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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窓] 제주지법서 4.3수형생존자 피고인 심문 ... 4.3 도민연대 "의미 있는 재판"
변호사 "이번은 자유로운 법정서 답변" ... 생존자 "잘됐다는 이야기 듣고 싶어"

 

커다란 족쇄였다. 김평국 할머니는 “‘전과’라는 두 글자를 지워버리고 싶었다”라고 목이 메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로운 것이 70년을 따라 다녔다. 너무 아팠지만 그래도 재심 결정이 났을 때는 조금 편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 그 재판 정말 잘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 마음을 품고 김평국(88) 할머니는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기억을 다시 꺼내 들었다. 검사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또 변호인들의 질문에 옛 기억을 되짚었다. 김 할머니뿐만 아니라 70년 전 억울함을 품은 이들이 함께 했다. 

 

제주지방법원의 제 201호 법정에서 유례가 없는 4.3과 관련된 과거 재판에 대한 재심의 피고인 심문은 그렇게 이뤄졌다. 

 

◇ "국가가 다시 묻는다. 내란죄가 맞는가?" =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제갈창 부장판사)는 26일 오후 2시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 4.3수형생존자 18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재심 청구사건과 관련, 1948년에 내란죄로 유죄선고를 받고 구금됐던 10명에 대한 피고인 신문을 진행했다. 

 

지난달 29일 첫 공판 이후 두 번째 공판이었다. 

 

1948년에 유죄선고를 받았던 수형생존인인들은 피고인 신문에 앞서 제주지법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재심이 “매우 의미있는 자리”임을 강조했다.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는 “이분들은 4.3 이후 동네에 살지 못하고 일가 친척들을 찾아 피난을 갔던 분들이 잡혀 내란죄로 징역 1년에서 5년까지 형을 받았다”며 “70년 동안 왜곡된 역사 속에서 희생자들과 도민들, 유가족들이 받아온 고통이 법원에 서 다뤄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4.3수형생존자들에 대한 변호를 맡고 있는 임재성 변호사 역시 “4.3 70년 역사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일”이라며 “(26일 피고인 심문을 받는 이들은) 48년 4월부터 12월 경 제주에서 무장대에게 물품을 제공했다는 내용의 내란죄 혐의로 유죄를 받았다. 물론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당시 경찰도 그런 사실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며 “하지만 고문을 하고 때리면서 ‘예’라고 대답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유죄 판결을 받아 뭍에 있는 형무소로 갔다”고 설명했다. 

 

임 변호사는 “고문과 불법구금이 재심 개시결정의 이유였다”며 “이제 이를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국가가 다시 물어본다. 내란죄가 맞느냐고. (4.3수형생존자들은) 불법구금도 고문도 없는 자유로운 법정에서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임 변호사는 이어 “법정에서 공정하고 온전한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임 변호사는 4.3수형생존자들의 진술에 신빙성을 더할 새로운 증거를 꺼내들기도 했다. 

 

임 변호사가 제시한 증거는 미군이 1950년 7월1일 촬영한 사진으로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팀이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자료다. 

 

 

임 변호사는 “당시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던 생존자 분들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내려오고 간수들이 도망을 가자 50년 6월30일 제주로 돌아오기 위해 형무소 문을 열고 수원으로 걸어갔다”며 “하지만 한국군을 만나 체포됐다. 그 당시 사진들이 보관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를 생존자분들에게 물어보니 사진 현장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사진이 70년 전의 특정 현장 모습을 생존자분들이 명확하게 기억하고 진실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이를 참고자료로 제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물어보는 것에 답하지 못하고 매만 죽게 맞았다” = 기자회견 이후에는 201호 법정에서 피고인 심문이 이뤄졌다. 

 

이날 피고인 심문은 검사 측에서 4.3생존수형인들을 대상으로 70년 전 당시 상황에 대해 질의하고 이어 변호인 측이 질의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먼저 김평국 할머니가 피고인석으로 이동했다. 

 

김평국 할머니는 1930년 당시 중산간 마을이었던 아라리에서 태어나 4.3 당시에 지금의 이도동으로 피난을 온 후 경찰에 체포, 유죄판결을 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검사는 김 할머니에게 당시 경찰이 무장대를 위해 제공한 것이 있는걸 심문했는지를 물었다. 이에 김 할머니는 “경찰의 심문에 답하지는 못했다”며 “매만 죽게 맞았다. 별 기억도 안나고 매 맞은 게 아프기만 했다. 무장대를 위해 망을 봤느냐는 질문에 그런 적이 없다고는 했다”고 말했다. 

 

또 검사가 남로당 측 인원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김 할머니에게 아는 사람이 있는 지 묻자 김 할머니는 “이름들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남로당 가입 같은 것도 전혀 없었는데 맞아서 억울하기만 했다”고 답했다. 

 

김 할머니는 변호사 측 질문에 대해서는 “당시 19살 때였다”며 “맞기만 죽게 맞았지, 죽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때 매 맞은 곳이 아프다”고 말했다. 

 

또 전주형무소에서 나와 제주로 오는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하며 “석방증을 받아 나왔다”며 “배표를 받기 위해 석방증을 매표소에 보여주는데 물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어머니 생각에 버텼다”고 설명했다. 

 

이어 “괴로운 것이 70년을 따라다녔다”며 “너무 아팠다. ‘전과’라는 두 글자를 지워버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또 이번에 재판에 대해서는 “‘그 재판, 정말 잘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어지는 심문에서 한 할아버지가 검사측의 질문 내용을 잘 듣지 못하자 검사가 피고인석 앞까지 이동,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생존인들 앞에 앉아 질문 사항을 또박또박 물어보는 이례적인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검사들의 질문에 생존인들은 “경찰들이 질문은 하지 않고 때리기만 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이어갔다. 

 

박내은 할머니는 검사측의 무장대에 어떤 물품을 전해준 기억이 있느냐는 질문에 “죽을까봐 무서워서 신발 등을 줬다”며 “산사람(무장대)도 무섭고 경찰도 무서웠다”고 말했다. 

 

경찰의 고문이 심했느냐는 질문에는 “죽을 정도였다”며 “뒤로 묶어서 천장에 매달고 때렸다. 손목이 부러졌다. 정신을 잃으면 한 겨울인데도 냉수를 뿌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박 할머니는 이어 “온 몸에 통증으로 지금도 잠을 못 이룬다”며 “특히 허리가 아프다. 계속 통증을 줄이는 주사를 맞는데도 아파서 잠을 못 이루고 거실을 왔다갔다 한다. 지금도 고문 기억이 계속 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오는 27일에도 피고인 심문을 이어갈 예정이다. 27일에는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8명에 대한 심문이 이뤄진다. 다만 이들 중 정기성 할아버지는 병환으로 참석이 불가, 재판부에 진단서를 낸 상태다. 

 

재판부는 27일 심문을 마무리하고 다음달 17일 결심공판을 가질 예정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연령 등을 고려, 늦어도 내년 1월 중으로 재판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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