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를 가지면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 영화가 있다.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1992)’가 그런 영화다. 뉴잉글랜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넬)는 집이 가난해서 학교 도서관 사서 일을 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고향에 가기 위해 긴 부활절 연휴 동안 돈을 모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다. 마침 적절한 보수를 주는 임시 일자리를 찾기는 했는데, 완고한데다가 입이 거친 퇴역 중령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를 맡아주는 것이다. 술에 취해서 수류탄 핀을 뽑았는데 터지면서 실명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를 돌보는 조카의 가족 여행을 거부하고 혼자 집에 있겠다고 해서 조카가 며칠 돌봄을 부탁했다. 찰리에게는 첫 만남부터 영 마음에 안 든다.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너를 자세히 보고 싶으니까.” 보이지도 않으면서 슬슬 떠보질 않나, 선생님(Sir)이란 말 싫어하니 중령님이라고 부르라고 겁을 준다. 프랭크는 조카 가족이 떠나자마자 부리나케 짐을 싸서는 가기 싫어하는 찰리를 억지로 데리고 뉴욕행 비행기를 탄다. 미리 준비라도 했다는 듯 전광석화로 떠난다. “여성의 머리칼은 모든 것을 말해주지. 또 입술 닿는 기분은 사막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공포와 불안감을 나타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영화가 있다. 31분짜리 짧은 상영 시간이지만 완성도와 감동이 100% 충전된, 허진호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두 개의 빛: 릴루미노(Two Lights: Relúmĭno, 2017)’다. 제목에서 말하는 두 개의 빛은 감독이 의도한 것도 있겠지만, 관람자 각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예술 작품의 주제와 감동은 감상하는 자의 것이니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잘 쳤으나 점점 시력을 잃어 ‘저시력장애’를 가지게 된 서인수(박형식)는 현재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는 청년이다. 그와 달리 장난기 넘치고 밝은 성격의 안수영(한지민)은 냄새로 일하는 조향사(아로마 테라피스트)다. 7살 때부터 안 보이기 시작해서 현재 한쪽 눈은 아예 안 보이고, 다른 쪽은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일 뿐이다. 수영이 사진동호회에서 함께 출사(사진 찍으러 나가는 일)를 다니면서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해도 인수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점점 잃어 가는 시력 때문에 걱정과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수는 동호회에서 만난 시각장애인들이 한결같이 밝은 척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안 보이는
지난 회차에 이어 시각 관련 영화 세 편을 준비했다. 모두 독특한 구성으로 만들어졌으며, 시사하는 바가 있는 영화, 스릴러, 액션 각각 골라보았다. 장애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곳 2008년 제작되고 산드라 블럭이 주연한 ‘버드 박스(Bird box)’는 시력을 잃는 것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무언가를 보게 되면 자살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일부러 눈을 가려서 살아야 하는 상황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이 또한 엄청난 전염력을 지녀서 전 세계가 심각할 지경에 이르고, 말로리(산드라 블록)는 두 아이의 눈을 가린 채 보트를 타고 강물을 따라 도망을 친다. 이틀을 꼬박 극한의 공포와 위험을 겪으며 도착한 곳은 시각장애인 학교. 눈이 안 보이는 장애인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은 무엇을 볼 염려가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 두 아이와 말로리는 평온을 찾고 시각장애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된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장애인이 대부분인 사회에서는 주류가 그들이고, 비장애인들은 이방인이 되거나 비주류로 살게 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 비장애인이 안전하고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것..... 버드 박스는 새장을 뜻하는데,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면 좋다. 어둠 속에서 보게 되
한 일본인이 미국의 도로 한복판에서 파란 신호등이 켜져도 차를 운전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차문을 열게 하고 들여다보니 그 사람은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부르짖는다. 겨우 안과를 찾아가서 진료를 받는다. 의사(마크 러팔로)는 혈액검사나 눈 검사를 모두 해봐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한다. 다만 신경 이상으로 인한 실인증(Agnosia)이라고 추측할 뿐. 그 사람을 진료한 안과 의사도, 처음 일본인과 접촉한 사람들도 하나둘씩 같은 증상으로 시야가 '우윳빛'으로 하얘지면서 눈이 멀어져간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백색 질병(White diseases)’은 삽시간에 도시 전체를 뒤덮어버리고, 정부는 무기력하게 대응하다 강제 수용을 결정한다. 환자들을 잡아다가 과거 병동으로 쓰던 건물을 수용소로 쓰면서 가두고는 방치해버린다.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딱히 어떤 조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장 군인들로 하여금 봉쇄를 하고 통제권을 벗어나면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수용된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혼자 다닐 수 없어서 앞 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다녀야만 한다. 이런 모습은 1, 2차 세계대전 당시 포탄 파편이나 화학전 때문에 눈을
‘타투(tattoo)’는 인류의 아주 오래된 문화이다. 과거에는 싸움에서 상대방을 겁주려고 새겨놓은 것부터 죄를 지은 사람에게 징표로 하는 등 다소 제한해서 이용했다. 조직폭력배나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많이 인식하기 때문에 ‘문신(文身)’이라는 말 보다는 ‘타투'로 쓰자는 주장도 있다. 요즘은 개성의 표현으로 누구나 할 정도로 대중화되어서 연인끼리 짝으로 하기도 하고, 팔뚝이나 배, 등에 귀엽게 표현하기도 한다. 타투라는 말은 태평양의 섬나라 사모아에서 쓰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영어권에서 사용하고 있다. 의학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타투를 할 때 오염이나 감염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과 지울 때 몸에 상처를 낼 수 있고, 그것 또한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여러 나라에서 의료법 등으로 제약을 가했고, 사람들은 몰래 타투를 새기기도 하였다. 타투는 과연 의료 행위일까? 한국에서 타투 관련 활동은 의사 면허 소지자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의사들 중 과연 몇 명이 ‘타투잉(tattooing)’을 하고 있을까? 위생이나 감염의 문제는 의료법이 아닌 관련법으로도 얼마든지 주의할 수 있는데..... 얼마 전 일본에서 타투
‘미드나잇 선(Midnight Sun, 2017)’은 어렸을 때부터 ‘색소성 건피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케이티(벨라 손)라는 소녀에 관한 애틋한 이야기를 담았다. 영어 제목인 ‘한밤중의 태양’은 무슨 의미일까? 어두운 밤에만 활동해야 하는 케이티에게 태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각자의 느낌으로 되새겨보면 좋겠다. 케이티의 아버지 잭 프라이스(롭 리글)는 딸이 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를 한다. 낮에는 밖으로 나오면 안 되고, 집은 자외선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특수 유리창으로 둘러쌌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는 1인 2역으로 딸 케이티를 보살펴야 한다. 낮에 밖으로 못 나가는 케이티의 유일한 낙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드는 일과 창밖을 내다보면서 좋아하는 찰리 리드(패트릭 슈왈제네거)라는 학생을 몰래 훔쳐보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9학년이 될 때까지,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다니는 찰리를 보는 것은 케이티의 행복이었다. 그러한 케이티에게 친구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그가 심한 병을 앓아서 낮에 못 논다고 하니까 자기도 햇볕에 오래 못 있으니 밤에 놀러 오겠다는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 1980) 존은 태어날 때는 괜찮았지만 점점 자라면서 얼굴이나 몸통, 팔과 다리에 기형의 모습을 띠게 되어 사람들이 보면 무서워하고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큰 자루에 눈구멍을 뚫어서 쓰고 다녀야 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극빈자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어느 유랑 서커스단에 팔려 간다. 이마는 크게 돌출되어서 코끼리 이마를 연상하게 하고, 뒤통수는 엄청나게 불룩 튀어나왔고,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어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기괴한 모양은 머리뿐만 아니라 두꺼운 그의 오른팔과 두 다리는 코끼리의 것처럼 두껍게 부풀었고, 몸통에는 많은 혹들이 엉켜있었다. 서커스단장은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코끼리에게 밟혀서 그 형상을 하고 태어났다. 억울하게 죽은 코끼리의 영혼이 그에게 들어갔다.'와 같은 엉터리 말을 해대며 관객들에게 소개한다. 그런 신비감을 줄수록 관객들이 놀라서 더 많은 박수를 보내게 되고, 그가 등장하는 시간은 큰 인기를 얻어 서커스단에 수입을 많이 올려주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조셉 메릭 또는 존 메릭이지만 서커스 단장은 코끼리 인간, 즉 ‘엘리펀트 맨’으로 불렀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지
오늘은 진료를 시작하고 3일째.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주민들을 맞는다. 아침 9시부터 진료를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새벽부터 먼 길을 와서 진료소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가 아프세요?“ "콩팥이 아파요. 심장도 아프고... 소화가 안 되면서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파요.” 몽골 진료 풍경 몽골에 진료를 온 지 나는 15년 됐고, 내가 속한 열린의사회는 올해로 25년째다. 그동안 진료하는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말을 타거나 모터사이클을 타고 오던 모습에서 승용차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몽골 사람들은 아픈 상태를 얘기할 때 장기 이름을 대는 경우가 많다. “콩팥이 아파요.“ ”심장이 아파요.“ ”췌장이 아파요.“ ”쓸개가 아파요.“ ”간이 안 좋아요." 처음 몽골에 와서 진료할 때는 깜짝 놀라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분들의 표현에 익숙해져서 슬기롭게 문진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몽골 사람들에게는 콩팥돌(신장결석)이나 쓸개돌(담낭결석)이 많다. 채소가 흔하지 않고 양고기를 중심으로 한 육식을 기본으로 많이 하다보니 콜레스테롤 섭취가 많다. 콜레스테롤은 결석의 기본 성분이다. 이런 질병이 아니라면 위에서 말하
인류에게 끊임없이 괴로움을 준 질병을 말하라면 ‘관절염’을 들 수 있다. 개나 말, 소와 같은 반려동물이나 가축은 물론 들짐승들까지도 사지를 가진 동물이라면 누구나 겪는 병이기도 하다. 관절은 인체가 움직일 수 있도록 뼈와 뼈 사이를 연결하는 곳으로 여러 질환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무리하게 사용하다 보니 닳아서 생기는 ‘퇴행성관절염’과 서서히 염증이 심해지면서 관절이 망가지는 자가면역질환인 ‘류마티스 관절염’이 대표 선수들이다. ‘내 사랑(Maudie, 2016)’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성장에 문제를 가진데다가 어린 나이에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게 되면서 걷기도 힘들고 손으로 물건을 쥐기조차 힘든 상태로 오빠와 고모로부터 박대를 받다가 나이브 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모드 루이스(Maud Kathleen Lewis, 1903~1970)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이브(Naive) 화가란, 단어 뜻처럼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고, 특정 미술 사조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자신이 본 자연이나 실물들을 솔직하게 그리는 화가들을 말한다. 일을 하고 싶지만 아무도 일거리를 맡기지 않아서 고민하던 모드(샐리 호킨스)는 입주해서 일할 가정부를 구한다는 전단지를 보고 마을에서 떨어
이전에 소개한 에린 브로코비치 외에 환경오염을 다룬 또 다른 영화를 올려본다. 2019년에 제작되어 화학물질을 다루는 거대 회사와의 오랜 법정 소송을 다룬 ‘다크 워터스(Dark Waters)’는 화학계 기업들의 법률을 담당하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인 롭 빌럿(마크 러팔로), 그의 아내 사라(앤 해서웨이), 로펌의 대표 톰(팀 로빈스) 등의 화려한 배역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거대 글로벌 기업인 미국의 듀폰(Du Pont)사를 상대로 20년의 세월을 싸우는 롭이라는 변호사의 이야기이다. 화학물질을 생산해서 전 세계에 공급하는 듀폰사는 최근까지도 각종 코팅제로 사용되는 ‘테플론’이라는 유기화합물을 이용해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테플론은 과불화옥탄산(PFOA)이라고 지칭되는 합성물질에서 나온 건데, 처음 개발될 때는 너무 단단하고 분해되기 어려운 화합물이라 2차 세계대전 때 탱크에 방수처리용으로 사용하다가 듀폰사에서 가전제품이나 장난감 등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탄소 8개가 연결된 화합물이라서 다른 말로는 ‘C8’이라고도 불리고, 프라이팬에서부터 장난감, 의류, 자동차, 콘텍트 렌즈, 종이컵 등 온갖 제품의 코팅 등에 이용되었다. 이 물질은 영화에서처럼 오랜 시간이
병원 직원으로 취업하려고 면접을 보는 한 여성이 있다. 그는 고교 졸업이 전부이고 병원 근무 경력이나 의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던 터라 보기 좋게 탈락하고 만다.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되는지 주차한 차에는 교통위반 딱지가 붙어있고,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이 여인이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 2000)’ 영화의 주인공이다. 에린은 사고의 소송을 위해서 에드 메스리(알버트 피니)라는 변호사를 만나지만 재판에서 지고 만다. 어린아이들 셋을 데리고 사는 그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수십 군데를 알아보다가 자기의 소송을 맡았던 에드라는 변호사 사무실에 우격다짐 격으로 일자리를 달라고 하면서 들어간다. 에드는 마지못해 사무실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어느 날 에린이 서류 정리를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퍼시픽 가스 전력회사(PG&E)라는 회사에 부동산을 매각하는 서류 사이에 병원 기록이 들어있던 것. ‘백혈구 수치 이상, 염증이나 백혈병일 때 나타나는 현상임’이라는 소견이 적혀있는 기록을 보고 이상하다고 여겨서 병원 기록의 주인을 찾아 LA 외곽의 힌클리(Hinkley)라는 작은 마을을 찾아간다.
암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불치병들은 의학통계로 예상되는 남은 수명이란 게 있다. 흔히 ‘얼마나 살 수 있겠습니까?’ 물었을 때 의사가 대답하는 그 생존 가능 시간을 말한다. 만일 죽음이 결정되었고, 남은 시간을 안다면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하고 싶은지 물음을 받았을 때 어떻게 말할까? 영화 ‘파이브 피트(Five Feet Apart, 2019)’는 우리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을 앓는 스텔라 그랜트(헤일리 루 리차드슨)는 일곱 살 때부터 병원에서 살고 있다. 희귀질환이면서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병원에서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언제나 산소통을 가지고 다녀야 하고, 하루종일 산소 콧줄을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입원한 병원에는 오래전부터 같은 질환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다 세상을 떠나고 자신과 포(모이세스 아리아스)라는 친구만 남아있다. 희귀질환인 낭포성 섬유증 영화에는 다소 어려운 의학용어들이 나오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병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스텔라가 앓고 있는 낭포성 섬유증은 희귀질환으로, 서양인들에게서 종종 발견되지만, 동양인에게는 잘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