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의사는 발병 초기에 병자를 완치시킬 수 있다. 일을 고려할 때에 되도록 일찍 착수하여야 한다. 싹이 틀 때에 없애버리지 못하면 형세가 변함에 따라 손쓸 틈도 없이 급변할 수 있고 심지어는 큰 재앙이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다. 나뭇가지와 다름없다. 어린 가지는 손으로 쉽게 없앨 수 있지만 크고 나서는 도끼를 쓰지 않으면 없앨 수 없다. 송(宋)나라 때에 도적 장해1)가 고우(高郵)성을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고우성의 수장 조중약(晁仲約)은 그 도적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효유(曉諭)군에서 부유한 토호에게 소와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도적떼를 대접하도록 했다. 그 사실이 전해지자 재상 부필(富弼)은 조중약을 붙잡아다가 법에 따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범중엄(范仲淹)은 인정에 호소하며 말했다. “군현의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도적떼를 물리치고 성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조중약이 도적떼를 만나 막아서지도 않고 오히려 뇌물을 주었으니 법에 따라 주살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 고유에는 병사가 없을 뿐 아니라 무기도 없습니다. 백성조차 마음속으로 모두 나서서 재물을 모아 주는 것이 강탈당하고 목숨 잃는 것보다 좋지 않으냐고 생각하
조그만 일이라고 홀시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일을 처리하거나 사람을 쓰는 데에는 나쁜 일이 아직 경미할 때에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방지하여야 한다. 시작과 끝을 신중하게 하여야 한다. 자질구레한 일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인생은 한 단계 씩 업그레이드 시키듯이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손실을 피해야 한다. 경쟁 중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추리하여도 로직에 맞아야 하고 판단도 오류 없이 정확하여야 한다. 우리가 패를 잘못 내면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고 이길 수 있는 것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 처지는 급전직하하게 된다. 형태가 크게 변하여 세 번이든 네 번이든 뒤집기 어려워진다. 심지어 철저히 실패하게 되어 모든 국면을 끝내야 할 때가 있다. 생활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번 것은 제외’ 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가장 무서운 생각이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미약하다.1) 노자는 말한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도모하고 혼란해지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 ……시작할 때처럼 마지막에도 신중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작을 일로 큰 것을 잃
모택동은 말했다. “마땅히 남은 용기로 적을 끝까지 쫓아야 하느니, 허명을 쫓다만 초패왕을 배워서는 안 되리니.” 화근을 철저히 없애버리고 상대에게 쉴 기회를 주지 않는 책략은 너 죽고 나 사는 전쟁 중에는 필요하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대에서 결사항쟁은? 상대를 사지에 몰아넣어야 마음이 후련해진다면? 상대는 최후의 발악을 할 수 밖에 없다. 궁지에 몰린 쥐가 어떻게 할까? 자기도 불필요한 손실을 입게 된다. 궁지에 몰린 짐승은 결사적으로 반항한다. 겹겹이 포위된 짐승은 사투를 벌이기 마련이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짐승에게는 용맹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사투를 벌인다. 대자연의 한 현상에 불과할까? 아니다. 정치계나 상업계에서도 자주 보인다. 그물 한쪽을 벌려 놓듯이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는 책략이 필요하다. 상대를 끝까지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송(宋) 인종(仁宗, 1022~1063 재위) 때에 재상 부필1)은 단주(澶州) 상호하(商胡河)부터 육탑거(六漯渠)를 뚫어 섬서(陝西)를 가로 지르는 옛 수로로 물을 끌어드리려 했다. 평소에 부필을 싫어하던 대명부(大名府
지금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명예를 좇아 날카로운 말솜씨로 타인의 이름을 훼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정말 알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과 만나고 일을 처리는 데에 덮어놓고 말을 많이 하면 정반대가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을. 심지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실수하여 건드려 불운은 자처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천기를 누설한 사람은 쉽게 천벌 받는다.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쉬이 원망 듣게 된다. 명(明, 1368~1644) 성조(成祖, 주체朱棣, 1402~1424 재위) 시기에 광동 포정사(布政使) 서기(徐奇)가 도성에 들어와 황제를 알현할 때 영남의 등나무 돗자리를 가지고 와서 경성의 관원들에게 선물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경성에 들어서자마자 순성관에게 압수당했다. 순성관은 선물 주려던 관원 명단을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황제가 보자 선물 명단에 ‘여러 어진 사람이 모두 모여’ 있었지만 오직 양사기1) 이름만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청렴결백이 마음에 들어 단독으로 그를 불러서 물었다. 양사기가 말했다. “당초 서기가 명을 받아 광동에 부임할 때에 여러 관원이
위진남북조(221∼589) 때에 왕자 소자량1)과 범진2)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소자량은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불교도였다. 그는 인생의 삼세인과(三世因果)로 운명이 정해졌다고 여겼다. 범진에게 물었다. “당신이 인과를 믿지 않는데, 그러면 어째서 어떤 사람은 일생을 부귀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재능을 품었으면서도 평생 펼치지 못하며 평생 초라하게 살아 아무 이름도 남기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범진이 답했다. “다른 인생은 사실 같은 가지의 한 꼭지에 달린 꽃송이 같은 것이오. 바람이 불어오면 어떤 꽃은 화병에 놓여 사람이 보면서 즐기는 대상이 되고 어떤 꽃은 운이 나빠 똥통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전자는 왕자님이시고 후자는 바로 저입니다.”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꽃을 가지고 비교하고 있다. 사람은 환경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결과는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생활하면서 진지한 인식이 부족하여 불원간 닥쳐올 처지에 경솔한 태도를 취하여 그 속에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잘못을 깨달아 위험한 곳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곳에는 살지 않으면서
청(淸)나라(1636~1912)가 『이십사사(二十四史)』를 간행할 때 건륭1)은 자주 자신이 직접 대조하고 검토하였다. 착오를 발견할 때마다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통쾌해 했다. 화신2)과 여타 대신들은 건륭의 그런 심리에 영합하였다. 건륭에게 건네는 필사본 초고에 찾기 쉬운 부분을 고의로 몇 글자를 틀리게 써서 건륭이 쉽게 교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 교묘한 방법을 이용하여 건륭의 학문이 깊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건륭의 면전에서 황제의 학문이 깊다고 아첨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었다. 황제가 교정한 초고는 다른 사람이 절대 고칠 수 없었다. 그런데 건륭이라고 다 교정할 수 있었겠는가. 건륭이 교정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그런 오류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오늘 날에 전판(殿板) 서적에 존재하는 오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화신은 이해타산이 뛰어났다. 셈이 빨라 건륭의 심리를 잘 파악하였다. 늘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어 건륭의 환심을 샀다. 화신은 건륭의 성정, 호오나 생활 습관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건륭의 성깔, 애증 등에 대해서는 제 손금 보듯 훤했다. 왕왕 건륭이 무엇을 원하는지 건륭이
10월 말에 직예파 장군 풍옥상1)이 갑자기 오패부를 등지고 고북구(古北口)에서 회군하였다. 북경경비사령관 손악(孫岳)과 결탁하여 북경을 점령하였다. 풍옥상과 손부방은 휴전을 제안하고 조곤에게 압력을 가했다. 오패부를 면직한 후 조곤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산해관에서 회군한 오패부는 풍옥상과 맞섰지만 장작림의 가세로 대패하고 한구(漢口)로 도주하였다. 제2차 봉직전쟁이 끝나고 조곤이 뇌물로 세웠던 정부도 무너졌다. 장작림과 풍옥상은 일부 직예파 군인과 함께 단기서2)를 총통으로 추대하였다. 이 전쟁에서 봉군총참(奉軍總參) 양우정3)은 장작림의 명령을 받고 산해관으로 진입하였다. 양우정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었지만 나름대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병권을 잡게 되자 안하무인인 본성을 드러냈다. 득의양양하게 심양(沈陽)을 출발할 때부터 평소에 신임하던 장신선(張神仙), 마신선(馬神仙) 등 4명의 술사를 대동하였다. 양우정은 장작림 못지않게 신도(神道)를 믿고 있었다. 작전을 펼치기 전에 항상 4명의 신선에게 점치게 하여 날자와 시간을 정한 후에 행동하였다. 당시 장작림 아들인 제3군단장 장학량4)이 양우정과 함께 있었다
곽송령1)은 장작림2)의 수하였다. 부군단장으로 제2차 직봉전쟁3) 중에 봉군(奉軍)이 승리를 거두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신파(新派) 군인이었다. 군벌 부대 내의 낡은 규칙과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군을 개혁하자고 진언하였다. 그러자 봉계(奉系) 원로들이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장작림과 심복 양우정(楊宇霆)도 갖가지 트집을 잡아 도외시했다. 곽송령은 화가 치밀었다. 1924년 11월 23일, 난주(灤州)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해 평화를 창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봉천(奉天)으로 회군한다고 선언한 후 병간(兵諫)을 준비하였다. 장작림은 봉천에서 소식을 접하고 급해졌다. 화도 치밀었다.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막아서야 할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장작림은 평상복을 입고 권총 두 자루를 가슴에 차고서는 검푸른 얼굴빛에 시뻘건 두 눈으로 혼자서 서재에서 서성거렸다. 부관과 위병들은 문 밖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갑자기 서재에서 장작림의 명령소리가 들렸다. “맹인 점쟁이를 불러라.” 맹인 점쟁이는 누구인가? 운세를 점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사실 완전한 맹
사회에서 교류할 때 다른 사람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면 자신의 독립된 인격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천지간에 존귀하게 태어났다. 자기 운명을 가장 잘 주재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이다. 어떤 지위나 환경에 처했든지 자기 운명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기초적인 존엄과 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많이 약속하고 책임진다. 지위도 다르고 배분도 다르다. 여러 가지 예교는 다른 사람에게 종속하는 위치에 처하기 쉽게 한다. 그럴 때에 자기 존엄을 지키고 인격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 독립성과 판별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타인이 하자는 대로 순종하는 희생물이 돼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 적어도 받아들일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이나 권세를 무조건 따라서도 안 된다. 물론 여기에는 조직 기율과 제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어떤 때에든 자신은 자랑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시황(秦始皇, BC246~BC221)이 죽을 때 유조를 내려 태자 부소(扶蘇)에게 계위하도록 했다. 당시 태자 부소는 평소부터 진시황과 정견이 엇갈려, 일찍이 군대를 감독하
원세개는 격앙하며 말했다. “그저 황상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반드시 실행할 것이오.” 담사동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쉽게 다룰 수 있소. 영록은 그리 녹녹한 사람이 아니오. 그를 죽이기가 쉽지 않을게요.” 원세개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무엇이 그리 어렵다는 말이오? 영록을 죽이는 일은 개 한 마리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소.” 담사동은 조급해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겠소? 내가 곧바로 황상께 아뢰리다.” 원세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너무 성급하오. 내가 지휘하는 군대의 총탄과 화약은 모두 영록의 손아귀에 있소. 군관 중에도 그의 사람이 적지 않소. 내가 먼저 천진(天津)으로 돌아가 군관을 바꾸고 총탄을 준비해야만 거사를 치를 수 있소.” 담사동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바람을 보며 돛을 조종하듯 정세 변화를 봐가며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강유위와 담사동은 그의 사람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광서제에게 충성을
명나라 방상붕1)은 일찍이, “사람을 만나면 3부만 이야기하고 마음 전부를 내던지지 마라.”(『增廣賢文』) 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사람 만나면 말을 조심스레 삼가고 모든 마음을 내보이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은 옛사람이 말이 재앙이 되는 것을 삼간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거나 경솔하게 지껄이거나 웃지 않는 사람에게는 잠시 진심이나 본뜻을 표출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의견만 고집하거나 오로지 이기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는 실언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사귄지 얼마 안 되는 사람에게 어리석게도 깊은 얘기를 나누면 당신이 토로한 성심성의가 오히려 흑백이 전도된 비방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상황을 알면서도 숨겨 말하지 않는 것은 충실하지 못하다. 마땅히 침묵하여야 할 때에 말하는 것은 내뱉은 말 모두 더러운 때와 같게 된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에 침묵하고 말하지 않으면 그 침묵은 먼지와 같다. 말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은 다른 뜻이 있기에 그러하다.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무는 것은 어리석음의
금에 순금이 없듯이 완벽한 사람은 없다. 열심히 하여 관리가 됐으나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아무리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착실하다 하여도 결국은 아수라장이 되어 효과를 제대로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좋지만 결코 좋은 관리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존중하는 것은 당신이 동정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옹정(雍正, 1722~1735 재위) 황제는 사람을 쓰는 문제에 비교적 깨어있었다. ‘현재(賢才)’를 표준으로 삼았다. 결코 ‘오로지 친한 사람’만 쓰지는 않았다. 청(淸) 왕조가 건립된 초기에 여러 왕공이 제각기 공을 세웠다. 순치(順治, 1643~1661 재위) 황제는 그들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하오기1) 인원 모두 왕부의 부하가 됐다. 평화로운 날이 계속됐지만 거만하고 횡포한 여러 왕공의 습속은 고쳐지지 않았다. 자주 부하를 잔인하고 포악하게 대했다. 양광총독(兩廣總督)〔광동성(廣東省)・광서성(廣西省) 총독〕 양림(楊琳)은 돈군왕에 속해 있었다. 어느 날, 돈군왕2)에게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의심받았다. 돈군왕은 환관을 광주로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