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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의 제주해녀와 삶(4)] 좀녀 아기는 이레만에 밥 먹인다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나는 열일곱에 시집을 가서 스무살에 첫 딸을 낳았다. 남편은 ‘살림 밑천’이라며 좋아하였다. 사실 해녀들끼리는 ‘똘 나민 도새기 잡앙 잔치호곡, 아덜 나민 발길로 조름팍 찬다(딸 낳으면 돼지 잡아서 잔치하고, 아들 낳으면 발길로 궁둥이를 찬다)’는 속담을 우스개로 주고받는다. 속으로는 아들을 낳는 게 더 좋으면서도, 해변마을에서는 딸을 낳아도 서운해 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아고 착허다, 좀녀 났쩌!” 하면서 산모를 추켜세웠다.

 

그런데 내 딸은 첫돌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다. 열이 펄펄 끓으면서 밤낮으로 울고 보채자, 시할망(시할머니)이 용하다는 무당을 데려다가 푸닥거리를 하였다. 하지만 굿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이가 숨을 할딱이며 ‘추∼욱 하니 늘어질 즈음, 모슬포에서 병원 조수를 하던 아기 아방(아버지)이 돌아왔다. 아방은 아이를 보자마자 가슴에 품고서 모슬포로 내달렸다.

 

그러나 병원으로 가던 중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요즘처럼 119를 불러서 병원차에 싣고 달렸으면 좋았으련만. 아방은 땅을 치며 울고, 나는 가슴을 치면서 울었다. 시할머니는 ’아기 명줄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걸 어떵허느냐‘ 면서 한숨을 지었다. 집집마다 아이를 낳으면 반타작을 하던 시절이었다. 열 명을 낳으면 평균적으로 다섯 정도가 살아남았다.

 

2년 후에 나는 다시 딸을 낳았다. 내심 서운하였다. 아들을 낳아서 튼튼하게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아방은 ‘아들보다 지꺼진(기쁜) 딸’이라며 좋아하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열을 이기라’면서 ‘정열’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밑으로 2∼3년 터울로 딸과 아들을 번갈아 낳고 나서, 나는 계속하여 내리 딸을 다섯이나 낳고 말았다. 정말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것이 막둥이가 되었다. 아방은 아홉 남매를 모두 당신 손으로 받아서 탯줄을 끊었다. 그리고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던지 모두가 살아남아서 대가족이 되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은 대부분이 저녁에 태어났다. 나는 물때가 좋으면 아기 낳는 그날까지도 물질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 사는 게 다 영 허는 거구나(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면서 참았다. 아깃배를 맞춰서 배가 아파오면 얼른 물속으로 들어갔다. 숨비질을 하고 나와서 테왁에 엎어졌다가 다시 물에 들기를 반복했다. 물질을 할 때는 아픈 줄도 모르다가 물에서 나오면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다. ‘놈도 다 경호멍 난다(남도 다 그렇게 하면서 낳는다)’는 시어머니 말을 떠올렸다.

 

보통 해녀들은 15일 간격으로 12물에서 6물까지 7~8일 가량 물질을 한다. 한 달에 두 번 이루어지므로 물질기간은 보름쯤 되는 셈이다. 음력으로 초아흐레와 스무나흘이 한물이다. 이를 기준으로 헤아려서 12물, 조금, 한조금, 게마슴, 한물, 두물, 서물, 너물, 다섯물, 여섯물 등으로 정해진다. 이처럼 15일 간격으로 바닷물의 간조를 헤아리는 것을 ‘물찌’라고 한다.

 

전복과 소라와 오분작 등을 잡는 헛무레는 한조금에서 일곱물까지 작업을 하고, 미역이나 천초 역시 두 세 물에 시작해서 여섯물 혹은 일곱물까지 작업을 한다. 물질을 할 수 있는 물찌에는 파도가 너무 거세거나 날씨가 매우 험하지만 않으면 대부분 작업에 들어간다. 물때가 일곱물, 여덟물로 늙어가면서 물이 거칠어지면 ‘웨살’이라고 한다.

 

큰 아들을 가졌을 때는 미역철에 만삭이 되었다. 꼭 미역 해치하는 날에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애깃질, 뱃질’이라고, 아기를 분만하는 시간과 배가 떠나는 시간은 분명치가 않다. “아기야, 제발 미역 허채날이랑 지나민 오고생이(온전하게) 나오라, 이!” 하면서 달랬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물질을 마치고 성창으로 들어오는 중에 애깃배를 맞추면서 배가 아파왔다. “아이고, 아기야, 똑 촘았당 집에 가민 털어지라이!” 하고 주의를 주었다.

 

길에서 태어나면 ‘길동이 길남이, 길순이나 길녀’가 될 터인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들이었다. 일단 이름이라도 좋아야 이 풍진 세상을 이름값으로 살아낼 것이 아닌가. 우리 동네에도 어멍이 육지물질을 갔다가 난바르 배에서 낳는 바람에 ‘배선’이가 된 아이가 있다. 축항에서 낳았다고 ‘축항둥이’란 별명을 달고 사는 친구도 있었다.

 

내 간절한 부탁을 들은 건지 아니면 자기 이름을 위하여 몸조심을 잘 한 건지, 아기는 저녁밥을 먹고서도 한 시간이 지난 후에 세상으로 나왔다. 아기를 받은 아방은 ‘아들이여!’ 하면서, ‘용건(龍鍵)’이라 불렀다. 오랫동안 생각해 놓은 이름이리라. 딸 아들 구별하지 않는다면서도, 얼마나 노심초사 아들을 기다렸을까? 이름 속에는 ‘열쇠를 물고 태어난 용’처럼 ‘만사가 형통해서 부자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갔다.

 

아들을 낳은 후에도 사흘 만에 바당으로 나갔다. 미역물질이 끝물에 이르렀지만, 미역은 조금이라도 돈이 되는 거였다. ‘애기짐광 메역짐은 베여도 안 내분다(아기짐과 미역짐은 무거워도 안 내버린다)’고, 당시는 소라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아기가 빠져버린 배가 얼마나 흑싹(허전)하던지, 존둥이(허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맸다. 그래도 몸이 자꾸만 물 위로 둥둥 떠버려서 호미로 돌부리를 붙들며 몸부림을 쳤다.

 

물질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사주’ 하는 욕심으로 하는 거다. 호미로 부지런히 미역을 조무랐다. 남보다 사흘을 쉬었으니 미역값 받을 날이 걱정이었다. 그럭저럭 한 망실이를 채우고 나니 아랫배가 묵직하니 저리고 아파왔다. 무거운 짐을 성창 위로 올릴 일도 캄캄하였다. 미역 망실이를 올리느라 용을 쓰다 주저앉으면 뼈마디가 무너져서 평생 동안 고생이다. 마침 이웃집 정자어멍이 얼른 달려들어서 내 망실이부터 올려주었다. 과부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해녀들은 척 하면 삼천리로 눈치가 빨랐다.

 

 

그래도 나는 큰 딸 정열이가 정복이를 돌보고, 둘째가 셋째를 돌보아 주어서 아기업게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다. 우리 아방 친구는 8남 1녀를 두었는데, 늘 우리 앞에서 아들 자랑으로 노래를 불렀다. “난 밭갈쇠가 요닯이라” 하면서. 그럴 때마다 기가 죽어 있는 나에게, 아방은 빙그레 웃으면서 오히려 훗날을 장담했다. “우린 일곱 명이 똘이난 살암서. 두고 봐. 저 집 어멍 아방이 노년에 어떵 사는고?” 사실은 노년이 이르기 전부터 우리에겐 딸 많은 게 복이 되었다. 딸들이 애기도 봐주고, 살림도 해주고, 밭일도 도왔다. 그 덕택에 나는 고된 물질을 하면서도 마음만은 편안했다.

 

듣자하니 저 화순 사는 순화 아지망은 애기 봐줄 사람이 없어서 큰딸은 모래밭에 구멍을 파서 눕혀놓고 물질을 했단다. ‘좀녀 아긴 사을이민 골체에 눅져 뒁 물질혼다(잠녀 아기는 사흘이면 삼태기에 눕혀 두고 물질한다)’는 말처럼 말이다. 육지서 뱃물질을 할 때는 아기를 배에 태우고 가서 사공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아지망(아주머니)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아기를 갯가에 끈으로 묶어 놓고서 물질을 다녀왔단다. 아기가 얼마나 울었던지 배가 고파서 홀락홀락(힘 없이 축 느러진 모양) 해버렸다. 얼른 아기를 안고서 울면서 젖을 주었다. 하루 종일 부른 젖을 급하게 먹느라 껄떡거리는 아기를 보면서 어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어멍이 물에 들어버리면 아기가 하루 종일 굶어야 하니까, 일찌감치 젖과 함께 밥을 주어 길들였다. ‘좀녀 아긴 일뤠만에 것 멕인다(잠녀 아기는 이레만에 밥을 먹인다)’고, 우리 아이들도 일찍부터 밥을 먹였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먹성이 좋고 이빨도 단단해서 튼튼하게 자라주었다. 생각해 보면, 고생도 힘이 되고 가난도 복이 되었다. 한 평생 살아가는 게 더하고 빼고 나면, 너 나 없이 둥글고 평평한 게 아닐까.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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