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당 뒈싸져실거여(바다 뒤집어졌을 거야), 엉덕(바닷가 절벽이나 큰 바위) 쪽으로 가보라. 뭔가 막 올라왔을 것이여.
해마다 몇 번씩 찾아오는 태풍 뒤의 바다 모습이다.
폭풍우가 쓸어내린 하천 빗물과 화산회토(화산재가 퇴적하여 생긴 흙)가 일시에 밀려들면 연안의 바다색은 온통 누런 색깔로 변한다.
인근 바다에 고이고 썩었던 백화들을 깨끗이 씻어 내고 바닷속을 화~악 뒤집어 주기 때문에 어쩌면 바닷사람들에겐 오히려 태풍이 반가운 손님일 수 있다.
한꺼번에 밀려들어 단물에 취한 고기나 감태해초들이 바닷가로 둥둥 떠오른다.
그래서 그때 그 시절의 아이들은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에는 아랑곳없이 내리비치는 땡볕을 받으며 막 바다로 줄달음을 쳤다.
초가지붕이 날아가고 밭 돌담들이 허물어지고 온 동네 골목마다바람에 널브러진 온갖 넝쿨 더미로 아수라장이 되지만, 원체 낙천적으로 자란 아이들은 마냥 들떠서 바다로 내달린다.
아니나 다를까 태풍 뒤에 쓸어내린 고요한 바다 어귀엔 금세 숨을 볼락 거리는 싱싱한 고기들이 둥갈 둥갈 떠올랐다. 문어랑 낙지랑 따치랑 이름 모를 고기와 해초들을 아이들은 공짜로 수입한다.
바람 타는 섬의 아이들은 바다를 안고 살았다. 그래서 둘만 모이면 바다로 향했다. 한여름 바다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도 않은 아이들이 구릿빛으로 타들어 가도록 물에 뛰어들며 멱감기 하였다.
그래서 바다는 늘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꿈의 무대요 삶의 이치를 터득하는 무한대의 자연학습장이었다.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광대무변의 정겨운 바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아름다운 바다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꿈의 고향이었다.
화산섬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꼬막 같은 초가지붕 마을, 조상의 혼과 얼이 흠뻑 스미어 배인 포구들은 예로부터 바위틈새를 뚫고 솟아 나오는 샘물 *고다니(고장,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지방)를 따라 설촌하였다.
돌담에 화산토를 마름질하여 집을 짓고, 밭담을 쌓고, 환해장성(마을을 따라 갯가에 둘러쌓은 성)을 둘렀다. 바다에 연한 집 뒤로는 해풍을 막기 위해 돌담 성을 둘러놓지만,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올 때엔 지붕 위로 *절 지쳐 오르는(파도가 물체에 부딪혀 오르는) 너울이 한바탕 공중 잽이 치고 마당으로 줄줄 흘러내려서 숨골로 빠져들었다.
멀리 태평양에서 발원하여 산방산을 치고 밀려오는 절 소리가 마치 하늘이 지휘하는 광상곡처럼 웅장하기만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산방산 *절 우는 소리(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퍼지는 소리)의 크기에 따라 일기의 향방을 감지하였다. 자연이 발하는 기상예보였다.
갯가사람들은 그렇게 거대한 자연의 힘에 순응하며 바다에 기대어 살아왔다. 거친 바다와 모진 풍파는 섬사람들의 강한 체질과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길들여 놓았다.
그래서 제주의 어머니들은 자연에 순응하는 힘이 유독 강했다. 남자를 먹여 살릴 정도로 강인한 기질과 건강미를 타고났다.
삼다의 여자는 단순히 남자보다 숫자가 많다는 의미보다는 여자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돌. 바람. 여자의 숨비소리(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며 내뿜는 소리)는 제주를 낳았고 섬 제주는 여자를 키웠다.
바다의 독살인 *원(밀물 때 몰려든 고기를 잡기 위해 만든 돌담)과 잠녀들의 *불턱(돌담으로 에워싼 탈의장), 삼백육십 여덟 개의 오름과 한라산자락을 향하는 밭 돌담 줄기마다 원기를 불어넣는 것은 다름 아닌 강인한 제주여자들의 기질에서 비롯되었다.
“밭에 비가 풍족하게 내려사(야) 밭농사 풍년이 들 듯 바당에도 태풍이 불어줘사(야) 바당농사도(바다농사도) 잘되는 거여.
“올해에도 몇 번 바당이 뒈싸져사(뒤집어져야) 물질(해녀가 물속에서 작업하는 일)하는 맛이 날것이라..
“우리에겐 바당이 밭이여... 손질이 정성스러운 만큼 보답헌다(한다). 좋은 바당은 사람 손으로 맹글어(만들어) 가는 거라.
어부와 잠녀들의 넋두리다.
물속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잠녀들은 조류변화에 누구보다도 민감하여 자연의 영향에 순응하는 천리를 바다에서 체득한다.
그렇게 영육을 묻는 삶의 터전이자 혼을 뿌려온 바다생활이 이제 마지막 악장을 치게 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언제부터였는가. 바다에 마귀의 성 같은 붉은 깃발들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인간의 무지몽매한 힘으로 바당을 뒈싸 놓으려 한다. 아니 텃바당이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뒈싸질 운명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태풍의 힘으로 뒈싸진 바당은 황금어장으로 바뀌는 복원력을 타고 나지만, 인간의 무지로 뒈싸진 바당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할 뿐이다. 그런 이치를 모를 리도 없는 인간들은 별무대책도 없이 막무가내로 바다를 허물어 나간다.
이미 우알 녘(위와 아래쪽) 바당에 무쇠 부딪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을 어쩌란 말인가.
골리앗 기중기와 덩치 큰 굴착기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밀어붙일 기세로 진을 치고 일반인 출입통제의 붉은 깃발들이 동네바다에 무서운 공포감과 위기감을 자아낸다.
힘없는 바다 지킴이 어부들과 잠녀들이 목숨을 건 투쟁으로 맞서지만, 맥도 못 추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힘이 달리고 부치는 건 불 보듯 뻔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볼 뿐이다.
생명의 바다엔 청천벽력, 벼락 덩어리가 내려치는 것을 보고도 당장에 자신에게 피해가 없어 보이니 그저 남의 일인가 한다.
푸른 바다의 일렁이는 물결과 넘실거리는 파도, 행복한 바다의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탈도 많고 말도 많은 무지렁이 바당으로 뒈싸지고 마는가.
물 윗사람들이 오락가락 평행선을 그으며 다툼질을 하고 천길 물속을 들여다보면서 울부짖지만, 상처 난 바다의 응어리진 한을 풀어줄 도리가 없으니 상군잠녀(기량이 뛰어난 잠녀)들이 자맥질하던 원혼만이 지천을 맴돌다 사라질 뿐이다.
호오이 호오이숨비질 소리를 실어 나르는 노여운 파도가 밀려와서 엉덕바위를 냅다 후려치고 나면 산채만한 물거품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다 거칠게 부서져 내린다./수필가 강관보(제주도청 농축산식품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