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말기에 진(晉)나라에 권력을 장악한 귀족 지백(智伯)1이란 인물이 있었다. 이름은 지혜롭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총명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무지막지하였고 욕심에 끝이 없었다. 자신이 커다란 봉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충분치 않다 여겼다. 한번은 이유 없이 위선자(魏宣子)2에게 토지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위선자도 진나라 귀족이었다. 그는 지백의 행동이 무척 싫었다. 토지를 그냥 줄 리 만무하였다. 신하 중에 지모가 있는 임장(任章)3이 있었다. 임장이 위선자에게 권했다. “공께서는 지백에게 토지를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선자는 이해되지 않아 물었다. “내가 왜 쓸데없이 토지를 넘겨준다는 말이요?” 임장이 말했다. “그가 아무 이유 없이 토지를 요구하면 분명 이웃나라의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웃나라도 그를 싫어하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사리사욕에 정신이 팔린 그는 이번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도처에 손을 뻗어 요구할 게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모든 이들이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주군께서 그에게 토지를 내어주시면 모든 이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더욱 오만해 질 것
‘후흑’이란 ‘뻔뻔하다’ 뜻이다. 낯가죽이 두껍고 속이 검다는 의미다. 손자(孫子)가 말했다. “주군(主君)은 분노로 인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되며 장수는 화가 치민다고 전투를 벌여서는 안 된다.” 도량은 시련을 겪을 때에 체현된다. 일상생활 중에도 희로애락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듯 숨겨야만 한다. 러시아 명저 『거장과 마르가리타』1 중에서 지옥의 왕은 평상시에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다. 선글라스를 벗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책을 읽었을 때 배역이 신비로운 암시를 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종오의 『후흑학』2을 읽고 나서야 문득 모든 것을 알게 됐다. 진정한 역량이 있는 인물은 남에게 자신의 의도를 쉬이 간파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공은 자아제어에서 온다. 자신의 모든 정서와 행위를 반드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자아제어는 어렵고도 어렵다. 그러면서도 가장 필요하다. 자신을 제어할 수 없으면 타인에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을 제어하려면 반드시 자신을 먼저 제어하여야 한다. 자신의 감정, 태도, 비밀을
항우(項羽)1와 유방(劉邦)2이 천하의 패주를 다툴 때 유방은 사소한 것에 신경 쓰면서 암암리에 세력을 키워나가 점차 깃털을 다 갖추게 되자 군대를 동원해 항우와 대치하였다. 국면이 온당치 않아 한 지역 군대가 전멸하면서 부친까지 항우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항우는 강압으로 쉬이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고 유방의 부친을 이용해 유방을 협박하였다. 유방의 낯짝이 더 두껍다는 것을 어찌 짐작할 수 있었으랴. 유방이 항우에게 말했다. “내 부친이 바로 당신의 부친이지 않소. 만약 당신이 당신의 부친을 삶아 먹을 수밖에 없다면 인자한 마음을 내어 내게도 한 잔 나누어주시구려.” 유방의 성공은 바로 “성공한 사람은 ‘뻔뻔하다’”는 이치를 증명하고 있다.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인은 가장 체면을 중시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면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한다. 존엄을 위하여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 “삼군이라도 그 장수를 빼앗을 수 있지만 필부라도 그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 ; “옥이 되어 부서질지언정 하찮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일촉즉발의 상황에 맞닥뜨릴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때, 기술적으로 처리해 자기 존엄과 원칙을 보호하지 못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게 된다. 진(秦) 목공(穆公)¹이 뛰어난 말 한 필을 잃어버렸다. 말이 기산(岐山) 아래로 내려가니 현지 향민이 잡아먹어 버렸다. 관리가 말을 잡아먹은 사람을 잡아다 엄벌에 처하려 했다. 목공이 말했다. “군자는 축생의 일을 가지고 사람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맛있는 말고기를 먹으면서 술 마시지 않으면 건강을 해친다고 들었다.” 목공은 말을 잡아먹은 사람들을 사면해줬을 뿐만 아니라 마실 술을 하사하였다. 나중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기산 아래서 전투를 벌이게 되자 진 목공은 친히 전선으로 나섰으나, 결국 부상을 당해 포위당하여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그때 먼 곳에서 300여 명이 갑자기 달려들어 진(晉)의 군대를 공격하니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마침내 진 목공은 위험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진(晉)의 군주를 사로잡게 됐다. 목공이 나중에 물어서야 알게 됐다. 그들은 예전에 군주의 뛰어
삼국시대에 조조(曹操)는 북상해 새외에 있는 오환(烏桓)¹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남방의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당시에 원정을 감행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였다. 많은 장수들이 원정하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조조는 군대를 거느리고 출격해 오환을 무너뜨리고 기본적으로 북방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하였다. 개선한 이후에 조조는 당초에 누가 북벌에 동의하지 않았는지 조사하라고 명했다. 반대하였던 사람들은 중벌을 받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웬걸 생각지도 않게 조조는 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북벌은 이미 대승을 거뒀는데 어째서 반대한 사람에게 오히려 상을 내린다는 말인가. 조조가 말했다. “북벌의 일은 분명 대단히 위험하였다. 내가 비록 요행히 승리를 거뒀지만 그것은 하늘이 도운 덕분이지, 내 결정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들의 반대는 옳은 것이었다. 만전을 기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조언이기에 상을 내린 것이다. 나는 모두가 이후에도 나와 다른 의견을 거리낌 없이 개진하기를 바란다.” 이후 사람들은 조조를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충성하였다. 조조는 여러
당(唐) 왕조 때 누사덕(婁師德)¹은 세가공자로 몇 대에 걸쳐 삼공에 올랐다. 자기 대에도 조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나중에 동생이 대주(代州)에 태수로 가게 되자 떠나기 전에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누사덕이 당부하였다. “누 씨 집안은 대대손손 조정의 은혜를 입었다. 지금 우리 형제도 관직에 있다. 일반인은 우리 세가공자가 제멋대로 군다고 비판하고 있다. 네가 관직에 있을 때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잘 견뎌내 우리 누 씨 가문을 욕되게 하지 말거라.” 동생이 대답하였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닦아버리면 그만이지요.” 누사덕은 고개를 가로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네가 침을 닦으면 속으로 원망하게 된다.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느냐! 누가 네게 침을 뱉거든 그저 침이 얼굴에서 마르도록 놔두어라.”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일반인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거든 반드시 일반인이 참을 수 없는 것까지 참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고이래로 영웅 중에서 이것을 가장 멋들어지게 보여준 인물은 전국시대 때 제(
재능이 있으면서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첫째,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까닭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다. 둘째, 큰 뜻을 가지고 문도무략(文韜武略)¹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좋은 때를 타고 나지 못하는 경우다. 강태공(姜太公)과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강태공은 자신의 총명함과 가진 재능과 지혜를 포악한 군주 주왕(紂王)을 돕는 데에 쓰지 않고 끝끝내 자신을 알아줄 현명한 군주를 기다렸다. 새가 나무를 골라 앉는 것처럼 시기와 형세를 판단하고 옳은 주군을 택하여 섬겼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때의 빈궁과 고통을 감내하여야 했다. 자신이 뜻을 이루지 못한 울분을 참아내야 했다. 목전의 공명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큰 뜻을 품은 사람은 평생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더라도 청렴결백하고 자기 자신을 아껴야 한다.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아야 한다.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에게 빌붙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간사한 자와는 한 패거리가 되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타인이 조롱할까 염려해서도 안 된다. 굳은 의지로 자신이
공자는 말했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커다란 계책이 위태로워진다.”(『논어·위령공(衛靈公)』) 큰일을 하려면 반드시 전반적인 국면을 총괄적으로 보아야 한다. 작은 일에 뒤얽혀 벗어나지 못하면 안 된다. 일을 처리할 때 지엽적인 문제를 일률적으로 강조하면서 전반적인 형세를 간파하지 못하면 핵심을 붙잡지 못하게 된다. 중점을 잃고 단서가 뒤섞여 버린다. 어디에서 시작할지 알지 못한다. 사람을 쓰거나 일할 때 주류를 중하게 여겨야 한다. 작은 일 때문에 사업 발전에 장애가 돼서는 안 된다. 순금이 어디 있던가? 완벽한 사람이 있던가? 우리가 필요한 것은 개인의 재능이다. 과실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타인의 과실에 눈을 돌리는가? 지엽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면 자질구레한 일이나 잊어버려도 될 일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사람의 장점을 먼저 보아야 한다. 『권인백잠(勸忍百箴)』은 말한다 : 대세를 보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지엽에 연연하지 않는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을 따지지 않는다. 큰 옥규를 관상하는 사람은 자그마한 하자를 세밀히 살피지 않는다. 거대한 재목을 얻으려
큰 뜻이 있는 사람만이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분투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각각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자신만이 겪는 실패가 있다. 실패의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좌절을 맛보면 소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에서 경험을 삼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일어나 노력하고 분투하여야 한다. 이밀(李密, 582~619)은 수나라 말기 대란의 시대에 살았다. 일찍이 양현감(楊玄感)에게 의탁해 와강채(瓦崗寨)에서 봉기한 후 축록(逐鹿) 전쟁에 참가하였다. 618년에 이밀은 동부에서 왕세충(王世充)의 부하에게 패하여 세력이 고갈되자 잠시 이당(李唐)에게 귀순하였다. 이후 다시 당(唐)나라에 반기를 들어 기병했으나 실패 후 사살되었다. 이밀은 난세의 효웅이다. 몇 번 일어서고 몰락하며 적지 않은 좌절을 맛보았고 실의에 빠졌었다. 위(魏)선생의 이름은 실전되었다. 그는 북주(北周)에서 태어났다. 유가 경전을 두루 섭력하였고 악장(樂章)에 정통하였다. 그럼에도 성정이 담박해 권세를 탐하지 않았다. 비파, 거문고와 더불어 술 마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수나라 말기 천하대란의 시기에 세상을 벗어나 향촌에 은거하였다. 수나라 대업(大業) 9년에 수
인생, 순조롭게만 살아갈 수는 있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어떤 일이든 풍파를 겪게 된다. 여러 곤란과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초래하였든 밖에서 밀려왔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시기의 풍파를 인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자신이 의지나 웅대한 뜻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다. 지금 큰일을 이루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뜻을 높이 가져야 한다. 한 시점, 한 사건에 순조로우냐 장애가 있느냐에 마음 둬서는 안 된다. 일시적 성패에 골몰해서도 안 된다. 좌절을 겪었거들랑 강해지려 마음먹어야 한다. 어려움을 이기려 분투하면서 자기 이상을 실현하여야 한다. 성공하려면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태도가 있어야 한다. 장애물은 사람의 의지를 연마하는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좌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다. 『맹자·고자하(告子下)』에 익숙한 말이 나온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혀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하여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한다. 그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을 참게 해,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
대만(臺灣) 총통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이 세상을 뜬 그 해, 둘째아들 장위국(蔣緯國, 1916~1997)의 계급은 중장(中將)이었다. 중장에 앉은 지 14년이나 된 해였다. 국민당(國民黨)의 규정에 따르면 14년 동안 중장에 있다가 상장(上將)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강제로 퇴역하여야 했고 계급도 따라서 취소되어야 했다. 상장은 종신직이었다. 임시총통이 된 장남 장경국(蔣經國, 1901~1988)은 장위국을 승진시킬 생각이 없었다. 장위국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부친 장개석의 장례식이 끝나고 모친 송미령(宋美齡, 1898~2003)이 미국으로 안거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떠나는 그 날, 장 씨 형제는 전송하러 나갔다. 장위국은 특별히 일찍 관저에 도착해 양복 입는 습관을 버리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모든 훈장을 부착한 후 문을 들어서자마자 송미령에게 군례를 올렸다. 이전에 장개석 집안에서는 장개석, 송미령의 생일 때나 추석, 단오절, 중추절에 전 가족이 모여 축하할 때는 편한 복장을 하였다. 그렇기에 송미령은 장위국의 행동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장위국은 엄숙하게 답했다. “얼마 없어 군복 입을 자격을 상실
제(齊)나라에 전중(田仲)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향촌에서 은거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지혜로운 일이라고 여겼다. 송(宋)나라 사람 굴곡(屈谷)이 전중을 찾아가서 말했다. “저는 선생님이 인품이 높고 절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 사람이라고도 들었습니다. 저는 별다른 능력을 가지지 못하여 그저 밭에서 농사나 짓고 있습니다. 특히 조롱박을 재배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게 큰 조롱박이 있습니다. 돌멩이처럼 딱딱할 뿐 아니라 껍질도 너무 두꺼워, 속에 과육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제가 유달리 남겨두고 싶어 보관하고 있던 커다란 호롱박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전중이 듣고는 말했다. “호롱박이 연할 때는 먹을 수 있고, 오래 돼 강하게 되어 먹을 수 없을 때에는 그릇으로 만들어 물건을 담으면 되지요. 그런데 당신이 가지고 온 조롱박은 크기는 크지만 껍질이 너무 두터울 뿐 아니라 과육도 없고 절개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합니다. 이런 호롱박은 물건을 담을 수 없고 술도 담아낼 수 없습니다. 무슨 쓸모가 있겠소이까?” 굴곡이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