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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살다]한순간에 제주에 반해 바로 제주인이 된 '배정자'씨

 

이제는 서울행 비행기를 타면 집을 떠난다는 느낌이 든다. 서울에 가면 며칠 못 버티고 자꾸 집으로 가고 싶다. 원래 내 삶의 터는 서울인데도…. 

어느덧 제주에 정착한지 2년하고도 9개월이다. 주변에서 ‘서귀포할망’(서귀포 할머니)이라 불러도 낯설지가 않다. 아니 그게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이제 곧 칠순을 바라본다. 늦게 선택한 지금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남들은 얼른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건 못하건 나는 행복하다.

서귀포 법환동에 B&B(Bed&Breakfast)하우스 ‘알레올레’를 차린 배정자(69·여)씨. 그는 한국에 걷기열풍을 몰고 온 ‘제주올레’의 한 복판에 있다. 올레 7코스가 지나는 법환포구 언저리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솔직히 갈옷에 ‘몸빼바지’(허드렛바지)가 더 편한 그는 영락없는 '서귀포할망' 모습 그대로다.

대구가 고향이고, 중학교 때부터 서울살이를 한 터라 분명 ‘서울아씨’의 자태를 기대했는데, 예상과 다르다. 경기여고에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를 나와 중국사 전공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은 재원이건만 도무지 인텔리 냄새도 나지 않는다.

 

물론 그의 이력을 뒤져보다 나오는 김영삼 정부 시절 김숙희 교육부 장관의 비서관으로 일한 3년 경력도 지금의 그를 보면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저 제주의 시골마을에서 만나는 ‘제주할망’의 풍모 그대로다.

커다란 야자수 나무와 빨간 우체통을 지나 들어간 곳엔 40년은 족히 됨직한 오래된 느낌의 ‘알레올레 B&B 하우스’가 있다. 어떠한 고침도 없는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단란한 가족사진들과 그가 해외여행을 다녀오며 틈틈이 모아둔 각종 소품들로 즐비하다. 모두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것들인데다 진지한 삶의 기록물이기도 하다.

-제주도에 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 보다는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어요. 친구들과 놀 때에는 행복했지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항상 허탈하고 허무했죠. 그러던 중 3년 전 외손녀와 제주올레 7코스를 걷고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서귀포’에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서귀포에 완전히 반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가족을 설득하고 아이들은 서울에, 저희 부부는 제주로 내려왔죠. 이제는 서울에 올라가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왜 집 나가면 집이 그립다는 그런 생각. 그 집이 지금 사는 이 집이에요. 사실 3일만 서울에 있어도 목이 아프고, 사람들에게 치이고, 자연이 없는 것이 싫어요.”

-남편과 가족들은 반대하지 않았나요?

 

“왜 아니겠어요. 남편이 많이 반대했죠. 바람 많고, 습하다고 투덜댔죠. 그래도 ‘꼭 제주가서 살아야겠다. 여기서는 못 살겠다. 혼자라도 거기서 살겠다’라고 폭탄선언 했어요. 아니 거의 협박수준이었어요. 아이들도 많이 반대했죠. 자신들이 잘 돌보지 않아서 이러신가 하는 생각도 했대요. 주변에서도 3년도 못 버티고 올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남편과 애들이 더 좋아해요. 특히 남편은 ‘나도 이제 제주사람이야. 제주가 너무 좋아.’라고 말 할 정도예요.”

 

-제주도 그 많은 곳 중에 왜 하필 어촌마을인 법환동에 살게 됐나요?

 

“제주시는 서울의 축소판이어서 싫었어요. 무작정 서귀포에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처음에는 중문에 살려고 집주인과 약속을 했는데, 집주인이 다른 분과 계약을 해버렸죠. ‘신구간’이라는 제주도 풍습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할까봐 잠도 못 이룰 정도였어요. 마침 생활정보지에 이 집이 나온 거예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글세로 계약해 버린 겁니다. 법환은 딱 적당한 시골마을이에요. 근처에 대형마트도 있고, 병원도 있어서 생활에 불편함이 없죠. 게다가 마을 앞에는 탁트인 바다가 있어요. 매일 산책을 할 때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 집이 탤런트 고두심씨 동생 집이래요. 그래서 가끔 동생하고 고씨가 들렀다 가기도 해요.” 

 

-'알레 올레 B&B 하우스'를 운영하게 된 이유가 뭔가요?

“우연한 계기였어요. 경남 창원에서 온 모녀가 제주올레를 걷다가 재워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재워줬죠. 근데 그 모녀가 올라가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좋게 이야기했나 봐요. 입소문에 한두명씩 오던 게 결국 지금의 '알레 B&B 하우스'가 된 거죠. 해 보니 좋은 게 훨씬 많아요. 손님이 있다는 게 생활의 활력소가 되더라고요. 지금 오시는 분들은 언론인, 전문직, 커리어우먼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도 1주일에 2~3일은 반드시 쉬려고 하고 있어요. 원래 B&B 하우스를 경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제 삶을 살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 왔으니깐요. 전에 YWCA에서 이사로 있을 때의 계기로 김숙희 교수님이 교육부 장관하던 시절 비서로 일했었는데요. 김 교수님이 제가 이걸 한다니깐 전화로 핀잔을 주시더라고요. 얼마나 기분이 상하던지…. 근데 김 교수님께서 한번 이 집에 머물고는 하루만 더 머물면 안되겠냐고 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너무 좋아서 매년 꼭 들르세요.“

 

-‘알레 올레’를 운영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나요?

 

“삼일 전에 다시 찾아주신 분인데, 1년 전에 숙박비를 잘못 알고 반값만 내고 갔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와서는 ‘그때 정말 미안했다’면서 그때 지불하지 못했던 숙박비를 주고 갔어요. 극구 사양했는데, 얼마나 완강하던지…. 또 언제는 호주 유학가기 전에 스쿠터 여행을 온 한 젊은 여자가 왔었어요. 햇볕이 너무 따가웠는지 귀가 다 벌개졌더라고요. 그런데 특이한 것이 이 여자가 대형마트 종이봉투에 눈구멍을 뚫고 쓰고 다닌 거예요. 그날 자신은 ‘이마트걸’이였다면서 얼마나 호탕하게 웃던지 아직도 눈이 선하네요. 그리고 30년 동안 차도 비행기도 타지 않으시는 원공스님이 찾아오셨어요. 한경면 저지리에서 전화를 해 위치를 묻는데 저는 월드컵경기장까지 오시면 모시러 가겠다고 했죠. 그런데 원공스님이 월드컵경기장까지 걸어서 오신거예요. 그날 비가 많이 와서 차를 타시라고 했더니 극구 걸어서 가겠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도 같이 비를 맞으며 걸어서 집까지 왔어요. 비는 맞았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알레 올레’와 관련된 블로그도 운영하고 계시나요?

“있지만 간간히 들어가 보는 편이예요. 반대로 남편 따라 배운 사진이 효력을 발휘하는지 사진으로 찍은 제주가 너무 예뻐서 경기여고 동창회홈페이지에 올린 게 그만 동창생들이 여기저기 퍼뜨려 놨더라고요. 거기에다 ‘알레 올레’를 방문해 주셨던 분들도 내 블로그에 감사 글을 적어주셔서 이렇게 입소문이 나버렸습니다.”

-서울에 계신 지인들에게 지금은 제주 마당발로 통하시겠네요.

 

“사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됐네요. 어떤 분은 단국대 교수였는데 아이들이 미국에 있어서 미국에서 노년을 보내려다가 한 번 돈내코에 있는 저희 집에 왔다가 제주에 반하신거예요. 돌아가신 후에 바로 전화로 땅을 구해달라 하시길래 돈내코 인근에 땅을 구해드렸어요. 지금은 그 곳에 주택을 짓고 사세요. 그런 분들이 꽤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저희는 돈내코에 있는 집을 피기벨리라고 불러요. 외손녀가 돈내코에 있는 집이라면서 피기벨리라고 부르거든요. 감귤 창고로 사용되던 곳인데 개조해서 지금은 별장 같이 사용하고 있어요.”

-서울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셨는데, 여기서 또 다른 인연을 만드시고, 얻은 것도 많으신 것 같네요.

 

“제주에 올 때 정말 모두 비우고 내려와서 채우지 말고 살아 보자고 맘먹었죠.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인연은 어쩔 수 없었어요. 어느 날은 원공스님께 ‘마음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살아보자. 생각하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요.’라고 말했더니, ‘그대가 부처인가’라고 답해주시더라고요. 아무 말도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있는 그대로 살아요. 평생 안 해본 일들도 많이 하게 됐죠. 텃밭도 가꾸고, 개도 키우면서요.”

 

-외손녀 다빈이와의 관계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특별한 사연이 있나요?

“제주까지 오게 한 운명적인 계기가 재작년 제주여행이였어요. 그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다빈이도 함께 했었죠. 다빈이는 제 딸이 미국에서 혼자 학업을 할 때 낳은 아이인데 공부하는데 힘들 것 같아서 생후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데려왔죠. 아기 때 제 손에서 컸죠. 외손녀이자 친구 같은 아이에요. 다빈이와 올레길을 걸을 때 올레길 소원나무에 ‘개 기르기, 제주도 와서 살기’라는 소원을 적었어요. 그래서 개를 기르게 됐는데, 그 개가 지금 우리 가족의 또 다른 식구 ‘우리’에요. 다빈이와 통화 할 때 빼 먹지 않는 것이 ‘우리’의 안부죠. 다빈이는 제주도를 너무 좋아해요. 친구들에게 제주 자랑을 하는데 가끔 친구들을 데리고 여행도 오죠. 매년 감귤철만 되면 귤을 다빈이 반으로 보내주는데 그럴 때면 다빈이는 반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려요. 완전히 제주 전도사예요. 나중에 제주 와서 살겠대요.”

 

-이곳에서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불편이요? 물론 있었죠. 뮤지컬이나 연극 같은 문화적 갈증도 있었고, 분위기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도 마시고 싶었고요. 하지만 그런 것 빼고는 거의 없어요. 집착할게 없는데 불편 할 리가 있겠어요. 나이가 들면서 더욱 초연해지고 있어요. 사실 여기 살면서 욕심이 없어졌어요. 여기서 좋은 옷, 좋은 가방, 높은 지위 필요 없잖아요. 평상시 화장도 안하는 걸요! 여기서 그런 것 내세우면 이웃들이 웃지 않을까요? 지금은 서울에 갈 때 갈옷도 입고 가요.”

 

-해외여행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도보여행을 즐기셨나요?

 

“30대 후반에 해외여행을 처음으로 갔어요. 당시에 나가려면 반공교육도 며칠씩이나 받아야 했어요. 도보여행을 시작한 것은 얼마 안돼요. 2006년도부터였는데, 청계천을 매일 걷다보니 도보여행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계기가 돼서 해외여행을 도보로 하게 됐죠. 하지만 제주올레를 걷고 나서는 제주보다 못하더라고요. 지금은 집 앞에서도 매일 5km씩 산책도 하고 있어요. 요즘은 오름을 오르는 것이 제 목표예요. 지금까지 40여 곳을 올랐는데, 너무 좋았어요. 제주의 풍경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죠. 앞으로 더 많이 올라 갈 거예요.”

‘회사를 그만 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친구들과 여행도 하고, 좋은 영화도 보러 다니고, 낮에 산책도 다니고, 서점에서 몇 시간이고 주저앉아 책도 읽고, 집에서 장아찌도 담그고…. 그 동안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일들을 했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줄 곧 내 마음을 괴롭혔다. 그냥 논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나이 들면 다들 그렇게 사는데…. 지난 가을 외손녀와 둘이서 제주여행을 했다. 갑자기 ‘아! 서귀포로 이사 오면 안 될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두 달 사이에 이뤄졌다.‘ -그의 블로그[cafe.daum.net/nn126]에서 말한 제주인생의 영감이다.

 

△알레올레 B&B 하우스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117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전화로만 예약을 받는다. 이 B&B 하우스는 이부자리는 항상 깨끗하게, 화장실에는 휴지와 수건을 수북이 쌓아두기, 올레꾼들을 위해 아침밥 반드시 차려주기라는 재미있는 운영 철학이 있다. 한방에 2명을 기준으로 조식을 포함해 1명당 2만5000원을 숙박비로 받고 있다.

 

문의 011-894-3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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