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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살겠다" 떠나는 제주 백성들 … 6만 인구가 2만명으로 줄어
왕족도 피해가지 못한 '출륙금지령' 뭇 백성에겐 더 가혹

한 때 이주 열풍이 뜨거웠던 제주가 인구 감소세로 돌아섰다고 한다.

 

 

시들해진 이주 열풍과 청년층 이탈, 고령화, 저조한 출산율 등 팍팍해진 서민들의 삶 탓이다.

 

과거에도 이 같은 현상이 있었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과도한 수탈 등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 도망치듯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제주 인구가 크게 줄었다.

 

이때 궁여지책으로 나온 조정의 정책이 '출륙금지령'이었다.

 

약 200년간 제주를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이 철저히 격리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왜 생겨났고,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차라리 왜놈에게 죽겠다" 떠나는 제주 사람들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인조 7년 8월 13일)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제주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통제정책을 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됐듯이 '제주 백성들이 유리(流離)'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집과 직업이 없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닌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15∼17세기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제주 백성이 유민(流民)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역사학자들은 조선시대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확립되면서 지방관에 의한 과도한 수취 탓이라고 설명한다.

 

화산섬 제주는 토양과 기후 등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왜적의 침입, 태풍과 같은 각종 자연재난에 취약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연환경적 요인보다도 더 큰 문제는 백성의 노동력을 대규모 공사와 군대 등에 동원하는 부역(賦役)·군역(軍役)의 폐단, 왕실과 국가에 각각 바쳐야 하는 진상(進上)·공물(貢物)의 폐단 등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데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격리된 섬 제주는 지방관이 마음대로 부정을 저지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결국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많은 백성이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도망했다.

 

'제주 목사 장림이 부임한 지 얼마 안돼 진상을 빙자해 민간의 좋은 말을 다 빼앗았으며, 농사철에도 도로를 수리한다는 핑계로 민간을 침노(侵擄·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침)하여 부역시켰으며 … (중략) … 이로 말미암아 주민들이 실농(失農)하여 먹고 살 수가 없어 내지(內地)로 유이(流移)한다고 합니다.'

 

중종 5년인 1510년 중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뿐만 아니라 명종 10년인 1555년에는 지방관의 수탈이 극심해 제주 백성들이 '차라리 왜놈에게 죽겠다'고 한탄하고, 제주를 이탈하는 사람이 많아 제주의 3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대정현에 백성이 50∼60호밖에 남지 않았다고 조정에 보고됐다.

 

제주를 떠난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 6만 인구가 2만명으로 줄어…슬픈 제주인의 이름 '두무악'

 

'제주의 한라산을 두무악(頭無岳)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세속에서 제주 사람을 두무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성종실록 262권, 성종 23년 2월 8일 기유 7번째기사 1492년)

 

조선시대 타지역 사람들이 제주 사람들을 '두무악'이라 불렀다.

 

두무악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머리가 없는 산'이란 뜻으로, 뾰족하게 솟은 다른 산과 달리 산 정상이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을 본떠 '한라산'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한라산의 별칭이지만 성종실록의 설명대로 육지 사람들이 제주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소리나는 대로, 들리는 대로 부르다 보니 제주인을 지칭하는 말은 두모악, 두모야지, 두독야 등 다양했다.

 

"못살겠다"고 제주를 떠난 유민 '두무악'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처자식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경상도·전라도의 바닷가 연안에 옮겨 정박하는 자가 수천명인데…'(성종 8년 1477년), '두무악은 해체(海採·미역을 따는 일)로 업을 삼아 … 김해 도요저리(都要渚里)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이 무려 1000여명이나 돼 스스로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중종 5년 1510년)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무악을 구성하는 제주 사람들의 신분은 대부분 '포작인'과 그의 가족이었다.

 

포작인은 제주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남성을 통칭하는 말이다.

 

전복을 캐거나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고 전복 등 해산물을 채취해 진상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로, 훗날 해녀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해남이라 불렸다.

 

조정에 바쳐야 할 진상품 부담과 중간에서 가로채는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친 이들이다.

 

이들은 폭풍우와 사나운 파도를 만나도 두려움 없이 배를 잘 다뤘을 뿐만 아니라 왜적도 포작인을 두려워해 피해 달아날 정도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과 싸우며 맹활약을 하기도 했는데 전쟁을 전후해 포작인들은 바다에 떠돌면서 해적질을 하는 등 지역의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제주 유민은 15세기 초반 몇천명 규모에서 17세기 들어서는 최소 1만명 이상으로 늘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세종 16년(1434년) 6만3474명이던 제주 인구는 선조 34년(1601년) 2만2990명에 불과하는 등 약 170년간 4만명이 줄었다.

 

출륙금지령 이후 현종 11년인 1670년에는 인구가 4만2700명으로 늘었지만, 제주 백성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자 관리들의 수탈은 더 심해졌고 더 악랄해졌다.

 

 

출륙금지령은 유배 온 왕족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인조 6년인 1628년 역모에 휘말려 죽은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의 가족들이 제주로 유배왔다.

 

오랜 세월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인성군의 다섯 아들 가운데 장남 이길과 차남 이억, 사남 이급이 제주 여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인조 13년 이들의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출륙금지령 때문에 처자식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후 사면돼 죄인 신분을 벗어나자 이들은 제주에 남아있는 처자식을 데려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이 청원을 받아들이려 해도 조정 대신들은 "제주의 인물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한 것은 곧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내려온 고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가 아무리 친족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결코 그 어미들까지 육지로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라 말하며 반대했다.

 

결국, 제주에서 얻은 자식들만 어머니 없이 제주를 떠나 한양의 아버지 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왕족과 혼인한 여성들의 발까지 묶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일반 백성들에겐 가혹하리만치 더 엄격했다.

 

조선은 혼인을 통한 여성의 이주를 막기 위해 제주 여성의 경우 육지 남자와 혼인하는 것까지 법으로 막았다.

 

 

◇ "탐라 조선술·항해술 한순간에 날려버려"

 

출륙금지령은 제주를 철저히 외부와 격리시켰다.

 

그 결과 발달한 다른 지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어려움이 컸고, 오랜 세월 힘겹게 축적해 온 해양 기술이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현종 3년(1012년) '탐라 사람이 와서 큰 배 두 척을 바쳤다', 원종 9년(1268년) '탐라에 명하여 배 100척을 만들게 했다', 충렬왕 6년(1280년) '배 3000척을 짓는데 탐라에 조칙을 내려 재목을 징발하며 탐라에서 건조한 배로 홍다구가 일본 정벌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양문화 전문가로 제주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주강현 박사는 저서 '제주기행'에서 이같은 고려사 기록에 대해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며 "조선의 출륙금지령은 탐라가 축적해온 모든 해양력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고 지적한다.

 

결국 제주 해안에는 탐라 해양문화의 상징인 커다란 '덕판배'가 사라지고 작은 뗏목 배에 불과한 '테우'만이 보편적으로 남게 됐다.

 

주 박사는 "오랜 해금 정책으로 돛배 자체를 금한 결과다. 돛배를 사용하게 하면 고기를 낚는다는 핑계로 먼바다에 나갔다가 육지로 도망칠 것이 뻔한 이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제주의) 항해술과 조선술이 급격히 쇠락하는 것은 자명한 결과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걸핏하면 배가 표류하고 난파당해 숱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제주도가 머나먼 변경으로 치부되는 데는 이 같은 배경이 한몫했다"고 강조한다.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순조 25년(1825년) 출륙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약 200년간 기나긴 '고립'이 제주에 해(害)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는 제주의 문화를 보전하는 데 일면 영향을 줬다는 해석도 나온다.

 

언어와 해녀문화 등은 제주가 육지와 다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아래아(ㆍ)와 쌍아래아(‥) 등 한글 고유의 형태가 남아있어 '고어(古語)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제주어(제주 사투리) 명맥이 근근이 흐르고 있다.

 

또 다른 지역 사투리에서도 나타나는 단순한 억양·리듬의 차이만이 아닌 전혀 다른 어휘가 존재하는 제주어의 형성 배경에는 '섬'이라는 한반도와 단절된 지리적 환경이 주요했지만, '출륙금지령'과 같은 인위적 단절이 제주어의 독자성을 더욱 키우는 데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해녀 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전복을 잡아 진상했던 포작인이 제주를 이탈하자 그 부담을 해녀들이 떠안아야 했고, 삶의 고통을 공동체 문화로 이겨낸 해녀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

 

탐관오리와 부조리한 정책이 백성을 짓밟더라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간 사람들이 일궈낸 슬픈 역사와 문화다.

 

제주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종종 하는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 수 있다)는 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지금까지 이어온 말이 아닐까.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 이 기사는 조선왕조실록과 '15∼17세기 제주유민의 사회사적 연구'(이영권), '제주기행'(주강현·도서출판 각),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순이·여름언덕), '새로 쓰는 제주사'(이영권·휴머니스트), '신비 섬 제주 유산'(고진숙·블랙피쉬) 등 논문과 책자 등을 참고·인용해 제주의 출륙금지령과 문화에 대해 소개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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