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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제주…장애인의 날 특집] 시각장애인 명상음악가 홍관수씨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지만…음악과 긍정적 사고로 열정적 삶 살다

갓 초등학교를 입학한 어린 나이에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무슨 병인지도 몰랐다. 부모님들도 포기해야 한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운명에 모든 것을 맡겨야만 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됐다. 자신이 가진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의 평온을 되찾아주는 마치 부처와 같은 음악을 전해주고 있다.

 

장애에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언제나 ‘참 나’를 생각하며 삶을 사는 명상음악가 홍관수(41)씨.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만들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음악가이자 가수이다.

 

한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그는 사춘기도 모른 채 살아갔다. 오히려 저승의 문턱에서 돌아오다 보니 모든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과연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제주시 연동 한 빌라 1층. 5계단을 올라서자마자 그의 집이다. 초인종을 누르자 그가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는 옆으로 비켜서면서 집안으로 안내했다. 식탁에 의자를 꺼내며 기자를 앉히고는 차를 권했다. 든 행동이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시력을 잃은 것은 언제?

 

“시력이 나빠진 것은 어릴 때 열이 많이 나면서였다. 부모님과 형과 누나한테 들은 얘기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는 병명을 밝혀내지 못했다. 열이 계속 났고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부모님이 마지막 애타는 심정으로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무속인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코피가 멈췄다. 하지만 몸은 엉망으로 변해갔다. 시력도 나빠졌다. 점점 더 나빠지자 부모님은 한 가닥 희망이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제주시 한림읍 동령리에 있는 황룡사(사찰)로 보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지내니까 몸이 편해지고 마음이 안정적이게 됐다”

 

-절에서는 어떤 생활을?

 

“특별한 생활은 없었다. 매일 새벽 예불을 하고 스님들과 같이 살았다. 절에서는 약 10년을 살았다. 그냥 혼자 있을 때도 있었다. 불경도 외웠는데, 시력이 없어 테이프를 통해 외웠다. 뜻은 몰랐지만 마음이 편했다. 운동도 했다. 마음의 안정도 찾았고 건강도 좋아졌다.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 소중했던 것 같다. ‘참 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다른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하던데, 난 그런 생각을 안 해봤다. 불교적인 가르침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노보살님 말씀이 저를 살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그 분이 ‘살면서 ‘이거다’라는 것은 없다’, ‘욕심 부리고 살 거면 당장 나가’라고 했다. 말썽을 부린 것은 아니었는데 절에 살려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즉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는 것이다”

 

 

-음악은 언제부터?

 

“기타는 절에 살 때 배웠다. 형이 근무지가 육지로 발령 났다면서 전근 가기 전에 기타를 갖다 줬다. 그때부터 치게 됐다. 19살 때쯤이다. 형이 기본 코드와 줄 맞추는 법을 가르쳐 췄는데 나중에 다 까먹었다. 주법도 몰랐다. 당시 EBS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국악 방송이 많아 국악장단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서 기타를 쳤고, 궁금한 점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책에 있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읽혔다. 기본 코드도 알고 점차 독학하게 됐다.”

 

-음악을 본격으로 배운 것은?

 

“영지학교에 있을 때 ‘뚜럼 브라더스(제주어 가수)’의 동갑내기 박순동씨가 임시 교사로 왔었다. 학교 경사로(휠체어)가 울림이 좋아 거기서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박씨가 ‘노래 잘한다. 같이 무대 서보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2001년 고3 가을에 처음 무대에 섰다. 당시 오멸 감독(영화 <지슬>의 감독)이 제주 문화 살리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테러 J’라는 팀을 만들고 ‘머리에 꽃을’이라는 주제로 문화 운동을 펼쳤다. 시청에서도 했는데 그때의 공연이 처음이었다. 그때 안 했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떨리는데 그때는 더욱 떨렸을 것이다. 경헌이(오멸 감독의 본명이 오경헌이다) 형을 통해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떨려서 노래가 틀렸었는데도 경헌이 형이 할 때마다 불러줬다. 대학을 육지로 진학했을 때도 공연을 할 때마다 불러줬다. 경헌이 형이 춘천 마임페스티벌에 참석할 때에도 데리고 갔다.”

 

그에게 음악을 처음 접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친형이었다. 그리고 음악에 심취한 그를 끌어들인 것은 뚜럼 브라더스의 박순동씨였다. 그가 많은 활동을 할 수 있게 이끌어준 것은 오멸 감독이다.

 

 

-절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신학대학으로 갔다?

 

“나사렛 대학에 진학했다. 신학대학이기도 했지만 종합대학이다. 인간재활학과가 있는 직업재활학부에 진학했다. 직업관련 학과다. 취업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웃음) 특수교육과를 가려고 했는데 약시였으면 갈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혀 보이지 않아 누구를 케어해주기가 힘들다. 종합대학으로 바뀐 지 얼마 안 됐고 장애인 특례 입학도 있었다. 동아리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아는 사람 통해 이곳저곳 동아리 많이 다녔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고 하나에 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강의에 몰래 들어가 청강도 많이 했다. 동기들은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지만 나는 술·담배 하지 못해 많이 어울리지는 못했다.”

 

-신학대학 생활은 어땠나?

 

“기숙사 들어갈 때 종교 란에 ‘불교’를 적었다. 4명이 한 방에 사는데, (학교 측에서) 전도사 2명, 신학과 학생 1명을 붙여줬다. 나중에 알았는데 (학교 측에서) 그런 식으로 전도를 했다. 기본적으로 법문을 들은 적이 있어 전도사와 목사와 토론을 많이 했다. 그래도 기본적인 (종교)사상이 너무 다르다 보니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기독교를 배척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채플시간, 예배시간이 있고, 아침에도 새벽기도 시간이 있는데 그때도 참석했다. 다른 사람들이 신학과 학생인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웃음) 4년 내내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하는 신학과 학생과 전도사들이 바뀌었다. 하지만 매번 어느 정도 얘기를 나누면 끝이 났다. 재밌게 살았고 많은 지식을 얻었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른 종교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야 하는데

 

“2006년 2월에 졸업하기 전 취직 걱정에 2005년 말에 시각장애인 면접이 있었는데 떨어졌다. 그 후 제주도로 내려왔다. 영지학교에서 직업교육 강사로 있었다. 지난해까지 강사를 했지만 올해에는 시각장애 학생이 없어 강사 활동은 중단됐다. 다행히 안마원에서 안마일도 같이 하고 있어 지금은 안마일만 하고 있다. 정직은 아니고 파트타임 정도로 하고 있다. 한 가지 일에 얽매이고 하면 돈을 많이 벌지만 대기 시간이 길어 낭비하는 시간이 많다. 내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다.”

 

-(다시 음악 얘기로 돌아가서) 자작곡도 있다고 들었는데...

 

“2007년에 제 곡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인연의 소리’다. 가사가 있는 명상곡이다. 지루하고 느리고 길게 느껴진다. 우연치 않게 제주대 박태수 교수가 국제 명상센터 창립 기념일이 있다면서 명상곡 해달라고 제안했다. 사실 그 행사에 맞춰 곡을 급조(?)했다. 그 뒤에도 곡을 만들었다. 기존에 있는 곡에다 가사를 붙인 것도 있다. 자작곡은 ‘님 찾아’, ‘난 행복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의 길’ 등 10여 곡이 된다.”

 

-공연도 다니는데

 

“공연을 많이 못 다닌다. (나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절에서 행사할 때 몇 차례 갔다. 불러주면 간다.(웃음) 내 노래가 아무 무대에 설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노래가 조용하고 국악 비슷하면서 국악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요도 아니다. 왜 그런 곡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가는 데로 만들었다. 대구에서 초청해줘 3일간 공연한 적이 있다. 행위예술가가 내 노래에 맞춰서 공연했다. 대구에서 한 공연을 제주에서 하자는 얘기가 있었다. 그래서 3월29~30일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소극장에서 콘서트를 연다. (인터뷰는 콘서트 전에 이뤄졌다) 주최는 우리(기타를 쳐주고 건반을 치는 사람과 홍씨)가 한다. 대구에서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들었다. 3일 동안 공연했는데 특히 일요일에는 좌석이 없어 서서 공연을 봤다고 들었다.”

 

-부모님 또는 가족을 위한 노래나 공연은?

 

“부모님을 위해 노래를 부른 적이 없다. 가족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가 민망하다. 이번에 올릴 곡은 ‘어머니’라는 곡이다. 노래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다. 10~15분 정도 된다. 대구에서도 이 노래에 맞춰 행위예술가가 공연을 했다. 어머니가 올해 79세가 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곡을 만들었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나 때문에 고생한 어머니가 생각난다. 가슴이 아릿하다. 힘을 가진 의미의 언어를 ‘만트라’라고 하는데, 어머니를 ‘만트라’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가사는 ‘어머니’ 또는 ‘자비하신 어머니’ 딱 두 단어다. 처음에 아무생각 없이 30분 넘게 만들었는데 녹음한 뒤 보니 너무 길었다. 그 순간은 내 스스로가 명상이 된 것이다. 그것을 줄이고 줄여서 지금의 곡이 됐다. 사실 나는 줄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공연에 올리는 곡 중간에는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가사를 삽입했다.”

 

-노래(음악)란

 

“나에게 노래는 벗이다. 운동과 같이 벗 같은 존재다. 기타를 잡고만 있어도 편안하다. 노래는 정서적으로 안정을 가져다준다.”

 

-앞으로의 계획은

 

“음반을 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기획자가 하자고 하면 내보고 싶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 계획…. ‘당신의 목표가 뭐냐’고 하면 참 힘들다. 안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다 보니 그렇다. 계획은 다 잘 됐으면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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