에게 그 집까지 데려가 달라고 했다. 거지가 안내하는 집에 가보니 정말로 그 손님의 가마가 그곳에 있었다. 거지는 멀찍이서 그 손님을 가리키고는 돈을 받아들고 떠났다. 전당포 주인이 집안으로 들어가 봤다. 손님이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감히 떠들어대지 못하여 종복에게 손님을 불러달라고 한 후 언쟁을 벌였다. 손님이 말했다. “물건이 가짜였다면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내게 줄 수 있다는 말이요?” 안에 앉아있던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는 둘에게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후 손님에게 말했다. “우리는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부당하게 이익을 봐서는 안 되오. 시정 소인과 언쟁하면서 체통을 잃어서도 안 되지요. 귀하께서 저당 잡혀 가지고 온 돈은 아직 쓰지 않았잖소. 어찌 그냥 되돌려 주지 않는 게요!” 그 손님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따른다면서 전표를 내주고 팔찌를 돌려받았다. 전당포 주인은 기쁜 마음으로 전표를 받아들고 돌아갔다. 전당포 주인이 저녁 무렵에 돈으로 바꾸려 조폐국에 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표를 가지고 와서 현금으로 바꾸어 떠나버린 후였다. 조폐국에서 돈을 찾아간 전표와 전당포 주인이 가지고 온 전표를 대조해보니, 전당포 주인이 들고 있던 전표는 가짜였다. 전당포 주인이 다시 손님이 있던 집으로 찾아갔으나 벌써 떠나고 아무도 없었다. 거지도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알고 보니 염치없는 얼굴을 하고 나타난 거지와 사기꾼들은 한통속이었다. 짝을 이루어 사기 친 것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청나라 때 북경 지역에서 유행하던 가격 표준이다. 강희(康熙) 때에 무게 7분(分)의 소전(小錢)을 주조해 북경에서 유통하였다. 2문(文)이 대전(大錢) 1문에 해당하였다. 그 소전을 당시에 ‘경돈(京墩)’이라 불러, 북경 금전의 명칭이 되었다. 나중에는 1문 당 경전 2문으로 제조해 사용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등 양대 정당이 6·3 조기 대선을 불과 열흘 앞둔 시점에도 공약집을 내놓지 않아 유권자들이 ‘깜깜이 선거’에 내몰렸다. 국민의힘은 25~26일께, 민주당은 27~29일께 공약집을 공개할 예정이다. 결국 재외유권자는 공약집도 없이 투표를 마치게 됐다. 유권자 25만8254명이 20~25일 118개국 223개 투표소에서 투표하는데 공약집을 확인조차 못했다. 지역·주제별로 따로따로 내놓은 ‘쪽공약’만 공개됐다. 세 차례 TV토론 중 경제(18일)·사회(23일) 분야를 주제로 한 두차례 토론은 공약집 없이 진행됐다. 3차 토론이 27일이니 사실상 모든 TV토론이 ‘무無공약집 토론’이 될 판이다. 정책 토론과 상호 검증 기회를 양대 정당 스스로 차단하고 나선 것이다. 대선 사전투표는 29~30일 이틀간 진행된다. 지난해 총선의 사전투표 비중(46.7%)을 감안하면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공약집을 제대로 검토할 시간도 없이 투표를 하게 된다.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대선 공약집 늑장 제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된 박근혜 후보는 대선 9일 전, 문재인 후보는 10일 전에 각각 공약집을 공개했다. 국정농단 사태로 선거가 앞당겨진 2017년 조기 대선 당시 홍준표 후보는 22일 전, 문재인 후보는 11일 전 공약집을 발표했다. 2022년 대선 때 윤석열 후보는 투표 13일 전, 이재명 후보는 15일 전에 공약집을 제출했다. 앞서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공약집이 일찌감치 한달 전에 나왔다. 이회창 후보가 36일 전, 노무현 후보가 31일 전에 내놨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정동영 후보가 20일 전, 이명박 후보가 18일 전에 공약집을 공개했다. 결국 21대 대선은 역대 대선 중 가장 늦게 공약집을 내놓은 불명예를 안게 됐다. 대외적으로 ‘정책 경쟁’을 하자고 외치면서도 구체적인 정책자료집 공개를 미루는 것은 서로 ‘검증’과 ‘비판’을 차단·회피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공약을 검증하는 시민단체인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유권자들은 ‘검찰, 경찰, 감사원 등 권력기관 개혁’을 이번 대선의 1순위 의제로 꼽았다. 이어 ‘경제 회복 및 저성장 극복대책 마련’ ‘공정과 상식 회복 등 민주주의 복원’이 2·3순위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의 선택은 조금 달랐다. ‘국민 통합·사회적 갈등 해소’가 1순위였다. 이어 ‘인공지능(AI) 등 미래산업 육성’ ‘수도권 집중 완화 및 균형발전’이 2·3순위로 꼽혔다. 전반적으로 일반 유권자(국민)들이 전문가보다 훼손된 민주주의, 저성장의 늪에 빠진 경제 상황에 대한 우려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을 겪으면서 ‘민주주의 복원’ 의제가 새롭게 제기됐다. 유권자들은 각종 현안을 고소·고발 등 사법시스템으로 끌고 가는 정치 실종과 선출받지 않은 기관들의 과도한 정치 개입 및 월권을 지적하며 공정성 확보가 시급한 과제라고 인식했다. 저성장과 미국발 관세 후폭풍에 대한 걱정이 경제 회복 및 저성장 극복대책을 요구했다. 대선 공약집 발간이 공직선거법상 의무사항은 아니다. 앞서 12일 공개된 두루뭉술한 키워드 중심 ‘10대 공약’도 중앙선거관리원회가 임의로 제출받아 공개한 것이다. 유권자에게 발송되는 선거공보만이 의무사항이지만, 후보별로 공약을 비교해 파악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빈약하다. 대선 공약집은 후보자가 정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침서이자 유권자와의 약속이다. 그런데 공약집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2002년 16대 대선 이후 갈수록 발표가 늦어지는 추세다. 특히 이번 대선 공약집 공개가 가장 늦다는 것은 또 다른 ‘정치 퇴행’이다. 그 탓에 ‘정책 선거’가 자리 잡지 못한 채 정당과 후보들은 상대 말꼬리를 잡거나 잘못을 들춰내 공격하는 네거티브 선거전에 몰두하는 형국이다. 김문수 후보는 이재명 후보의 ‘커피원가 120원’ 등을 공격했다. 더불어민주당도 김문수 후보의 ‘미스 가락시장’ 발언 등을 비판했다. 후보들이 지금까지 내놓은 공약 가운데 재원 확보 방안과 실행계획이 없는 구호에 그치는 것들이 적잖다. 첫번째 경제 분야 TV토론에서도 후보들은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거나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답변으로 넘어갔다. 민생 현안과 국가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정책공약 경쟁은 뒷전인 채 상대방을 향한 인신공격이나 추문 들추기, 자격 시비, 색깔론 등 네거티브로 치닫는 선거전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부정적 캠페인에 유권자들이 노출되면 투표율이 5% 정도 떨어진다는 미국 대선 결과 분석(탈동원효과)도 나와 있다. 공약집 발간이 늦어질수록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설익은 공약이 국정과제로 이어져 부작용과 후유증을 잉태할 위험성도 커진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
1924년 9월 24일, 노신(魯迅)는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산문시를 발표하였다. 『야초(野草)』집에 수록된 산문시로 상징과 사실 수법으로 묘사하였다. 나는 벗겨진 높은 벽을 따라 부드러운 먼지를 밟으며 걸어간다. 나 이외에 몇몇이 제 갈 길을 걷는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벽 위로 솟아오른 높은 나뭇가지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잎을 단 채 내 머리 위에서 흔들거린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사방이 온통 먼지다. 한 아이가 나에게 구걸한다. 겹옷을 입었다. 슬프거나 근심스럽게 보이지 않는데 막아서며 절하고 쫓아오며 애원한다. 나는 그의 말투와 태도가 싫었다. 나는 슬프지도 않으면서 장난치 듯 하는 그가 싫었다. 나는 쫓아오며 애원하는 그에게서 진저리가 났다. 나는 길은 걷는다. 나 이외에 몇몇이 제 갈 길을 걷는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사방이 온통 먼지다. 한 아이가 나에게 구걸한다. 겹옷을 입었다. 슬프거나 근심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벙어리이다. 양손을 나란히 벌려놓고 손짓한다. 나는 그의 손짓이 싫다. 그리고 결코 그는 벙어리가 아니다. 구걸하는 방법일 뿐이다. 나는 희사하지 않는다. 희사할 마음도 없다. 나는 단지 자선가보다 높은 자리에서 혐오와 의심과 증오를 보낼 뿐이다. 나는 무너진 토담을 따라 걷는다. 잘린 벽돌이 무너진 돌담 사이에 쌓여있다. 돌담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산들바람이 가을 한기를 내 겹옷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사면이 온통 먼지다. 나는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구걸할지를 생각한다. 소리를 낸다면 어떤 말투로 할까? 벙어리로 가장하면 어떤 손짓으로 할까? ... 나 이외에 몇몇이 제 갈 길을 걷는다. 나는 앞으로 보시를 받을 수 없고 베풀어 도우려는 마음(布施心)도 얻을 수 없으리라. 나는 앞으로 자선가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혐오, 의심, 증오만을 받게 되리라. 나는 앞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침묵으로 구걸하리라! ... 나는 적어도 허무는 얻게 되리라. 산들바람이 불어와 사면이 온통 먼지다. 나 이외에 몇몇이 제 갈 길을 걷는다. 먼지, 먼지... ... 먼지... 과거에 노신 작품을 평가할 때 학계에서는 예술의 상징과 사실 두 방면만 주의할 뿐이었다. 요 몇 년, 중국에서는 작품의 상징 의의를 더 중시하고 있다. 그중에는 생경한 정치공리주의를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경우도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인문과학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다. 노신을 연구한 일본 학자 오다 타케오(小田岳夫)는 노신의 산문시 중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당시 회색의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중국학자는 문제를 제기했다. “노신 『야초』 속에는 분명 비교적 농후한 허무와 비관적 정조가 노출되어 있다. 그렇다고 「구걸하는 사람」이 그런 허무, 비관의 ‘회색의 심경’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신은 전편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싫어하고 암울과 허무를 부정하였다. 그는 항쟁으로 암울한 사회를 벗어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표정의 소침은 내심의 치열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구걸하는 사람」의 서정적 특색이다.”(「손옥석(孫玉石), 『야초』 연구」) 과연 그럴까? 「구걸하는 사람」의 상징과 사실 두 방면 중 어느 한쪽도 버려서는 안 된다. 사실, 노신은 이 산문시에서 사실 방면에서 거지들의 관용적인 사기 수법을 주의해 드러내 보였다. 예를 들어, “슬프거나 근심스럽게 보이지 않는데 막아서며 절하고 쫓아오며 애원한다.” “슬프거나 근심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벙어리이다. 양손을 나란히 벌려놓고 손짓한다.” 이 모두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보이는 사기 수법이다. 그렇기에 노신은 명확히 표명하였다. “나는 그의 말투와 태도가 싫었다. 나는 슬프지도 않으면서 장난치 듯 하는 그가 싫었다.” “나는 그의 손짓이 싫다. 그리고 그는 벙어리가 결코 아니다. 구걸하는 방법일 뿐이다.” 이런 사기술과 위장은 한 세대 한 세대 전승되고 연속돼, 반복적으로 희사자의 측은지심을 찔렀다. 그래서 노신은 말했다. “나는 희사하지 않는다. 희사할 마음도 없다. 나는 단지 자선가보다 높은 자리에서 혐오와 의심과 증오를 보낼 뿐이다.” 세상사가 늘 변하는데 누가 감히 자신의 일생 중 결코 거지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노신도 자신이 그러한 지경에 빠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상하였다. “나는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구걸할지를 생각한다. 소리를 낸다면 어떤 말투로 할까? 벙어리로 가장하면 어떤 손짓으로 할까?..." 그런데 노신은 사기 치지는 않고 그저, “나는 앞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침묵으로 구걸하리라!” 결과는 어떻게 될까? “나는 앞으로 보시를 받을 수 없고 베풀어 도우려는 마음(布施心)도 얻을 수 없으리라.”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선가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혐오, 의심, 증오만을 받게 되리라.” 「구걸하는 사람」은 직관적으로 거지가 행하는 사기라는 상투 수단을 드러내 보이면서 당시 사상가의 관점을 표현하였다. 적어도 「구걸하는 사람」의 예술 상징 방면에 대하여 이미 많은 학자가 세간에 해석을 해놓았기에, 굳이 이 글에서 논술할 내용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언급한 것은, 거지의 사기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 따름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나무 낚시가 적합한 제주바당 제주바다는 검은 현무암 돌투성이가 땅과 바다에 주를 이룬다. 화산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물은 쉽게 찢겨서 대나무 낚시가 발달했다. 조간대에서는 보이는 것도 돌이요, 보이지 않는 해저도 돌로 꽉 차있다. 그래서 해안에는 아무데나 배를 댈 수가 없다. 현무암 무더기 틈새로 작은 포구들이 마을과 인접해서 이루어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주바다는 암초와 암반이 발달해 있어서 소위 정착 생물의 서식환경이 좋은 편이다. 약 250여종의 해조류가 제주 연안을 중심으로 자라고 있다. 특히 해조류를 주먹이로 하는 오분자기, 전복, 소라, 조개 등 150여 종의 패류가 이와 관련하여 서식하고 있다. 제주해안은 겨울에도 수온이 따뜻하여 여러 가지 어류들의 산란장으로 적합하거나 겨울을 지내기 좋은 여건에 있어서 350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이는 동해나 서해에서 흘러드는 한류와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제주도 어장은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어민들이대거 침탈하였다. 비양도, 가파도, 우도 등 곳곳에 어물 창고를 만들고 나가사키 방면으로 수송하여 돈을 벌었다. 일제감점기에는 하루에 200척이상 제주바다를 침탈했다. 흥미롭게도 약 300년 전에 저술된 이형상의 《남환박물》에는 제주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는 제주에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어장(漁場)이나 그물(漁網)을 사용하는 바가 없고, 단지 낚시질로 고기를 잡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 해역이 화산암 투성이어서 일부 해수욕장 외에는 그물 사용이 어렵다. 물고기 종류로는 상어(鮫魚), 악어(鰐魚), 고래(鯨魚), 문어(文魚), 고등어(古刀魚), 멸치(行魚), 생어(生魚), 옥돔(玉頭魚), 날치(飛魚), 은어(銀口魚), 숭어(秀魚), 오징어(烏賊魚), 방어(魴魚) 등이 난다고 하며, 특히 우도 등지에는 혹 수달(水獺)이 있다고 전한다. 또한 지금의 우리가 아는 흔한 토착 어종의 이름인 고맹이(놀래기), 복쟁이(복어), 멩치(쑤기미), 보들래기(장글레기), 눈큰볼락, 손치, 어렝이, 우럭, 졸락, 패감생이들은 소위 대나무로 하던 바다 낚시나 고망 낚시를 해본 사람들에게 추억이 되는 물고기들이다. 전문 낚시꾼들은 흑돔, 감성돔, 황돔, 다금바리 등의 고급어종들을 선호하고 있다. 서촌에서는 원담, 동촌에서는 갯담 원담은 원, 갯담, 개라고도 한다. 원담은 제주의 원시적 어로 시설이다. 원담은 해안에 작은 여가 형성된 곳을 서로 이어 막아 밀물 때 고기가 들어오게 하고 썰물 때 가두어진 고기를 잡는 돌담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원(垣), 담(垣)은 오래전 한나라 때부터 생긴 말로 하늘의 천체 속 자미원(紫薇垣), 태미원(太薇垣), 천시원(天市垣)에서 유래했다. 여기에서 원은 28수(宿)를 모은 무리 진 하늘을 3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둘레를 지은 형태를 말한다. 산담 또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이 깃들어 있는 바 이 삼원(三垣)과 관련이 깊다. 산담이 하늘을 염두에 두고 망자가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에 머문다는 말로 해석된다. 즉 체백은 땅에 머물고, 혼백은 하늘로 간다는 것을 상징한다. 원담은 바다 방향은 완만하게 만들고 마을 방향은 수직으로 만들어 고기가 들어오기는 쉬우나 썰물이면 막혀서 못 나가게 만든 겹담 구조의 돌그물이다. 원담의 형태는 ㄱ자형, 一자형, ⁀형 등 다양한 모양이 있다. 원담은 마을마다 원, 갯담, 개라고도 불렀다. 모슬포는 원담이라고 부른 것과 달리 구좌읍 동복, 김녕, 행원, 월정, 평대, 세화, 하도지역에는 갯담, 개라고 부른다. 원담에는 주로 멜이 들었고, 그 뒤를 따라 갈치도 따라올 때도 있었다. 고도리(고등어 새끼), 각재기 등의 어종도 있었다. 원담에 멜이 들면 개인용 사둘이나 족바지로 잡는다. 큰 규모로 멜을 잡을 때는 그물접의 계원들이 공동으로 잡았다. 원담은 어선이 등장 않던 시기의 어로 방식으로 작은 마을 단위로 골을 만들어 원담을 쌓았다. 크기는 약 100평의 작은 원담에서 1500평의 큰 원담까지 마을의 규모와 지형에 따라 다양하다. 높이는 80cm~1m 내외, 넓이 1.5m 정도로 두 사람이 왕래할 수 있다. 또 이 원담은 허채(許採)시 미역이나 천초 등의 해산물을 나르는 길의 역할도 병행했고, 마을 어린아이들의 안전한 물놀이 터가 되기도 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사기는 거지가 쓰는 상투적인 수법이다. 틈만 나면 상용한다.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사기 친다. 다음 사례를 보자. 나이가 많은 귀머거리 거지가 무릉(武陵) 성문 밖 번화한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문을 닫으면서 신호기를 올리며 징을 칠 때 즈음, 군선(軍船) 한 척이 정박하였다. 선실에 앉아있던 5품 관리가 고개를 내밀어 기슭에 있는 귀머거리 거지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선실로 데리고 오게 하였다. 선실에 들어서자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A씨의 큰아들 아니십니까? 이전에 저를 수양아들로 삼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공명을 얻어, 지금 관리가 됐습니다. 양아버지가 궁핍하게 되어 이런 지경에까지 전락했다니. 실로 저의 죄입니다!” 늙은 거지는 관리가 사람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직 맞장구 쳤다. “나는 나이가 들어 흐리멍덩해졌소. 지난 일은 모두 꿈속 같구려.” 5품 관리가 말했다. “이리저리 떠다니며 객지에서 고생했지만 모습이나 체격은 크게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그러고서는 사람을 시켜 거지에게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 군선이 외지고 조용한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1개월 넘게 봉양하였다. 머리를 빗질하고 알아차리지 못하게 고무 분말로 색을 입히니, 거지는 환하게 빛나는 영감으로 변했다. 그때 관원이 거지에게 말했다. “제 옷을 입기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시장에 가서 비단을 사와야겠습니다. 잘 입으셔야 저와 함께 임지에 부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양부께서 현지에서 구걸하면서 지내셔서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체면이 서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점포에 가서 물건을 볼 때, 마음에 들면 고개를 젓기만 하시면 됩니다. 말은 절대 하지 마시구요.” 거지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둘은 5품 의관을 차려 입었다. 가마 두 대에 올라 종복 2명을 대동하여 기슭에 있는 마을로 들어갔다. 먼저 금은방에 들러 4량이나 나가는 금팔찌 2쌍을 샀다. 점주에게 비단가게에 가서 한꺼번에 은량으로 값을 쳐서 주겠노라고 했다. 그러고는 비단가게로 들어가서 사려고 하는 품목 표를 점주에게 건넸다. 표에 적혀있는 물품을 보니 3000여 원에 달하지 않는가. 손 큰 구매자였다. 당장에 객실로 청하여 정성스럽게 접대하였다. 점주는 은밀하게 함께 온 종복에게 사실을 탐지하였다. 젊은이는 관원으로 엄주(嚴州) 이부(二府)이고 늙은이는 그의 부친이라 하였다. 이부의 누이동생이 수군(首郡) 지부의 아들과 혼약했는데, 도시에서 결혼식 올리러 가는 도중이라 하였다. 사려고 하는 물품은 시집갈 때 가져가는 혼수품이라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점주는 각별히 비위를 맞추며 술상까지 차려 융숭히 대접하였다. 그 관원이 금은방 주인을 초청하여 같이 앉아 어울리면서 자기의 좋은 친구라고 추켜세웠다. 점주도 연거푸 대답하며 순응하면서 자신이 영광스럽다고 생각하였다. 연회가 파하자 비단가게 점주는 여러 가지 비단, 모직물을 꺼내어 늙은 거지에게 일별해 선택하라고 보여주었다. 늙은 거지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급해진 점주는 곧바로 물었다. “이것들은 고급 물품입니다. 황상께 올리는 공물로도 쓸 수 있습니다. 옷을 만들어 입어보도록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때 젊은 관원이 말했다. “내 부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누이동생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마음에 드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곧바로 가마꾼을 불러 물품을 들게 하고 시종 한 명을 붙여 호송하도록 해서 보냈다. 오랫동안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재촉하라고 다른 시종을 보냈다. 그때 가마꾼이 소식을 알리러 왔다며 먼저 돌아왔다. 아가씨가 보낸 여러 색깔의 비단이 마음에 들어 모두 남겨두라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어떤 품질의 은량으로 지불해야 좋은지 모르니 관원이 직접 가서 점검해 달라한다고 전했다. 그 관원이 늙은 거지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잠시 여기에 계셔주세요. 제가 가서 은자를 골라 가지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가마를 타고 떠났다. 군선에 도착한 후 관원이 가마꾼들에게 두둑하게 챙겨주면서 고생했으니 먼저 이 돈으로 식사를 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가마꾼들이 떠나자마자 군선은 출항하였다. 늙은 거지와 점주는 오랫동안 점포에서 기다렸으나 돈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금은방 주인과 비단가게 점주가 당황해서 늙은 거지에게 캐물었다. 늙은 거지는 켕기는 것이 있었기에 대답하는 말이 군색하고 억지스러웠다. 결국 상대방에게 붙들려 현아로 끌려갔다. 현령이 늙은 거지를 심문한 후 사기 당한 사실을 확인했으나 달리 처리할 방도가 없었다. 쫓아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늙은 거지가 현아에서 석방될 때 여러 사람이 모여들어 입은 옷들을 전부 벗겨내어 가져가 버렸다. 5품 관원의 신발과 모자는 시의에 맞지 않았고 일반 백성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남겨 두었다. 이후 그 늙은 거지는 머리에는 5품 관모를 쓰고 발에는 관원의 신발을 신고서 벗은 몸으로 여전히 길거리에서 구걸하였다. 그런 늙은 거지의 모습을 보면서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야기 속의 늙은 거지는 원래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잘못된 것을 그대로 계속 밀고 나가며 사기 칠 기회를 엿보다가, 그중에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결국 사기꾼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한 차례 안락한 생활과 존귀함을 누리기는 했으나 마침내 찾아온 좋은 상황이 그리 길지 않았으니. 낡은 옷조차도 입지 못하고 또다시 예전처럼 구걸하며 살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야했다. 거짓으로 양아버지로 삼아 가짜를 진짜로 성심껏 모시면서 사기 칠 계책은 세운 사기꾼은, 일찍부터 거지들이 기회만 생기면 사기 치려한다는 것과 무뢰한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렇다. 네가 나에게 사기 치려니 나도 네게 사기 치는 것, 한패가 되어 못된 짓을 하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상이 다 밝혀지니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슬픈 희극이 아닌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거지 무리가 저지른 가장 중심 되는 악행은 사기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세상은 늘 바뀌고 사기술도 변하기에 세상 사람은 결국 다시 속임수에 걸려든다. 그러니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거지 사기술은 약간의 노리기(노림술)일 뿐이다. 새로운 술수를 부리고 기발한 생각을 해내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자주 썼던 거지의 사기술 몇 가지를 보자. 청나라 때에 A씨가 타인이 일을 하는 데 중간에서 증인을 서주기로 하고 모두가 공소(公所, 동업자 조합 사무소)에 함께 가서 은량1)을 봉하여 저장하기로 하였다. 은량을 저울질할 때 마침 대나무 바구니를 손에 든 거지가 와서 구걸했다. A씨가 부스러기 은전 몇 개를 건네주었다. 거지가 적다고 했다. A씨가 화나는 척하며 거지가 들고 있는 낡은 옷으로 덮여있는 바구니에 원보를 던져주면서 질책하였다. “네가 바라는 것이 이거냐?” 거지는 질겁해서 말했다. “부자 어른께서 몇 푼 던져주고 싶지 않으면 주지 않으시면 될 일이지, 그렇게 화까지 내고 그러십니까?” 그러고는 바구니에서 원보를 꺼내어 탁자위에 올려놓고 다른 돈은 받지도 않고 떠났다. 나중에 피해자가 봉인을 뜯고 나서야, 거지가 돌려준 원보는 가짜 돈이고 진짜는 가지고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A씨와 거지는 한통속이었다. 바꿔치기 수법으로 편취한 것이었다. 모과 회시 때에 각 성의 관용 수레가 경성에 군집하였다. 어떤 효렴(孝廉)이 유리창(琉璃廠)을 지날 때에, 남색 나사 마괘자를 손에 들고 장사하는 거지를 만났다. 보아하니 도둑질해온 것 같았다. 가격을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은자 2량이라 하였다. 가격이 너무 쌌기에, 효렴은 기뻐 당장에 샀다. 돌아간 후 효렴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장안 생활이 쉽지 않다고 했는가. 달랑 은자 2량으로 나사 마괘자를 살 수 있잖은가.” 사람들이 믿지 않자, 보여줄 요량으로 옷 보따리를 열었다. 그런데 질척질척한 흙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정말로 마괘자인줄 알았잖소. 흙이라니. 그러니 은자 2량인 게지요.” 효렴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분명히 마괘자였는데. 어떻게 흙으로 바뀔 수 있지?” 사람들은 바꿔치기 수법에 당했다고 알려주었다. 먼저 흙이 든 보따리를 숨겨뒀다가 매매가 성립될 때에 진짜 물건과 교묘하게 바꿔치기 한 것이었다. 바꿔치기 한 것이 들통 나서 팔지 못하게 된다하더라도 되돌려 주면 그뿐이었다. 아니, 옆에 있던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손에서 뺏어가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사는 사람은 장물을 사려했다고 고발당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니, 그저 사기 당해 손해 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소한 것에 욕심을 부리는 그런 사람은, 어떤 일에 연계시키기만 하면 계략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은 이익을 탐하다가 큰 손실을 보는 게 인생사이지 않던가. 바꿔치기 수법은 거지들이 상용하는, 또 짝과 공모하여 저지르는 사기술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은량(銀兩), 옛날 화폐로 사용한 은이다. ‘양(兩)’을 단위로 중국 각지에서 통용되었던 본위 화폐로, 정해진 화폐는 없고 ‘원보은(元寶银)’, ‘마제은(馬蹄银)’ 등으로 통용하고 실제로는 ‘원(元)’으로 환산해 사용하였다. 1935년에 ‘폐량개원(廢兩改元)’이 실행돼 폐지되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거지가 있는 반면에 물에 빠져 죽은 거지의 시신을 부친과 남편으로 오해하여 상복을 입고 효경을 다한 경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청나라 때 남정원이 『녹주공안』에 기록한 내용이다. 남정원 본인이 광동 보녕(普寧) 현령으로 있을 때 친히 경험했던, 숨겨져 있던 일을 밝혀내어 고발했던 살인사건이다. 현민 정후추(鄭侯秋)의 처 진(陳) 씨가 어떤 사람이 자기 남편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현아(縣衙)에 고발하였다. 진 씨의 말은 이랬다 : 남편이 남동방(南董坊)의 보장1)을 담당하고 있을 때에, 소방무(蕭邦武)가 계약서를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숨기자 남편이 그것을 따지니 앙심을 품고 있었다. 소방무는 11월 13일에 폭도들을 데리고 정 씨 집으로 몰려가서 재산을 강탈했다. 남편은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중상을 입고 피할 데가 없어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시체는 지금 협산(峽山) 개천에 있다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죽은 사람의 아들이 배를 타고 가서 시신을 싣고 와서 현령에게 검시해 달라고 했다. 죽은 사람의 손톱에 진흙과 모래가 잔존한 것을 보니 익사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상흔 하나 없는 몸에 얼굴만 식별하기 어렵게 변해 있었다. 진 씨 모자는 상복을 입고 애통하게 울면서 현령에게 소방무 등의 목숨으로 보상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자료와 의혹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후추가 평상시에 도적들의 범행을 내버려둬서 백성에게 해를 끼친 까닭에 관부의 추문이 무서워 도망간 것이 분명했다. 처자는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모함하고 있었다. 삼일도 지나지 않아 부근 혜래(惠來)현에 숨어있던 정후추가 체포되면서 사건이 해결되었다. 진상이 확연하게 밝혀지니 칭찬이 자자했다. 마지막에 남정원이 말했다. “그 시체는 어디에서 가져온 것이냐 물으니, 물에 빠진지 오래된 주인 없는 거지 시체를 실어왔다고 한다. 지금 가짜 아들, 가짜 처가 남편을 위하여 상복 입고 효를 다하며 상장을 짚어 입관하고 장사를 지내니, 체통이 어찌 서겠는가. 그 거지도 웃음을 머금고 구천으로 갔을 것이다.” 『의옥집』에 기록된 무참하게 머리를 잘리어 증거물로 변한 억울한 거지와 비교하면 물에 빠져 죽은 배고픈 거지는 행운인 셈이다. 그러나 거지로 전락하면 결국 배고픔과 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갈 데 없게 된다. 종국에는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은 어쨌든 처참하지 않은가. 이러한 무고의 살인사건이 아니더라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가련한 벌레처럼 조용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거짓 장례식이 거행된다하여도 무슨 필요가 있을까? 살아있을 때 그에게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도 실컷 먹게 하여 편각이라도 인생 여정을 연장시키는 것보다 못하지 않는가. 생활이 곤궁해 초라하게 되어 죽는다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손면(孫沔), 거지를 혹형으로 다스리다 거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도둑질하기도 하고 사기 치기도 하고 강탈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는 흔히 볼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절옥귀감』 권5의 기록을 보면 송나라 때에, 추밀부사 손면(孫沔)이 항주지사를 담당할 때 왼쪽 손은 없고 오른쪽은 두 손가락만 있는 거지가 가난뱅이 집의 솥을 훔치다가 싸움이 붙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거지는 손이 잘린 왼쪽 팔을 들고 울면서 말했다. “가난뱅이가 저를 모함하고 있습니다! 손도 없는 거지가 어찌 솥을 훔친다는 말입니까?” 손면은 곧바로 동의하면서 가난뱅이를 책망하며 쫓아냈다. 그런 후 부드러운 말로 거지를 안위하고는 솥을 건네주었다. 거지는 처음에는 받지 않자 손면이 몇 차례 더 안위하였다. 그러자 거지는 손면의 속셈을 모르고 남아있는 두 손가락으로 솥을 들고 팔을 이용하여 천천히 들어 머리에 얹혔다. 가만히 보고 있던 손면이 사람을 시켜 다시 잡아오게 한 후 그의 손가락을 잘라 대중에게 보였다. 그런 판결에 대해 손극(孫克)은 평했다. “간악한 일을 징치하는 것은 중용의 도에 부합하지 않는다. 실제 부득이한 경우에만 그렇게 한다. 여공작(呂公綽)이 병사에게 특별히 사형을 판결한 까닭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군인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의 관계가 중대하니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 간악한 무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도리 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거지가 솥을 훔친 일은 지극히 하찮아서 말할 가치도 없다. 사실을 밝혀내면 그뿐이다. 법을 넘어 혹형으로 처벌했으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세속에서는 칭찬받아 명예를 드높일 수는 있지만 군자가 행할 일은 아니다. 특별히 여기에 그 일을 기록하고 그 뜻을 판별하여 분석해 놓으니 간악한 사람을 징치하는 데에 경계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정극은 손면이 솥을 훔친 거지에게 남은 손가락마저 잘라버리는 참형을 내린 것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양형이 과중하다고 보고 ‘법의 정도를 넘은 혹형’이라고 단언했다. 사실 너무 과했다. 잔인하다 아니할 수 없다. 달리 생각해보자. 훔친 것이 맞다하더라도 남은 삶은 또 어떻게 꾸려나가야 한단 말인가. 거지의 처지가 불쌍할 뿐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옛날 보갑제도(保甲制度)의 보장이다. 청대(淸代)에는 ‘보정(保正)’, ‘지보(地保)’, ‘지방(地方)’, ‘지갑(地甲)’, ‘리서(里胥)’라고 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거지 구성원 성분은 대단히 복잡하다. 예부터 그랬다. 이것이 거지가 자주 범죄에 연루되는 기본적인 원인이다. 송나라 때 정극(鄭克)이 편찬한 『절옥귀감(折獄龜鑑)』에 ‘위정람상(韋鼎覽狀)’의 일을 기술하고 있다. 위정(韋鼎, 515~593)이 광주자사(光州刺史)에 부임했을 때 손님으로 갔다가 주인집 첩과 사통한 사건이 벌어졌다. 손님이 돌아갈 때를 기다려 첩이 귀중한 재물을 훔친 후 야밤에 도망쳤다. 오래지 않아 죽임을 당하여 풀덤불에 던져졌다. 주인이 손님과 첩이 사통했다는 것을 알고 손님이 첩을 살해했다고 고발하였다. 현리가 심문한 후 손님과 첩이 간통한 죄상을 파악하고 손님을 사형에 쳐하도록 판결하였다. 사건 심리가 종결되어 주부에 보고하였다. 위정이 안건을 살핀 후에 말했다. “이 손님은 간통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모 사찰의 승녀가 첩을 기만하여 재물을 훔쳐오도록 한 후 사찰의 노예를 시켜 그녀를 죽이도록 하였다. 장물은 지금 모처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곧바로 손님을 석방하고 중을 체포토록 했으며 동시에 장물을 찾아내었다. 이때부터 관할 지역 내에 질서가 잡혔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태평하고 기풍이 올바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성도고금기(成都古今記)』에서 소회무(蕭懷武)의 일도 기록하였다. 오대시기에 전촉(前蜀) 후주의 부하 중에 소회무라는 관리가 있었다. 특무 조직 ‘심사단(尋事團)’을 책임지고 있었다. 본래 순군(巡軍)과 같은 직무였다. 그는 100여 명을 관할했고 그들 각각은 십여 명의 심복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모이고 흩어지니, 사람들이 판별하기 어려워 ‘개’라고 불렀다. 큰 길이나 작은 골목에서 무의(巫醫), 술집 심부름꾼, 거지, 고용인부, 장사꾼(행상인), 심지어 아동 중에도 그들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민간 백성의 사사로운 비밀도 그들은 모르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주군(州郡) 관부나 훈신 귀척의 집에서 밥 짓고 말을 기르고 수레를 몰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공적 사적의 모든 동정을 아무 때나 소회무에게 비밀리에 보고하였다. 이러니 사람들은 두려워졌다. 자기 신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소회무의 앞잡이라 의심하였다. 소회무는 그것을 빌미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원성이 조정 내외에 가득했다. 곽숭도(郭崇韜)가 군대를 거느리고 촉에 입성한 후 그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참수 시켰다. 이에 대해 정극은 말했다. “이것이 간악한 사람을 정탐하다가 오히려 간악하게 되는 사례다. 눈과 귀가 되어 감시할 수 있는데 어찌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여 원망이 생기겠는가?” 거지도 그 사이에서 어릿광대 역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팔 잘린 거지, 알고 보니 도적이었다 도적질을 하다가 곤궁해져서 거지가 되기도 했다. 청나라 광서 23년(1897), 소흥(紹興) 수징교(水澄橋) 다리 어귀에서 두 팔이 없는 거지가 구걸하러 다녔다. 그는 아무 때나 두 다리로 골패를 가지고 놀면서 도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발가락으로 기와 조각을 집고 수십 보나 멀리 던지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 소년 시절에 악인의 유혹에 빠져 도적이 됐다. 한번은 복건(福建)에 있는 모 부잣집에 도둑질하러 갔는데 그 집에서 방비하고 있었다. 곧바로 지붕으로 도망쳤지만 은밀히 추적하는 사람을 따돌리지 못했다. 저항할 틈도 없이 왼쪽 팔이 잘려나갔다. 아픔을 참으면 간신히 담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나중에 1척 정도까지 추격해 온 사람에게 오른쪽 팔까지 잘려나갔다. 다시 추격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자 사찰에 들어가 숨었다. 사찰의 스님은 자비로웠다. 의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치료까지 해줬다. 3개월 정도 지나서야 아물었다. 원래 패거리가 3명이었는데 2명은 사로잡혔다. 어쩔 수 없이 혼자 구걸하면서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는 두 팔이 없지만 능히 뛰어오를 수 있었다. 빙 둘러선 구경꾼들이 돈을 주겠다며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가 다리 어귀에서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면 착지할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의 경공(輕功)은 여전했다. 이 사례는 거지의 출신성분을 보면 숨어 지내는 범죄자도 받아들여 은닉시켜주는 단체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반대로 무고한 거지를 억울하게 죽이는 경우도 생겼다. 『의옥집』 권10에 집록된 『포급람원개(捕急濫寃丐)』의 기록이다 : 선현(宣縣)과 흡현(歙縣) 사이에 있는 지역에 강도가 밤에 길을 가던 행인을 죽이고 목을 잘라 머리만 가지고 사라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날이 밝아올 때, 길 가던 사람이 거기에서 피를 밟아 넘어졌다. 급히 혐의를 벗으려 애썼으나 관부는 살인범으로 몰아 옥에 가둬버렸다. 그런데 맞춰 볼 사람머리가 없으니 안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상부에서는 기한을 두고 빨리 해결하라 다그쳤다. 포리(捕吏)는 병이 들어 거동하기 힘든 거지의 머리를 잘라 숫자를 채웠다. 살인 혐의를 받아 옥에 갇힌 그 사람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어쩔 수 없이 허위자백 했다. 결국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중에서야 진범이 잡혔다. 하지만 이미 길을 가던 무고한 사람과 불쌍한 거지가 죽임을 당한 후였다. 흉악범 한 명에, 원혼이 세 명이나 생겼다. 거지는 무슨 잘못이 있는가. 무고한 사람을 남살하는 관부는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더욱이 거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시신에 머리가 없다고 거지의 머리를 잘라 숫자를 채우다니.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세속 관념 중 거지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비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물의 화원(畫園), 동물 그림의 정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 기획은 9명의 화가가 참여하고 있는데 중견작가 3명과 청년·신진작가 6명이 동물 주제를 가지고 마련하였다. 동물 그림의 정원이라는 주제에 걸 맞게 모두 포유류나 조류와 같은 동물을 그린 그림들이다. 그래도 동물에 관심이 있는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강부언의 바다는 숨을 죽이고 있다. 무엇인가 기다리는 의아한 분위기이다. 해안에서 고즈넉히 쉬고 있는 백로의 무리들은 순백의 형상이 오늘따라 순수하게 느껴진다. 백로들은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 희다. 흰 것은 고고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한한 바다를 바라보는 그들의 앞날에 변해가는 환경의 배반이 짙은 슬픔으로 배어난다. 오승익은 자신의 인생 경험에 말못하는 고통이 있었다. 붉은 색은 그의 감정의 색이다. 강렬한 븕은 색의 한라산 아래 작가의 변신처럼 마소가 침묵 상징이 되고 있다. 살암시민 살아지는 삶은 인고(忍苦)의 언어이다. 그러나 한라산의 아픈 침묵을 깨려는 듯 마음은 어느새 산자락 아래 무겁게 서 있다. 이미선은 남방돌고래의 빠른 유영에서 바다 평원을 구르는 파도에 감기는 동물의 아름다운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돌고래가 화가 자신이 되는 순간 바다는 새롭게 사유하는 공간이 된다. 세상의 비밀은 운동성에 있으며, 만물은 모두 움직이고 생명의 역동은 움직일 때 다시 살아난다. 물결이나 선이나 동작은 서로 연결돼 있어서 그것들의 관계에서만 예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김산은 만월, 원시림, 물을 통해서 자연은 하나이면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의 조화이다. 작가는 자연 자체이면서 자연의 매개자인 백록을 통해, 인간의 염원으로서 오래된 미래의 이상향을 꿈꾸고 있다. 김원재는 신비하게 생각되는 흰 까마귀를 등장시켜 사회 속의 다름과 이질적인 차이에 대해서 고민한다. 우리 사회에서 다름이란 마치 환경에서 천적에게 노출된 것처럼 따돌림되기 일쑤다. 그렇지만 환경은 스스로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그것이 자연과 인생의 생태계와 비슷하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김지훈은 추상을 마치 의식의 흐름인양 보여준다. 새소리를 그려보자는 의도인 것 같다. 세상은 소리로 꼭 차 있다. 인간의 오감 중에 눈은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고, 청각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린다. 소리는 비가시적이지만 어떤 형태를 선명하게 연상할 수가 있다. 소리의 형태적 표현이 리듬이 되는 데 형태와 색채의 음악성이 바로 그림이 된다. 정재훈은 고양이를 그리고 있다. 얼룩은 고양이의 특성을 나타내지만 유추해보면 삶에서 겪어야하는 수많은 사건이나 공포들의 반영처럼 보인다. 홀로 섬에 있다는 것은 물에 갇힌 존재의 고독으로 보이며, 사회적 환경에서 묻어나는 온갖 얼룩은 그래도 평온과 안정의 숲으로 돌아가려는 자신의 처지를 이겨내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허진혁은 말의 슬픈 눈동자를 통해서 화가의 삶을 들여다본다. 표현의 자유는 방대하지만, 과연 제도, 명예, 삶은 우리 사회로부터 어느 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가? 예술가의 인생은 마치 첩첩산중을 홀로 가는 말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늘 맛닥뜨리는 현실은 맑은 눈동자에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게 한다. 존재는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은 자유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희망일 것이다. 유찬우는 뱀과 도마뱀을 그린다. 원래 뱀은 도마뱀에서 진화하여 지금은 종류가 3700종이나 된다. 유찬우의 뱀은 비바리뱀이다. 비바리뱀은 우리나라 제주도에만 존재하는 희귀종으로 북방한계선이 된다. 도마뱀은 토종으로 산야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줄장지뱀과 다르다. 뱀의 상징은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악의 화신이지만 제주도에서는 칠성신이 된다. 뱀의 생태적 특성이 집을 지키고 쥐를 퇴치하므로 곡식을 지키는 부자의 상징으로 여기며, 칠성신앙은 모계로 전승된다. 칠성은 말 그대로 북두칠성에서 기원하여 죽음을 관장하여 인간의 목숨과 수명을 관리한다. 사실 선과 악은 인간의 가치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담론이며 도덕 윤리 또한 해당 사회의 셰계관에서 비롯된다. 청사는 신성하고 도마뱀은 약자의 생존전략과 닮았다. 변신은 변화이며, 다른 것으로 전환이고 생성과 소멸은 생태계의 조화일터이다. 선악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중국어 ‘공안(公案)’이란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옛날 관부의 공문서 〔안독(案牘)〕, 심리 용도로 쓴 탁자, 안건이나 사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송대 화본소설과 희곡의 한 부류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시비를 판단하는 관청의 문서의 뜻을 빌어 선배 조사의 언행 범례를 가리키기도 한다. 청나라 옹정 연간(1723~1735)에 광동성 보녕(普寧)현 지현을 역임했고 나중에 조양(潮陽)현을 겸치한 남정원(藍鼎元)은 탄핵되어 관직을 잃은 후에 자신이 역임했던 시기에 판결했던 안건을 모아 『녹주공안(鹿洲公案)』 상하 2권, 24편을 편찬하였다. 남 씨는 자가 옥상(玉霜)이고 ‘녹주’는 호이다. 『청사고(淸史稿)』의 「순사전(循史傳)」에 그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를 다음처럼 평했다. “도적과 송사 대리인을 잘 다스렸다.” “신처럼 사건을 심리하였다.” “소송사건을 판결하면서 여럿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았고 논하는 데에 엄격하여 흠이 없었다.” 『녹주공안』 내용은 주로 불법을 저지른 아역(衙役)1)이나 소송 대리인 징치(懲治), 호강(豪强) 공격, 도적 숙청, 지방 치안질서 정돈, 미신 타파 등 지방 민사, 형사 사건이다. 여기에서 ‘거지와 공안’이라 제목을 붙인 것은 거지라는 성분이 복잡한 구성원으로 결성된 사회 집합체를 논술하고 그중에서 여러 형사나 민사 범죄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현상을 논술하는 데에 뜻이 있다. 이 단체는, 초기든 타락하여 변질된 이후든, 끊임없이 사회의 정상적인 생활 질서를 해쳤다. 사람들이 의지해 생존하는 사회 환경을 교란하고 손해를 끼쳤다. 나중에는 갈수록 엄중해져서, 결국 공해(公害) 중에서도 큰 재앙이 됐다. 근대 거지 항방(行幇)의 형성을 분계로 삼아 말한다면 이전에는 주로 개별 범죄 위주였으나 이후에는 단체 범죄 위주로 변했다는 특징이 있다. 거지가 모두 개방 한 곳으로 모여들어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은 아니다. 개방 중의 거지가 독단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총결해 보면 위에서 말한 분계선은 존재한다. 여기에서는 고금의 거지 안건 중에서 개인 단독 범죄가 단체 범죄로 변화되는 과정을 가지고 관련 사례를 열거하면서 거지 단체가 사회 범죄의 중요한 번식장소였다는 것을 알아보려 한다. 개방은 불량배들이 모여 범죄를 저지른 가장 큰 악의 축 ― 범죄의 ‘대본영’이었다. 거지가 돈을 돌려주다 물론 모든 거지가 다 나쁜 사람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가난해도 뜻을 잃지 않은 사람은 예부터 많이 존재했다. 효도하려고 걸식하고 부모나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구걸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 손을 뻗어 재물을 얻었으나 차마 그것 때문에 사람을 해치지 못한 사례도 있다. 청대 저인적(褚人荻)은 『견호광기(堅瓠廣記)』 권5에서 『백취쇄언(白醉瑣言)』 중의 ‘거지 환금’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 원충철(袁忠徹)이 사직한 후 사명(四明)으로 돌아가니, 어떤 참정이 찾아와 축하하였다. 나이가 많아 머슴애가 부축해 나왔다. 머슴애는 열두어 살 난 아이로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다. 기이한 용모로 곁에 서 있었다. 손님과 주인이 앉기를 기다리는데 원충철은 머슴애를 오랫동안 주시하였다. 참정이 물었다. “상보께서 주목하시는데 관상이 위험한 모양이지요?” 원충철이 답했다. “내가 보기에 저 아이가 현귀해질지 아닐지는 참정에게 달린 것 같소이다.” 참정이 말했다. “오늘까지 저 녀석은 무뢰한이었어요. 무슨 부귀가 생긴다는 말은 못하지요!” 원충철이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관상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나중에 머슴애는 참정의 집에서 제멋대로 굴다가 쫓겨나 결국 악묘(岳廟)에서 기거하고 구걸하면서 살았다. 어느 날, 어떤 부인이 보따리를 들고 악묘에 들어와 오랫동안 악비(岳飛)에게 기도하고 예배하였다. 한참만에야 떠났는데 보따리를 잊어버리고 그냥 놓고 나갔다. 거지가 다가가 열어보니 금은이 가득 들어있었다. 거지는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숨겨두었다. 얼마 없어 목 놓아 슬피 울면서 보따리를 찾는 부인이 나타났다. 거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꺼내 돌려주었다. 부인은 받자마자 은자를 꺼내 사례하려하자 거지가 말했다. “잘못알고 계십니다. 내가 사례를 받을 생각이 있었다면 어찌 모두 제 것으로 만들지 않고 이렇게 돌려줬겠습니까?” 부인이 상황을 살펴보고 물었다. “누구하고 같이 생활하니?” 거지가 답했다. “저는 무의무탁이라서 거지가 됐습니다.” 그 부인은 잃어버릴 뻔한 돈을 가지고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남편을 위하여 사명 지휘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가던 참이었다. 부인은 거지를 데리고 함께 갔다. 지휘사가 석방시켜주자 본래 자녀가 없었고 본가에도 같이 사는 사람이 없어, 그 거지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윤자(胤子)로 삼았다. 그때부터 거지는 현귀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비록 원 모의 주관적 상상과 멋대로 결론을 내린 부분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거지가 돈을 줍고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은 순박하고도 성실한 품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궁하다고 뜻까지 궁할까. 아무리 가난해도 포부는 변하지 않는다. 의롭지 않은 재물은 탐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한 품격은 모든 사람에게 있을 수는 없다. 영락하여 낡은 사당에서 지내는 거지가 그 일을 해냈다. 이야기의 결말을 보면 거지에 대한 작가의 예찬이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아역(衙役), 아역, 아속(衙屬). 관아(官衙)에서 부리던 하인이다. 청대(淸代), 각 관청에서 잡역에 종사한 사람이다. ‘토공(土工, 변사자 매장인)’, ‘개두(丐頭, 거지 단속인)’, ‘포갑(鋪甲, 구역 내 순시인)’ 따위를 총칭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