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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기생충 (6)

우리에게 익숙한 계급·계층의 드라마는 대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고, 그 전선의 전후방에서 갈등과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는 조금 낯선 전선이 형성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아니라, 똑같이 ‘못 가진 자들’인 기택네와 지하실 남자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진다.

 

 

기택의 대를 이어 백수의 세계에 안착한 아들에게는 명문대학에 다니는 부잣집 아들 친구가 있다. 친구는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장받았지만 기택의 아들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온통 암울하기만 하다. 열패감이나 질투심에서라도 기택의 아들은 그 친구를 멀리할 법한데 그렇지도 않다. 그저 선망하고 부러워한다. 기죽어 지내지만 그렇다고 적개심을 갖진 않는다. 때때로 잘나가는 친구가 던져주는 ‘떡밥’을 머리 긁적이며 받아먹는다.

 

친구가 찾아와 해외연수를 떠나 있는 동안 자신이 ‘미래의 연인’으로 점찍어 놓은 과외지도 여학생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대학생으로 위장해서 ‘임시 가정교사’로 들어가라는 모욕적인 제안임에도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다.

 

부잣집 친구는 제대로 된 대학생을 가정교사로 대체하면 혹시라도 자신이 찍어놓은 미래의 연인을 뺏길까 두려워 ‘형편없지만’ 오히려 안전한 기택의 백수 아들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알고도 기택의 아들은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기택네 일가족은 몽땅 박사장네 기사, 가정부, 미술치료사, 가정교사로 위장 취업해 으리으리한 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일한다. 자신들의 주거환경과는 너무나 판이한, 거의 비현실적인 환경과 삶의 방식을 접하고 그들은 그저 감탄할 뿐, 같은 인간에게 주어진 부당하리만큼 커다란 거리에 문제의식을 갖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좋은 기회와 환경을 제공한 박사장 가족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 꿈같은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되기만을 소망한다. 기택네의 계급의식은 어쩌면 인도의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를 연상시킨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수드라, 바이샤로 구성된 계급 차이는 인도인들에게는 ‘넘사벽’의 영역이다.

 

사자나 코끼리가 사는 세렝게티 자연국립공원의 초원에 둘러쳐진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책 울타리와 같다. 넘으려고 시도하면 100% 감전사가 기다린다.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쩌면 고뇌하고 분노하고 저항하고 다치고 죽어 나가는 것보다 오히려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희망을 얘기하지만, 가끔 희망은 고문이다. 기택네는 어쩌면 카스트 제도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인도인들의 삶의 지혜를 체득했는지도 모르겠다. 기택네가 혐오하고 분노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빤히 올려다 보이는 반지하방의 천장에 치붙은 유리창문 밖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노상방뇨를 일삼는, 같은 동네의 못 가진 자들이다.

 

인도의 바이샤는 감히 수드라나 크샤트리아, 브라만 계층의 인간과 시비하고 다투지 않는다. 바이샤는 철저하게 바이샤끼리만 다투고, 수드라는 수드라끼리만 다툴 뿐이다. 기택네 계급이 아마도 수드라 정도에 속한다면 박사장네는 브라만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감히 수드라가 브라만에게 대들거나 불경하겠는가. 그저 같은 수드라끼리, 혹은 자신보다 더 낮은 바이샤에게나 고함치고 쥐어박을 뿐이다.

 

 

기택네는 뜻밖에도 박사장네 지하실에 숨어 사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지하실 남자와 맞닥뜨린다. 굳이 물어보거나 알아볼 필요도 없이 한눈에 견적이 나온다. 지하실 남자는 기껏해야 수드라거나 아마도 바이샤에 가깝다.

 

지하실 남자가 보기에도 기택네 식구는 결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계급일 리 없다. 브라만의 어두운 지하실 깊은 곳에서 수드라 혹은 바이샤의 두 가족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고 증오의 불꽃이 일어나 치열한 그러나 보기 민망한 전투가 벌어진다.

 

우리 사회도 이제 ‘개천에서 용 나오는’ 시절이 아니다. 계급이 ‘안정(?)’돼 가는 모양이다. 더 이상 아무도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희망은 그저 어리석은 자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일 뿐이다. ‘YOLO’의 지혜로 한번뿐인 인생을 희망고문당하면서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희망을 품고 ‘저들’과 싸우지 않는다. 그저 내 눈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우리’와 싸울 뿐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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