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토’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묵시록)의 그리스 어원이다. ‘신의 계시 실현’을 의미하기도 하고 거대한 사변의 발생으로 하나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종말은 항상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말로 하면 ‘판갈이’ 쯤 될까. ▲ 스페인은 마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옥의 ‘쿠쿨칸’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표범 발’을 8명의 추적자들이 집요하게 추적한다. 위기의 순간마다 어느 소녀가 노예상인들에게 했던 저주의 ‘계시’가 하나씩 이뤄지면서 노예상인 추적자들이 차례로 죽어간다. 우리나라 영화 ‘최종병기 활’이 표절했다고 논란이 일었던 쫄깃쫄깃한 장면들이다. 그렇게 7명의 추적자들이 하나씩 죽어가고 마지막 남은 최후의 추적자가 주인공 표범 발을 땅끝 해변까지 몰아붙인다. 더 도망갈 곳 없는 해변에 도달한 최후의 추적자와 표범 발앞에 거대한 스페인의 전함이 떠 있
마야의 대제사장은 인신공양의 한바탕 ‘축제’를 벌이기 위해 노예상인들을 고용한다. 노예상인들은 밀림을 헤치고 평화로운 마을들을 습격한다. 기껏해야 멧돼지 사냥이나 하던 평범한 ‘작은’ 마을 주민들의 전투력이나 무기로는 고도로 훈련된 노예상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 웅장한 유물의 뒤편엔 '폭력'이 숨어 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대개 야만적인 힘에 굴복하곤 한다. 마을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양민들은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한다. 노예의 시조는 처음부터 노예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노예의 자식은 대대로 노예가 된다. 노예상인들에 끌려 지옥의 행군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도시’ 치첸잇자(Chichen Itza)의 악명 높은 ‘쿠쿨칸(Kukulkan)’ 피라미드다. 천문에 밝았던 마야인들은 ‘쿠쿨칸’ 피라미드 동서남북 4개의 계단을 91개씩 만들어 364계단을 구축하고, 꼭대기 계단 하나를 더해 정확히 365계단을 쌓았다. 그다음 매년 춘분과 추분에 꼭대기의 그림자
쏟아지는 TV 프로그램, 광고, 인터넷 정보, SNS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때론 없던 욕망까지 열심히 발굴해낸다. 욕망이 커지는 만큼 소비를 늘릴 수 있다면 문제없겠지만, 다함께 소비를 무한대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두들 불행해진다. ▲ 현대자본주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찬양하고 고무시킨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 ‘아포칼립토’는 마야족 작은 마을 주민들의 사냥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을의 젊은 사냥꾼들이 울창한 숲속에서 멧돼지처럼 생긴 짐승 한마리를 쫓는다. 10여명이 창을 들고 숲속에서 멧돼지와 숨바꼭질하며 몰아 결국 포획에 성공한다.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소중한 양식이 되어줄 멧돼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숨통을 끊는다. 그리고 즉석에서 배분이 이루어진다. 배분의 순서는 사냥에서 세운 공로의 정도를 기준으로 한다. 모두 큰 불만 없이 분배가 완료된다. 나뭇가지에 멧돼지를 매달고 마을로 돌아오는 젊은이들을 마을의 아녀자들이 몰려나와 맞이한다. 갈리아를 정복하고 로마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개선행진을 벌이는 시저의 군대가 부럽지 않다. 마을에서는 멧돼지 한 마리로 밤늦
‘아포칼립토(Apokalypto·2006)’는 영화배우로 익숙한 멜 깁슨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대작 영화다. 배우가 순간적인 객기로 감독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멜 깁슨은 감독으로도 출중한 기량을 보여준다. 2004년 감독 데뷔작인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도 만만치 않은 기량을 뽐낸 바 있다. ▲ 묵시록엔 ;하나의 위대한 문명은 내부로부터 먼저 붕괴되고, 그다음에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다'고 명시돼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아포칼립토는 미국에서 만든 ‘외국어 영화’ 같다. 모든 대사를 사라진 고대언어 ‘아람어’로 채웠던 2004년 작 ‘예수의 수난’처럼 ‘아포칼립토’에서도 사라진 마야 언어를 최대한 복원해 사용하고 영어 자막을 서비스했다. ‘자막 영화’ 보기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하는 미국 관객들에게 고집스럽게 영어 자막 영화를 들이대는 멜 깁슨의 오기와 원칙이 감탄스럽다. 메가폰을 잡은
폭력조직 ‘골드문’의 회장 석동출이 의문사를 당하고, 조직의 2인자 정청(황정민)과 3인자 이중구(박성웅)의 ‘왕좌의 게임’이 본격화한다. 폭력조직의 후계구도 경쟁에 난데없이 경찰이라는 ‘외세’까지 개입하면서 판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 담장 위를 걷는 경계인은 자신을 '도구'가 아니라 '정'으로 받아주는 사람들 쪽으로 떨어지고 싶어 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폭력조직과 경찰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와중에 조직의 내부정보가 거의 실시간으로 경찰에 털리는 것을 눈치챈 2인자 정청은 중국 최고의 해커를 동원해 경찰이 조직에 심어놓은 빨대가 다름 아닌 자신의 형제와 같은 최측근 이자성(이정재)임을 알게 되고 깊은 번뇌에 빠진다. 결국 정청은 조직을 배반하는 한이 있어도 ‘브라더’ 이자성을 보호하기로 한다. 열심히 계산기 두드려보는 ‘타산’보다 ‘정’이 앞선다. 6년 전 목포바닥에서부터 다져온 ‘정’을 저버릴 수 없다. 이자성도 조직에서 자신의
경찰은 우리사회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어야 한다. 제아무리 짙은 어둠도 먼동이 트면 물러가게 마련인데, ‘골드문’이라는 어둠의 세력은 아무리 빛을 비춰도 물러가기는커녕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넓어진다. 이대로 뒀다가는 미국의 마피아처럼 통제불능 상태가 될지도 모르겠다. ▲ 하얀 종이 위의 검은 점을 검정 물감으로 지우려면 결국 종이 전체가 검어진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어둠을 몰아내야 할 경찰은 점점 초조해지고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몽양 여운형 선생도 해방정국의 혼란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사람들이 비상한 각오로 비상한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특단의 대책을 세운다. 여운형 선생처럼 경찰청의 ‘비상한 사람들’이 ‘일이 틀어지면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비상한 각오’로 아예 경찰을 ‘골드문’ 조직 회장에 앉히려는 ‘비상한 작전’에 들어간다. ‘비상(非常)’이란 말 그대로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
요즘은 ‘장르 파괴’가 대세여서인지 영화도 ‘장르’라는 것을 하나로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듯하다. ‘코믹 호러’도 있고 ‘로맨스 스릴러’라는 것도 있다. 사무기기만 복합사무기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영화도 ‘복합영화’를 감상하는 세상이다. 한 그릇 밥 속에 모든 것을 넣어 비비는 비빔밥을 좋아하는 우리네 취향에 맞는 추세일지도 모르겠다. ▲ 빛과 진실이 결국은 어둠과 거짓을 몰아낼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장르 파괴’가 트렌드라고 하지만 영화 ‘신세계’의 장르는 비교적 명확한 일명 ‘누아르(noir)’라 불리는 범죄물이다. 암흑가(noir)에서 ‘어둠의 자식들’이 벌이는 어두운 모습들이다. 그럼에도 영화 ‘신세계’는 조금은 독특하다. ‘어둠의 자식들’은 어둠 속에 은밀하게 숨어서 악을 행하고, 결국은 ‘빛의 자식들’에게 일망타진돼야 하는데, 영화는 그렇게만
‘골드문’ 조직원들이 조직의 배신자를 바지선에 태우고 인천 앞바다쯤으로 보이는 가까운 바다에서 죽을 만큼 두들겨팬다. 그다음 산 사람 입에 강제로 ‘콘크리트’를 부어 넣고 드럼통에 넣어서 다시 드럼통을 콘크리트로 채우고 뚜껑을 밀봉해 바다에 수장한다. 영화 ‘신세계’는 이런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렴풋이 동트는 바다를 뒤로하고 조직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항구로 돌아와 시침 떼고 세상 속에 섞인다. ▲ 민주적 절차에 따른 협의에 의한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양극화는 점점 심해진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관객으로선 저런 무시무시한 조직이 우리 이웃에 평범한 얼굴로 돌아다닌다는 것이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다음 장면에서 구속됐던 ‘골드문’ 회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나는 뉴스가 나온다. 회장님은 개선장군처럼 구치소를 나서며 대자대비한 미소를 머금고 미끈한 승용차에 오른다. 악마의 조직의 ‘대마왕’이 감방에 갇혀있어도 그 조직원들이 생사람의 배 속을 콘크리트로 채워 수장하고 날뛰는데 이제 ‘대마왕&rs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2년)’는 우선 영화제목이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한다. ‘신세계’라는 이름은 어쩔 수 없이 백화점 상호 ‘신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설마 백화점 홍보가 아닌 이상 감독은 ‘신세계’라는 제목에 무슨 의미를 담고 싶어 했을지 궁금해진다. ▲ '신세계'는 모두가 함께 꿔야 가능한 꿈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백화점이 아니라면 ‘신세계’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또 다른 이미지는 미국 신대륙의 장엄함과 희망을 담은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쯤이다. 또 다른 것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경고를 담은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도 있다. 그다음으론 서구사회에서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해 왔지만 여전히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전세계 엘리트들의 비밀조직 ‘프리메이슨(Freemason)’이 표방하는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
러드로 대령은 정의롭지 못한 ‘인디언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젊음을 바친 군대를 떠난다. 러드로 대령이 보기에 그것은 ‘전쟁’이라기보단 ‘학살’이었다. 군인의 명예는 당연히 적군과 맞서 싸워 조국을 지키는 것일 텐데, ‘인디언 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인디언 전사’들과의 전투가 아니라 인디언 마을을 덮쳐 마을을 불태우고 인디언 아녀자들을 몰살했기 때문이다. ▲ '부정(否定)의 정의(定義)'는 '정의(定義)'가 아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러드로 대령은 명예롭지 못한 ‘전쟁’에 분노하고, 그 ‘학살명령’을 내린 미국정부에 대해서도 분노한다. 정의롭지 못한 ‘인디언 전쟁’에 치를 떨게 된 러드로 대령은 ‘반전주의자’가 되고, 또한 전쟁을 조장하는 정부에 분노하는 ‘반정부 인사’가 된다. 말 그대로 ‘anti-’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lsq
도회로 나간 하버드 유학생인 막내아들 새무얼이 몬태나의 아버지 목장으로 약혼녀 수잔나를 데려온다. 아버지 러드로 대령과 큰아들 알프레도가 정장을 차려입고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가 예를 갖춰 맞이한다. 그 자리에 둘째 아들 트리스탄은 없다. 목장에 도착했을 때 저 멀리서 말을 탄 트리스탄이 천천히 다가온다. ▲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는 항상 편치 못하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알프레도가 수잔나에게 트리스탄을 소개하지만, 트리스탄은 ‘만나서 반갑다’거나 ‘환영한다’는 간단하고 상투적인 인사조차 없이 수잔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빙글빙글 웃기만 한다. 대단히 무례하다. 알프레도가 수잔나에게 그런 트리스탄을 가리켜 ‘원래 이놈은 우리 목장의 동물들보다 무례하다’고 양해를 구하지만, 정작 수잔나는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최고의 환영을 받은 듯 흐뭇하기만 하다. 잘생기면 좀 무례해도 모두 용서되는 모양이다. 얼굴이 ‘열일’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새무얼이 전사하고 수잔나는 미망인 아닌 미망인이 된다. 러드로 대령은
‘가을의 전설’에는 곰이 3번 등장한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신 스틸러’다. 곰으로 시작해 곰으로 끝난다. ‘한칼’의 내레이션에 의하면 15살 되던 해 트리스탄은 자신의 운명을 찾겠다고 느닷없이 야밤에 숲속에 찾아들어가 잠자는 곰을 깨워 맞짱을 뜬다. 교실에서 낮잠 자고 있는 학교의 ‘짱’을 깨워 한판 뜨자고 하는 ‘중2병’ 걸린 15살 소년의 모습이다. ▲ 경제야말로 무너져서는 안 될 현대사회의 '신전(神殿)'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트리스탄은 가슴에 상처를 입지만, 대신 곰 발톱을 하나 뽑아버린다. 눈 비비고 일어나 비몽사몽 중에 발톱을 뽑힌 곰이 어이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숲속으로 사라짐으로써 결투는 트리스탄의 승리로 끝난다. 곰이 잘했다. ‘중2’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성인이 된 트리스탄은 어느날 사냥에 나섰다가 곰을 발견하고 총을 겨누지만, 이내 총을 거둬들이고 곰은 숲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트리스탄은 아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주류밀매업자와 부패한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