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할 작품은 화면상에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상처의 흔적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장지를 여러번 겹친 바탕을 만들고 장지의 표면을 거친 붓으로 비비고 짓이기고 일그러뜨린 바탕에 퇴색된 갈색의 느낌으로 채색한 그림이었다. 한지 자체의 물성을 이용하여 평평한 표면 위에 한지 자체가 짓이겨지고 일그러진 입체적인 상처와 흔적을 표면적으로 드러낸 작품인데 내 의도가 우연히 잘 드러난 실험작품이라 애착이 간다. 친구가 여러 작품들 중 구입할 그림을 선정해달라 해서 이 애착이 가는 작품을 권유했더니 그 친구가 바로 그 자리에서 작품을 가져갔다. 감사의 기억으로 이 작품을 소개한다. 오늘부로 이 연재를 끝내는 날이라 이렇게라도 이 귀한 지면을 통해 다시금 그 친구의 호의에 감사를 전해보려 한다. 작가들이 보통 개인전이나 기타 전시에 참여하여 발표한 작품들이 팔리는 경우는 보통 친한 지인들이나 가족들이 구입해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팸플릿이나 전시를 보고 아트 딜러나 화랑에서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용케도 작품이 눈에 띄어 인생이 바뀌는 축복받은 작가들도 많다. 적은 예산으로 전시를 치르는 경우는 홍보도 미미할 수밖에 없기에 그만큼 운도 따라야 그림을 팔 수가 있는 기회도 생긴다. 예전 친구가 천재도 재수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 일견 일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일은 혼자 힘으로는 안되는 일이 거의 절대적이다. 인연생 인연멸 하는 까닭이다. 작가 스스로 자기가 그린 그림이 맘에 들고 감상자들도 좋아하는 그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리고 나면 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평생 맘에 드는 작품 하나를 그리는 것이 작가들이 갖는 꿈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작가 등용문이라는 통념이 있어 국전 중앙일보 동아일보 공모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이유가 있어 대학때부터 철저하게 공모전 출품을 안했다. 지금은 젊을 때 치기어린 어리석은 생각으로 후회가 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라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과거에는 보통 개인전을 짧게는 5년이나 10년에 걸쳐 작업에 천착하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 성과를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하는게 다반사다. 오랜 화업을 이어나가고 학벌이나 지위를 갖춰야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 풍토였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과 다르게 1년에 한번씩 또는 그 이상 개인전을 치르는 작가도 많다. 학연.지연등에서 벗어나 자기색깔과 자기만의 밀도를 중시하며 많은 발표를 통해 인지도를 확장시키는 풍토가 만연하다. 그만큼 다양한 발표의 장과 환경이 형성되어 있고 젊은 작가들의 역량도 우수해서 그럴 것이다. 어느게 낫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 스스로의 선택이며 작가 스스로가 자신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많은 공모전과 많은 아트페어가 열려 작품을 공공연하게 팔 수 있는 환경과 공간이 많아지고 있다. 내가 2006년에 참여한 개인전 형식의 단체 부스전은 그 신호탄들이었던 것임을 지나보면서 알게 된다. 무수한 공모전의 난립, 전지구상으로 연결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발달, 지자체들의 문화 콘텐츠 개발 및 문화활동의 저변확대와 활성화 등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미술시장의 활성화와 더불어 작가의 작품 판로 개척과 예술의욕 고취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국제적 미술시장의 유입도 그렇고,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독창성으로 무장한 젊은 작가들이 발굴되고 그 위상이 빛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도 참 다행한 일이다. 춥고 배고픈 예술가란 말이 옛날 이야기로 들릴 정도로 예술적 환경이 좋아지긴 하였지만 슬프게도 현실은 아직도 춥고 배고픈 예술가는 늘상 존재한다. 아쉬운 점은 미술의 대중화 속에 대중적 취향을 너무 의식하다보면 작가의 작품의 기원과 예술적 방법론 작품성보다는 표피적, 시각적 화려함에 경도되거나 치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대중적 일반적 인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작품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 오류와 착각의 부작용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옥석을 가려가는 선진문화로의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예술가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 ‘예술보다 삶이 먼저다’ 라는 말이 그 예다. 그러나 오랜시간과 고민을 들여 고통스럽게 창작하는 예술가들은 단순히 물질적 궁핍이나 결핍 때문에 자기의 잠재적 무한능력을 쉽게 돈과 바꾸고자 하지 않는다. 속물적 근성의 발로라는 경계에서 흔들리는 자신과 타협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울 수 있겠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시절이다. 돈은 분명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중요한 가치들도 많다. 돈을 부정하는 것도 옳다고 할 수 없지만 돈을 신봉하는 것도 옳지 않다. 모든 건 조화와 균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반합도 그렇고 중도 중용의 삶도 그렇다. 많은 작가들이 자기 그림을 들고 많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아트페어에 나가 자기작품이 팔린 걸 자랑삼아 온라인 네트워크서비스에 올리는 것을 보면서 시대의 변화를 절감한다. 그러나 전국을 떠돌아 다니는 보부상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내가 판단하고 얘기할 자격은 없지만 거대한 흐름의 변화에 편승해야 한다는 그 조급함들이 약간은 우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용기들이 도리어 부러움으로 다가오는 것도 현실적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다. 그 용기와 도전도 부럽고 시각적 완성도와 아이디어와 센스도 부러운 게 솔직한 나의 심경이다. 나를 채찍질하는 마음과 함께 선·후배 작가들에게 말한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없는 날개짓으로 높이 비상들 하라.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생존의 치열한 싸움터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작품에 올인하고 총알도 많이 만들어라. 그 전업정신으로 물질적 결핍에 연연하지말고 열정으로 미래에 밝고 빛나는 더 큰 그림을 그려 한발 한발 이기고 나아가라. 어떨 때는 자신감있게 승부사적 비즈니스적 기질을 발휘하라. 나에게는 그런 점이 부족하고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대를 읽고 자신이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냉철히 판단하고 배울 것은 배우고 공부하라. 배우되 지나치게 경도되거나 한쪽으로 쏠리지는 말아라. 고향에 돌아오자 귀한 만남의 인연으로 내 작품을 사 주는 이들이 꽤 된다. 참 감사하다. 그 빚진 마음이 있어 좀 더 나은 그림으로 보답하고 싶고 작품 발표도 좀 더 정리된 구상으로 보여주고 싶은데 이 또한 구태의연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변화를 두려워 말고 습식과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잘 아는 지인의 말처럼 '머리로 그리기 어려우면 손으로 그려라'라는 충고의 말이 더 와닿는 시절이다. 한발 내딛기 힘든 마음의 경계 안에서 바깥의 유혹보다 내면의 내실을 다지고 현실과 시대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걸맞는 나만의 그 무엇을 되돌아보며 찾아가고 중심을 바로잡아가고 잃지 않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하겠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명료하고 구체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과 생각에 따라 현실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 고뇌와 번민이 오히려 자신의 나약하고 부족한 성정을 타파하고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된다. 본질의 자신을 믿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용기있게 열정을 갖고 도전하길 바랄 뿐이다. 한해가 또 무심히 지나간다. 누구에게는 멋진 한해였을 것이고 누군가에는 아쉽고 힘들고 아픈 한해였을 것이다. 겨울은 삼한 사온이 반복된다. 추워도 계속 춥지는 않은 법이다. 하루하루 순응하고 참고 버티다 보면 따뜻한 봄이 도래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자신과 무관한 부정적 에너지에 휘둘리지 말고 힘을 내길 바란다. 고통이 도약의 발판이 되길 바란다. 얼마전 카톨릭 신자이신 나의 둘째 형님과 대화중에 주신 영적 말씀을 고이 간직하며 이글을 마무리한다. ‘하느님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깁니다.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고백록]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빛이 되기를 바라며 모든 이들이 자신이 빛임을 알기를 바란다. 모든 것에 감사하다. 그동안 오만과 교만, 무지한 자신을 돌아보게 해준 이 영광스러운 연재코너에 감사하며 응원과 격려를 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더 나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바란다. 새롭고 설레는 변화와 비상을 꿈꾸며... <끝> ** 그동안 한우섭의 '제주찰나'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제이누리>는 새해에도 더 좋은 콘텐츠, 더 나은 연재물로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편집자 주> ☞한우섭은? = 제주제일고,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나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담묵회 창립회원, 아티스트그룹 '정글' 회원, 민족미술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노원미술협회 회원, 디자인 출판 일러스트작가, 한강원 조형물연구소 디자이너, 서울 제주/홍익조형미술학원 원장, 빛 힐링명상가로 활동하고 있다.
◆ 함괘(咸卦) 함(咸)은 교감으로 서로 감응하는 것이다. 사람은 감정을 통하여 함께 모인다. 효심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사람이 있다. 만감이 교차하며 감격하여 눈물 흘린다.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지성이 대단한 사람도 있다. 서로 정을 느끼고 솔직하고 성의 있게 대하며, 마음을 열고 질실하게 대하면 능히 친구를 찾을 수 있다. 사랑이 순조롭지 않으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아무리해도 끝나지 않는 이야깃거리가 사랑이다. 가까운 친척 간의 사랑은 혈육의 정이요 친구 사이의 사랑은 우정이며 연인끼리의 사랑은 애정이다. 사람은 모두 감정을 가지고 있다. 서로 함께 할 시간이 길면 길수록 감정은 깊어진다. 그러다가 서서히 감정은 책임으로 변한다. 『주역』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람 사이의 교류는 왕왕 감응이 선행된다고. 그런 감응은 목적이 없다. 순결하다. 별의별 궁리를 다하여 교류하는 게 아니다. 옛사람은 그것을 ‘느낌〔감(感)〕’이라 했다. ‘느낌〔감(感)〕’이 있어야 ‘존경〔경(敬)〕’이 생기고 ‘사랑〔애(愛)〕’이 생기며 ‘구함〔구(求)〕’이 생기고 정으로 느낄 수 있다. 상대방을 기쁘게 하여 감동시킨다. 가장 마지막에 변함없는 감정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함(咸)’의 도리다. 청나라 때 소설가 심복(沈復)은 『부생육기(浮生六記)』에서 자신과 아내 운(蕓)이 일생동안 서로 사랑한 기초를 기록하고 있다 : 결혼하고 나서 몇 개월이나 지났어도 운은 심복을 처음처럼 공경하였다. 심복은 우리는 남이 아니니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운에게 얘기하였다. 운은 그 말을 듣고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심복이 운에게 옷을 입혀 줄 때 운은 예전대로 감격하는 태도로 고맙다고 말했다. 결국 어느 날, 심복이 참지 못하여 또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위선자라고 말했다. 운이 조용하게 말했다. “성인의 가르침이 설마 틀리다는 말씀이십니까?” 심복은 마음속으로 공경하면 된다고, 그렇게까지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운은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만에야 말했다. “그러면 부모에게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공경하여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심복은 무척 감동받았다. 성낸 것을 바꾸어 웃으면서 아내를 위로하였다. 나중에 자녀를 낳고 사별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살아가면 갈수록 감정이 더욱 돈독해졌다. 근대 문학가 임휘인(林徽因, 1904~1955)이 양사성(梁思成, 1901~1972)을 선택하고 서지마(徐志摩, 1897~1931)를 선택하지 않은 것도 공경으로 사랑하고 예로써 대했기 때문이다. 서지마와 같은 현대 시인은 서양인의 낭만을 배우기는 했지만 서양인의 진심어린 믿음은 배우지 못했다. 유럽만 하더라도 20세기에는 적지 않은 부녀자들이 공경으로 사랑하였고 예로써 대했다. 단지 ‘예의’라는 명사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감응은 위대하다. 감응이 애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천지가 감응하여 만물을 만든다. 성인은 지극한 믿음으로 만민을 감응시켜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 그렇기에 청년 남녀가 서로 감응하여 한 눈에 반하면 부부 인연을 맺고 후대를 낳는 것, 이 또한 자연적인 일이다. 친구를 사귀고 교류하는 데에 감응은 정보다, 그런 후에 믿음이 초석이 된다. 『주역』은 말한다. “함(咸)은 형통하니 바름이 이로우므로 여자를 취하면 길하리라.”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감응했다고 하자. 그런데 이제 막 시작되었다. 발 한 쪽은 움직이려 하지만 온몸이 움직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감응이 있기는 하지만 움직일 수 없다. 감응이 발가락까지는 왔다. 그래도 온몸을 움직이기는 부족하다. 그렇지만 처음보다는 힘이 있다. 이때 경거만동해서는 안 된다. 강요하거나 억지로 구하지 말라. 아직은 감응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기억해 둬야 한다. 친구를 사귀려거든 강요하지 말 것이며 억지로 구하려고도 하지 말라. 감응이 허벅지까지 도착했다면? 이미 힘이 생긴 것이다.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주역』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때 냉정하게 조용히 관찰하라고. 급하면 안 된다. 맹목적으로 타인을 쫓아가면 안 된다.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감응이 마음까지 왔다면? 그때 교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교류도 사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순수한 마음을 견지하여야 한다. 그래야 길하다. 다시 더 위로 올라갔다면? 입까지 갔다면. 달콤한 말도 과하다. 『주역』은 말한다 : 감동을 시키는 언어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그런데 감동을 시키면서도 기본적으로 성의가 없다면 그것은 소인의 행위다. 산 위에 못이 있다. 위쪽의 못에는 물이 있다. 아래로 스며든다. 아래쪽에는 산이다. 산은 수분을 흡수해 윤택해 진다. 서로 감응하고 교류하면 못은 더욱 맑아지고 산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사람과 산은 서로 통한다. 겸허하게 타인을 받아들인다. 아무런 편견이 없다. 광범위하게 타인과 감응하고 소통하면서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 咸卦 ䷞ : 택산함(澤山咸), 태(兌 : ☱)상 간(艮 : ☶)하 함(咸)은 형통하니 바름이 이로우므로 여자를 취하면 길하리라.(咸,亨,利貞,取女,吉.) 「상전」에서 말하였다:산위에 못이 있는 것이 함(咸)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서 마음을 비워 사람을 받아들인다.(象曰,山上有澤,咸,君子以,虛受人.) [傳] 함괘(咸卦:䷞)는 「서괘전」에서 “천지가 있은 연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연후에 남녀가 있으며, 남녀가 있은 연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연후에 부자가 있으며, 부자가 있은 연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연후에 상하가 있으며, 상하가 있은 연후에 예의(禮義)를 둘 곳이 있다”고 하였다. 천지(天地)는 만물의 근본이며, 부부는 인륜(人倫)의 시작이다. 이 때문에 상경(上經)에서는 건괘와 곤괘를 맨 앞에 두었고, 하경(下經)에서는 함괘를 맨 앞에 두고 항괘(恒卦:䷟)로써 그 다음을 이었다. 천지는 두 가지 물건이므로 두 괘가 나뉘어 하늘[천(天)]과 땅[지(地)]의 도가 되었고, 남녀는 교합하여 부부를 이루므로 함괘와 항괘는 모두 두 몸체가 합하여 부부의 의로움[의(義)]이 된다. ‘함’은 느낌이니 기뻐함을 위주로 하고 ‘항’은 항상됨이니 바름을 근본으로 삼는다. 기뻐하는 도는 스스로 바름을 가지고 있다. 바름의 도에는 진실로 기쁨이 있다. 공손하면서 움직이고 굳셈과 유순함이 모두 호응하는 것이 기뻐함이다. 함괘는 태괘(兌卦:☱)가 위에 있고 간괘(艮卦:☶)가 아래에 있으니, 소녀와 소남(少男)이다. 남녀가 서로 느낌의 깊음은 젊은 사람만한 자가 없기 때문에 두 젊은 사람이 ‘함’이 된다. 간괘의 몸체는 독실하여 간괘가 의미하는 그침은 정성스럽고 참된 뜻이 되니, 남자의 뜻[지(志)]이 독실하여 아래로 사귀면 여자의 마음은 기뻐하여 위로 호응하므로, 남자는 느낌의 먼저이다. 남자가 먼저 정성으로 느끼게 하면 여자는 기뻐하면서 호응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은 제3회 개인전을 했던 한 해였다. 그 이후로 이런 저런 핑계로 혹은 기회가 있어도 개인전을 하지 못했다. 사실 개인전이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때가 되지 않으면 할 수가 없거니와 또 다른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말은 꼭 정답이 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느닷없이 다가오기도 하는 일이 있기도 하니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게 기회도 오는 법이다. 서울 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에서 개인전 형식의 부스를 할당받고 작품 열 몇점을 걸었던 전시였다. 마지막 날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외국계 은행을 다니고 있던 친구가 오랜만에 찾아와줬다. 더구나 그림 한점을 즉석에서 매입까지 해주었던 고마운 기억이 남아있다. 그 전시작들 중 한 작품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흔적에 관한 추상표현 연구에 집중하던 때라 열몇점의 작품을 단기간에 제작할 수 있어서 가벼운 개인전이라 생각하고 진행된 전시였다. 큰 공간에 많은 부스를 나누고 관람객들을 상대로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이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바탕에 물감(분채)을 칠하고 흩뿌리고 나타나는 중첩과 우연성에 즉흥적인 감흥을 넣어 예기치 않은 순간의 무의식적 표현 위에 나타나는 붓자국과 얼룩의 흔적을 나름의 상징인 새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그림이다. 표면의 파여있는 입체적 표현은 심층의 깊이 잠자고 있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깔려진 색감의 얼룩을 통해 파여진 느낌을 묘사정리하며 새의 형상으로 변환하였다. 한 쪽은 멈춰있는 새의 형상을 그리고 다른 한쪽은 비상하는 새의 형상을 그려 대비를 주고 있다. 색깔도 달리하여 푸른색은 새 형상과 더불어 현실의 비상을 표현하는 의미로 만들어져 있다. 그 위의 종이가 뜯겨져 있는 형상은 조형적 구성의 변화를 더하고 매순간 부조리하고 불편한 현실을 얘기하고 있다. 현실은 마음대로 안되고 뜻대로 안되지만 그런 현실적 불편 속에서도 늘 희망의 백지처럼 헐고 낡은 벽지를 새롭게 도배하듯이 다시 극복해가려는 의지의 발현 같은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또 다른 상처가 만들어지고 생기기를 반복한다. 쳇바퀴 돌 듯이 반복되는 일상, 늪같은 현실은 곧 자신이 선택하고 만든 에고(ego)와 잠재의식의 발현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잠재의식 안에는 흐림, 어두움, 무거움이 없는 차별없이 순수한 사랑과 무한한 비상, 도약, 성장을 꿈꾸는 그런 세계가 있음을 믿고 지향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얘기하고자 한 작품이다. 그림이 어둡다고 내용이 어두운 것은 아니다. 어둠을 통해 밝음을 두드러지게 하는 일종의 환기장치로 보면 되겠다. 미추(美醜)의 구별은 그래서 중요하지 않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한우섭은? = 제주제일고,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나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담묵회 창립회원, 아티스트그룹 '정글' 회원, 민족미술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노원미술협회 회원, 디자인 출판 일러스트작가, 한강원 조형물연구소 디자이너, 서울 제주/홍익조형미술학원 원장, 빛 힐링명상가로 활동하고 있다.
◆ 리괘(離卦) 리(離)는 붙다, 의지하다 뜻을 가진다. 그런데 『주역』이 강조하는 것은 ‘리(離)는 붙음이니, 해와 달이 하늘에 붙어 있고 백곡과 초목이 땅에 붙어 있다’를 본받는 것이다. 사람은 정도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강불식(自强不息)하여야 한다. 하늘의 뜻에 순응해 자기의 처지를 만족해야〔낙천지명(樂天知命)〕 한다. ‘거듭 밝음으로 바름에 붙어야’, ‘천하를 교화해 이룰’〔화성천하(化成天下)〕 수 있다. 고립무원이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집에서는 부모에 의지하고 밖에서는 친구에 의지한다. 의지란, 있지 않은 때가 없고 있지 않는 곳이 없다. 『주역』에서는 위험을 만나면 의지할 데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의지할 데를 찾아야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 의지할 데가 있어야 비로소 높은 봉우리를 오를 수 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적합한 의지처라야 한다. 의지할 수 없는 것은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배워서 익혀두어야 한다.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에게는 마땅히 붙이고 있을 상대를 살펴야 하니, 붙은 것이 올바르면 형통할 수 있다.”1) 예를 들어 높은 산봉우리를 오를 때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 풀도 아니요 작은 나무도 아니고 남가새이거나 독사라면 우리가 의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 숲 속에서 아기 호랑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어미 호랑이는 사냥꾼이 몰래몰래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위험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사냥꾼이 벌써 기다란 창을 들어 올린 상태였다. 어미 호랑이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자식을 버릴 수 없었다.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어미 호랑이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사냥꾼을 향하여 어흥 울부짖으면서 덮쳤다. 미칠 지경에 이른 어미 호랑이는 흉맹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본 사냥꾼은 혼비백산하였다. 평상시라면 창을 든 사냥꾼을 본 호랑이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었다. 노기등등한 어미 호랑이 기세를 본 사냥꾼은 사냥할 생각은 이미 멀리 달아나고 고개를 돌려 도망쳤다. 그렇게 어미 호랑이는 자신의 용기에 의지해 자신의 어린 생명을 구해내었다. 이것도 의지다. 자신을 의지한 것이다. 그렇기에 『주역』은 말한다. “발자국이 엇갈리니, 공경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불리함을 직면할 때 마음속에 정기가 충만하면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주역』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앞선 태양이 석양이 되어 서쪽에 지면 다음 태양이 동쪽에서 막 솟아오른다고. 영고성쇠 그 자체는 자연의 정상 상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술독을 들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남은 인생을 즐기며 보내야 한다. 『주역』은 말한다. “천리(天理)를 즐거워하고 천명(天命)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2) 명(命)은 존재하기에 알아야 한다. 공자는 40에 불혹하였고 50에 지천명했다고 했다. 명을 아는 것이 미혹되지 않는 것보다도 힘들다는 의미다. 명을 아는 관리자라야 진인사(盡人事)하여 대천명(待天命)할 수 있다. 모든 일에 전심전력한다. 조그만 이해득실을 좀스럽게 따지지 않는다.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력투구하고 성공하는지 못하는지는 명에 달려있다는 마음을 가진다. 이것이, “명을 알면서도 운명이라고 단념하지는 않는다.” 라는 태도다. 그렇게 해야 낙관적으로 분투할 수 있다. ‘낙천’이란 희희낙락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열심히 했는가를 물을 뿐 무엇을 수확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타인을 탓하지도 않는 태도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중국인은 보편적으로 오래 살기를 원했다. ‘낙천’이란 수명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는 태도로 매우 분주하며 힘들고 고된 일을 해나갔다. “인생은 백년을 채우지 못하는데 항상 천년의 근심을 품는다.” 이것은 숙명이다. 추락을 생각하지 않는다. 의식을 마비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재능이 사라져버려 보통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세월은 홀연히 진다. 뜻은 있으되 초대받지 못함은 역시나 명이다. 자신의 몸에 많은 문제가 있고 많은 곤경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다 안다. 많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이미 정해져 있다. 수확해야할 양이 이미 정해져 있다. 과다한 요구는 공염불이다. 발전하려면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당연한 행복을 향유하여야 한다. 공자는 말했다. “도를 근심하고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덕이 닦아지지 아니함을 근심하고 집안이 가난함을 근심하지 아니함)3) 또 제창하였다. “선비로서 도에 뜻을 두고도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함께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4) 공자는 또 말했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개를 삼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의롭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귀한 것은, 나에게 있어 뜬 구름과 같다”5) 안회(顔回)를 칭찬하면서 말했다. “어질다, 회는!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가난한 마을에서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다, 회는!”6) 공자와 안회의 이런 정신의 경지에 대하여 송대 유학자들은 ‘공안지락(孔顔之樂)’이라 불렀다. 무슨 의미인가? 이른바 ‘안빈낙도(安貧樂道)’7)요 ‘낙천지명’이다. 공자와 안연의 편안함〔안(安)〕의 본질은 가난〔빈(貧)〕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덕(德)’에 있다. 공자와 안연의 즐거움〔락(樂)〕은 ‘덕’으로 얻은 ‘도(道)’이다. 사실 중국 전통철학 중 ‘빈(貧)’은 그저 특정 역사조건에서 만들어졌다. 부강, 민주, 문명 국가에서는 ‘부유하게 살고 편안하면서’ ‘하늘의 도리를 즐긴다.’ 결국 빈부는 외연일 따름이다. ‘덕’이 내재된 근본 요소다. 따라서 ‘안덕낙도(安德樂道)’라 해야 하리라. 『주역』은 내적인 이성, 덕성을 대단히 강조한다. 자신의 덕행과 지혜를 의지해야 근심 없이 생활하고 정신적으로도 의탁할 곳이 있다. ‘낙천지명’일지니. 오늘의 태양은 이미 서해에 떨어졌다. 내일의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 서있다. 다른 지름길이 없다. 그저 밟고 있는 땅을 의지하여야 한다. 꽃이 피고 열매 맺는 봄가을에 의지하여야 한다. 자기 노력에 의지해 온힘을 다하여 싸워나가야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 離卦 ䷝ : 리위화(離爲火), 리(離: ☲)상 리(離: ☲)하 리(離)는 곧음이 이로우니 형통하다. 암소를 기르듯이 하면 길할 것이다.(離,利貞,亨.畜牝牛,吉.) 부드러운 음이 중정(中正)에 붙어 있으므로 형통하니, 이 때문에 “암소를 기르듯이 하면 길할 것이다.”(柔麗乎中正,故亨,是以畜牝牛,吉也.) 리(離)는 붙음이니, 해와 달이 하늘에 붙어 있고 백곡과 초목이 땅에 붙어 있으니 거듭 밝음으로 바름에 붙어서 천하를 교화하여 이룬다.(離,麗也,日月,麗乎天,百穀草木,麗乎土,重明,以麗乎正,乃化成天下.) 발자국이 엇갈리니, 공경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履錯然,敬之,无咎.) [傳] 리괘(離卦䷝)는 「서괘전」에서 “감(坎)은 빠짐이니, 빠지면 반드시 붙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리괘로 받았으니, 리(離)는 붙음이다”라고 하였다. 험난한 가운데에 빠지면 반드시 붙는 바가 있음은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니, 리괘가 이 때문에 감괘(坎卦)의 다음이 되었다. 리(離)는 붙음이며 밝음이니, 음이 위아래의 양에 붙은 것을 취하면 붙음의 뜻이 되고, 가운데가 빎[허(虛)]을 취하면 밝은 뜻이 된다. 리(離)는 불[화(火)]이 되니, 불의 몸체는 비어 있어 물건에 붙어 밝은 것이며, 또 해가 되니 또한 비어서 밝음[허명(虛明)]의 상(象)이다. 1) 在人,當審其所麗,麗得其正,則能亨也.(程颐) 2) 樂天知命,故不憂.(「繫辭」상) 3) 스승의 남기신 유훈 있으니, 우도불우빈〔도를 닦지 못했음을 근심할 것이지 가난을 근심하지 말라〕이다.(先師有遺訓,憂道不憂貧.)(도잠陶潛「회고전사懷古田舍」) 4) 士志於道,而恥惡衣惡食者,未足與議也.(「里仁」) 5) 飯疏食飮水,曲肱而枕之,樂亦在其中矣.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述而」) 6) 賢哉回也!一簞食,一瓢飮,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雍也」) 7) 가난하게 살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의 도리를 지키려는 삶의 철학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심형(心亨)’을 실현하려면, 첫째, 천성이 강건하여야 한다. 둘째, 중도를 능히 행할 수 있고 진취적이어야 한다. 바로 송사에서 감탄한 것과 같다. “강변의 거친 바람 견딜 만은 하지만 인간세상 살아가기 참으로 어렵구나.”1) 우리는 아름다운 꽃이 가득 뿌려진 탄탄대로를 바라서는 안 된다. 가시가 막아선 험하고 작은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여야 간난신고의 인생 여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군자는 사업을 하는 데 여러 가지 곤란과 어려움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일찍이 준비해 자신의 도덕수양과 사무능력을 제고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 씩 하나 씩 놓여있는 저점을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흉험한 사막을 건너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에 있어, 능력에 있어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다. 『주역』은 말한다. “‘구덩이가 차지 못하였음’은 중도(中道)가 아직 크지 못해서이다.” 무슨 말인가? 위험한 함정을 아직 메꾸지 못했다. 중도를 지키고 정도를 지키는 도리는 아직 더욱 확대,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중도를 지키고 정도를 지켜야만 위험을 없앨 수 있다. 함정이라는 것은 아직 완전히 메꾸지 못했다는 의미다. 중도를 지키고 정도를 지키는 도리를 충분히 확대하지 못했다. 여전히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은(不偏不倚) 중정의 원칙을 견지해 일을 행하면 함정을 밟아 평평하게 만들 수 있다.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다. 이후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한다. 중정을 지키고 정도를 지키는 것은 공(公)이요, 어느 쪽으로도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는 것은 평(平)이다. 만약 위험한 지경에 빠진 후 자신이 유약해 험지를 빠져나올 힘이 없고, 고위에 있으면서 부정을 저지르고 잘못하여 위험을 무릅쓰는 길에 들어서면 실로 심상치 않다.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욱 깊이 빠져들 위험이 있다. 이때 자기 스스로 구할 수 없고 바깥 도움도 없으면 예후가 대단히 흉험하다. 함정에서 위험을 만났으면 먼저 작은 수익을 모색할 수 있다. 작은 이득을 먼저 구하면 차츰 차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애써 노력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중간에 위치하라. 중도를 행할 수 있다. 위험 중에 있다면 힘이 닿는 일을 하면서 먼저 작은 소득을 구하고 점차 위험을 벗어나 승리할 수 있는 길을 탐색하라. 한고조 유방(劉邦)이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차례 위험한 지경에 처했지만 누차 위험을 벗어났다. 작은 승리를 쌓으면서 큰 승리를 이루어 냈다. 마침내 초한쟁패에서 최후의 승자가 됐다. 항우(項羽)는 자신이 서초패왕이 되었을 때 유방을 한중과 파촉의 황량한 험지에 봉하고 관중으로 돌아오는 길을 막았다. 유방은 봉쇄된 험지에 처했으면서도 태연하게 처신하면서 역량을 쌓았다. 입지를 굳히고 난 후 나아갈 계획을 침착하게 세웠다. 먼저 작은 소득을 얻고 기회를 보면서 발전하는 것, 이것이 작은 것을 구하여 큰 것을 얻는, 신중하면서도 위험한 길을 걷는 도리다. 이미 깊은 함정에 빠졌으면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어떤 행동도 결국에는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심각한 위험에 빠지면 나오는 것도 위험하고 돌아가는 것도 위험하다. 나가지도 후퇴하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지면 어떤 방법으로도 위험한 지경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처했으면 어떤 곤란과 위험이 닥치더라도 전념으로 인내하라. 우선 엎드려 묵묵히 대기하라. 전기가 마련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억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경솔하게 일을 행하면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게 된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때도 여전히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더 나빠지게 된다. 자리를 잡지도 못하고 중간에 위치하지 못하여 하반신 위에 처해 있다면, 바로 아래 함정의 위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위에 있는 함정의 위험이 장차 도래하려고 할 때, 앞뒤 모두 위험하다. 진퇴양난이다. 일시에 위험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잠시 멈추어 있느니만 못하다. 멈추어 서서 좋은 방법을 모색하고 좋은 기회를 기다리라. 만약 요행을 바라고 모험하면 헛수고 할 뿐 아니라 더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신중하고 신중하라! 지극히 위험한 함정에 빠졌을 때, 깊고도 깊은 함정이라 자력으로 빠져나올 힘이 없으면 지극히 흉험한 것은 당연하다. 어려움과 위험에 빠진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 외부의 도움을 쟁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위험한 함정이 아직 메꾸어지지 않았다면 삼가 뜻을 지키면 위험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인생의 길에는 늘 다 메꾸지 못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구불구불 울퉁불퉁하다.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물이 흘러가 가득 차지 않는’ 도리를 알아야 한다. 중도를 지키고 정도를 지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習坎卦 ䷜ : 감위수(坎爲水), 감(坎: ☵)상 감(坎: ☵)하 「단전」에서 말하였다 : 습감은 거듭 험함이다.(彖曰,習坎,重險也.) 물이 흘러가서 가득차지 않으며 험함을 행하나 신의를 잃지 않는다.(水流而不盈,行險而不失其信.) “마음 때문에 형통함”은 굳센 양이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維心亨,乃以剛中也.) “가면 가상함이 있음”은 가면 공이 있는 것이다.(行有尙,往有功也.) 「상전」에서 말하였다 : 물이 연거푸 이르는 것이 거듭 험함[습감(習坎)]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덕행을 항상 되게 하며 가르치는 일을 익힌다.(象曰,水洊至,習坎,君子以,常德行,習敎事.) 「상전」에서 말하였다 : “구덩이가 차지 못하였음”은 중도(中道)가 아직 크지 못해서이다.(象曰,坎不盈,中未大也.) [傳] 습감괘(習坎卦)는 「서괘전」에 “물건은 끝내 지나칠 수 없으므로 감괘로 받았으니, 감은 빠짐이다”라고 했다. 지나치고서 그치지 않는 이치는 없다. 지나침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빠지니, 감괘가 이 때문에 대과괘의 다음이 된 것이다. ‘습’은 거듭함[중습(重習)]을 이르니, 다른 괘에서는 거듭하였더라도 그 이름을 더하지 않았는데 유독 감괘에서만 습자를 더한 것은, ‘거듭 험함’이라서 험한 가운데에 다시 험함이 있어 그 의리가 큼을 나타낸 것이다. 괘의 가운데에 한 양이 있고 위아래에 두 음이 있다. 양은 채워있고 음은 비어있으니, 위아래에 의거할 곳이 없어 한 양이 두 음의 가운데에 빠져 있기 때문에 감괘의 빠진다는 뜻이 된 것이다. 양이 음 가운데에 있으면 ‘빠짐’이고, 음이 양 가운데에 있으면 ‘걸림’이다. 양이 위에 있는 것은 멈추는 상이고, 가운데에 있는 것은 빠지는 상이며, 아래에 있는 것은 움직이는 상이다. 음이 위에 있는 것은 기뻐하는 상이고, 가운데에 있는 것은 걸려 있는 상이며, 아래에 있는 것은 공손한 상이니, 빠지면 험함이 된다. ‘습’은 거듭함이니, 예컨대 학습(學習)과 온습(溫習)은 모두 거듭함의 뜻이다. ‘감’은 빠짐이니, 괘에서 말한 것은 험난함에 대처하는 도이다. ‘감’은 물[水]이니, 하나의 양이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가장 먼저 나온 것이므로 물이 되었다. ‘함(陷)’은 물의 몸체이다. 1) 江頭未是風波惡,別有人間行路難.(辛棄疾, 『鷓鴣天·送人』)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습감괘(習坎卦) 감(坎)은 구덩이, 항정이다. 파생하여 위험, 평탄치 못하다 뜻을 갖는다. 인생은 태어나자마자 고통을 받는다고 말한다. 어딘가 억지스러움이 있음을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치에 맞는다. 그렇다. 인생의 길에는 밝은 빛만 있는 게 아니다. 울퉁불퉁하다가도 가끔은 빛을 비춘다. 그때, 고개를 숙이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물이 흘러가서 가득차지 않으니 중용의 도를 견지하고 정도를 지켜라. 꾸준하게 나아가라. 발걸음을 내딛기 힘들 정도로 곤경에 처하면 어떻게 하여야할까? 인생 여정 중 언제 어디서나 험난한 걸림돌을 만나게 된다. 남송 시인 양만리(楊萬里)의 시 한 편 보자. 인생 여정 중 만나는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고개를 내려오면 어려움이 없다는 말 하지 마시게, 행인을 속여 자못 기쁘게 만드는 것이라오. 바야흐로 만 개의 산이 둘러싼 속에 들어가 보니, 산 하나가 우리를 내보내자 산 하나가 또 가로막는 구려.”1)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인생의 위험 지대를 벗어날 수 있을까?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도 얼굴빛은 편안히 변함이 없다.” 이러한 기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정신의 경지는 분명 평범한 것이 아니다. 필시 위험한 지경을 벗어나는 인격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믿음은 거대한 정신적인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위험을 만났을 때 중요한 것은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험난한 지경을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몸은 위험한 지경에 빠졌더라도 마음만은 용왕매진하여야 한다. 위험한 지경을 초월하여야 한다. 그래야 위험에 처했더라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위험한 길을 가면서 평탄한 길을 가는 것처럼 하여서 위험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다. 곤란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다. 태연자약하게 침착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자연지도와 일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고유한 지혜가 빛을 발하게 된다. 『주역』은 말한다. “습감은 거듭 험함이다. 물이 흘러가서 가득차지 않으며 험함을 행하나 신의를 잃지 않는다. ‘마음 때문에 형통함’은 굳센 양이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가면 가상함이 있음’은 가면 공이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위험이 겹겹이다. 물의 본성은 멈추지 않고 흐름이다. 걸림돌을 만나더라도 멈춤 없이 끊임없이 흐른다. 끝끝내 믿음을 잃지 않는다. 성격이 강건하기에 마음이 형통하다. 능히 중도를 행할 수 있다. 행위는 숭상할만하기에 성공할 수 있다. 물은 흐르나 가득차지 않는다. 천산 만곡의 험지를 만난다 하더라도 도도하게 흐르는 물은 막히지 않는다. 물은 구불구불하게 돌아서라도 결국 앞으로 흘러간다. 산천 협곡의 험지를 돌고 돌아 마침내 큰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우리는 물이 시사하는 바를 깨달아야 한다. 물처럼 어려움을 제거하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물처럼 끊임없이 내달아야 한다. 영원히 형통하여야 한다. 물은 여태껏 위험이나 장애물에 막혀 흐르지 못한 경우가 없다. 대해로 흘러 돌아가는 신념을 잃은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물이 ‘믿음이 있는(有孚)’ 것이다. “물이 흘러가서 가득차지 않으며 험함을 행하나 신의를 잃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다. 스포츠의 세계챔피언 쟁탈전은 지극히 험난하고 긴장이 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지는 기술의 고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 소양의 고하에 있다고 한다. ‘믿음이 있는(有孚)’, ‘마음 때문에 형통한(心亨)’ 양성(良性)의 마음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다고 한다. 위험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마음상태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습감(習坎)’ 2글자는 다른 해석, 즉 ‘거듭된 곤란과 위험’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저 거듭된 곤란과 위험을 통하여 위험한 지경을 여러 차례 경험하고 고생을 누차 하여야 복잡한 곤란과 위험에 대한 판별능력과 적응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 계속해서 경험과 지혜를 얻어야 용감하게 어떤 지점에서 위험이 도사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위험을 넘어설 수 있다. 위험에 빠지면 곧바로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물은 비록 잠시 장애를 만나지만 앞으로 흘러가는 에너지를 축적하여, 일종의 내재된 힘을 가지고 마침내 위험과 장애를 벗어난다. 진의(陳毅)의 시구는 참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삼협은 장강을 묶어 강의 흐름을 고쳐보려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기문을 돌파하면 동쪽으로 흘러가 바다를 이루는 것을.”2) 이로써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형체는 비록 험난한 지경에 빠져있더라도 마음은 오히려 형통하고 막힘이 없는 것을. 그럴 수 있는 까닭에 위험과 장애를 돌파하여 기필코 형통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음 때문에 형통(心亨)’의 깊고 오묘한 이치다. 1) 莫言下嶺便無難,賺得行人錯喜歡.正入萬山圈子裡,一山放出一山攔.(『過松源,晨炊漆公店』) 2) 三峽束長江,欲令江流改.誰知破夔門,東流成大海.(『峽江圖』)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서울 한전아트센터갤러리에 전시한 정글 아티스트 그룹 정기전 출품작이다. 당시 입시학원 운영이 어려워 폐업하고 북한산 밑 아동미술학원을 재인수하여 운영할 때 아이들 수업 재료인 비눗방울을 만드는 재료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이다. 재료도 재료지만 학원 아동수업을 회화적 조형원리인 점.선.면.입체에 대한 방향으로 기초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나타나게 된 또 다른 배경이 될 수도 있었다. 다 그만한 인연이 되고 원인이 되어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들이다. 비눗방울의 형상과 흔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생각의 이면에는 나라는 존재의 가벼움을 얘기하고자 했다. 당시 작가노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그림을 그린다. 이전에는 존재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 매 순간 순간이 최선이고 실재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존재의 의미와 실재란 과연 무엇인지 의심만 들뿐 나는 알 수도 없고 결국 스스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게 혼란속에 뒤섞여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스스로 잘못된 선택과 행동, 위선과 타협, 갈등, 우울과 어리석음 등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탓하고 타인을 탓하고 자신을 탓하는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상처와 자학의 흔적을 남기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모든 것들 또한 사실은 착각과 오류로 점철된 어리석고 교만한 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 나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단지 즉흥과 우연, 그리고 존재의 흔적 , 부재의 흔적을 표현한다. 그것이 형상이 됐든, 추상이 됐든간에 스스로 필요에 따라 남길 것은 남기고 지울 것은 지우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밖에 없다. 모자란 것은 채우고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연결하고 문제가 생긴 곳은 해결하고 정리하고 마무리한다. 끝나고 보니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나와 닮아있다. 다시 또 시작한다. 또다시 지우고 움직이고 생각한다. 과연 실재란 무엇인가?‘’ 비눗방울도 존재다. 한없이 가볍지만 빛을 받으면 투명한만큼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 무수한 비눗방울이 만나고 충돌하고 합해지며 서로서로 화판 위를 노닌다. 존재의 가벼움은 단순한 허무주의나 염세적인 것이 아닌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 놓인 존재가 겪어야 하는 실존적 고뇌에 대한 이야기다. 가벼움이나 무거움 중 어느 한 쪽을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그 분별심을 콘트롤 하는 중도의 삶을 얘기한다고 보는게 나의 생각과 가까울 것이다. 어린이 놀이도구인 비눗방울 스틱을 처음으로 이용하여 보았다. 비눗방울만 봐도 즐거워 하는 그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느낌도 담아보고 싶었다. 그림은 비눗방울이 보여주는 점적요소와 뜯어지고 부서져가는 선적 요소, 제작하다만 미완성된 화판에 노출되어진 초배지의 흔적을 그대로 면적요소로 하여 자연스럽게 드러난 공간을 면과 선을 통한 공간 분할과 그속에 존재하는 비눗방울의 점적 존재의 흔적들을 중첩과 모아짐과 흩어짐의 그룹핑을 통해 율동과 리듬감 있게 자유로운 화면구성을 보여주려 하였다.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예전과 별다르지 않게 갖고 있는 생각이 지금의 현실과 비슷하게 반복되어 나타나거나 데자뷰 됨을 알게 된다.. 아직도 이런 미망이 반복되고 있음을 ... 변해온 줄 알고 극복해 온 줄 알았는데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착각과 오만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 감정 느낌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될 것이며 쉽게 변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돈과 건강, 죽음 등 더 큰 인생의 문제로 괴로움은 더해 갈 것이다. 지금도 늘 그렇지만... 누구나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늘 행복하길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모두가 똑같은 것 같다. 크게 변하기는 쉬운 게 아니지만 그 괴로움이 사는 동안은 늘 따라다니는 것임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 괴로움이 변화의 조짐임을 알아차린다. 과거의 생각, 감정, 느낌보다 더 풍성해지고 성숙되어지는 과정임을 알게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삶은 그렇게 무거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매순간 매순간 닥치는 고비고비도 잘 넘겨 왔으므로 ... 과거의 모습이 나의 거울이 되어 다 잘될거라 생각하며 감사하게 살 일이다. 어떤 것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나다움을 믿고 사랑하며 또 움직이자. 생각, 감정, 느낌은 망상이 되기도 한다. 버릴 수 없으면 즐기기라도 하면 좋은데 있지도 않은 생각, 감정, 느낌에 마음의 망상을 더하고 더해서 결국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해가는 상황을 만들어가는게 대부분이다. 어려우면 어려워질수록 정신차리고 더 감사하고 현재에 충실하고 노력해야 한다.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마음 밖에 다른 것이 없다. 비눗방울 하나에도 설레이고 감동받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처럼 세상을 놀 듯이 재미있게 살고 싶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 너무 진지하거나 너무 심각하게 살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탈이 나는 것을 주변에서도 많이 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심각함과 진지함 그동안 살아온 고집스러운 자기판단의 오만과 고집의 경직된 지나침을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되돌려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자연의 축복이 아닌가 한다. 너무 많은 판단과 선택속에 지나친 옳고 그름의 판단이나 좋다, 나쁘다라는 나만의 그릇된 선택을 경계하며 조금은 자기만이 옳다라는 그릇된 생각, 감정, 느낌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감사히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마음의 변화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 지나친 분별과 판단으로 괴로워 하기보단 늘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며 매순간을 즐기고 몰입하고 작은 사소함에도 감동받는 맑고 순수하게 빛나는 어린아이의 투명한 마음 같은 삶, 우리의 내면에 있는 보석같은 아이를 보듬고 안아주고 사랑하자.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가능성 있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삶을 기뻐하고 사랑하고 즐기자. 무심코 지나다 바라본 그림속 일그러진 자화상속에 숨어있는 내면 아이의 아픔을 달래며 잠자고 있는 아이의 꿈과 소망을 끄집어 내본다. 늘 빛나는 삶에 감사하며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한우섭은? = 제주제일고,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나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담묵회 창립회원, 아티스트그룹 '정글' 회원, 민족미술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노원미술협회 회원, 디자인 출판 일러스트작가, 한강원 조형물연구소 디자이너, 서울 제주/홍익조형미술학원 원장, 빛 힐링명상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역』은 말한다 : 비상시기에 비상한 수단을 가지고 비상한 일을 하라. 한 가지 방법에만 구애되지 말라. 용감히 창조하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거리낌 없이 얘기해 보자.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사람은 모두 자신이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더냐. 그런데 성공은 사람에게 쉽사리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업에 대한 추구가 광명을 향한 행진이라고 한다면 실패라는 거꾸로 선 그림자는 그림자처럼 어디를 가든 따라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보자. 투자자는 파산의 위험을 감수하여야 한다. 경기 참가자는 도태할 수 있다는 걱정이 생길 수 있다. 시험을 보는 사람은 낙방할 우려가 있고 과학 연구자는 ‘심기만하고 수확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렇게 실패는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온다. 그런데 실패란 두렵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훼멸시키는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닐 경우가 많다. 실패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가 문제일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을 하던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니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가 도래한 후에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다음번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어쩌면 성공일 가능성이 많다. 유감인 것은, 성공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대다수 사람이 떠나버린다는 점이다. 실패는 분명 우리 사업의 장애물이다. 우리를 멍이 들도록 넘어뜨릴 수도 있다. 그런데 실패는 사업의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우리를 더 높이 올려다볼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진정으로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실패를 발판으로 삼으면 실제로 우리를 완벽한 길에 올려놓고 매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한다. 여러 상황 속에서 실패는 성공 교향악의 전주일 따름이다. 성공을 분만하기 전 극통이다. 실패 속에는 이미 성공의 동기가 포함돼 있다. 사업상 성공한 사람은 대부분 일찍이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패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추구하는 목표가 높으면 높을수록 실패를 경험할 확률이 많다. 실패로 쓰러질 위험성이 더 많다. 영국 물리학자이면서 수학자인 켈빈(Kelvin)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55년 동안 끊임없이 분투하였다. 과학 발전에 최선을 다했다.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든 특별한 점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실패라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을까?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에 저명한 물리학자 겸 수학자가 될 수 있었다. 다른 쪽으로 보면 우리는 많은 실패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해보지 않으면 된다는 전제가 있으면 된다. 미국 캔자스시티에 유진 브라이스(Eugene Brice)라는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패를 피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한 번도 테니스 선수권대회에서 져본 적이 없습니다. 공직 선거에서 한 번도 낙선한 적이 없습니다. 독창 콘서트에서 한 번도 가사를 잊어버려 웃음거리가 되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만이 실패의 위험을 안게 됩니다.” 이 이치는 분명 맞다. 어떤 행동이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목사일 따름이다. 그는 테니스 선수도 아니요 음악가도 아니며 미국 대통령은 더더욱 아니다. 앞으로 나가려는 길에 힘듦과 장애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실패할 위험이 두려워 주저주저 나아가지 않으면 그 결과는? 어떤 실패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성공은 영원히 숨어버린다. 창조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가 필요하다. 과학은 실패를 겁내지 않는 용사가 필요하다. 현대화 사업도 마찬가지로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는 용사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활, 사업과 세계의 일부분은 실패로 구성돼 있다. 성공은 바로 그것과 비교 속에 존재한다. 실패가 있기에 성공이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없다면 인류가 그것을 정복하지 않을 것이고 사물도 발전의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세계는 있어야만 하는 균형과 조화를 잃게 될 것이다. 사업의 실패자는 마찬가지로 사업의 헌신자이다. 단지 그런 헌신은 자기 희생정신이 필요할 뿐이다. 창조를 위한 실패는 모방하여서 얻은 성공보다도 가치가 있다. 여태껏 실패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위대해질 수 없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감하게 실패를 마주할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사업 발전의 중요한 시기에 어려움이 겹겹이 쌓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도처가 가시밭길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 인내심이 필요하다. 서슴지 않고 뛰어들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이 점을 해낼 수 있다면 기적은 우리 곁에 다가온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 大過卦 ䷛ : 택풍태과(澤風大過), 태(兌 : ☱)상 손(巽 : ☴)하 대과(大過)는 들보가 휘어지니, 가는 것이 이로워 형통하다.(大過,棟橈,利有攸往,亨.) 「상전」에서 말하였다 : 못이 나무를 없애는 것이 대과(大過)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象曰,澤滅木,大過,君子以,獨立不懼,遯世无悶.) [傳] 대과괘(大過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이(頤)는 기름이니, 기르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대과괘(大過卦)로 받았다”라고 했다. 무릇 만물은 길러진 뒤에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지면 움직일 수 있다. 움직이면 지나치게[과(過)] 되니, 대과괘(大過卦)가 이 때문에 이괘(頤卦)의 다음이 됐다. 대과괘는 위는 태괘(兌卦☱)이고 아래는 손괘(巽卦☴)이니, 못[택(澤)]이 나무[목(木)] 위에 있음은 나무를 없애는 것이다. 못은 나무를 윤택하게 하고 길러주는 것인데 마침내 나무를 없애는 데에 이르니, 이것이 대과(大過)의 뜻이다. ‘대과’란 양이 지나친 것이다. 그러므로 큰 것이 지나침과 지나침이 큼과 대사(大事)의 지나침이 된다. 보통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성현의 도덕과 공업 및 보통의 일보다 크게 뛰어난 모든 일이 다 여기에 해당한다. 성인이 인도(人道)를 다하는 것이 이치에 지나친 것이 아니다. 천하의 바른 이치로써 일을 다루나, 잘못을 바로잡는 작용[용(用)]이 조금 중(中)보다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행함에 공손을 지나치게 함과 초상(初喪)에 슬픔을 지나치게 함과 씀에 검소함을 지나치게 함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바로잡기를 조금 지나치게 한 뒤에야 중(中)에 미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중(中)을 구하는 작용이다. 이른바 ‘대과’라는 것은 보통의 일 가운데에서 큰 것일 뿐이지, 이치에 지나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크기 때문에 항상 볼 수가 없고, 항상 보는 바에 비하여 크기 때문에 ‘대과’라고 이른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선양(禪讓)하고 탕왕과 무왕이 방벌(放伐)한 것과 같은 것은 모두 도(道)를 말미암은 것이니, 도는 중(中) 아님이 없고 항상 되지 않음이 없으나, 세상 사람들이 항상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보다 크게 지나치다[대과(大過)]’고 이르는 것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대과괘(大過卦) 대과(大過)는 상규를 넘어선다는 뜻을 나타낸다. ‘진리는 왕왕 소수의 손에 장악’되기 때문에 군자는 ‘홀로 서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지 말라’고 자주 말한다. 바로 자신이 발전할 결정적인 순간에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위축돼서는 안 된다. 소심해져서도 안 된다. 용감하게 돌진하고 용감하게 맞서야한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자기에게 속한 천지를 개척할 수 있다. 너무 소심해서 이것도 겁나고 저것도 두려우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사람의 일생은 비상시기가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도 한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우리가 안전하게 그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느냐를 보면 된다. 교묘하게도 비상시기에 호방한 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지 않던가. 비상시국이 군웅의 재능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야 하는 문제를 잡아내고 잘 처리할 수 있으면 성공도 순리적으로 펼쳐지게 되리라. 기회를 붙잡는 것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주역』은 말한다. “못이 나무를 없애는 것이 대과(大過)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커다란 과도기가 도래할 때, 용감하게 돌진하고 용감하게 맞서 나아가야 한다. 추호의 두려움도 가지지 말고 강철같이 굳세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몇 천 년의 봉건사회는 엄격한 계급관념을 만들어 냈다. “군주가 신하에게 죽으라면 신하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만 했다.” 명령에 따라야 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절대 복종하여야 했다. 그것이 신하된 자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런 윤리문화는 광범위하게 전해졌다. 더욱이 오늘날까지도 엄연하게 끊이지 않고 전해져 왔다. 정확성과 실제성은 접어두고 오직 상부(상급)에서 말하는 것만을 표준으로 삼는 것, 오직 책의 내용만을 전적으로 믿는 것, 이것도 그런 윤리문화의 다른 표현이다. 개성을 버리고 복종을 중시하는 현상도 그런 윤리문화의 다른 표현이다. 연공서열을 따지는 것, 권세를 맹신하는 현상도 그런 윤리문화의 다른 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창조성을 목숨처럼 여겼던. 이미 고인이 된 중국 과학자 왕선(王選), 그는 생전에 권세에 도전해 창조하여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현대 중국의 뛰어난 노동자 대표인 기중기 기사 허진초(許振超), 그렇게 많은 ‘특기’를 몸에 익힐 수 있었고 그렇게 많이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런 윤리문화에 젖어있던 결과는 아닐 터이다. 여러 가지 사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계급이 분명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절대 복종하는 윤리문화는 창조의식을 ‘틀’ 안에 가두어 소멸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개성을 버리고 권세에 굴복하면 창조성 인재는 ‘테두리’ 속에서 멈춰서 버리지 않던가. 문화를 창조하고 창조성을 배양할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계급문화가 만들어낸 복종하는 윤리도덕과는 영원히 고별해야만 한다. 이외에도 대세에 순응하는 사유습관이 아직도 존재한다. 같다는 뜻인 ‘동(同)’은 중국 전통문화 속에 많은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적극적인 의미가 적지 않다. 오늘날에도 더더욱 중시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부정적인 면이 많다는 것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同’에는 너무나 많은 부정적인 면이 내포돼있다. 예를 들어, 앞서지도 말고 뒤지지도 말고 그저 여러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대세에 순응하여야 한다. 모험하지도 말고 나서지도 말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라. 이것이 오히려 가장 안전하고 틀림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머리를 내미는 새가 총을 맞는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불거져 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 “숲속의 나무가 홀로 유별나게 크면, 바람이 반드시 그것을 부러뜨린다.” 걸출한 인재는 늘 사람들의 주요 견제 대상이 된다는 말일지니. 이런 말들이 지극히 이치에 맞는 명언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어디 이뿐이랴. “공을 세우기를 바라지는 않고 다만 잘못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또 있다. “공로는 없지만 그래도 고생은 좀 했다.” 무슨 말인가? 비록 잘하지는 못했더라도 열심히는 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공한 사람의 행동 규범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문화심리로 얼마나 많은 창조의 불꽃을 소멸시켰던가. 탐색해 나가는 발걸음을 얼마나 많이 멈추게 만들었던가. 용감하게 ‘첫 번째로 게를 먹은’ 사람은 ‘분수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던가. (‘첫 번째로 게를 먹은 사람’은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발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서는 사람을 분수도 모른다고 하는 세태는 지금도 존재한다. 감히 이목을 끄는 사람은 ‘세상을 모르고 분별없이 우쭐댄다’고 보고, 용감하게 돌진하고 부딪치는 사람은 ‘경솔하다’거나 ‘경망스럽다’고 멸시하지 않던가. 개성이 강한 사람은 ‘덜 되먹었다’고 ‘미숙’하다고 간주하지 않던가. 대체로 창신(創新)이란, 창조란, 원래 있거나 현존하는 사물을 초월한다. 아직 오지 않거나 없는 것을 포착한다.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성의 해방이 필요하다. 독창성이 있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처음으로 만드는 개척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화조건이 마련되어야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고 신천지를 개척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사물을 창조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개혁 창조하는 인물을 대할 때 사람들은 자주 완전무결이란 척도로 평가하려고 한다. 모든 일을 원만한 것을 문제 삼고 완벽한 것을 가혹하게 요구한다. 일하는 사람 뒤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눈 뜨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줄서있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이 뒤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잘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용감하게 돌진하는 사람 뒤에는 손가락질 하는 사람 몇몇이 있기도 한다.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오히려 ‘멋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용감하게 맞선 사람이 실수할 때면 유감이라고 말한다. 창조하려는 사람 뒤에는 끊임없이 흠을 들추어내는 사람이 서있다. 흠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오히려 ‘식견이 앞섰다’고 하면서 창조하는 사람이 실패하면 무참하게 질책한다. 이런 사례, 부지기수가 아니던가. 창조는, 변화하는 ‘변(變)’을 주장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한다는 것이다.” 일정 정도의 의미에 있어 창조는 고유한 사물을 균형 있게 깨뜨렸고 고유한 관계를 조화롭게 돌파하였다. 더욱이 판박이 업무 추진 방식을 무너뜨렸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용감하게 변혁할 수 있었고 경쟁할 수 있었다. 즐거이 모험할 수 있었고 창조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창조에 대한 열정을 앞 다퉈 내뿜을 수 있었고 활력 넘치는 창조의 기세를 앞 다퉈 내달릴 수 있었다. 커다란 과도기는 비상시기다. 곤란과 좌절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가져서는 안 된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신념대로 행동하여야 한다. 새로운 길을 향하여 매진하여야 한다.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야 한다. 비상시기에는 비상한 인물이 탄생하게 된다. 비상한 찬스를 만나게 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인물이 그런 찬스를 만나 뛰어난 영웅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런 영웅은 유별난 감화력을 갖추고 있다. 고상한 도덕을 겸비하고 있고 대담하게 앞서나가는 용기를 갖추고 있다. 사실, 비상시기에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이 적을 따름이다.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되고 기회를 놓친 사람은 일반인이 된다. 더 아쉬운 것은 분명히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고 있으면서 너무 소심하여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점이다. 앞뒤를 너무 재어 우유부단해져 버린다. 사고가 생길까 겁을 집어먹는다.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래서 기회를 순순히 넘겨줘 버린다. 뻔하지 않은가. 과도기에 용감하게 뛰어들려는 열정이 없이 머뭇거린다면 쉬이 성공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늦갂이 대학원생 시절 작품이다. 조교였던 친구의 권유로 고민하다가 아내의 허락과 격려로 결혼후 힘든 상황에서도 진학, 휴학 한번 안하고 그럭저럭 무사히 졸업하였다. 대학교 시간강사는 안해봤지만 대학원을 졸업해야 자격이 되기 때문에 아내는 작가로서 그리고 학원 보다는 대학 시간강사라도 하면 나을 듯 싶어 졸업이후를 기대 했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어 대학강의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내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했고 그만큼 현실에 둔감하고 당시 절심함도 없었던 나였기에 기대했던 아내에게 지금도 참 미안하다. 이 그림 제목은 ‘연결짓다’이다. 이 때 함께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 제목 또한 동사로 붙였다. 부딪히다, 사라지다, 떠돌다, 움트다 등. 이는 고정태이며 관념적인 명사적 단어보다 능동태적, 가변태인 동사가 그림속 추상성과 더불어더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 시공간을 표현하는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움직임이나 상태를 표현하는데도 적합하고 형용사적 의미와 서술의 의미도 있고 실천과 결과의 의미가 있어 동사를 그림 제목으로 붙였던 것 같다. 어쩌면 문장에서 보면 명사보다 동사가 더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학원 논문에 더 그럴싸한 논지로 동사를 택한 이유를 썼던 거 같은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양화의 선 또는 획은 그런 움직임의 동사적 의미가 다른 어떤 예술적 장르의 재료보다 물질적측면에서나 정신적 측면에서 비교하면 더욱 강하고 두드러진다. 이 그림은 선을 통해 운동하는 형태로서 시각에 의해 볼 수 있고 기분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선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선과 선이 만남은 곧 존재의 충돌을 일으키고 동시에 충돌과 만남은 이야기가 생성되고 흔적을 만들고 남긴다는 생각에 긋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만든 작품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선의 밀도 차이와 흔적의 강·약은 상대적 힘과 에너지의 우열 차이와 변화를 내포하고 보여준다. 붓을 다루는 작가의 힘과 속도의 변화, 그리고 물로 지울 때의 시간의 차이와 물의 세기, 그리고 우연한 효과의 무작위성을 포함하는 차이도 포함해서... 그 선의 에너지 차이와 함께 붓질의 궤적에 의한 속도감을 긴장감 있게 표현하려 하였고 그 차이와 궤적의 변화들을 조화롭게 연결지어 보이려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그로 인한 인과의 문제, 연기법의 문제로 귀결되어가며 만남과 인연으로 일어나는 충돌과 문제의 해소, 화해, 용서 ,조화로운 통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제작과정과 표현상에 있어서는 붓질의 자유로움과 재미를 유희하며 그 반복과 중첩을 통해 붓질의 충돌과 교차를 자연스럽게 엮어짐에 신경을 쓰고, 물로 지워가며 나타나는 우연의 효과를 살리며 모자라 보이는 것은 나름대로 더하고 채워가며 마무리 한 작품이다. 우리는 늘상 모든 것에 접하거나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보이는 모든 관계부터 보이지 않는 생각까지 ,어떤 이유나 상황으로 한 생각을 일으켜 그 생각이 어떤 상태가 되는 것도 일종의 비물질적 대상에 의한 상념이 인연이 이루어져서 여러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 근본원인이 있고 인연이 있든 인연이 없든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에 의해 이 우주는 어떤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듯 하다. 그 인연과 연기는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온 과정이며 원인이고 그 결과물이 현재의 나의 모습이다. 이 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무수한 만남, 사건.사고,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나타나고 있다가 사라지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흔적을 남기고 저장되기도 한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일이 생겨 부득이하게 개명을 하게 되었다. 참 인생은 알 수 없다. 반평생을 부모님이 지어주신 한 이름으로 살다가 개명을 하니 많이 낯설고 어색하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바꾸려니 죄송하기도 하고 오랜 습관이 무의식으로 굳어지고 그렇게 부르고 불리워진 이름이 세상속에서 인연된 타인에게 각인된 기억과 무수한 곳에 내이름과 인연된 것들, 그리고 소리라는 보이지 않는 파동으로 존재했을 거를 생각하니 그 이름 하나로 관계맺은 그 모든 인연이 주는 무게감이 컸었구나를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이름 세글자가 그동안 세상과 만나 충돌하고 만나고 연결되어 살아온 시간이 이젠 지워지고 사라져간다. 이왕 개명을 했으니 이름이라는 고유명사에 부끄럽지 않게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움직임과 올바른 행위의 동사적 삶을 살아가보자. 개명한 새로운 이름으로 앞으로 또 만나는 인연과 세상에 좋은 파동을 가진 소리로 좋은 일들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옛 이름으로 만들어져 왔던 안좋은 것들은 삭제되고 바뀐 새이름으로 세상에 좋은 파장 파동이 되어 유익한 결과가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 다시 시작하고 노력하고 다시 거듭나자. 긍정적인 한 생각이 한 마음을 일으켜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게하고 그에 따른 결과가 한 생각에 달라짐을 믿고 다시 용기있게 힘을 내어 살아가자. 새롭게 바뀐 이름처럼 생각도 마음도 새로 태어나 예전보다는 한걸음 더 성숙된 마음으로 살아가 보자. 그리고 다가올 연결되고 인연된 모든 만남을 더욱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더 깊은 감사함을 갖고 살아가 보자. 한 생각이 마음을 일으킴을 알아차리고 만약 안좋은 사념이라면 그마음에 휘둘리지 말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약해지지 말고 존재의 당당함을 견지해 나가보자. 모든 것은 에너지 싸움이다. 밝고 긍정적인 상념의 에너지를 충만케하여 행복해지자. 어둠은 조그마한 빛으로도 물러간다. 내가 행복해야 모든 연결된 이들이 또한 행복할 것임을 알기에...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모든 것에 감사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한상범은? = 제주제일고,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나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담묵회 창립회원, 아티스트그룹 '정글' 회원, 민족미술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노원미술협회 회원, 디자인 출판 일러스트작가, 한강원 조형물연구소 디자이너, 서울 제주/홍익조형미술학원 원장, 빛 힐링명상가로 활동하고 있다.
◆ 이괘(頤卦) 이(頤)의 본뜻은 턱이다. 파생하여 양육, 봉양의 뜻을 갖는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바쁘게 뛰어다닐 수밖에 없다. 가정을 위하여 바쁘고 부모처자를 걱정하여야 한다. 이 사회에서 모든 가정은 양육을 필요로 한다. 이것들은 우리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한다. 세상 경험을 쌓고 살 길을 찾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자력갱생하여야 한다. 재부를 창출하여야 한다.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여야 한다. 놀기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해서는 안 된다. 먹는 것만 밝혀서는 안 된다. 빈들거려서도 안 된다. 가족에게 부담이 돼서는 안 된다. 『주역』은 말한다. “이(頤)는 곧게 하면 길하니, 길러주며 스스로 음식[구실(口實)]을 구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슨 말인가? 부양하는 일을 점을 쳐서 물으니[정(貞)] 길하다[길(吉)]는 뜻이다. 부양하는 일을 관찰하니 스스로 먹을 것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은 경제 독립의 사회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여야 비로소 매력을 발할 수 있다. 가정에서도 발언권이나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자력갱생하여야 한다. 어려움을 견디며 창업하려는 정신을 발양하여야 한다. 홍기거(紅旗渠)는 20세기 6,70년대 임주(林州, 원림原林현) 인민이 자력갱생, 간고한 창업 정신, 자강불식, 개척 창신, 단결 협력, 멸사봉공 정신으로 이루어낸 일대의 기적이다. 공정은 1960년 2월에 시작되었다. 수로 건설에 참여한 간부와 민간인은 고된 시공 조건 아래서 태항(太行)산 절벽 위에 험탄 협곡 가운데 자력갱생한다는 일념으로, 고난의 창업 정신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사를 진행하였다.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서 봄여름을 10차례 넘기며 산을 만나면 동굴을 뚫고 협곡을 만나면 다리를 놓으면서 산 1250개를 깎고 수로교 151개를 건설해 터널 211개를 뚫었고 각종 건축물 12408좌를 건조하였다. 파낸 토석으로 넓이 2미터 높이 3미터의 벽을 만들었다. 중국의 남북을 이은 것으로 광주에서 하얼빈까지 연결시켰다고 하여야 할까? 인공 은하인 홍기거는 임주 민간인이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개조한 위업임을 드러내고 있다. 자력갱생이란 무엇인지, 고난의 창업 정신이란 무엇인지, 단결 협력과 멸사봉공의 정신이라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위대한 정신이라고나 할까. 홍기거는 자력갱생, 고난 창업의 모범이다. 후세에게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인간 은하’로 남겨주었다. 홍기거 정신은 귀중한 정신유산이며 후세에 남겨진 재산이라 할 것이다. 중국인은 말한다. 민족이 대부흥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민족 역량을 결집시킬 신앙이요 정신이 필요할 것인데 홍기거의 ‘자력갱생, 고난 창업, 단결 협력, 멸사봉공’의 정신은 과거의 세월에 울려 퍼지는 것을 넘어 오늘날 신시대에 떨쳐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중국인은 또 말한다. 노동의 영광은 역대로 중국인이 공인하는 도덕이요 중국인의 전통적인 미덕이며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가장 기본이 되는 사람됨의 진리라고. 그런데 물질생활 조건이 개선되고 불량문화의 영향으로, 사회 분업과 노동 차별이 존재하면서 그 진리를 잊어버리거나 멀리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놀기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상과 경향이 생겨났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추세다. 노동과 부지런함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먼지는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힘듦과 피곤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체력, 지력, 땀을 쏟아내야만 노동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 노동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노동은 능률을 필요로 한다. 사회 생산력을 높이려면 실제로 노동자는 과학기술 지식을 운용하여 복잡한 노동으로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꾸준히 배우고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어야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과 동시에 노동의 영예감을 맛볼 수 있다. 부지런히 노동하고 자신의 힘으로 생활해 나가야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다. 부양하는 데에는 물자를 부여하는 양육 이외에 정신 식량을 주어야한다. 그래서 부양하려면 덕을 길러야 한다. 『주역』은 말한다. “기름에 위배되면 곧더라도 흉하여 십년이 되어도 쓰지 못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 무슨 말인가? 부양은 바르고 스스로 자라는 덕을 길러야 한다. 상구(上九)에서 부양을 구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당하지 않은 수단으로 살 길을 찾는 행위가 극점에 이르렀으니, 엄중하게 이도(頤道)를 어겼기에 그 결과는 반드시 흉험하다. 사람이 부양을 구하는 데에는 반드시 중정의 덕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부양하고 타인을 부양해야 한다. 타인에게 부양을 구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맑게 하여야 한다. 실제에 근거해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 지름길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모든 수단을 강구해 타인에게 터무니없이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효의 요지는 자신의 주관적 노력과 정당한 방법과 경로로 부양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부당한 수단으로 타인에게 부양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송나라 사람 유초(游酢)는 해석하였다. “위가 아래를 길러주니 이(頤)의 바름이다. 만약 위에 있으면서 오히려 아래가 부양하면 이는 거꾸로 된 것이다. 이 이효와 사효는 모두 거꾸로 돼있다. 그런데 이효는 사물에 뜻을 두고 있고 사효는 도에 뜻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사효는 이를 거꾸로 했기에 길하고 이효는 행하면 흉하다.” 무슨 뜻인가? 백성 민중을 위해야 하고 백성 민중 사이에 부양을 구하는 것은 물질이라는 말이다.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부양을 구하는 것에는 마땅히 덕과 의로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정씨역전(程氏易傳)』은 말한다. “삼효 이하는 몸을 기르는 자이며, 사효 이상은 덕과 의를 기르는 자이다. 임금으로서 신하에게 기름을 의지하고, 윗자리에 있으면서 아래 사람에게 기름을 의지함은 모두 덕을 기르는 것이다.” 위가 아래에 부양을 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내용은 사방에 덕과 의를 베푸는 것이다. 바로 『상전(象傳)』의 말과 같다. “‘거꾸로 길러주기를 구하나 길함’은 위에서 베푸는 것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른바 ‘위에서 베푸는 것이 빛나다’는 말은 위에 있는 통치자가 한편으로는 거꾸로 아래에게 부양을 구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민중에게 덕과 의를 베푸는 것이다. 고귀한 지위를 벗어던지고 내려가 빈천한 백성과 교류하면서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며 백성을 부양한다는 말이다. 명나라 사람 임희원(林希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현인에게 낮추는 마음이 전일하지 않으면, 현인이 선으로 고해주기를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다. 보태주기를 구하는 마음이 계속되지 않으면, 거의 얻지 못했는데도 그치게 된다.” 통치자가 백성에게 부양을 구하는 관건은 덕과 의를 베푸는 것이요 어진 이를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는 마음이 한결같아야 하고, 아래에게 사람을 부양하도록 구하려면 끊임없이 절박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부양하는 데에 멈춤이 없게 할 수 있고 스스로 부양하는 데에 잘못이 없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가정에 대하여 말하면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풍족한 열매를 거둬야 하고 가정의 물자 소비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자녀에게 정신적 재부를 물려줘서 고상한 덕성과 훌륭한 생활 습관을 갖출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기업과 단체에 대하여 말하면, 사원의 생활에 만족을 시켜주는 것 외에도 그들에게 훌륭한 기업문화를 부여해야 하고 단체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사원들에게 진정으로 기업과 단체가 자신들의 두 번째 집으로 여길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한다. 아주 만족하게 기업과 단체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공헌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국가에 대하여 말하자면, 국가의 모든 것은 국민에게 속해 있다. 국가는 재부를 국민에게서 받은 것이기에 다시 모든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써야 한다. 동시에 덕과 의를 베풀어야 하고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만민을 감화시켜야 한다. ***** 頤卦 ䷚ : 산뢰이(山雷頤) , 간(艮: ☶)상 진(震: ☳)하 이(頤)는 곧게 하면 길하니, 길러주며 스스로 음식[구실(口實)]을 구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頤,貞吉,觀頤自求口實.) 기르는 곧은 도에 위배되기 때문에 흉하여 십년이 되어도 쓰지 못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 / 기름에 위배되면 곧더라도 흉하여 십년이 되어도 쓰지 못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拂頤貞凶,十年勿用,无攸利.) 거꾸로 길러주기를 구하나 길하니, 호시탐탐하여 하고자함을 좇고 좇으면 허물이 없으리라.(顚頤吉,虎視耽耽,其欲逐逐无咎.) [傳] 이괘(頤卦)는 「서괘전」에 “물건이 모인 뒤에 기를 수 있으므로 이괘로 받았다”라고 했다. 물건이 이미 쌓아 모이면 반드시 길러주어야 하는데, 길러주지 않으면 생존하고 번식할 수 없다. 이괘가 이 때문에 대축괘의 다음이 됐다. 괘가 위는 간괘(艮卦☶)이고 아래는 진괘(震卦☳)이어서 위아래의 두 양효가 가운데에 네 음을 포함하고 있고, 위는 멈추고〔간괘〕아래는 움직이며〔진괘〕, 밖은 충실하고 안은 비었으니, 사람의 턱의 상이다. ‘이(頤)’는 길러줌이니, 사람의 입은 마시고 먹어서 사람의 몸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頤)’라고 이름을 지었다. 성인이 괘를 만들어서 기르는 뜻을 미룸이 크게는 천지가 만물을 양육하고 성인이 현자를 길러 만민에 미치며, 또는 사람이 생명을 기르고 형체를 기르며 덕을 기르고 사람을 길러주는 데에까지 이르니, 모두 기르는 도이다. 움직이고 쉬는 것을 절제하거나 펴는 것은 생명을 기르는 것이고, 음식과 의복은 형체를 기르는 것이고, 위의(威儀)와 행의(行義)는 덕을 기르는 것이고,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사람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필립스(Philips)회사는 오랜 기간 인력자원을 회사 발전의 중요한 기점으로 삼았다. 업무의 고속적인 발전을 유지하려고 필립스는 전문적으로 명석한 인재 발굴 전략 조치를 만들었다. 그중 현지의 인재를 흡수하고 배양하려고 필립스는 중국의 인재를 전략적으로 중시하고 중용하였다. 100명의 사장급 현지 인재를 배양하려고 필립스는 우수하며 발전 잠재력을 갖춘 젊은 인재를 전폭적으로 끌어들였다. 내부 인재를 배양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중점을 두고 그들에게 필립스 발전 책략에 만족시키는 동시에 자기 직업의 앞길을 개선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특별히 인재 발전 센터를 만들어 원래 분산되어 있는 인력자원을 서비스 기능으로 집중시켰다. ‘TOTAL’ 발전계획을 통하여 중급 관리인재를 회사의 정책결정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지도 및 관리 능력 방면에 인재를 배양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여 미래의 지도급 인물이 되도록 도왔다. 필립스회사도 ‘본토 인재 국제화’ 전략 목표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걸출한 중국인 사원을 해외에 파견하였다. 훈련과 실제 업무를 진행하면서 전 세계에 걸친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중국에서 해외로 갔다. 그렇게 고급 인재를 배양하였다. 필립스회사의 인재 전략은 기업문화까지 포함하였다. 인재를 받아들이고 인재가 머무를 수 있도록 필립스회사는 내부 사원들의 적극적 참여를 제창하였다. 강한 구심력과 응집력을 갖춘 기업문화를 갖추었다. 필립스회사는 내부 사원의 ‘사원 업무 몰입도 조사’를 했다. 조사 과정마다 모든 사원은 회사의 현황과 미래 발전에 대한 자기 의견을 개진하였다. 조사 결과는 필립스회사 최고층 관리자가 주의하게 되면서 회사를 이끌어나가는 전략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그러한 계통적이면서 지향적인 인재 발전 전략을 통하여 필립스회사는 회사 자체 발전을 위한 많은 인재를 배양하였다. 사회의 기술 과학 진보와 경제 발전에 전문적인 동량이 되는 인재를 공급하게 됐다. 넓은 의미에서 ‘관련된 모두가 혜택 받는’ 인재 전략은 필립스가 추구하던 바였다. 『주역』은 말한다.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것이 대축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이전의 말과 지난 행동을 많이 알아 덕을 쌓는다.” 무슨 말인가? 하늘이 산속에 있다는 것은 대축괘의 상징이다. 군자는 그것에 근거해 앞선 성현의 언행을 많이 기억해 자신의 덕행을 쌓아나간다. 풍작을 거두려면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하는, 근본을 잊지 않는’ 도리를 알아야 한다. 사업의 성공은 모두가 함께 노력한 결과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이 더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성공을 거뒀다 하더라도 함께 할 이가 없으면 외톨이 장수가 될 뿐이다. 그렇기에 군자는 현자를 아껴야 하고 선(善)해야 한다. 선을 쌓아야 덕을 쌓을 수 있다. 덕을 쌓아야 부귀가 오래 갈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말한다. “덕이 많아야 복이 많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덕을 쌓아야 강산을 향유할 수 있었다. 발전하려는 자는 마찬가지로 덕을 쌓아야 부귀가 오래간다. 겸허, 공경, 절약, 친민, 제천 등등,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준이다. 반대로 교만, 방탕, 사치, 자기 과시, 과도한 흥분은 모두 쇠패하는 복선이다. 『노자』 제49장은 말한다. “성인은 언제나 사심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선한 사람은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선하게 대하니, 그 덕은 선이다. 미더운 사람은 믿어주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믿어주니, 그 덕은 믿음이다. 성인이 천하에 임할 때는 두루뭉술하게 천하를 위하여 마음을 섞는다. 백성은 모두 (성인의 행동에) 이목을 기울이나 성인은 모두를 어린아이로 삼는다.” 무슨 말인가? 현명하고 밝은 사람은 문제를 볼 때 어떤 주관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자기 마음으로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고 모든 것에 백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선량한 사람은 타인을 선하게 대한다. 선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한 사람은 선하게 대한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을 감화시킨다. 성실한 사람은 타인을 믿는다. 불성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실한 사람은 그를 믿는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의 신임과 사랑을 받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 사욕이나 편견을 갖지 않는다. 백성과 부드럽게 서로 지낸다. 사람을 순박하고 성실하게 감화시킨다. 백성은 그의 무욕에 감화되어 자신의 순수한 천성을 회복한다. 선은 사람의 본성이다. 선이 있기에 돈을 벌 수 있고 즐길 수 있으며 행복을 느끼고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다. 믿어보자 : 착한 사람은 평생 평안하다. ***** 大畜卦 ䷙ : 산천대축(山天大畜), 간(艮: ☶)상 건(乾: ☰)하 대축은 곧음이 이롭고(이로우니),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아서) 길하니(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大畜,利貞,不家食吉,利涉大川.)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것이 대축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이전의 말과 지난 행동을 많이 알아 덕을 쌓는다.(天在山中,大畜,君子以,多識前言往行,以畜其德.)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아서) 길함”은 현명한 이를 기르는 것이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로움”은 하늘에 호응하는 것이다.(不家食吉,養賢也,利涉大川,應乎天也.) [傳] 대축괘는 「서괘전」에 “무망이 있은 뒤에 쌓을 수 있으므로 대축괘로 받았다”라고 했다. 무망이면 실질이 있기 때문에 쌓아 모을 수 있다. 대축괘가 이 때문에 무망괘의 다음이 됐다. 괘는 간괘가 위에 있고 건괘가 아래에 있어서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으니, 지극히 크게 쌓은 상이다. ‘축(畜)’은 ‘쌓아 저지함[축지(畜止)]’이 되기도 하고, 또한 ‘쌓아 모임[축취(畜聚)]’이 되기도 하니, 저지하면 모인다.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상을 취하면 온축함이 되고, 간괘가 건괘를 저지함을 취하면 ‘쌓아 저지함’이 된다. 저지한 뒤에 쌓임이 있으므로 ‘저지함’이 ‘축(畜)’의 뜻이 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