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매케이(Adam McKay) 감독의 ‘돈 룩 업(Don’t Look Up·2021년)’은 지구종말을 다룬다. 지구종말은 자극적이긴 하지만, 이미 여러 감독이 너도나도 손을 댔던 주제라 진부해져버린 측면도 있다. 매케이 감독은 이토록 진부한 주제에 ‘정치풍자극’이라는 옷을 입혀 차별화를 꾀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메릴 스트립, 티모시 샬라메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진지한 배우들만 보고 이 영화를 ‘정극(正劇)’쯤으로 기대한다면, 영화의 초반부 전개가 적응이 안 되고 당황스럽다. 매케이 감독이 그의 경력을 미국 유명한 코미디 풍자쇼인 ‘SNL(Saturday Night Live)’ 대본작가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조금 적응이 빨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코미디 풍자쇼의 한 코너를 2시간짜리로 만들어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풀어낸 듯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극단적이고 과장된 상황을 설정해 놓고 광대들이 장구와 북, 꽹과리, 날라리가 흥을 돋우는 가운데 한바탕 난리굿을 펼치는 ‘마당극’에 가깝다.
어느 날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라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천문학 교수는 직경 10㎞짜리 거대 혜성이 98% 확률로 6개월 후에 칠레 앞바다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민디 박사는 이 혜성의 위력이 핵폭탄 10억톤(t)급이고, 쥐라기 공룡을 멸종시킨 혜성보다 그 파괴력이 족히 10배는 된다는 계산도 제시한다. 사실이라면 지구 종말이다.
지구 종말류(類) 영화에서 거대 혜성이 향하는 나라는 대개 미국이다, 온갖 외계종족들의 침공도 항상 미국을 타깃으로 삼는다. 외계인들도 미국이 ‘지구의 수도’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전쟁에서 수도만 함락하면 ‘게임 오버’다. 뉴욕 앞바다의 ‘자유의 여신상’ 목이 떨어져 나뒹굴거나 뉴욕 앞바다에 가라앉으면 이는 미국의 종말이 아니라 곧 지구종말이라는 것이 미국산 지구종말물(物)들의 전형적인 클리셰(일반적인 전개방식)다.
‘돈 룩 업’에 등장하는 혜성은 그동안의 혜성들이 너무 미국으로만 달려갔던 것이 조금 미안했거나 눈치가 보였는지 이번에는 칠레 앞바다를 향하는데, 그렇다고 얘기가 달라질 것은 없다. 팔 걷고 나서서 지구를 구할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이번에도 ‘지구 방위 사령부(PDCO·Planetary Defense Coordination Office)’가 미국이 자랑하는 핵미사일을 들고 나선다. PDCO는 2016년 NASA 산하에 설치된 실재하는 기구다.
정부 기구에 감히 지구 방위 전담기구를 둔다는 발상은 아마도 미국만이 해볼 수 있는 포효이거나 제국주의적 발상일 듯하다. 어쩌면 1년 국방예산만 ‘1000조원’을 편성할 수 있는 소위 ‘천조국(千兆國)’ 미국만이 부려볼 수 있는 객기일지도 모르겠다.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그들의 인식은 ‘세계 속의 미국’이 아니라 ‘미국 속의 세계’다. 자기들 프로야구 30개 팀들을 대강 동부와 서부와 나눠 놓고 동부 우승팀과 서부 우승팀이 벌이는 게임을 거리낌 없이 ‘월드 시리즈’라고 부른다. 이들에게는 미국이 곧 ‘월드’임이 분명하다.
국제 표준 도량형(度量衡) 기준이 분명 m(미터), L(리터), g(그램)으로 통일돼 있지만 미국만은 당당하게 혹은 시치미 떼고 yd(야드), 갤런(gal), 파운드(lb)를 고집한다. 온도도 국제표준 ℃(섭씨)가 있건만 아랑곳 않고 홀로 ℉(화씨)를 고집한다. 우리는 아쉬울 거 없으니 불편하면 너희들이 바꾸라는 식이다.
어쩌면 ‘세계에서 외국 지명이나 국제뉴스에 가장 무지한 국민’ 조사에서 미국인이 항상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는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데 로마 제국 시민들이 굳이 허접스러운 변방과 속주(屬州)들의 시시콜콜한 사정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듯이 말이다.
영화는 미국이 핵미사일로 거대혜성 파괴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한바탕 ‘소동극’을 벌이는 가운데 아프리카, 유럽, 일본 등등 모든 ‘변방의 시민’들이 TV 앞에 모여 ‘지구의 수도’ 미국에서 전해지는 웅장한 ‘지구 방어 프로젝트’의 소식 하나하나에 환호하거나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이 안타깝게도 끝내 ‘지구 방위’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인류는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후를 준비한다. 걸핏하면 맥락도 없이 성조기 챙겨들고 광화문 광장에 몰려다니는 분들은 혹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많은 비(非)미국인들에게는 왠지 굴욕적이고 반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장면들이다.
얼마 전 미국 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피격당했는데 모든 국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우리나라 야당의 차기 유력 대통령 후보가 칼에 찔렸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인물을 다루는 ‘뉴스의 비중’이 정확히 그 인물의 사회적 영향력을 반영한다고 하면, 확실히 이재명 대표보다 트럼프의 생사(生死) 여부가 대한민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다.
11월 5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아무래도 무지막지할 정도로 솔직하게 미국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고, 그 인물의 당선이 우리나라 경제나 안보에 혹시 재앙적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마치 ‘트럼프’로 명명된 거대 혜성이 한반도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처럼 종말론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트럼프 혜성’이 11월 한반도 상공에 도착하기 전에 천궁 미사일로 요격해서 잘게 부숴버리거나 아니면 일본쯤으로 방향을 틀게 할 수도 없으니 갑갑한 일이다.
정말 미국이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생각이 단순히 우리가 그들에게 ‘그루밍(심리적 지배·grooming)’을 당해서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치열하고도 정교한 대미(對美) 외교와 대미 ‘로비’ 외에는 달리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며칠 전에 우리나라 국정원과 외교부의 대미 ‘불법 로비’가 미국에 적발돼 시끄럽다 하니 더욱 갑갑하다. 이 문제를 두고도 서로 ‘너희 정권 탓’을 하고 있으니 그 답답함은 다시 한번 배가된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