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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명 목사 중 가장 많은 기록 남긴 '제주의 보물'
"제주·인천·경주·영천 지역학과 접목…협력해야"

 

이형상 목사는 조선시대 제주를 거쳐 간 목사 중에 제주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기록화첩과 지도, 운문·산문·편지 모음집, 장계, 지리서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처럼 많은 기록을 남긴 건 역대 그 어떤 목사보다도 제주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근래 들어 이형상의 제주목사 재임 당시 주요 행적과 자취를 되새겨보며 다각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긍정과 부정 사이" 이형상을 바라보는 제주의 시선' 지난 연재에 이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이형상 목사의 삶을 들여다본다.

 

◇ 짧은 재임 기간 제주에 미친 큰 영향

 

숙종 28년인 1702년 3월 제주에 도착해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이듬해 3월 파직돼 6월 제주를 떠나기까지 15개월 가량 제주에 머물렀다.

 

실제로 제주목사로 재임한 기간은 1년 남짓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제주에 미친 영향은 30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 목사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관심은 '당(堂) 오백과 절(卍) 오백' 전설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신당 파괴에 집중됐다.

 

학자들의 선행연구 역시 대부분 음사(淫祀·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라고 칭해지던 신당 철폐 등에 집중됐던 것이 사실이다.

 

제주에 조선의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신당과 불당을 태워 없앴던 희대의 사건 탓에 여전히 제주에는 이 목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과연 그를 문화적 다양성을 훼손한 부정적 인물로 바라봐야만 할까.

 

2000년을 앞두고 제주에서 이뤄진 중요한 문화적 이벤트는 이러한 기존 흐름에 전환점이 됐다.

 

'탐라순력도'의 300년 만의 귀환이었다.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1702년 도내 각 고을 순시를 비롯해 한 해 동안 거행했던 여러 행사 장면을 화공(畵工) 김남길에게 그리게 하고 간략한 설명을 곁들여 만든 화첩이다.

 

조선시대 제주의 모습을 담은 기록 화첩인 만큼 제주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였다.

 

오랜 세월 경북 영천 이형상 목사의 종가(宗家)에서 보관해왔지만, 끊질긴 설득 끝에 제주시가 매입하면서 1998년 12월 30일 제주로 돌아왔다.

 

탐라순력도의 귀환 이후 이를 바탕으로 과거 제주에서 거행됐던 각종 행사가 하나씩 재연되기 시작했고, 그림 속에 등장하는 옛 제주 사람들의 복식 등 다양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뿐만아니라 '탐라지도', '탐라록', '탐라장계초', '남환박물' 등 이형상이 남긴 제주 관련 문헌이 하나씩 번역돼 발간됐다.

 

이형상 자신이 제주에 와서 직접 보고 겪은 경험, 고민 등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을 통해 18세기 당시 제주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에 대한 연구로도 이어졌다.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서 단행한 개혁, 혁신 등이 화두가 됐다.

 

 

이 목사가 제주의 주요 일을 조정에 보고한 장계(狀啓)를 엮어 만든 책인 '탐라장계초'에는 제주 백성들이 과중한 부역과 공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목마장을 돌보는 목자, 바다 속에 들어가 전복 등을 캐는 잠녀 등의 고통을 헤아려 그 폐단을 시정하고 무속이 만연해 있던 제주 풍속을 사회교화라는 입장에서 신당과 불당을 철폐하고 제주를 개혁하기 위한 장계를 올리는 등 적극적인 대처에 나선다.

 

또 변방 제주의 교육 현실에 안타까워 하며 문무(文武) 교육을 장려하는 등 과거급제자 배출을 위해 노력했다.

 

이 목사가 1년 남짓한 재임 기간 제주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책에 대한 제안으로 올린 장계만 21건에 달한다.

 

이외에도 이형상은 제주의 지리적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신하로서 그는 제주를 단순히 국토 최남단, 절해고도의 섬이 아닌 해양 외부 세력이 들어오는 길목이자 국가 방어를 위한 최전선이라 인식했다.

 

김새미오 제주대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남환박물의 가치와 시선' 논문을 통해 "병와 이형상이 지은 '북설습령', '남환박물', '동이산략'은 청, 제주, 일본에 대한 기록"이라며 "조선의 변방에 대해 단일 저술로 하나씩 남긴 경우는 아마 병와(이형상이)가 처음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시대 제주는 변방이자 외부 세력이 들어오는 입구에 해당한다"며 "(이형상은) 변방인 제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이 목사는 제주에 도착하자 마자 군사시설 점검과 군사훈련, 군사들의 사기 진작 등 제주의 방어 강화에 힘을 쏟았다.

 

탐라순력도 41개의 그림 중에 군사점검 관련 그림만 17개에 달한다.

 

이진영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역시 '제주목사 이형상 인식 연구'를 통해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서 벌인 전면적인 개조 혹은 개혁은 '제주는 국가방위의 최전선'이라는 지리적 인식과 '제주는 조선의 강역이면서도 모든 면에서 조선이라 볼 수 없다'는 인문사회적 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형상은 자신이 바로 왕가의 일원이라는 소명의식 때문에 여타의 목민관들과 달리 제주를 근본부터 바꿔놓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파직으로 1년 여 길지 않은 제주 생활을 마감하고 바다를 건넌 이형상은 경북 영천의 호연정에 은거하며 30여년 간 저술 활동에 매진한다.

 

경학 및 성리학을 비롯해 예학, 역사, 전기, 지리, 시문, 국학, 언어, 종교, 천문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분야에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다.

 

그는 조선시대 286명의 제주 목사 중에서 제주에 대한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300여 년 전 제주에 대한 기록은 단순히 개인의 흔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조선 후기 제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제주의 보물이자 국가의 보물로 평가받는다.

 

박규홍 병와연구소 소장은 최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이형상 학술세미나에서 '제주목사 이형상의 연구 현황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주제발표 하면서 "병와 선생은 학자이자 목민관으로서 뛰어난 안목과 정보력, 실사고증의 노력으로 주목할 만한 저술을 남겼다"며 "병와 선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주도와 인천시, 경주시 그리고 영천시 등은 병와학을 각 지역의 지역학과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완성도 높은 교육·문화 콘텐츠와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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