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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24) ... 4차 조천 탐방코스 (3편)

■이기풍 목사 집(? 또는 교회)터

 

이기풍 목사는 1908년 제주에 입도하여 본격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개신교를 전파한 인물이다. 당시 제주에 유배중이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의 도움(당시 100원기부)으로 제주읍 서문근처의 출신청을 매입하고 성내교회를 건립한다.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기록에는 1908년 금성리교회, 1909년 조천리교회, 1910년 성내교회 설립의 기록이 나온다.

 

현재의 조천장로교회는 1980년도에 지금 위치에 들어섰는데, 1914년도 지적도를 보면 이기풍 명의의 대지가 나온다.

 

 

<조천읍 역사문화지, 2011,제주특별자치도>에 의하면 조천출신의 신자 천아나라는 분이 1908년 이기풍 목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전도에 힘쓰던 중, 1909년에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자택을 예배당으로 헌납하여 조천교회의 역사가 시작되게 한 인물이라고 한다.

 

자식을 못 낳는다고 두번이나 소박을 당하고, 온갖 궂은 일을 하며 고단하게 살아가던 중 57세때 이목사의 선교로 종교의 품에서 삶의 위안을 맞이했다고 한다. 천아나는 자신의 자택을 예배당으로 헌납하는데 이 집이 조천리교회의 시작이며, 조천을 떠나 성읍에 와서 다시 자신의 집을 또 헌납하는데 이 곳이 성읍교회의 기틀이다. 또한 법환교회의 개척에도 간여했다. 1921년에 조천으로 귀향하여 교회일을 보다가 1930년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2441번지는 원래 천아나 소유의 자택이었으며 교회에 헌납하여 소유주가 목사인 이기풍으로 기록되어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1909년에 조천리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처음의 조천리교회 자리일 것으로 추정해 본다. 지금의 양진사 바로 맞은편인데, 1914년 당시에는 양진사가 있는 땅이 바다(해안 암석지대)였었고, 이 대지가 바로 바다에 면해 있었다.

 

 

■관청터(조천리 경로당)

 

 

지금은 조천리의 경로당으로 사용되고있는 관청터이다.

 

 

탐라순력도의 조천조점에 보면 연북정 좌측상단에 기와집이 보인다. 그림의 위치로 보아 이 곳임을 확신하는 이유는 1914년 지적도에 이곳이 '청(관청)'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이다. 이 곳에서 조천포구를 드나드는 모든 행정적 지원업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조천비석거리

 

화북포구와 더불어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던 조천포구 역시 부임이나 이임했던 관리들의 공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곳의 비석들은 유난히 공을 들여 모두 비각안에 세워져 있다.

 

 

 

이 곳에도 선정을 베푼 관리의 비도 있지만 목사 이의식 같이 <탐라기년>의 1847년 기록에서 보듯 '탐욕하고 포악하며 엄하고 혹독하기로 백성이 범과 같이 미워했다'고 되어 있는 이도 있다. 폭정을 휘두른 이도 진정 자신은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비석거리가 있다는 그 자체로 의미를 두어 본다.

 

 

비석거리의 7개 비석 중 이원달 목사와 백희수목사의 비는 화북 비석거리에도 있다.

 

■조천 야학당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에 세워져 문맹퇴치 및 청소년들에게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던 곳이다. 지금은 2009년에 제주도의 지원과 마을기금을 보태어 옛 야학당터에 건물을 신축하여 야학당 관련 전시와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황진식 생가 터

 

 

3.1운동 당시 조천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14인의 조천청년 중의 하나였던 황진식의 생가터이다.

 

■조천관

 

 

조천리의 본지명이 '조천관리'이다. 그러다가 1700년대에 '관'이 빠지고 '조천'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원래의 조천관은 조천진 안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표지석이 있는 조천관은 그 이후 조선말기에 객사로 쓰던 곳이다.

 

 

지금은 개인의 소유라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 아쉽다.

 

■금대

 

 

일제강점기 한학자이며 우국지사 김명식의 형인 김형식이 당시 유림의 거두였던 '김시우'를 기리면서 그의 집 앞 작은 동산에 김시우 아들 김윤환과 함께  1925년에 세운 비석이다.

 

 

조천의 3.1만세 운동이 김시우의 소상때 시작되었는데 조천만세운동 6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금대의 '금'자는 비파 금 인데 비가 서있는 이 작은 동산이 비파와 같이 생겼다고해서 '금산'이라 부르던 것에 기인한다. 글씨는 조천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김유배가 썼고, 비문의 시는 김형식이 지었다.

 

조천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유적이다.

 

■옛 정미소

 

 

4.3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4.3당시 소개령이 내려졌던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해안가 마을인 조천이나 함덕 등지에 많이 내려와 있었는데 일가족 중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고 하여 이곳에 수용되었다. 해안가 마을의 도피자 가족이라고 지명된 사람들도 수용되었는데 49년 1월과 2월에 걸쳐 도피자가족 90명이 조천지서 앞에서 총살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무고한 생명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져간 아픈 역사 앞에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생각하며 잠시 숙연해진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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