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과 관련 제주를 이른바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만드는데 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이에 대한 체계적인 규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제주도의회 정책연구실은 9일 ‘4.3사건 미군이 얼마나 개입했나’라는 정보소식지 ‘정책차롱’을 발간, 이를 통해 제주4.3과 관련해 미군 개입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도의회 정책연구실은 보고서를 통해 먼저 “미군이 제주도를 거대한 ‘킬링필드’로 바꾸어 놓는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언급한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카치아피카(George Katsiaficas)의 말을 인용, “4.3 당시 미군 측의 개임에 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책연구실은 “4.3 당시 미군은 경찰과 경비대 등 우리 진압군을 지휘하며 강경진압을 주도하는 한편 정보제공 및 물적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하지만 직접 개입한 명백한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도 “다만 외국의 학술보고서에는 이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 특히 당시 미군이 중대나 연대 병력규모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며 “당시 미군들이 제주도에 주둔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미국의 개입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또 다른 척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이어 4.3 당시 제주도에서 미군의 개입 사례의 유형을 ▲주한 미군사령관과 고문관들이 한국경찰과 경비대(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에게 직접 명령을 하달하고 ▲제주의 미군 고문단들이 실제 공중과 육상작전을 관리 및 감독하는 한편 ▲제주도에 주둔한 미군 부대가 우리 측 진압군에게 군수지원 및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강경진압을 지휘했다고 분석했다.
또 4.3 당시 제주도내 미군 주둔 병력에 대해서는 “논란은 남아 있는 상황”이라면서도 “프라스 파리 7대학 버트랜드 로에너(Bertrand M. Roehner) 교수의 논문과 당시 미군 측의 비밀문건, ‘주한미군사’ 사료, 미군증언 등을 토대로 1947년과 1948년 제주도에 미군이 최소 100명에서 최대 1000명까지 주둔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정책연구실은 한국전쟁 참전미군인 조셉 그로스만(Joseph W. Grossman)이 "1947년 봄에 6주 동안 20보병연대 제2대대의 500~1000명의 미군 병력이 제주도로 파견됐다"고 증언한 부분과 미군의 ‘화재 등 사건 보고서(Reports of fires and other accidents)’ 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미군의 개입 형태와 정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며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소상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까지 밝혀진 미군의 지휘책임과 함께 특별히 미군병력이 어느 정도 규모로 제주도에 주둔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미국의 개입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또 다른 척도가 된다”며 “반드시 이에 대한 명확하고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제시했다.
제주도의회 정민구 4.3특위 위원장은 “지난 달 파비앙 살비올리 UN 특별보고관이 제주4.3사건 해결을 위한 지원을 약속한 만큼 오는 6월 UN에서 개최되는 ‘UN 4.3 심포지엄’을 계기로 향후 미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러시아에 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료들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 수집을 통해 4.3 당시 미군의 개입정도를 명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