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 힘쓰겠다. 형식을 가리지 않고 실질적인 소통에 노력하겠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지난해 7월2일 도지사 취임식을 생략했다. 그 대신 제주도청 기자실을 방문한 자리에서 본격적인 원희룡 도정 2기 체제의 화두로 '도민과의 소통'을 강조했다.
원 지사는 이날 취임사를 통해 “제주도민을 중심로 삼겠다. 도민이 도정의 주인이다. 도정의 목적도 도민이다. 도정의 힘도 도민이다. 일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도민과 함께 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선 6기 도정운영과 지방선거 과정에서 ‘소통부족’이란 혹독한 비판을 들었던 원 지사는 그렇게 ‘함께’와 ‘소통’을 강조하며 두 번째 도지사 임기를 시작했다.
원 지사의 ‘소통’ 강조는 거듭됐다. 취임 직후인 지난해 7월5일 KCTV제주방송국에서 열린 제주언론인클럽 초청토론회에서도 “소통부족 비판은 겸허하게 수용하고 반성하겠다”며 “7기 도정은 도민과 행정이 함께 일하도록 하겠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그렇게 6개월, 원 지사가 수시로 강조했던 소통은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방통행식 도정운영’은 여전히 원 지사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원 지사가 취임 직후 지속적으로 강변하고 추진하는 사안 중에는 ‘블록체인’이 있다. 그의 의욕이 넘치지만 '도민공감대 부족'이란 힐난이 여전하다.
지난 10월26일 제주도청 4층 탐라홀에서 열린 국정감사장.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그런 지적들을 쏟아냈다.
당시 김병관 의원(더불어민주당, 성남시 분당구갑)은 원 지사에게 “블록체인 특구 지정 요청은 아무리 생각해도 생뚱맞다”며 “제주도내에서도 주민과의 공감대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강창일 의원(더불어민주당, 제주시갑) 역시 “정부규제를 풀 수 있도록 여론을 환기하는데 원 지사가 갑작스럽게 추진하고 있다”며 여론 조성 부족을 지적했다.
물론 제주도정의 일방적인 ‘알림’만이 있었을 뿐 도민, 도의회와 '쌍방 소통' 소식은 들어보기 어려웠다. ‘생뚱맞다’, ‘원희룡의 원맨쇼’라는 지적은 그래서 유효하다.
행정체제 개편와 관련해서도 소통부족은 피해갈 수 없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이후 13년 동안 행정체제개편에 대한 요구는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 근거는 기존 4개 시・군 기초자치단체 폐지와 행정시장 임명 등으로 인해 풀뿌리 민주주의가 훼손됐다는 논리에서였다.
물론 제주도 역시 인정했던 논리다.
도는 지난해 11월14일 제주도 행정개편위원회가 권고한 '의회를 구성하지 않는 행정시장 직선제'와 행정시의 4개권역 재조정, 행정시장 정당공천 배제 등의 내용을 전면 수용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행정시장 직선제에 대한 동의안을 제주도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실제 제주시민사회는 물론 곳곳의 요구는 실제론 다른 지점이다. "황당하게 문을 닫은 기초자치단체를 부활시키라"는 것이다.
원 지사 역시 지난 9월4일 제11대 제주도의회의 첫 도정질문 자리에서 강철남 의원(더불어민주당, 연동을)의 행정체제개편 관련 질의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기초자치단체의 행정부가 독립할 경우 당연히 의회가 있어야 한다”며 “의회 기능 없이 행정부만 독립을 하는 것은 민주국가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 지사는 결국 ‘의회 없는 행정시장 직선제’가 담긴 행정체제개편위의 권고안을 전면 수용했다.
당연히 반발이 클 수 밖에 없다. 진보정당과 시민단체는 “원 지사가 수용한 행개위 안은 철회돼야 한다”며 더 거세게 기초자치단체의 부활을 요구하고 있다.
제주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도 불만이다. 별다른 고민도 없이 1년여 권고안을 방치하다 돌연 도의회에 떠넘겼다는 비판이다.
당시 강철남 의원은 행정체제개편과 관련해 “도에서 모든 안을 논의하겠다고 했지만 논의도 없었고 의견수렴도 없었다. 행정시장 직선제나 행정체제 개편 등과 관련해 도정이 지나치게 노력을 안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강성균 행자위 위원장은 “제주도가 도민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있다”며 제주도정의 고민 부족을 추궁했다.
제2공항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도청 앞 천막에 대해 제주시가 계고장을 발부하자 김태석 제주도의회 의장은 "목숨을 담보로 한 외침을 계고장으로 틀어막는 것이 도민과의 소통이냐"며 원 도정을 향해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뜨거웠던 감자'는 국내 첫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의 개원허가다.
원 지사는 지난해 12월5일 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의 ‘불허’ 권고에도 불구하고 녹지국제병원에 대해 '외국인만 진료'라는 조건을 달고 개설을 허가했다.
원 지사는 "공론위 권고안을 존중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도의회 시정연설에서는 ‘수용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원 지사는 이 모든 말들을 뒤집었다. 여론조사와 토론을 통해 결정된, 사실상 도민의견인 '권고안'을 무시하고 스스로 내뱉은 공언마저 거짓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원 도정은 지난 1개월 동안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전면 불허 결정으로 갈 경우에 대규모 소송이 제기될 수 있다. 투자자들의 신뢰도도 떨어질 것이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 외교 갈등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로 항변했다.
하지만 소송 등의 우려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사안이다. 원 도정의 심사숙고가 이 정도의 선이었더라면 원 지사는 처음부터 ‘존중하겠다’라던가 ‘수용하겠다’는 말을 해서는 안됐다.
도민의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기에는 지금까지 ‘도민’을 강조해왔던 원 도정의 ‘핑계’로는 부족하기만 하다.
원 도정은 “공론조사 결과를 완전히 수용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불허'를 권고한 공론조사위의 결정을 일부 수용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소통부족을 넘어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의 근거는 여기다.
고대 로마 제국에는 ‘소통’과 관련된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를 일컫는 ‘오현제’ 중 한 사람이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이야기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수행원들과 함께 이동을 하던 도중 한 여인이 황제에게 청원을 하기 위해 황제의 앞길을 막아섰다. 이에 황제는 “지금은 바쁘다”며 여인의 청원을 뒤로한 채 자신의 길을 가려했다.
이러한 황제의 행동에 여인은 일침을 날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황제의 자격이 없습니다.” 황제는 여인의 그 말에 당장 가던 길을 멈추고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원희룡 지사는 2019년 새해의 업무가 시작되는 제주도 시무식 자리에서도 ‘소통’을 강조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도민들의 말에 원 지사가 지난 시간 보여온 모습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껏 그의 말과 행동이 달랐기 때문이다.
민선 7기가 시작되고 처음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를 맞는 자리에서 그가 다시 되뇌인 '소통강조'가 제발 거짓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뒤돌아서는 그를 향해 '도지사 자격'을 의심하는 숱한 시선이 쏠려 있다. 새해엔 제발 달라지기를 기원한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