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각 부처 차관급을 물가안정책임관으로 지정해 품목별로 물가를 관리하기로 했다. 이른바 ‘물가차관’이다. 원ㆍ달러 환율이 고공행진하면서 수입물가 상승이 국내 물가 상승으로 확산하는 것에 대한 긴급 대응 조치다.
11월 수입물가는 지난해 11월 대비 2.6% 올랐다. 지난해 4월(3.8%) 이후 1년 7개월 만의 최고치다. 수입물가는 5개월째 상승했다. 이미 11월 소비자물가는 2.4%, 특히 생활물가는 2.9% 뛰었다. 환율 변수에 민감한 석유류와 농축수산물이 물가 상승을 주도했다.
수입물가는 두세달 시차를 두고 국내 소비자물가에 반영되는 만큼 내년 초 물가 불안이 우려된다. 환율 상승세가 꺾이지 않으면 서민들의 삶은 내년에 더 팍팍해질 가능성이 높다.
물가차관은 각 부처 차관이 소관 품목의 가격ㆍ수급을 점검하면서 책임지는 것이다. 농·축산물과 가공식품은 농림축산식품부, 수산물은 해양수산부, 전기요금은 기후에너지환경부, 석유류는 산업통상부 차관이 각각 전방위적으로 밀착 관리하는 식이다. 어떻게든 물가를 안정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엿보인다.
정부가 생활물가 안정을 위해 위기의식을 갖고 적극 대응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관권으로 기업을 압박해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역대 정부도 물가가 불안할 때 품목별로 물가를 관리했지만 반짝 효과에 그쳤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첫해, 2008년 물가상승률이 4%대를 기록하자 52개 생활필수품을 묶은 ‘MB물가지수’를 만들어 물가와의 전쟁을 벌였다. 2012년에는 ‘배추 차관보’ ‘석유 국장’ ‘쌀 국장’ 등 품목별 담당자를 두고 공공요금 동결과 생필품 가격 억제에 나섰지만 물가는 되레 올랐다. 윤석열 정부도 2023년 11월 각 부처 차관을 물가안정책임관으로 지정했다.
최근의 물가 불안은 환율 급등, 국제 농산물 가격 상승, 인건비 상승 등의 구조적 요인 탓이다. 특히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며 수입물가를 끌어올리고, 이것이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번지는 모습이다. 이는 국제유가는 하락했는데 국내 주유소의 휘발유·경유 판매가격이 오른 것으로 입증된다.
이런 판에 정부가 행정력을 동원해 기업을 압박하고 가격을 억지로 누르면 시장이 왜곡된다. 과거에도 정권이 힘이 있을 때에는 웅크렸다가 정권교체기를 틈타 제품 가격을 한꺼번에 크게 올리는 부작용을 빚곤 했다. 섣부른 찍어 누르기식 물가 관리는 크기와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 비용 감축으로 서비스와 품질을 떨어뜨리는 스킴플레이션으로 전이될 수 있다.
정부는 관권으로 물가를 잡을 수 있다는 낡은 발상을 버리고, 근본적인 대책을 확실하게 실행해야 할 것이다. 농산물은 복잡한 유통 단계를 줄이는 등 고비용 물류 구조를 혁신하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정공법이다. 수입 식재료의 경우 할당관세 확대와 수입선 다변화를 통해 기업들의 원가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기본적으로 환율 안정이 전제돼야 물가도 안정된다. 17일 원ㆍ달러 환율이 장중 1480원을 넘어섰다. 환율 1480원 돌파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무차별 관세인상으로 불안감이 확산한 4월 이후 8개월 만이다.
한국은행과 국민연금의 외환스와프 및 전략적 환헤지 연장, 외국환평형기금 활용 등의 환율안정 조처가 통하지 않았다. 시장이 세운 심리적 마지노선이 잇따라 무너지면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400원대 후반 환율이 ‘뉴노멀’로 자리 잡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위기’ 표현으로 경고하고 나섰다. 이창용 총재는 17일 물가안정 운영상황 점검 기자회견에서 “전통적인 금융위기는 아니지만 성장과 물가, 양극화 측면의 위기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환율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으로 식품ㆍ외식 가격이 뛰어 중산층과 서민층이 소비를 줄이면 자영업자는 매출 부진에 허덕인다. 정부가 경기를 진작하기 위해 돈을 풀면 주식·부동산 가격이 올라 계층ㆍ세대 간 자산 양극화도 심화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가 18일 외국계 은행의 국내 영업 규제를 완화하고 국내 증권사의 서학개미 투자 독려를 단속하는 등의 ‘외환건전성 제도 탄력적 조정방안’을 발표했다. 대통령실은 7대 그룹 관계자들을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환율은 그 나라 경제력의 종합 가늠자다. 환율 불안은 그만큼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약화했다는 방증이다. 한ㆍ미 간 경제성장률 및 금리 차, 팽창한 통화량, 국내 기업 경쟁력 약화 등 구조적 요인을 해소해야 환율도 안정된다.
고환율이 물가 등 경제 전반에 먹구름을 드리우며 정부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해외투자보다 국내 투자에 더 매력을 느끼게 해야 한다. 확장적 재정운용을 자제하며 보유 외환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경제 펀더멘털을 강화해야 한다. 글로벌 기업들이 달러를 들고 한국으로 달려올 정도로 투자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절실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