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嘉慶)(1760~1820), 이름은 옹염(顒琰), 건륭제(乾隆帝)의 열다섯째 아들로 건륭65년(1798) 황태자에 책봉됐다. 부친은 정치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가경 4년 부황이 죽자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탐관오리 화신(和珅)을 사사하고 계속해서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봉기를 평정했다. 게으름을 경계하고 성실하게 정무를 봤으며 실제적이었다. 예를 준수하면서 모든 것을 민정과 민의를 체험하고 관찰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천조(天朝)는 부유사해(富有四海)”라 자처했다. 25년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죽었다. 가경 25년 더운 여름, 가경제는 많은 수행원, 명배우와 예기, 기마와 수레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목란위장(木蘭圍場)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 없어 열하(熱河)에 당도해 피서산장에 안착한 후 목란추수(木蘭秋狩)를 시작했다. 가경제는 피서산장에 진주하는 것이 자기 일생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7월 25일 60세인 그는,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경제가 죽자 열하의 행궁은 정보를 봉쇄했다. 피서산장의 대문을 굳게 닫고 출입을 제한했다. 27일이 돼서야 도성
화신(和珅)(1750~1799), 자는 치재(治齋), 만주 정홍기(正紅旗) 사람이다. 생원 출신으로 세직(世職)을 이어받았다. 건륭제 때 군기대신을 역임했고 호부상서, 의정대신을 거쳐 나중에 문화전(文華殿)대학사에 오르고 일등공으로 봉해졌다. 문예 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용모가 준수했으며 안색을 살피는 데 능해 건륭제가 극히 총애했다. 그 집정 20여 년간 도당을 만들어 사리를 꾀하고 권모술수를 부려 재물을 탐했다. 가경(嘉慶)이 즉위한 후 건륭제가 죽기를 기다려 20조 항목의 죄목으로 옥에 가두고 자결을 명했다. 그의 가산은 몰수됐는데 황제의 재산과 버금갔다고 한다. 화신은 건륭제 시기의 제일 권신이다. 파벌을 만들어 사사로이 이익을 탐했고 권력을 휘둘려 정치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횡령하고 수뢰했다. 권력을 독점한 20여 년 동안 거만하고 난폭했으며 제멋대로 굴었다. 이는 분명 건륭제가 총애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혼군(昏君)도 아니요 중국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성군이었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국가를 편안하게 만든 인물이었는데 화신의 못된 행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인가? 건륭제가 화신을 오랫동안 총애
복강안(福康安, ?~1796)은 푸차(Fuca, 부찰(富察)) 씨로 자는 요림(瑤林)이다. 청나라 만주 양황기(鑲黃旗) 사람으로 푸헝(Fuheng, 부항(傅恒))의 아들이고 고종(高宗, 건륭제) 효현황후(孝賢皇后)의 조카다. 운기위(雲騎尉)를 세직(世職)으로 삼등시위(三等侍衛)에 오르고 거듭 승진해 부도통(副都統)까지 올랐다. 건륭 38년(1773) 아구이(Agui, 아계(阿桂))를 도와 금천(金川)을 공격했다. 49년(1784)에도 아구이를 도와 감숙(甘肅) 회민(回民)봉기를 진압했다. 버이서(Beise, 패자(貝子))에 봉해지고 양광총독(兩廣總督), 호부상서, 보화전(保和殿)대학사 겸 군기대신 등을 역임했다. 비견할 이가 없을 정도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대단히 사치했고 상사(賞賜)를 남발했다. 가경(嘉慶) 때 명령을 내려 장수들이 지나친 포상을 삼갈 것을 지시하면서 사례로 늘 복강안을 들었다. 건륭제 시기 효현황후의 친정 푸차 가문은 그 당시 가세가 최고로 찬란했던 가문 중 하나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륭제가 효현황후가 죽자 비길 데 없이 애통해 했고 더 나아가 외척에게 정을 많이 쏟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건륭제는 눈앞의 여인이 우라나라 씨가 아니라 일찍이 죽은 효현황후 푸차 씨이기를 남몰래 바라고 있었다. 건륭제는 우라나라 씨에게 싫증을 느끼고 반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푸차 씨의 장점과 우라나라 씨의 단점을 비교하는 습관이 생겼다. 비교하면 할수록 우라나라 씨에 대한 반감이 세졌다. 반감이 세면 셀수록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집착과 같은 행태로 변했다. 그리고 자신의 혼인에 대해 더더욱 실망하게 됐고. 건륭 20년, 열셋째 황자를 생산한 이후 우라나라 씨는 황제와 자신이 나날이 소원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여인의 직감은 틀림없다. 푸차 씨가 죽은 지 오래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건륭제는 푸차 씨에게 여전히 깊은 정을 주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더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황제가 자신에게 줬던 열정과 흥미가 다른 비빈들에게 전이됐다는 것이다. 흔빈(忻嬪), 영비(令妃)와 같은 이들은 이전에는 자신보다도 못했던 비빈들이었는데 지금은 역전돼 황제의 마음속 사랑의 여인이 돼 있었다. 심지어 막 입궁한 회부(回部)(청(淸)나라 때 차이다무(柴達木) 분지에 있던 지명) 여자 용빈(容嬪) 조차도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위풍당당한 대청제국
사람들이 식후 한담거리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청관기안淸官奇案』중의 ‘건륭휴처(乾隆休妻)’(건륭이 아내를 쫓아내다)의 고사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우라나라 황후를 천성이 강직하고 단정하며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입궁 후 황후라는 자리까지 오른 존귀한 몸이 됐지만 부인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건륭제가 구애받지 않고 풍류를 즐기려할 때마다 제지했다. 우라나라 황후가 황제에 대해 권고하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말이 없었다. 황제는 궁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효행한다는 핑계로 모친을 모시고 강남을 순행하면서 구중궁궐의 속박을 벗어나 벌과 나비를 쫓아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자신을 속박하는 황후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황후가 태후를 모시고 효도를 할 수 있도록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으나 건륭제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황제가 출행하는 그 날, 황후는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궁녀들에게 행장을 꾸리라고 명한 후 황태후의 남순을 시봉하면서 며느리의 효도를 다한다는 것을 이유로 태후의 배인 봉주(鳳舟)에 올라 함께 강남으로 동행했다. 천자를 호위하며 순행에 나선 왕공
우라나라(UlaNara, 오랍나랍(烏拉那拉), ?~1766) 황후는 좌령(佐領) 나르부(Narbu, 나이포(那爾布))의 딸로 홍력(弘歷)에게 시집가 측복진(側福晉)이 됐고 건륭(乾隆) 2년(1737) 한비(嫻妃)가 됐다가 귀비(貴妃)에 오른다. 효현(孝賢)황후가 죽자 황후로 책봉된다. 건륭 30년 황제를 따라 남순(南巡)하다 건륭제와 사이가 벌어진 후 분노를 참지 못해 삭발했다. 이듬해 북경에서 죽었다. 성격이 강직하고 외곬이라 건륭제의 여성관계를 가지고 여러 번 아옹거려 건륭제가 싫어하게 됐다. 죽은 후 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2남 1녀들 뒀는데 딸은 요절했다. 건륭제의 정처 푸차(부찰(富察)) 씨가 죽자 황후가 된 우라나라 씨는 건륭제보다 일곱 살이 어렸다. 열서너 살쯤에 수녀(秀女)에 뽑혔다. 당시 건륭제는 황자로 번저(藩邸)에 있었는데 옹정(雍正) 황제가 측실 복진으로 하사했다. 홍력이 즉위 후 건륭 2년 후비 책립 의식을 거행할 때 20세가 된 우라나라 씨를 한비(嫻妃)로 책봉했다. 온유하고 부덕한 그녀는 황태후 니오후루(Niohuru, 뉴호록(鈕祜祿)) 씨의 사랑을 받았다. 건륭 10년 10월에 한귀비로
푸차 씨는 온유하고 지혜로웠다. 건륭제에게 깊은 애정을 줬으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여인은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대청제국의 전통을 푸차 씨는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황권에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건륭제의 개성도 잘 알고 있었다. 군주의 어려움을 후비가 된 자는 이해할 수는 있어도 분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황상을 묵묵히 안위하고 긴장을 풀어주고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은 온몸으로 다가가 다정다감하게 보살피고 안전하고 쾌적한 남편의 피난처가 돼 주면 됐다. 한번은 건륭이 절창(癤瘡, 절양癤瘍)을 앓았다. 어의가 기본적으로 치료하고 백일을 요양해야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황후가 듣고서는 태후를 봉양해야 하고 육궁의 일을 대행해야 했고 자녀를 양육에 전력을 해야 했기에 기진맥진했지만 다른 비빈에게 맡기지 않고 매일 친히 침상을 지키며 시봉했다. 매일 밤 황제의 침궁에서 잠을 자면서 차를 올리고 물을 따라줬다. 황제가 요양하는 기간 동안 약을 따르는 등 어느 하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일 정도 지나 건륭제가 건강을 회복하고 처음처럼 강건하게 돼서야 본궁으로 돌아갔다. 백일 동안 건륭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 1711~1748), 푸차(Fuca, 부찰(富察)) 씨, 차하얼(찰합이(察哈尔)) 총관 이영보(李榮保)의 딸이다. 황태자 홍력(弘歷)에게 시집간 후 적복진(嫡福晉)으로 책봉되고 건륭(乾隆) 2년(1737) 황후에 봉해졌다. 성정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정중하고 검약했다고 한다. 진주나 비취를 두르지 않아 건륭제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건륭 13년에 죽자 건륭제가 통절했다 전한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과 첫째 딸은 요절했다. 건륭황제는 ‘풍류천자風流天子’라 할 만하다. 다정한 군주였다고 한다. 미복을 하고 여러 차례 강남으로 내려갔었기 때문에 야사와 민간에서는 많은 일화를 만들어내 차 마실 때나 식후의 얘깃거리로 삼았다. 그의 첫째 황후 푸차 씨의 죽음에 대해 후세 널리 퍼진 『청조야사대관淸朝野史大觀』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고종(高宗, 건륭) 요현황후는 부문충공(傅文忠公) 항(恒)의 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항의 부인과 고종이 사통하자 후(효현황후)와 여러 차례 반목해 고종과 오랫동안 좋지 못했다. 남순 후 직예(直隸) 경계에 이르렀을 때 황제의 선박에 동숙하다가
그렇다면 정사(正史)의 기록을 보자. 그 두 편액은 강희제가 쓴 것이다. 『청사(淸史)․진원룡전』에 보면 강희 39년 4월 황제가 대신들을 조견할 때 신이 나서 “그대들 집에 각기 당호(堂號)가 있을 텐데 자기 말이라도 상관없다면 짐이 글씨를 내리려 하오”라고 했다. 진원룡은 자신의 노부가 이미 80세를 넘겼는데 자부에게 효도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황상에게 ‘원일당’ 세 글자를 내려 주십사 요청하니 강희제는 호쾌하게 일필휘지로 편액을 썼다고 돼 있다. 『해녕주지(海寧州志)․열녀전』에 보면 진세관의 종조부 진방언(陳邦彦)이 어릴 적에 부친을 여의어 그의 모친 황(黃) 씨는 41년 동안 수절하면서 아들을 재목으로 키웠다. 진 씨 가문이 영광스럽게 된 후 강희제는 자모의 희생정신을 높이 사 친히 ‘절효(節孝)’ 두 글자를 써 하사했고 ‘춘휘당’이란 편액을 써서 진 씨 집안에 내렸다고 돼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진 씨 집안의 편액은 건륭의 출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건륭은 과연 진 씨 집안의 아들일까? 그들의 출생 기록을 보면 기본적으로 판단을 내릴
건륭(乾隆, 1711~1799), 이름은 현엽(玄燁), 옹정(雍正)의 셋째 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 강희(康熙)제의 사랑을 받았다. 즉위 후 여러 차례 중가얼(Junggar, 준갈이(准噶爾)), 대소(大小) 금천(金川, 사천(四川) 대도하(大渡河) 유역)을 공략해 귀속시켰고 안남(安南)을 정벌하면서 청 왕조의 안녕을 가져왔다. 조정 대사를 처리함에 있어 현재(賢才)를 중용하고 강온병행정책을 썼다. 노역을 줄이고 세금을 낮추었으며 수로를 준설해 백성을 편안케 하도록 애썼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건륭 65년 황위를 가경(嘉慶)에게 양위해 태상황에 올랐다. 건륭제는 중국 역대 제왕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60년간 재위했다. 거기에다 태상황 3년을 더하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다. 건륭제는 일생동안 부귀영화를 누렸고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그리 영광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옹정제가 조포계(調包計)를 써서 해녕(海寧) 진(陳) 씨의 아이와 바꿔치기 했다고 하기도 하고, 그의 모친은 존귀한 집안 출신의 여인이 아니고 열하(
옹정(雍正, 1678~1735), 이름은 윤진(胤禛), 강희(康熙)제의 넷째 아들이다. 자태가 위용 있고 행동거지가 단아해 부황의 사랑을 받았다. 강희 37년에 버일러(Beile, 패륵(貝勒))에 봉해졌고 48년에 옹왕(雍王)에 봉해졌다. 형제들과 황제 자리를 다투는 과정에서 신중하게 행동했고 기묘한 수단으로 마침내 우위를 점해 대통을 이었다. 그가 등극한 후 관리의 품행과 치적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했고 탐관오리를 주살해 조정을 준엄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무를 열심히 했고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반란을 평정하고 러시아와의 국경선을 획정했다. 옹정 13년(1735) 원명원(圓明園)에서 급사했다. 넷째 홍력(弘歷)에게 황위를 물려줬다. 익호는 헌(憲)이요 태릉(泰陵)에 묻혔다. 1735년 옹정 황제는 북경의 교외지역 원명원에서 갑자기 죽었다. 옹정 황제의 사인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의견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상유내각上諭內閣』과 『주비유지朱批諭旨』 등 공문 기록에 근거하면 옹정 7년(1729) 겨울부터 옹정제가 큰 병을 얻었고 옹정 9년(1731) 가을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못했다. 오한과 신열이 계속됐고 음
연갱요(年羹堯, ?~1725), 자는 양공(亮工), 한군(漢軍) 양황기(鑲黃旗), 강희(康熙) 39년(1700) 진사, 59년 정서장군(定西將軍)에 제수됐고 이후 티베트를 공략했으며 요충지를 지켜 옹정(雍正)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삼등공(三等公)에 봉해졌다. 무원(撫遠)대장군에 제수된 후 청해(靑海) 나복장단진(羅卜藏丹津)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一等公)에 봉해졌다. 용맹하고 지략이 많아 조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나중에 남달리 공이 많음을 믿고 오만해져 ‘교종불법(驕縱不法)’(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다)했다는 평가를 받아 옹정 3년(1725)에 92개의 죄행을 씌워 옥에 갇히고 자진을 명받는다. 다시 말하면, 연갱요는 진사 출신이다. 관직은 사천(四川)총독, 천섬(川陝)총독, 무원(撫遠)대장군을 역임했다. 티베트를 공략하고 청해(靑海) 회족 반란을 평정했다. 옹정 2년 청해를 평정한 후 10월에 입경해 관직을 받는다. 당시 공이 천하를 덮을 만하여 대신들 중 가장 높은 관직인 일등공(一等公)에 봉해지고 그의 부친 역시 일등공에 태부함(太傅銜)이 더해졌고 아들 둘은 자작(子爵)과 남작(男爵)에 각각 봉해졌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