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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군사로 1000 왜구 격퇴, 을묘왜변 마침표 찍었다
"조선과 동아시아의 평화 정착 기여…모두가 기억해야"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인 1555년 을묘년 조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입했다.

 

제주와 전남에서 발생한 을묘왜변이다.

 

전남 영암을 중심으로 왜적의 침임이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을 무찌르고 왜변을 마무리 지은 곳은 제주였다.

 

이 승리를 '을묘왜변 제주대첩'이라 부르고, 제주 유일의 승전사로 입에 오르내린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제주 백성이 힘을 합쳐 왜적과 싸워 이긴 제주 유일의 승전사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의미를 알아본다.

 

◇ 70명의 날랜 군사와 치마돌격대로 왜구 격퇴

 

1555년 6월 21일 왜선 40여척이 제주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달 전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를 침략, 영암과 진도·강진·장흥 등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들이었다.

 

이들은 전라도에 큰 피해를 주고도 모자라 일본으로 돌아가는 대신 제주로 눈을 돌렸다.

 

애초 70여척에 달했던 규모는 다소 줄었지만, 조선 개국 이후 제주를 침략한 가장 큰 규모의 왜구였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서막이 올랐다.

 

 

며칠간 정탐을 벌인 끝에 왜구 1000여명은 6월 27일 제주 화북포로 상륙, 곧바로 제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전투는 동성(東城)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제주성 동성의 관문인 동문(東門)과 성 바깥으로 흐르던 하천인 산지천을 사이에 두고 왜구들은 남수각(현재 동문재래시장 인근 오현교) 동쪽의 높은 언덕에 진을 쳤다.

 

왜구는 제주성 안을 훤히 내려다보면서 활을 쏘며 공격했다.

 

당시 무관 출신인 김수문 제주목사는 본토에 왜적이 침입했음을 알림과 동시에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농성전(籠城戰)을 펼치며 백성을 지켰다.

 

하지만 무작정 지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성 밖에 산지천이 자리 잡고 있어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제주성은 식수문제로 오래 버티기에 취약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펼칠 수도 없었다.

 

자칫 전면전에서 패하면 제주성 뿐만 아니라 제주 섬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우려가 있었다.

 

군사가 턱없이 부족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공격적으로 대처해 하루빨리 적을 물러가게 해야 했다.

 

 

고심 끝에 김수문 목사는 군인 중에 용맹하면서도 날쌘 70명을 따로 뽑아 일명 효용군(驍勇軍)을 조직했다.

 

역습의 기회를 엿보다 동문을 통해 선제 기습공격을 시도했고 제주성에서 화살을 쏘며 측면 지원을 했다.

 

이어 기세를 몰아 일종의 기마부대인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를 투입, 기동력으로 상대를 제압함과 동시에 전열을 무너트렸다.

 

3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였다.

 

김수문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당시 상황을 이같이 전했다.

 

"무려 1천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步)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병(退兵)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두구(紅毛頭具)를 쓴 한 왜장(倭將)이 자신의 활 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으므로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습니다."

 

 

◇ 임금이 명명한 '을묘왜변 제주대첩' 기억해야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정부 지원군 없이 제주 백성들이 함께 일당백으로 왜적과 싸워 이긴 값진 승리였다.

 

당시 제주성 안의 인구와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을묘왜변 이후이기는 하지만 1601년(선조 34)에 작성된 김상헌의 '남사록'을 보면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제주도(제주목·대정현·정의현) 전체 인구는 2만2990명(남성 9530명, 여성 1만3460명)이며 제주성 안의 거주 인구는 565호에 남성 690명, 여성 1100명 등 1790명에 불과했다.

 

이 수치는 호적에 올라 있는 숫자를 합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인구는 아닌 것으로 여겨지며, 이미 사망했거나 집을 떠나 유랑하는 인구까지 포함된 숫자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다.

 

특히, 군역을 짊어져야 했던 남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제주에선 민가의 건강한 부인을 골라 제주성 위에 내다 세워 방어하도록 하는 등 다른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여정(女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을묘왜변 이후 50년이 채 안 됐을 무렵 남사록은 '제주성 안에 남정(男丁)의 수는 500명이고, 여정은 800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1천여 명의 왜적이 쳐들어왔을 1555년 6월 제주성 안의 제주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 아닌 명종 임금이 제주에서의 승리를 치하하는 교서에 직접 명명한 것이다.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수의 왜적을 물리친 제주대첩에 대해 명종실록(1555년 7월 7일)은 '영암의 수성(守城)과 제주의 파적(破賊)'이라 표현한다.

 

전남 영암은 왜적으로부터 성을 잘 지켜냈다면, 제주에서는 적을 격파해 승첩을 거두었다는 것으로 전라도에서 발발한 을묘왜변이 최종적으로 제주에서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었다는 뜻이 된다.

 

을묘왜변은 제주를 넘어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을묘왜변은 노략질과 철수만을 반복했던 이전 왜구와 성격을 달리한다.

 

당시 왜구는 단순히 전남 지역 약탈에 그치지 않고 제주로 이동한 뒤 곧바로 제주성으로 쳐들어가 성을 함락하기 위해 계획적이고 대대적인 침략을 자행했다.

 

이는 생존을 위해 밀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한 왜구가 활동무대를 중국 등지로 넓혀나가면서 제주를 중간 기착지로 활용하려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선 중기 문신인 임제는 제주여행기 '남명소승'(1577∼1578년)에서 '제주도는 중국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 있어 왜구들이 중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의 바다를 통과해야만 한다'고 설명, 제주의 지리적 중요성을 지적했다.

 

제주도와 제주연구원이 지난 2022년 펴낸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은 이에 대해 "일본과 한반도 및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 요충지 제주가 왜구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큰 지각변동을 초래할 사안이었다"며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을묘왜변 제주 대첩은 당대 조선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기여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 "을묘왜변 제주대첩, 그리고 이와 관련한 제주의 주요 인물들은 역사와 기억 양쪽 모두에서 소홀히 취급돼 왔다"며 승전의 역사를 기억하고 후대에 남기기 위한 연구와 콘텐츠 제작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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