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넘실대는 파도와 한라산 자락의 풍광에 도취되다 보니 내딛는 걸음마다 가볍다. 게다가 이곳은 나만의 추억이 도처에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77년 갓 사범대학을 나와 새내기 교사가 된 나는, 이 마을에 있는 고산상고(지금의 한국뷰티고) 교사로서 1년간 근무했었다. 틈나면 주변의 한적한 길을 찾아 마냥 걷기도 했던 그 시절, 당산봉은 전경대가 주둔하여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된 곳이었다. 지금은 오름 안이 개방된 지 오래 되어서인지 꽤 넓은 분지가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당오름을 내려오니 저만치서 ‘자구내’ 포구가 우리를 반긴다. 자구내 바닷가를 거닌 일행은 고산평야라고 불리는 드넓은 지대를 가로지른다. 내가 근무할 당시에는 이곳은 밭이 아닌 논이었고, 평야 동쪽에는 자그마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자그마한 시내라는 의미로 자구내라 불렸으리라 추측해본다.
40여 년 전 새내기 교사 시절 학생들과 함께 농번기에는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던 이곳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니.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역사를 나이 들어 알게 되는 기쁨이, 나이 먹는 비애를 반감시켜주기도 한다.
수월봉과 당산봉 오름은 마주 보는 형제오름 같다. 형제도 얼굴과 성격이 다르듯, 당오름이 근육질의 남성상이라면 수월봉은 곡선미 있는 여성상이다. 수월봉으로 향하여 걷던 나는 저만치 특이한 표시판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일렁여 일행에서 빠져나와 표시판으로 향했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이곳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안내 글이다. 유물의 모조품이라도 전시된 곳이 있으면 하는 아쉬움 하나 간직했다.
수월이는 위험도 잊은 채 절벽중간까지 내려가 그 약초를 캔 기쁨에, 바위를 잡았던 손이 풀려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녹고는 누나의 시신을 붙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으니, 녹고의 눈물이 바위틈에서 끝없이 샘솟는다 하여 바위틈의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전한다. 이 오름을 녹고오름, 물나리오름, 수월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