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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홍의 '제주바둑의 향기'⑥ 박영수 전 지부장의 삶과 바둑

박영수(朴永洙, 46년생, 제주시 이도2동 1167-11)는 1990~2002년까지 한국기원 제주지원장, 제주지부장 등을 맡는 등 제주 바둑을 위해 태어났다. 그의 은퇴식이 도지사 공관(우근민 도지사)에서 치러질 정도로 바둑인의 사랑을 받았다.

 

박영수, 그가 한국기원 지원장을 맡게 된 것은 제주신문에서 해마다 제주바둑의 왕위를 뽑는 왕위전이 중단된 것을 부활키 위해서였다. 당시 제주신문 양주하 상무 등은 일반 기우회의 명칭으로 부활하기에는 곤란하다며 공식적인 한국기원의 명칭이어야 한다는 명분을 제시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한국기원 관계자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쉽게 풀렸다. 기원 건물 평수가 30평 이상에 정식 프로기사 사범을 두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제주시 칠성로 입구 옛 산호다방 3층에 있던 칠성기원 자리에다 기원을 차리고 윤기현 국수를 사범으로 위촉하여 그가 한국기원 제주지원장을 맡았다. 그가 회장이던 백록기우회 주관으로 90년 제17기 왕위전은 8년 만에 부활됐다.

 

그의 삶은 기구했다. 때문에 누구보다 독립심이 강했고 리더십을 갖추게 됐다. 그의 부친 박세원(당시 20세)은 1948년 주정공장에 있던 4‧3관련 수용소에 쌀을 공급하던 쌀 배급소 직원이었다. 육지로 끌려가는 수형인이 박세원에게 “끌려갔다고 가족에게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족에게 전해준 것이 빌미가 됐다. 계엄령이 내려졌던 그해 12월 11일 군사재판에서 형을 받고 복역하다 6‧25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듬해 모친 김순여는 일본으로 떠나 개가했다. 용담2동 정뜨르 큰 아버지 박세희 집에 홀로 남겨져 자란 셈이다. 1988년 일본 오사카에 있는 고모집에 갔을 때 도쿄에 있는 모친과 연락이 되어 모친이 찾아왔다. 모친은 아들에게 “돈이 필요해서 일본에 왔느냐”는 당연한 듯한 물음이나 박영수에게는 폭탄 같은 서글픔이 왔다. 그래도 모친이 태어난 곳인 사꾸라이로 2시간여 열차를 타고 가, 온 마을이 벚꽃에 뒤덮인 곳에서 하루를 보냈다. 모자의 정(情)은 함께 살며 희로애락을 나누었을 때 깊어짐을 알았다. 모친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없이 해마다 양력 1월 1일에 모친에게 새해 전화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다.

 

 

박영수는 18살 때 정뜨르 목공소(목수 고유길)에서 궤짝과 문짝 짜기를 1년여 배우고 옛 서문성터 자리가 남아있었던 서문통 용머리다방 밑 1층에 있던 삼공목공소(가구 제작) 목수로 들어갔다. 사장은 삼촌 뻘되는 김수삼. 1년 만에 직원을 3~4명으로 늘리고 2년째인 65년에는 박영수가 공장장이 돼 직원을 20명으로 늘렸다. 낮에는 목공생활, 밤에는 오현중 야간을 다녔다. 66년 4월 해병대 176기로 지원 입대했고 해병 하사관학교(단기하사 10기)는 사격선수로 문광부 제2차관을 지낸 박종길과 동기이다. 68년 만기 제대했다.
용머리다방에 있을 때 중앙지 제주주재 김모 기자가 내기바둑을 한다며 가끔 식사값 정도의 용돈을 빌려갔다. 어느 날 한국기원에서 김봉하 원장(그의 동생 명하는 오현고에서 콘사이스‧영어사전이라 불리는 천재)과 김 기자가 두는 바둑을 보면서 바둑에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내기바둑의 왕자라는 김 원장의 실력은 2급(아마 5단), 김 기자는 한 급수 아래로 거의 김 원장이 이겼다. 박영수는 동네 친구인 9급 실력 강원종에게 바둑 배워주기를 청했다. 처음 24점을 놓고 바둑을 두었다.

 

69년 한국기원이 단골손님을 대상으로 바둑대회를 열었다. 참가자격이 9급 이상이었다. 바둑을 배운지 불과 한 달밖에 안된 그에게 9급은 높은 턱이나 다름없으나 오기가 발동, 9급으로 참가했다. 시합 당일 왠 일인지 승승장구였다. 결승에서 동갑내기 홍영기(제주대 4년생)와 맞붙어 졌지만 준우승을 했다. 원장과 주변에서 모두들 ‘프로가 될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사회적으로 골칫거리인 도박을 바둑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제주시 병문천 서문다리 밑에서는 청‧장년층 사람들이 몰려들어 속칭 ‘도리짓고 땡’ 화투 노름판 도박으로 날을 지새웠다. 다방에서는 마작판이 벌어지곤 했다.

 

박영수는 69년 5월 제주도바둑기우연합회 창립을 위해 한 달간 시외버스를 타고 도일주하며 바둑인을 만났다. 안덕면 화순에 사는 면장출신, 전 김종필 과수원 관리인은 ‘바둑을 두고 가라’며 3~4일 동안 집에다 붙들기도 했다. 창립총회 날 도내 바둑인 200명이 참석하는 성황리에 초대회장은 강영학, 그는 사무국장이 됐다. 그러나 당시 제주바둑계의 최강자인 한용철 등이 모임 설립에 대한 동의가 없었다며 핵심 1~2급 고수급 15명이 별도의 조직을 하는 바람에 2년 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박영수는 좌절치 않고 72년 가을, 화투 대신 바둑과 장기로 흥미를 유도키 위해 제주에서는 첫 장기대회를 칠성기원에서 열었다. 최초로 상금을 내걸고 점수제도 도입, 졸은 2점, 상은 3점, 마 5점, 포 6점, 차 12점으로 정했다. 현재 포가 7점인 것을 보면 오늘날 점수제와 거의 같은 셈이다. 사발통문, 입소문을 통해 알렸지만 참가자가 80여명에 이를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또한 박영수는 69년 제주신문 주최 왕위전 2회 때부터 준비와 진행을 도맡다 시피 했다. 82년 2월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지구인 담맘에서 아파트건축공사를 하는 (주)한양의 목공 형틀반장으로 있다가 85년 12월 제주에 왔을 때 왕위전은 그사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가 제주에 없었던 83년부터 89년까지 왕위전이 열리지 않은 것은 그의 빈자리가 컸던 것임을 증명한다.

 

박영수는 백록기우회(초대‧2대 회장 박동일)에 3대 회장을 맡는 등 회장을 세 차례나 했다. 그리고 왕위전 부활에 나섰던 것.

 

한국기원 제주지원과 제주지부장을 맡으며 가장 보람된 일은 92년 5월 일본에서 ‘바둑의 신’이라 일컫는 오청원 기성 부부와 임해봉 9단 등을 초청한 일이다. 의류제조업을 하며 한국기원 이사로 있던 부산의 김영성은 열렬한 오청원의 팬이었다. 김영성이 오청원을 부산으로 초청할 의사를 비추자 박영수는 제주에서의 체류경비를 맡겠다고 하여 공동 초청으로 추진, 제주에 온 것이다. 그랜드호텔에서 지도대국을 벌였고 숙소는 서귀포 신라호텔로 정했다. 경찰의 사이드카 경호를 받도록 하는 등 의전에도 공을 들였다.

 

 

오청원은 융숭한 대접에 바둑판에다 김영성과 박영수에게 친필 사인을 해주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국내에 오청원의 사인이 3개뿐으로 알려지고 이 사인 바둑판을 두고 후일 윤기현 9단이 사기행각을 벌였다고 하여 한국기원에서 제명조치가 있기도 했다. 박영수와 윤기현과는 악연이다. 윤기현은 이 초청행사때 박영수로부터 교통비 등 사범료를 받았는데도 다면기료를 요구하자 박영수는 분개하고 한국기원에 사범교체를 요청했다. 후임 사범이 TV바둑 명해설가인 장수영 9단이다. 장 사범은 성품이 소탈하고 원만하여 인간적이다. 현재까지 제주바둑을 지도하고 있고 제주도명예도민증도 받았다. 또 한국기원 제주지원은 각시도 프로대항 바둑대회에서 제주 대표로 활약한 중국 여류 후나웨이 9단과 ‘올인’의 주인공 차민수 4단에게도 명예도민증을 받도록 요청하여 이뤄졌다.

 

93년 4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제주 방문 때, 서귀포 하얏트호텔에서는 일본의 조치훈과 한국 이창호가 벌이는 제4회 동양증권배 세계대회 결승 1, 2국이 있었다. 호텔노조가 파업으로 꽹과리를 치면서 김 대통령의 방문을 막아서고 말았다. 박영수는 노조위원장과 멱살을 서로 붙들어 호텔 로비에서 내뒹굴며 노조원의 철수를 요청했지만 허사가 돼 김 대통령은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제주에서의 국제대회와 국내 타이틀전은 박영수가 제주관광을 위해 한국기원 등에 적극 요청한 결과 중 하나다.

 

 

한국기원 제주지원과 제주JC는 한국 프로기사 23명을 초청, 오리엔탈호텔에서 다면기 바둑시합을 열었다. 이날 조훈현 국수는 도내 5명과 1대 1 대국을, 서봉수, 유창혁 등 16명의 프로기사들은 동호인 5명씩과 다면기를 벌였다. 당시 30만원하는 비자목 바둑판 5개와 일반 바둑판 80개에다 대국 기사의 붓글 사인을 새겨 선물했다. 프로기사가 한꺼번에 제주에 나들이한 것은 한국바둑사상 초유의 일이다.

 

95년 중국바둑계의 거목 네웨이핑(섭위평‧聶衛平) 9단(중국 인민위 대의원)과 마효춘 9단, 상해일보 부사장, 편집국장 등 일행을 초청, 도내 관광지를 안내했다. 96년 10월에는 7명이 10박 11일 일정으로 한중 바둑교류전을 열었고 제주와 자매결연 도시인 중국 하이난도와 혼성팀을 구성해 한‧중 대항전을 펼쳤다. 중국 베이징 시장이 일행을 만찬에 초대하는 대접을 받았다.

 

박영수도 IMF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종업원 5명을 둔 그의 대흥목재사가 건설업체의 연쇄 부도로 건설회사에 먹히고 말았다. 영어의 몸이 됐을 때 조훈현 국수는 구정을 이틀 앞에 두고 제주에 내려와 제주검사장을 면담하여 그의 선처를 부탁하고 갔다. 그래서 조 국수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는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2002년에 왕위를 8번이나 한 최다 왕위 김준식에게 한국기원 제주지부를 넘겼다.

 

박영수의 업적 또 하나는 91년 이전까지 프로 입단전 대회에 제주에서는 출전권이 0.5명이었다. 강원도의 경우 2명이었다. 한국기원에 강력 요청하여 제주도도 2명으로 늘렸다. 5승은 되어야 입단이 되는데 왕위 출신 김형유, 김준식, 박수웅, 박순천, 강순찬 등이 출전했지만 거의가 2승의 벽을 넘지 못했다. 김형유 왕위가 입단전에서 후일 한국 바둑계의 거목 서봉수 명인을 꺾는 바람에 서봉수의 입단이 1년 미뤄졌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봉수, 그는 많은 일본 유학파를 꺾어 한국 바둑의 자존을 세운 ‘된장 바둑’의 지존이고 바둑 올림픽이란 응씨배를 제패했으며, 한국 바둑의 4대 천왕이었기에 전설이다.

 

박영수는 “제주바둑을 위해 멍석을 깔았을 뿐이다. 바둑은 인생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기에 제주도에 바둑 붐이 다시 일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장승홍은? = 연합뉴스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사회부 차장을 끝으로 은퇴한 원로 언론인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제주지부장, 제주불교법우회 회장, 제주도불교청소년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불교와 청소년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제주청교련 회장도 지냈다. 청년시절부터 다져온 바둑실력은 수준급이다. 제주바둑계의 원로와 청년을 두루 아우른 친교의 폭이 넓다. 최근 본인이 직접 취재현장에 나서 제주바둑계의 역사를 정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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