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보 : 국민당 군대 내에 ‘정공'(政工, 정치공작) 부서는 아무런 역할을 못했는가? 고화 : 국민당 군대 중에 정치부는 줄곧 군사 주관아래의 막료 기구였다. 1944년 6월에 내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의 압력을 받아 국민당은 미군체제를 배워 처음으로 군에서 당부를 철퇴하고 군위회(軍委會) 정치부를 공보국으로 고쳤으며 그 외에 국방부 감찰국과 민사국을 뒀다. 정치부 직능을 세 분야로 나눈 것이다. 당부가 군대에서 퇴출된 후 정공 인원은 군대에서 지위가 높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엉터리 약을 파는 곳’이라 보면서 군대 내부에서는 더더욱 응집력이 없었다. 왕정균(王鼎鈞)의 회고에 따르면, 내전 후기 국군 관병들이 국군 실패를 논할 때 다른 사람의 일을 얘기하듯 했다고 한다. “타인의 불행을 즐긴다”고나 할까. 모두 해방군의 포로가 될 때까지 그런 태도를 가졌다고 했다. 국군의 외형은 강대하게 보였으나 내부는 실로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해방군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1945년 10월 25일, 중공 중앙 서기처는 「국군 공작부 성립에 관한 지시」를 보내 각 중앙국과 분국, 군위와 대군구와 야전군, 각
조보 : 장개석의 개인적인 군사 재능이 모택동과 차이가 있다는 점이 실패의 커다란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나? 고화 : 장개석은 군사 방면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장개석은 계통적인 군사 사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모택동에게는 “10대 군사 원칙”이 있었다. 어떤 때는 장개석의 전략적 안목이 정확하기는 했다. 그런데 자기의 의견이 옳은 게 분명한데도 반대가 있으면 끝까지 견지하지 못했다. 1948년 2월, 장개석은 여러 차례 위립황(衛立煌)에게 금주(錦州)로 주력군을 철군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위립황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장개석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 부작의(傅作義)에게 철군해 남하라하고 했으나 부작의는 차하얼과 수원(綏遠, 1928년 중국 북부 내몽고内蒙古에 설치한 성으로 1954년 내몽고 자치구에 병합) 지역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화북을 지키는 것이 대세이고 강남으로 철수하는 것은 일부지역에 안거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장개석도 동의해 버렸다. 더 중요한 것은 장개석의 군사 전략에 중대한 결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목에 ‘보성수지(保
국민당이 말 위에서 천하를 잃자 중국의 역사는 1949년 총부리에 의해 새로운 장을 쓰게 된다. 남경대학 역사학과 교수 고화(高華)는 국민당의 실패는 “역사의 합리적 작용”에 의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원인이 군사상 실패에 있다고 강조했다. ‘당국(黨國)’의 중심이 돼 당과 국가, 군대를 한 개인이 통솔했는데 장개석의 군사상 실패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동방조보(東方早報)』와 고화 교수의 대담이다. 동방조보(東方早報) : 국민당의 실패는 큰 제목이다. 정권이 총부리에서 나온다면 결국 총부리를 잃은 것이 되는 게 아닌가? 고화 : 그렇다. 동방 여러 나라의 정권 교체는 총부리가 결정했다. 물론 총부리의 뒷면에는 정치 등의 요인이 있기는 하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실패한 원인에 대해 가장 전면적이고 유행하는 답은 : 국민당의 실패는 역시 “역사의 합리적 작용”에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이며 문화, 사상, 그리고 교육 요소 등 여러 방면이 상호 작용하면서 국민당의 대륙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런 설명은 많은 증거들이 실재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군사
4월 13일 오후 1시, 노동자 시위대는 청운로(靑雲路), 동횡빈로(東橫濱路)를 경유해 보산로(寶山路)에 이르렀다. 기세등등한 시위대는 1킬로미터나 이어졌다. 시위대는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보산로 삼덕리(三德里) 부근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이 사격하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군중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현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반시간 후, 총소리가 멈췄다. 군인들은 수많은 노동자를 체포했다. 이것이 ‘보산로 유혈사건’이다. 살계를 펴면서 장개석은 ‘청당’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4월 17일, 장개석은 우파 국민당 중앙위원과 함께 남경(南京)에서 정치회의를 개최하고 ‘청당’을 발표했다. 그리고 비밀 1호 명령을 내려 공산당의 수뇌부 197명을 지명 수배했다. 주요 인물은 첫째 보로딘, 진독수, 다음으로 임조함[(林祖涵), 임백거(林伯渠)], 구추백(瞿秋白), 모택동, 운대영(惲代英), 주은래, 류소기(劉少奇), 장국도(張國燾), 팽배(彭湃), 등영초(鄧颖超), 채화삼(蔡和森), 방지민(方志敏) 등이었다. 공산당 좌파 인사, 예를 들어 심안빙(沈雁
물론 진찬현은 중국에서 열사가 돼 지금까지도 존경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기념하면서 국민당 반동파의 죄행에 대해 증오하는 것 이외에 돌이켜 생각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필 등은 진찬현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왜 그런 독수를 썼을까? 진찬현은 당시 무슨 일을 했을까? 달리 되돌아봐야 할 일은 없는 것일까? 신중국 성립 후, 당시 강서성 남부 지역에서 당 건립과 농민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던 진기함(陳奇涵) 상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진찬현 동지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공성(贛城) 자산계급과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희생됐다. 이것은 분명 영광이다. 그러나 공산당원으로써 얘기하자면 그는 엄중한 결점과 잘못이 있다. 양화, 주단, 포목 점원의 임금 인상과 삭감 실시에 대해 투쟁할 때, 그는 상황을 분석하고 처우에 대해 판별하지도 않은 채 똑같이 대하면서 있어서는 안 될 손실을 보게 만들었다. 당시 양화, 주단 점원의 임금은 금융업 점원에 맞춰 원래 임금의 14배를 갑자기 인상했다. 금융업, 양화, 주단 점주는 자본이 충분하고 점원이 많지 않아 부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목점 점원의
장개석(蔣介石, 1887년~1975년), 이름은 중정(中正), 자는 개석(介石)이다. 유명은 서원(瑞元), 족보 이름은 주태(周泰), 학명은 지청(志清)이다. 본적은 강소(江蘇) 의흥(宜興)이고 절강(浙江)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 근대 중국의 저명한 정치인물이요 군사전문가이다. 역대로 황포군교(黄埔軍校)교장, 국민혁명군(国民革命軍)총사령, 국민정부 주석, 행정원 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위원장, 중화민국 특급상장, 중국국민당 총재, 삼민주의청년단 단장, 제2차 세계대전 동맹국 중국전구 최고통수, 중화민국 총통 등 직을 역임하였다. 장중정은 손중산(孫中山)의 총애를 받아 민국정단에 들어섰고 손중산 별세 후 중국국민당을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국민정부시대에 줄곧 군정 핵심으로 중국의 항일전쟁과 세계대전을 이끌었고 제헌 이후 1대부터 5대까지 중화민국 총통을 27년 동안 역임하였다. 정치방법과 독재정치로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 생애는 북벌(北伐), 훈정(訓政), 국공내전, 항일전쟁, 제헌, 민국정부 대만 이전 및 동서양 냉전을 모두 거쳤다. 중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75년 4월
원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중국인들의 단편적인 몇 가지 관점을 나열해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첫째 의견 : 공산당은 손중산을 추앙할 뿐만 아니라 솔론(Solon) 등 노예주의 계급의 개혁가, 상앙(商鞅) 왕안석(王安石) 등 지주계급 혁명가와 개혁가, 워싱턴 나폴레옹 링컨 등 자산계급 혁명가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실제 평가는 차치하고 그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교과서에서는 그러하다. 그들이 무산계급혁명가들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역사 조건아래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원은 역사유물주의자인 것은 당연하다. 역사유물주의에서 역사 인물을 평가하는데 역사상의 인물들을 선악이라는 추상적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역사 환경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당시 해당 지역의 생산력이 어떠한 수준에 처해 있는가? 사람들의 의식주, 생로병사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어떤 이익집단이 존재했는가? 고찰하는 역사 인물은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가? 그들과 적대적인 집단은 무엇이 있었고 어떠했는가? 피차간 주장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어떤 주장이 생산력을 해방시키는데 이익이 있었고, 진보적
손중산(1866년~1925년), 광동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 취형촌(翠亨村) 사람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제상(帝象)이고 뒤에 문(文), 중산(中山)으로 바꿨다. 자는 재지(載之)이고, 호는 일신(日新), 일선(逸仙)이다. 근대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가로 청소년 시기에 광동(廣東)인민투쟁의 영향을 받았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 사업을 계승했다. 중화민국(中華民國)과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창설자이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제창자이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중화민국 임시대총통(大總統)이 되었다. 저서로 『건국방략建國方略』, 『건국대강建國大綱』, 『삼민주의三民主義』 등이 있고, 사후에 후인들이 『국부전집國父全集』을 여러 차례 출간했다. 1911년 ‘무창기의(武昌起義)’를 기점으로 손중산이 이끄는 신해혁명이 전국에서 폭발하면서 만청(滿淸) 왕조의 마지막 지푸라기를 잘라 버렸다. 이듬해 1월 1일, 손중산은 남경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다고 선언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1913년, 손중산 등 혁명당 당원들은 원세개(袁世凱)를 토벌한다는 명분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2개월도 안 돼
손중산(孫中山, 1866~1925), 이름은 문(文), 자는 재지(載之), 호는 일신(日新), 일선(逸仙)이다. 중국 근대 민족주의혁명의 개척자, 중국 민주혁명의 위대한 선구자, 중화민국과 중국국민당의 창립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창도자로 불린다. 『오권헌법五權憲法』을 창립하였다. 최초로 반제 반봉건의 기치아래 “공화(共和)를 이루어 이천 년의 봉건군주제를 종결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광동성 향산(香山)현(현 중산中山시) 취형촌(翠亨村)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중화민국 임시대총통(1912년 1월 1일 ~ 1912년 4월 1일)이 되었고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별세하였다. 1940년에 ‘중화민국국부’로 존칭되었다. 천지회(天地會), 청대 민간결사 중 하나로 홍문(洪門)이라하기도 한다. 속칭 홍방(洪幇)이다. 천지회 창립 시기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현재까지 정론이 없다. 그 구성원을 보면 최초에는 대부분 농민이거나 파산한 농민이 변한 수공업자, 행상인, 노점상인, 수륙교통을 이어주는 운수노동자, 그리고 기타 고정적인 직업이 없는 강호 유랑자들이었다. 이후 성분이 나날이 복잡하게
오패부(吳佩孚, 1871~1939), 자는 자옥(子玉), 산동 봉래(蓬萊) 사람으로 북양군벌 직계(直系, 직례파直隷派)의 총수다. 젊었을 때 군대에 들어갔으며 뒤에 보정(保定)의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졸업하고 원세개(袁世凱) 부하였던 조곤(曹錕)의 휘하로 들어갔다. 중국정부 성립 후 벌어졌던 군벌들의 혼전 중에 직례파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20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안휘파(安徽派)의 단기서(段棋瑞)에게 승리를 거두고, 1922년 역시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던 봉천파(奉天派) 장작림(張作霖)에게 승리를 거둔다. 뇌물 선거로 조곤을 대총통에 당선시키고 영미(英美)계 군벌인 직례파의 최고 거두가 돼 북경 정계를 지배했다. 1923년 경한선(京漢線)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고(2·7사변), 공산당원 임상겸(林祥謙)을 불태워 죽였다. 이와 같은 잔학성은 군벌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1924년 다시 봉천파와 싸웠으나 풍옥상(馮玉祥)의 배반으로 장작림에게 패배하고 하남(河南), 화북으로 후퇴했다. 1926년 북벌군에 패해 사천성(四川省)으로 퇴각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정계를 떠나 1932년부터는 북경에서 살았
장작림(張作霖, 1873~1928), 요녕성(遼寧省) 사람이다. 마적단 출신으로 러일전쟁 때 장경혜(張景惠) 등과 함께 일본군의 별동대로 비밀리에 활약했고 그 후 동삼성(東三省)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가 순방(巡防)대장이 됐다. 중화민국 수립 후 봉천(奉天, 현 심양瀋陽)에 들어가 1919년경 봉천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으로 동북의 실권을 장악했다. 1920년 화북에서 직례파(直隷派)와 안휘파(安徽派)의 군벌전쟁에서 직례파를 지지하고 중앙정계로 진출해 열하(熱河), 차하르(察哈爾) 등을 세력범위에 넣은 뒤 직례파의 오패부(吳佩孚)와 화북 쟁탈전을 여러 차례 벌여 강소(江蘇)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때 형세가 불리하자 북동으로 후퇴한 다음, 1926년 직례파 군벌과 합세해 다시 북경으로 진출, 혁명군의 북벌을 저지했다. 1927년 열강의 묵인 하에 북경의 공사관 구역으로 군사를 투입하고 소련 대사관 수사 등 탄압을 가하여 이대교(李大釗) 등 20명을 처형했다. 그 해 6월 대원수라 칭하고 일본을 배경으로 북경정부를 장악했으나 북벌군에게 패배해 북경에서 철수 퇴각하던 중 1928년 6월 그가 탄 열차가 봉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폭파돼 사망했다. 장작림의 세력
새금화(賽金花)는 청말민초(淸末民初)의 명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부옥련(傅鈺蓮)이라 하기도 하고 조채운(趙彩雲)이라 하기도 한다. 강소(江蘇) 염성(鹽城)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안휘(安徽) 이현(黟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동치7년(1887)에 일찍이 장원급제했던 홍균(洪鈞)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첩으로 삼았다. 그때 홍균의 나이는 48세였고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얼마 후에 홍균이 주 러시아 공사 및 유럽 각국의 공사로 발령되자 홍균의 부인이 사교장에 다니기 싫어해 그녀를 대신 동반하도록 했다. 홍균이 죽은 후에 상해로 가서 다시 기녀가 됐다. 이름을 조몽란(曹夢蘭)으로 개명했다가 뒤에 천진(天津)으로 가 또다시 새금화(賽金花)로 바꿨다. 새금화는 청나라 말기 여러 명기 중 가장 전기적인 인물이다. 시류에 부침한 기구한 운명, 일생 동안 각양각색의 호둣속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경국지색에 대해서 ; 호객을 하던 기녀들의 배에서 일약 ‘공사부인(公使夫人)’이 돼 조정명관 홍장원을 따라 유럽을 방문했던 기이한 경력에 대해서 ; 경자사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