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때 우리 사는 마을에 군경들이 들어왕(들어 와서) 마을에 불을 붙였고 친정아버지가 삼양지서로 끌려가 모지게 고문당하고 후유증으로 돌아간 마심(숨졌습니다)"
문연자(78·도련동)씨에게 그 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4.3사건 당시 그의 친정아버지는 폭도로 몰려 삼양지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숨졌다. 그 와중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3일 오전 10시 제주시 봉개동 평화공원 66주기 4.3국가추념식 현장.
위패봉안소에서 아버지,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위패를 그저 처량하게 바라보던 문씨에게 그 날은 청천벽력같은 비극이었다. 당시 문씨는 도련1동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군경 토벌대가 들이닥치자 삼양지서와 가까운 도련2동으로 겨우 몸을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
그는 "일가족 중 나만 살아남았지만 그 날을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눈물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옷소매를 훔쳤다.
"내가 태어날 당시에 우리 아버지가 순경들한테 끌려강(끌려가서) 정뜨르 비행장에서 총살당핸게(총살당했어) 당시 우리 아버지는 3대 독자여신디(삼대독자였는데) 연좌제에 걸려 우리 집안은 풍비박산나고 나도 어떵해그네(어떻게 해서) 제주여고까지 나와신디도(나왔는데도) 취직도 못행(못해서) 고생핸마씸(고생했다)"
태어나자마자 4.3사건으로 인해 부친을 잃은 김순자(67·신촌리)씨는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서 얼굴도 알지 못하는 친정아버지의 위패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김씨의 아버지는 폭도로 몰려 정뜨르비행장에서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연좌제도 그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김씨는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생계가 막막한 채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고 생생히 돌이켜 말했다.
올해 처음으로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66주기 4.3추념식이 참가한 유가족들은 4.3사건 당시에 비참했던 상황을 회고했다. 4.3사건이 발발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제주4.3사건이 처음으로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날. 기쁨은 잠시지만 희생자들의 위패를 바라보는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제이누리=강남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