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새로 구입한 차(car)와 같은 차는 전국에 수 백 대가 더 있다. 이 차는 새로운 차이긴 해도 이미 생산된 차들과 다를 바 없는 동질의 차로 네오스(neos)인 것이다. 그러나 카이노스(kainos)는 대량생산 된 많은 수의 차가 아니라 주문 생산한 한 대의 차(Model T car)로 숫자상으로도 한 대의 새 차이며 질적으로도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차를 말한다. 성경에는 “새(neos)포도주는 새(kainos)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새 포도주 비유가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이라는 뜻의 두 가지 헬라어 단어들이 모두 사용되는데 전자의 새(neos)포도주는 양적차원의 의미이며 후자의 새(kainos)부대는 질적인 변화를 전제한 의미로 쓰여졌다.
바그너를 시작으로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쉔베르크로 이어지는 젊은 숨결들에 의해 주도된 급격한 음악변화는 당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베토벤 교향곡을 선호하는 당대의 음악계와 청중들은 이들의 도발적 음악사조에 대한 배타적 적대감을 노골화함으로 새(neos)음악의 수용 속도를 무디게 했다.
그러나 결국 시대의 흐름 앞에 포용력을 보임으로 새로운(kainos)음악시대를 예견하며 이를 맞이할 준비를 가속화했고 달콤한 낭만의 청각성향은 근·현대음악의 큰 산을 조각하며 오늘까지 이르러 지금도 네오스(neos)의 강은 카이노스(kainos)의 바다로 흐르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많은 종류의 악보들과 퍼포먼스의 다양화는 음악가들의 본성을 자극하며 새로운(kainos)음악 속으로 급진하고 있고 방금 받은 악보가 채 연주되기도 전에 새로운 악보가 손에 쥐어지듯 변화의 시대적 촉각은 음악계에도 압박의 수위를 더해 오고 있다.
물론 모든 악보가 연주 될 만한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며 다 연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만 음악계의 더딘 음악욕구는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는 낡은 부대자루만 움켜지고 있어 출구마저 막혀 있는 듯하다.
특히 말러, 브르크너를 넘지 못하는 무생물 교향악단과 돌리고 나눠먹는 식상한 레퍼토리로 연명하는 무뇌(無腦) 합창단들, 베토벤, 쇼팽, 리스트의 피아노곡만 내내 두드리는 진부한 피아니스트들과 레퍼토리 개발은 뒷전인 채 화려한 무대 의상으로 밤낮 흘러간 옛 노래만 불러대는 게으른 성악가들, 음악은 고사하고 도구(기법)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무딘 작곡계와 변별력 하나 없이 상업성에 찌든 국내 유사 음악콩쿠르들과 전시용에 올인 하는 중앙과 지자체의 마네킹 예술행정 등은 음악예술의 총체적 위기를 반증하는 현상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새(neos)포도주를 담기위한 새(kainos)부대는 질적인 기반위에 지금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변화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음악 없는 음악가들이 가판대 위에서 음악을 막장 떨이로 팔아넘겨도 침묵하는 음악계의 태만함(slothfulness)을 계속 방치한다면 우리는 새로운(neos)음악을 담아낼 능력(kainos)이 없게 된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음악가들의 모호한 기준과 안이한 역사의식 역시 도약의 ‘때’를 놓치게 하는 공범이기에 그동안 의존해 온 껍질(가치와 형식)을 과감히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음악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카이노스(kainos)지휘자와 단원 영입으로 각 단체의 음악유형의 특성을 강화 시키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 행정의 무한 지원이야말로 새로운 ‘때’를 준비하는 지혜인 것이며 이로써 변화의 시기에 음악외연을 넓히며 새(kainos)부대를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울 수 없더라도 언제나 좋은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