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거저 생긴 이름이 아니다. 주인공이 있다. 한글에 온 생애를 건 학자의 젊은 날 성과다.
세종대왕 나신곳성역화 국민위원회 사무총장 김슬옹(54) 교수. 인하대 초빙교수이기도 한 그다.
“세종시에 세종학 대학원대학교를 세워 세종학과 훈민정음학을 가르치며 세종의 정신을 잇는 그런 후학들을 양성하고 싶습니다.”
그의 이름 뜻풀이처럼 슬기롭고 옹골찬 그 답다.
지난 12일 제주를 찾은 그를 만났다. 제주대에서 ‘한글’과 ‘훈민정음’ 등에 대한 그의 특강이 있던 날이다.
“한글은 쉬운 글자이자 어울림의 글자, 효율적인 문자에요. 직선과 원형으로 이뤄진 기하학적인 문자이기도 하죠. 지식과 정보의 평등을 실현시키고 위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한글. 또 지난해 해제된 훈민정음 해례본을 학생들에게 알리려 제주에 왔습니다.”
지난해 세계기록 유산이자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세계 최초로 풀어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으던 그다.
세종학 대학원대학교를 꿈꾸는, 세종과 같은 후학을 꿈꾸는 그의 한글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천자문을 다 뗀 '한자 수재’였다. 한자를 좋아하는 그에게 신문은 낙이였다. 신문 읽기를 즐기던 그다.
1977년 고교 1학년이던 어느날 그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신문에 표기된 한자어 '嬰兒'가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천자문에서도 보지 못했던 한자였다. 어린 아이를 뜻하는 ‘영아(嬰兒)’를 표기한 글자였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 아이’라는 쉬운 표현을 두고 굳이 천자문에도 없는 한자를 써가며 표기하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학생중앙> 잡지에서 한글학회 부설 전국국어운동고교연합회 모집글을 봤고 그 곳에 들어가 한글순화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김슬옹’이 아니었다. ‘김용성(庸性)’이 그의 원명이다. 그러나 고교 1학년 말, 그는 그의 이름을 바꾸기로 마음 먹었다. 이름을 한자로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그다. 법원에 개명신청을 해 정식으로 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슬옹’이란 이름을 그 자신에게 선물했다. ‘슬기롭고 옹골찬 옹달샘’이란 뜻의 ‘슬옹’. 그러나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 놔두고 왜 그러냐”며 격노했다.
고교시절 그는 연합회원들과 식당을 돌아다니며 한글순화 운동에 나섰다. 그 때 생겨난 말이 바로 ‘차림표’. 지금 식당에서 ‘메뉴’보다 ‘차림표’를 더 많이 볼 수 있는 건 그 시절 전국국어운동고교연합회가 수 많은 식당을 돌아다닌 성과다.
그 외에도 대학시절에는 동아리(써클)·새내기(신입생)·해오름식(창단식)·박음쇠(호치케스) 등의 한글어를 만들어 보급한 게 바로 그다.
그는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중학시절 학업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수업료가 없는 철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3년간 철도공무원으로 의무 근무를 해야 했다. 그의 첫 직장은 천안역.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수업료 일부(500만원)를 물어내고 철도복을 벗었다. 그리곤 2년간 신문 배달을 하며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연세대 국문과는 고교 시절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에 감동한 그의 목표였다. 외솔 선생의 숨결이 가득한 대학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한글 연구에 더 매달려 훈민정음 연구로 박사학위를 땄다. 그러나 그는 40번의 교수채용 전형에서 쓴 맛을 봤다. 그의 꿈은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꿈을 안고 면접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번번이 영어면접을 봤다. 영문과 교수가 아닌 국문과에 지원한 그였다. 한글학자로서 자존심이 상했고 심한 모멸감에 사로 잡혔다. 그가 교수임용 전형에 40번이나 실패한 이유다.
그렇지만 그의 꿈은 무너지지 않는다. 초빙교수로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고 세종학교육원을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특강 등에도 나선다.
그는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등 52권(공저 포함)의 책을 저술했다. 그가 쓴 논문은 110여편, 대중칼럼은 1000여편에 달한다.
한글날 공휴일 제정 공로로 문화체육부 장관상도 받았다. 사회봉사·독서토론 운동 등을 펼쳐 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최초로 해제했다. 오는 19일에 시상되는 외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외솔상은 1970년 창립된 외솔회에서 한글연구와 나라사랑에 평생을 헌신한 최현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1972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했다. 문화부문과 실천부문으로 나누어 시상하며 이 두 부문에서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은 사람에게 수여한다. 해마다 한글날을 전후한 10월에 시상한다.
훈민정음에 못지 않게 이를 창제한 세종에 대한 사랑도 만만찮다. 그는 세종대왕 나신곳성역화 국민위원회 사무총장이기도 하다. 세종의 업적을 기리고 세종을 가르치고, 세종과 같은 인물을 만드는게 그의 꿈이다. 그가 말하는 ‘세종학’이 바로 이런 학문이다. 세종과 같은 인성과 교품 등을 지닌 인물을 만들어내는, 인문·사회·과학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융.복합 학문이다.
그런 그가 바라보는 제주의 말과 글, 곧 '제주어'는 아쉽기도 하고 안타까운 대상이다. 제주어는 ‘ㆍ(아래 아)’가 남아 있는 유일한 한국어이기 때문이다.
“ㆍ(아래 아)는 ㅏ와 ㅗ의 중간 발음과 비슷한 발음인데, 그 발음을 할 수 있는 것은 제주사람이 유일합니다. 제주도만 노력한다고 해서 안됩니다. 이건 국가가 지원해야 하는 국보급 사업입니다. 제주에서 제주어 보전 열풍이 불고 있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소멸위기 언어인 제주어를 지켜내야 한다는 그다. 그는 제주에 제주어박물관 혹은 박물관 내 제주어 보전 전시관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또 그는ㆍ(아래 아)는 '아래'가 아닌 '하늘'로 불려야 한다고 말했다. 모음의 기본 체계는 'ㆍ(하늘) - ㅣ(사람) - ㅡ(땅)'이라는 그의 설명이다. '천지인(天地人)'의 원리가 깃든 한글창제의 원리를 다시금 되새기자는 취지다.
제주어박물관을 넘어 그는 훈민정음 연구소와 기념관, 한글 체험관을 짓고 싶어 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글을 상품화한 상품들을 팔아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미국에 훈민정음 연구소를 설립할 꿈도 꾸고 있다.
"훈민정음은 더 이상 우리나라만의 유산이 아닌 세계의 유산이죠." 훈민정음 창제 이념 중 하나인 보편성의 가치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도 그는 세계의 유산, 훈민정음을 지키고 보급하러 길을 나선다. [제이누리=박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