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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보전 vs 정주여건 개선 딜레마 … 사람들 마을 떠난다
"근본 문제 해결 없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안돼"

제주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이 있던 정의현성의 중심마을이다.

 

 

과거 제주의 행정구역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하나다.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전통 초가 등 제주의 옛 모습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1984년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이후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주민들이 초가집에 거주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지만, 보전과 정주여건 개선이라는 오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 원형 보전이라는 가치와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는 불편이 오랜 기간 쌓이고 쌓여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의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난 2차례 연재에 이어 살펴본다.

 

◇ 문화재 보전, 정주여건 개선 놓고 갈등

 

지난 2월 23일 오후 찾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제주성읍마을의 한 초가집.

 

10평(33.05㎡)이 조금 넘는 작은 초가에 90세 넘은 할머니가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상방(마루)엔 각종 살림도구가 가득해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앉을 만한 공간이 여의찮아 할머니는 구들방에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00년이 채 안 된 초가집은 겉으로 보기에도 너무나 위태로웠다.

 

천정과 외벽은 바름흙이 벗겨져 떨어져 나가 서까래와 벽체가 훤히 드러났고, 다 낡아빠진 외마디 나무기둥이 위태롭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전선이 지붕을 따라 그대로 노출돼 있어 단락(합선) 등으로 인한 화재 위험에도 매우 취약해 보였다.

 

초가집 안으로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내부에 목욕탕과 화장실을 만든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고,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길게 연결해 입구 근처에 대야를 받아 생활용수로 쓰고 있었다.

 

가까스로 가스레인지를 상방에 두고 음식을 내부에서 해 먹을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 2024년도에 이렇게 산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주인 할머니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인근의 또 다른 초가집은 일주일 넘게 비가 이어지자 방안으로 비가 새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지붕에 방수용도의 비닐을 씌우고 그 위로 다시 새(억새의 일종인 '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덮었지만 그런데도 비가 새는 걸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예전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막 줄줄 떨어져서 방에 물이 벙벙해졌다"는 집주인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지붕에 비닐을 씌울 땐 초가지붕에서 굼벵이 수십마리가 떨어져 나왔다고 했다.

 

볏짚이나 썩은 나무, 톱밥, 부엽토 등 식물질을 먹고 자라는 굼벵이의 특성상 초가지붕은 굼벵이가 살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읍민속마을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 이유는 한 가지다.

 

자기 소유의 주택임에도 마음대로 증·개축을 할 수 없는 등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성읍민속마을이 지난 1984년 6월 12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마을 내 초가집 외관을 변경하거나 수리하려면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에 따라 현상변경 허가받아야 하는데 그 절차가 다소 복잡하고 까다롭다.

 

예를 들어 주민이 화장실이나 욕실 용도로 초가집을 증축하려고 하면 우선 관할 지자체인 서귀포시에 신청해야 한다. 그러면 시는 다시 제주 세계유산본부에 요청하고, 세계유산본부는 재차 문화재청에 요구해 허가받는다.

 

원칙적으로 30일 안에 허가가 나와야 하지만 현장실사 등 추가 절차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더 오래 걸린다.

 

또한 싱크대 또는 냉난방 시설 등 경미한 현상변경도 지자체 차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주민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윤식 성읍1리장은 "부엌을 늘리려고 해도, 화장실을 만들려고 해도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내 집인데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며 "얼마나 답답했으면 초가집을 2000만원에 팔고 인근 문화재 지정 구역 밖에 집을 새로 지어 이사했겠느냐"고 말했다.

 

김명호 전 표선면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은 "현상변경 내용에 따라 허가가 나오는 데 1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불편하고 까다로워 주민들이 일일이 허가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결국 행정 몰래 불법 증·개축 등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문화재 보수, 건축은 일반 건축업자가 할 수 없고 허가받은 업체만 할 수 있어 평당(3.3㎡) 1000만원의 비용이 소요되는데 일일이 허가를 받고 진행하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이러한 탓에 지역 주민들은 초가집을 불법으로 증·개축해서라도 화장실과 욕실, 보일러실 등을 암암리에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상당수 주민들은 더는 초가집에 못 살겠다며 집을 제주도에 팔고 이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주민은 집을 팔고 받은 돈으로 다른 곳에 주택을 마련할 수 없자 마을 인근의 천미천 공원 부지에 컨테이너 가건물 등을 지어 생활하기도 한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에 따르면 현재 제주성읍민속마을 지정구역 79만4213㎡ 내 등록가옥은 306가구 1305동이다.

 

이 중 초가는 정의현성 안에 있는 일명 '성내'(城內) 77가구 260동, '성외'(城外) 158가구 674동이다.

 

주민이 떠나가면서 제주도가 매입한 초가는 44가옥 109동이다.

 

제주도는 증·개축 등으로 인한 마을 내 불법 건축물이 870여동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상 90% 넘는 대부분의 초가가 원형을 잃고, 외형·구조·내부 변형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오랜 기간 생활 불편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주민을 탓할 수도 없다.

 

제주도는 해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환경개선을 하고, 지난 2022년부터 소유주의 신청을 받아 불법 무허가 건축물에 대한 철거 등 정비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는 게 지역 주민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지난 40년간 주민 편의는 고려하지 않은 채 초가 원형 보존이라는 원칙만을 강조한 나머지 과거의 옛 정취와 전통경관도 잃고 주민도 떠나가는 특색없는 민속마을로 전락해가는 셈이다.

 

 

김철홍 전 성읍1리장은 "성읍마을 내 초가집 평수가 12∼15평(39.7∼49.6㎡) 정도다. 일반적인 국민주택 수준은 25평(82.6㎡)이다. 사람이 사는 민속마을로 지정했으면, 적어도 사람이 가족을 이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초가는 사람이 살면서 손때를 타야 수십년, 100년이 지나도 끄떡없이 보전되는 것"이라며 "훼손 가옥을 정비하는데 수많은 돈을 들이며 낭비하기 보다 주민이 마을을 지키며 예쁘게 가꾸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윤식 현 성읍1리장은 "사람들이 떠나간다. 젊은 사람은 다 떠나고 늙은 사람들만 남게 됐다. 옛날 학교 다닐 적 한 반에 50∼60명 했던 성읍초등학교 전체 학생 수가 이제 60명이 안 된다. 이러다 학교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해마다 이주자로 인해 발생하는 빈집이 3∼4채씩 꼴로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현재 복잡한 문화재 현상변경허가를 받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 자문단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며 "최대한 마을 주민 입장에서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문화재청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3월부터 성읍마을의 체계적인 보전·정비사업 추진방향을 재정립하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성읍마을 제3차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을 진행중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담아 진행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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