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는 앞으로의 효용가치가 적거나 아예 없는 돌(廢石)을 과감히 버림으로써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고 다른 실리를 얻는 것을 뜻하는 사석작전(捨石作戰)이 있다. 이 사석작전의 키워드는 잘 버려야 이길 수 있는 것이어서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여기에서 갈려진다. 바둑의 고수들은 어떤 돌이 앞으로 더 큰 가치가 있고 어떤 돌이 가치가 없을 것인가를 정확히 판단하며 상대적으로 가치가 적은 돌은 과감히 버릴 줄 앎으로 버린 만큼 반드시 대가를 얻는다. 그러나 하수들은 미래가치가 없는 돌(廢石)과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돌(要石)을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짐으로 현재의 돌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 모두 살리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대마(大馬)를 죽이고 판을 깸으로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것이 바로 하수들의 한계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처럼 관립(官立)전문연주단이 많은 나라는 없다. 외국의 음악가들조차 경이롭게 본다. 이처럼 서양음악 본고장에서도 유래 없는 관립연주단의 범람은 그 허와 실을 떠나 결코 나쁠 것은 없지만 이쯤에서 옥석을 가려 단(團)성장에 적합하지 못한 내면의 음악기후들을 걷어내야 한다. 환언하면 지휘자와 단원, 그리고 담당공무원에 대한 음악사석(捨石)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도·시립연주단들이 창단된 후 그런대로 기대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음악은 고갈된 채 꼼수와 음악정치로 자릴 연명하는 지휘자와 전문 연주자로서의 능력도 없이 집터나 지키는 터주 단원들, 여기에 단(團)위에 군림하며 직진도 후진도 못하게 바리게이트를 치는 담당공무원의 아전인수로 인한 단의 정체성 상실과 미래가치의 유실은 심각하다.
물론 오랫동안 노력해왔고 현재도 가치가 있어 보이는 지휘자와 단원, 담당공무원을 폐석(廢石)으로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현재의 낡은 가치에 연연하지 않고 버려야 할 돌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임면(任免)권자의 진정한 통찰력은 종국에는 더 큰 가치를 만들며, 이런 자들을 감싸 안을수록 단의 영구한 진보와 더 이상의 가치창출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고수라면 갈파한다. 그러므로 전문성이 떨어진 연주자들(지휘자·단원)이 방출 되지 않아 곳간(團)을 차지함으로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면 이들을 과감히 걸러내어 경이적인 연주 인프라에 걸 맞는 음악근육을 키워야함이 마땅하다.
더더욱 전문연주단의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의 골목 경쟁력은 분명 위기이며 위기는 곧 도구를 바꿔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변화란 때로 오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무심코 지나쳐버려 제대로 모르던 걸 알게 만드는 까닭에 흥미롭다. 그러나 변화에는 반드시 고통과 위기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만약 지금까지 괜찮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지금이 버릴 적기이며 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고수와 하수로 갈리는 것이다.
변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만족도와 함께 음악 경쟁력을 일류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갑’인 임면권자는 지루한 다큐멘터리 음악뿐인 발효 안 된 연주자들(지휘자·단원)과 예술단을 하급 잡부로 여겨 쥐락펴락하는 담당공무원을 과감히 정리하고 운영조례를 고쳐서라도 폐석(廢石)을 걷어냄으로 눅눅한 음악기후를 환기시켜 단(團)의 존재가치를 극대화하는데 고수다운 결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편, 요석(要石)같은 연주자들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속도 빠른 LTE 음악의 진수를 보여줌으로 차별적 감동의 고부가가치를 창출, 자신들을 탐스럽게 한다.
음악은 아무나 선택하는 옵션품목도 나누어 갚는 할부품목도 아니다. 음악은 본능적으로 체화된 음악 중독자들의 일시불 몫(삶)이며 태생적 한계를 지닌 불량 연주자들(지휘자·단원)과 담당공무원에 대한 음악사석(音樂捨石)은 우리에게 청중이 있는지 여부 보다 ‘어떤 청중을 갖게 하느냐’를 결정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김일호(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