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진실을 추적하면서 절감한 사실은 4‧3의 진실규명은 중앙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중앙의 정치지형이 진보적인 판세냐, 아니면 보수적인 흐름을 타느냐에 따라서 4‧3 진실규명의 역사도 명암을 달리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바람, 1988년부터 시작된 국회 광주 청문회 등은 4‧3 진실찾기를 촉구하는 강력한 촉매가 되었다. 1988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도 이듬해 4월 총선 결과 ‘여소 야대’ 국회로 바뀌자 동력을 잃고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판도를 일순간에 바꿔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단행된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이었다. 새로 탄생된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하는 ‘공룡’으로 변했다. 국민들이 투표로 정해준 정치 구도를 인위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이로 인해 4‧3 진실찾기도 시련을 맞게 됐다. 공안정국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경찰, 4‧3추모제 봉쇄하고 400명 연행 공안정국은 19
1980년대 말 4‧3 취재 초기에 가장 예민하면서도 어렵게 느껴졌던 것이 ‘4‧3과 남로당과의 관계’였다. 내 스스로도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남로당’하면 왠지 부정적이고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4‧3과 남로당 관계를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 등 객관적인 학술자료가 있지만, 4‧3취재반 출범 초기에는 ‘남로당은 악’으로 대변되는 관변자료들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4‧3 발발과 남로당은 밀접한 관계였고, 피할 수 없는 테마였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접한 관변자료에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북한, 또는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4‧3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못 박아 놓고 있었다. 1980년대 말까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그런 표현이 있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글도 듬성듬성 보였다. 이 문제는 너무도 예민한 사안이었기에 처음에는 신문 연재물 제목도 ‘지령설’과 &lsq
1947년 3월 10일부터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나는 이 총파업 관련 자료를 취재하면서 그 규모와 참여 폭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주도청, 법원, 검찰 등 대부분의 관공서를 포함하여 166개 사업장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학생들도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상점은 철시되었다.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관 66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제주신보사에서는 3‧1사건 희생자 유족 조의금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신문사는 사고(社告)를 통해 “희생자들은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도 쓰러졌다”고 표현했다. “경찰서를 습격하려 해서 불가피 발포했다”는 경찰의 성명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글귀였다. ▲ 제주신보 1947년 3월 10일자에 실린 조의금 모금 사고 “좌우 공히 참가, 이념을 뛰어넘은 총파업” 당시 조선통신사가 발간한 『조선연감』에는 이 상황을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세계사에서도 매우 드문 민관 총파업’이라고 평가했다. 지역민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어 부상을 입힌 사건을 좌익진영에서 역이용, 기마경찰대가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고 흑색 선전해 멋모르는 1만여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해서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 이 글은 1982년 판 『제주도지』와 1990년 판 『제주경찰사』 등 공적 기록물에 기술된 ‘1947년 3‧1발포사건의 진상’이다. 14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건의 진상은 과연 그랬을까? 이 발포사건은 제주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혹자는 이 사건은 4‧3으로 가는 도화선, 즉 불씨가 되었다고 했다. ▲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조준 사격하는 응원경찰 <강요배 그림> 안개 속에 가려진 3‧1발포 진상 찾아 나섰다 연재 순서에 따라 1991년부터 이 사건에 대한 심층 취재에 나선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때까지도 이 사건은 뿌연 안개 속에 가려 있었다. 당시 미군정 정보보고서, 중앙지와 지방지를 포함한 신문기사, 관변자료 등을 입수해 분석했다. 또 사건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들을 찾아 나섰다. 행운이랄까, 수소문 끝에 발포 현장
1989년 4월부터 『제주신문』에 매주 2회씩 「4‧3의 증언」이 연재되고, 덩달아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까지 발표되자 4‧3에 대한 제주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 발표 내용도 기존 자료의 왜곡사례를 지적하는 수준을 뛰어 넘어 미군정과 경찰의 조작사실까지 들추어내자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였다. 공안당국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제동을 걸고 싶었지만 연재되는 내용들마다 신뢰성 높은 근거가 제시되는 등 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월간지 『사회와 사상』에 연재물 그대로 게재 그 무렵 도서출판 ‘한길사’ 김언호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길사는 오랫동안 금기시돼 왔던 해방 직후의 한국현대사 관련 서적을 잇달아 출간함으로써 출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김 대표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잘 읽히는 도서를 만드는 출판사 사장으로 유명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 6권)도 그의 기획 작품이었다. 김 대표는 나에게 「4
미군정은 1948년 5‧10선거를 앞두고 딘 군정장관 주재로 제주에서 열린 ‘5‧5 최고 수뇌회의’에서 강경진압 방침을 확정했다. 그동안 온건정책을 폈던 김익렬 9연대장을 해임하고,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그리고 미군과 경비대, 경찰, 향보단까지 총동원하여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독려했다. 5‧10선거를 앞두고 이를 반대하는 시위는 비단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요동쳤다. 딘 군정장관은 남한 땅 1만3800개소의 선거사무소를 3만5000명의 경찰력만으로는 도저히 지켜낼 수 없다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해 4월 중순 민간인들을 동원한 향보단(나중에 ‘민보단’으로 변신)을 조직해 경찰을 지원하도록 했다. 5‧10선거 반대운동은 당시 좌파뿐만 아니라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김구 계열의 우파와 김규식 계열의 중도파들도 가세하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5‧10선거가 한반도를 영구히 두 동강내는 단선‧단정 획책이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특히 제주도 사태를 매우 중시했다. 4‧3 무
1989년 8월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을 들고 신문사에 돌아오자 편집국이 갑자기 들뜬 분위기가 됐다. 원고를 전면 검토한 송상일 편집국장은 4‧3 초기 미군정의 토벌정책과 군‧경의 대응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편집회의에서 취재반의 본 연재를 잠시 중단한 채 김익렬 유고를 매주 5회씩 연재하기로 결정했다. 1989년 8월 15일 『제주신문』에 「유언-4‧3의 진실」이란 이름으로 첫 회가 발표된 데 이어 그해 9월 23일까지 모두 26회가 연재됐다. ▲ [제주신문] 1989년 8월 15일자에 실린 김익렬 유고 제1회. 유족들과의 약속대로 친필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다만 유족의 요구에 따라 조 아무개와 박 아무개 등 특정인을 심하게 힐난하는 두 문장을 뺐고, 한자를 한글 표기로 맞춤법에 맞게 고치는 등 기초 교정만 했다. 노인의 육필이라서 문장 하나가 200자 원고지 서너 장을 훌쩍 넘긴 후에야 비로소 마침표가 찍힐 정도로 장문이 많았다. 송 편집국장은 그 긴 문장을 일일이 잘라 단문으로 만드는 등 손수 수정할 정도로 적극성을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유고 연재에
다시 4월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4‧3 발발 초기인 1948년 5월1일 민가 10여 채가 불타면서 시작된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 하지만 그날의 피해규모는 미미한 것이었다. 4‧3의 진행과정을 볼 때, 큰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주목 받는 사건이 된 것은 그 속에 숨겨진 비밀 때문이다. 의문투성이 미군 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 4‧3취재반이 오라리 방화사건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무성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in Korea : Cheju-do)’ 때문이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이 영화는 미군이 촬영한 유일한 4‧3 기록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 무대
다시 4월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여 경찰력과 서북청년회(서청) 단원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1948년 4월 5일 설치된 ‘제주비상경비사령부’도 경찰 조직이다. 그해 2월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나자 전국적으로 요동쳤다. 2월 26일 좌파세력에 의해 전라북도 경찰지서 26개소가 일시에 습격을 당했다. 쌍방 사망자는 25명에 이르렀다. 3월 1일에는 전라남도 경찰지서 10개소가 피습됐고, 16명이 사망했다. 이런 경찰관서 습격사건은 경상도에도 번졌다. 따라서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대 350명에 의해 경찰지서 12개소가 피습(쌍방 14명 사망)당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역사적인 4‧3연구소 출범 1989년 5월 10일 제주4‧3연구소가 출범했다. 연구소 개소식은 제주시 용담동 쌀가게 2층 사무실에서 조촐하게 진행됐다. 4‧3연구소는 1987년 서울에서 결성된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 팀과 1988년부터 제주도에서 은밀하게 4‧3 체험자들을 대상으로 증언 채록을 벌이던 현지 팀과의 결합으로 태동됐다. 제사협은 출범 직후인 1988년 4월 3일 서울에서 4‧3 학술대회를 가진 이래, 이런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연구소 설립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연구소 설립에 필요한 자금도, 연구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료도, 연구소를 맡아 일할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연구소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해를 넘기고 1989년에 접어들었다. 신문 연재를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41주년이 되는 4월 3일엔 어떤 형태든 기획기사를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재를 4‧3의 어느 시기부터 시작할 것인가? 연재의 제목은? 논란을 빚는 용어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입수된 자료들의 진위는? 체험자들의 증언을 어디까지 믿고 인용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신문 4‧3취재반을 주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안당국은 “사회 안정을 해치는 일”이라며 여러 경로를 통해 연재를 막으려고 압박해 왔다. 취재반에게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불이익 수준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전 제주의 한 언론사의 용기와 취재진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1988년 첫 4‧3 학술발표회 제주신문 4‧3취재반이 결성된 1988년은 4‧3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런 시대적 상징성을 반영하듯 이곳저곳에서 금기의 벽을 뚫어보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5‧16쿠데타 이후 4‧3에 관련된 말조차 꺼낼 수 없었고, 시나 소설로 표현해도 범죄가 되던 세상에서 금줄을 걷어내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해 4월 3일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동시에 공개적인 4‧3 학술행사가 열렸다. 4‧3에 관한 첫 학술발표회였다. 서울 행사는 오후 2시 국회 앞 여의도 여성백인회관(가정법률상담소 소속)에서 열렸다. 서울에 사는 제주 출신 지식인들로 창립된 &ls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