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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1)

1. 봉숭아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

우선 나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직선거리로 서울에서 400km로 떨어진 제주도 제주공항에서도 30여 km 남쪽으로 한라산 동쪽언덕 오름들을 지나 물영아리오름 근처에 있는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카페 이름 같지 않은, 카페 이름으론 좀 긴 듯한 자그마한 라이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올해 21살의 휴학생이 바로 나다. 정식 휴학계를 내놓고 쉬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입대를 앞두고 공부를 쉬고 있으니 휴학생이다. 대학에 적을 둔 대학생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학원엘 다니는 재수생도 아니다. 정체성 상실의 그냥 쉬는 학생이다. 좋게 말하면 발전성숙 과도기적 청년이랄까.

 

 

라이브 카페라고 하지만, 서울 한강변 미사리나 경춘가도, 또는 부산 달맞이고개, 또는 제주시 탑동이나 용두암 도로변의 그런 라이브 카페와는 수준이 전혀 다르다. 노래 잘 부르는 과거의 70·80 유명 가수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마이크도 갖춰놓지 않고 홀 한 모퉁이에 단지 기타와 드럼만 휑하니 놓여 있는 평범한 시골다방 같은 곳이다. 이래서 미사리의 카페처럼 문밖에 가수이름을 자기 얼굴보다도 더 크게 써 붙여 놓는 일은 이 카페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보잘 것 없는, 정말 보잘 데기 없는 이름만, 모양만, 거죽만 라이브 카페일 뿐이다. 구색은 갖춰서 그래도 이 카페에서는 매일 저녁 노래 소리가 들리고 늘 기타 소리도 들려온다. 물론 라이브이니 생음악이다. 쌩소리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 같지만, 대개 한 사람의 목소리로, 서툴게 줄을 튕기는 그의 기타 소리도 들린다. 어느 날은 다른 목소리에, 조금은 더 자연스러운 기타 소리나 색소폰소리를 들을 때도 있긴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물다. 하여튼 나는 이런, 미국 변죽물까지 먹은 나로서는, 젊디젊은 내 나이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개똥아! 개똥벌레 들어볼래?”

 

노래를 들어주는 관객도 대개 혼자다. 개똥벌레는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별칭으로 아버지는 굳이 애칭이란다. 드라마에서도 올망이 졸망이 게딱지같은 순티순해빠진 애들을 개똥이라 하던데 이걸 애칭이라니. 대답을 기다릴 리 없다. 재우치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훤하다.

 

‘아무리 우겨 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무덤이 내 집인 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노래를 해주렴.
나나~ 나나나나~~
......
마음을 다주어도 친구가 없네.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뿐인 걸.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손을 잡고 싶지만 모두 떠나가네.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손을 잡아주렴.
아아~ 외로운 밤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밤도 이렇게 울다 잠이 든다. 울다 잠이 든다.’
울다 잠이 든다, 울다 잠이 든다, 울다 잠이 든다...

 

 

눈치챘겠지만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의 유일무이한 가수는 나의 아버지다. 역시 눈치챘겠지만 그 노래를 어찌됐든 들어줘야 하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나다. 노래는 이미 끝났어도 아빠의 웅얼웅얼 후렴은 그칠 줄을 모른다. 있는 듯 없는 듯한 바람으로 사위가 잔잔한 날의 연기처럼, 떠나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며 떠돌기만 하는 희뿌연 연무처럼. 아들을 이국 멀리 떨어트려놓고 아들 대신 기타를 보듬고 있었을 아버지의 노래는 때로 슬프다. 기쁜 노래마저도 눈물짓게 만든다.

 

“아드~~을! 아빠 노래 어때? 조오치?”

 

나를 더 소개하자면,
아시아권을 지배하기 위한 전략적 군사요충지이지만 미국령 중 가장 오지인 괌으로 중학교 3학년 때 건너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원하는 미국 대학에 진학을 못하고 군대문제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한국을 떠난 지 거의 5년이 지나서이다. 상당수 한국의 20대가 그렇듯이 진학만 못했을 뿐 나도 가고자 하는 대학을 아직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때 한국에서 배우지 못한 이종격투기가 늘 한처럼 따라 다녔다. 미국 땅에서 덩치 큰 아이들 속에 있다 보니 이종격투기는 더 필요했고 그 필요성은 더 절실했다. 군대를 가려니 지원이란 게 있었다. 나는 불현듯 이종격투기가 떠올라 다른 생각할 것도 없이 해병대를 지원했다. 거기선 어쩌면 이종격투기 비슷한 걸 가르쳐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의 주인은 나의 아버지다. 시간제가 아닌 일당제로 비록 계약상의 불이익은 있지만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매일 그 날 일당을 잊지 않고 내 손에 쥐어주니 집안일을 도와준다기보다는 돈 버는 아르바이트생이 더 맞는 것 같긴 하다.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도 있는데 그 날도 아버지는 내게 약속한 그 일당을 꼭 준다. 확실하다고 해야 하나 절도가 있다고 해야 하나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 점에 있어서는 정말 끝내주는 아버지이다. 이 점은 좋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간제 대신 일당제를 고집하였고 늘 생각이 짧은 나는 ‘아들인데 하루 종일 부려먹기야 하겠어?’ 싶어 흔쾌히 일당제에 구두로 사인했다. 시간당 2천원과 일당 2만원은 당장 듣기에 2만원이 훨씬 더 많이 받는 듯해 보였다. 더 따질 것 없이 일당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의 일당제는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없었다. 더욱이 하루를 다 채우지 않으면 시간 계산도 해주지 않는다. 그 날 일당은 없다.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란다.

 

 

약속이라는 말은 아마도 내가 태어나 ‘엄마’라는 말 다음으로, ‘아빠’보다 먼저 배우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에게 너무나도 많이 들어온 말이 약속지키기이기 때문이다. 1분만 늦어도 이유불문, 호령이니 이 또한 정말 끝내주는 아버지다. 이 점은 싫다. 내 아버지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융통성이 없는 아버지를 가져본 사람이면 나를 이해할 것이다. 이러니 퇴근시간도 아버지와 언제나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떨어져 있던 5년의 긴 시간, 내 가슴에 박혀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온 몸으로 쓰렸던 혼자라는 외로움’, ‘가슴에 더 절절했던 가족에의 그리움’ 뼈에 사무친다는 말을 정말 실감하며 산 긴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처음 계약(계약서 없는) 당시엔 일당제니 시간제니 하는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라이브 카페라면 라이브 카페답게 저녁 무렵, 빨라야 오후 5시쯤 문을 열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그치며, 동작으론 느리고 생각으론 느긋한 내게 아침부터 서두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라르고 아들에 프레스토 아빠는 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청소해야지.”

 

첫 출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내린 첫 일이다. 그래도 아들인데... 더욱이 이국서 돌아온 지 불과 사흘밖에 되지 않은 삼일상봉아들에게 이건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 라며 가뜩이나 튀어나와 있는 입을 더 삐죽 내밀면서 진공청소기를 찾았다. 카페는 깨끗했다. 가지런히 걸려 있는 흰 수건과 물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는 호텔 목욕탕에 처음 들어갈 때 나도 모르게 움찔, 발뒤꿈치를 들었던 것 마냥, 며칠 전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에 처음 발을 들일 때도 그랬다. 진공청소기도 필요 없는 듯했지만 의례적으로 그걸 들고 나왔다.

 

“가수는 오늘 공연 준비를 위해 기타 연습해야 하거든? 청소기로 돌리지 말고 주방 옆 방을 걸레로 좀 치워주겠니?”

 

아버지는 이미 기타를 가슴에 그러안고는 ‘도레미파솔’ 줄을 고르고 있었다. 노래나 기타나, 아버지 실력으로 감히 무대 위에서의 공연이 어찌 가능한 일일까? 아버지는 아들과 떨어져 있는 사이에 기타실력보다는 뻔뻔함이 더 늘었는가 보다. 헤어짐, 떨어져 있는 동안 아버지는 아들 대신 기타를 끌어안고 외로움에 쩐 가슴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어둠이 깊어지고 달이 더 밝아질 무렵이면 덩그러니 혼자가 된 내가 하모니카로 대신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종종 만나야 했듯이. 퉁기는 줄의 속도로 판단하건데 여전히 아버지의 박자는 헤싱헤싱하는 게 이전 그대로였다.

 

그리 크지 않은 카페 안을 가로 질러 주방 쪽으로 가고 있자니 이미 아버지는 옹송그리고 전주도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5년 전, 괌으로 떠나기 며칠 전 내게 녹음해 준 테이프에도 들어있는 노래였다.

「초저녁 별빛이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 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

 

내가 아는 바로는 약 6년 전 아버지는 한 여자와 헤어졌다. 내가 ‘엄마’라고 부르던 분으로, 나를 낳아주진 않았지만 낳아준 엄마보다도 더 많은, 좋은 기억을 내게 지금도 남겨 놓고 있는 분이다. 여러분이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아버지는 이혼하고 나를 혼자 키우고 나와 함께 놀며 거의 십년 동안 살아왔었다. 그러다가 만난 그 분-5년 미국물을 먹은 놈이 빠다냄새부터 풍겨대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이럴 땐 미국식으로 ‘she’, 즉, ‘그녀’라고 하는 게 더 쿨할 듯싶다-그녀를 만나 내가 알기론 약 1년간 사귀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처음 들려준 노래가 <봉숭아>며, 이제는 아버지가 매일 부르는 노래가 되었고, 내가 지겹도록 듣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노래가 <봉숭아>다.

 

“가사, 좋지 않냐?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거쳐 나타나듯 고운 내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 더 들어볼래?”

 

계속 할 거면서 왜 묻는지 모르겠다.

 

“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 ’ ”

 

꼭 뒤를 흐리고 말지만, 나는 안다. 여자를 정식으로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한 나지만, 알고 있다. 돌아오지 않을 그녀라는 것쯤은. 당사자인 아버지는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터. 이러니 돌아오지 않을 님에게 차마, ‘돌아오소’ 할 순 없었던 게다. 아무리 노래라 해도, 혼자 부르는 노래라 해도. 대신 아버지는 ‘돌아오소’라고 불러야 할 대목에서 기타줄에 꽂혀 있던 고개를 쓱 들어 나를 보며 씩 웃곤 한다. 그 웃음을 보는 나는 참으로 슬프다. 웃음의 진실을 알면서 울음보다 더 슬픈 웃음도 있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순애아빠에게 왠지 화가 났고 이래서 신경질적으로 주방 옆 쪽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쪽방 안의 벽면은 온통 책으로 그득했다. 바닥에도 책이 밟혔다.

 

‘무얼 치우라는 거야, 도대체.’

 

초등학교 때에도 아버지는 서재로 나를 종종 심부름을 시키곤 했었는데 찾던 책 찾아 급히 돌아오면 아버지는 꼭 이랬었다.

 

“간 김에 책이나 좀 읽다가 오지.”

 

책장의 책들 사이에 삐죽 나온 노트 한 권이 먼저 눈에 잡혔다. 겉장에는<카페일지>라고 적혀 있었다. 표지의 제목으로 보아 아버지의 사적인 일기는 아닌 것 같고 사업을 전혀 안 해본 아버지로서, 카페를 운영하면서 필요했을 일들을 적은 사무적인 일지가 아닐까 싶어 무심코 안을 훔쳐봤다. 기타 뒤에서 고개를 쓱 들고 씩 웃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이거, 일기야 시집이야?”

 

그곳에는 마치 일본의 하이쿠(5·7·5의 3구, 17자의 짧은 일본 특유의 시)보다 더 짧은 글귀만 날자 아래에 적혀 있었다. 다른 사연은 없건만 일기라니...
 

 


가요
봉숭아
뽕짝 같진 않아

 

아버지의 시 같은, 오히려 시보다 짧은 단상일기는 짧기에 더 많은 상상을 끌어 잡는다. 나도 <카페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아버지와의 빈 자리를 메워가는 시간이며 입대를 앞둔 먼 훗날의 추억이 될 예비 이등병의 편지도 될 듯싶어서다. / 글과 그림=오동명
(계 속)

(다음 주부터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에서의 본격적인 상상이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어떤 꿈을 꾸게 될까요? 여러분의 상상도 상상하며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라이브 카페로 여러분을 매 주마다 정중히 초대합니다.)

 

오동명은?=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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