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순제(順帝, 1320~1370), 원 명종(明宗)의 아들이다. 재위기간 동안 황공 관리들의 탐욕이 극에 달했고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아 살아갈 수 없게 된 백성이 끊임없이 봉기를 일으켰다. 지정(至正) 20년(1369)에 명나라 군대가 대도(大都, 북경)를 함락시키자 북방 응창(應昌)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2년 후에 죽었다. 중국 고대 황제들은 교대로 교차하였다. 현명한 군주도 있었고 포악한 군주도 있었으며 황당하기 그지없는 황제도 있었다. 각양각색, 별의별 황제가 다 있었다. 원 왕조 말기에 공예 제작에 심취한 황제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원 순제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 妥懽帖睦爾)다. 원 순제는 명종의 장자로 어릴 적부터 교묘한 구상을 많이 하였다. 자신이 궁루(宮漏, 고대 시간을 제는 의기의 일종)를 설계해 제작하기도 하였다. 새로우면서도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궁루는 높이 약 6,7척, 길이는 높이의 절반, 여러 누호(漏壺)는 특별히 제작된 목궤에 숨겨져 있었다. 목궤에는 사방에 삼성전을 설치하였다. 목궤 허리에는 맵시 있는 자태의 옥녀를 새겼다. 손에는 시각을 알리는 산가지가 들려 있었고. 시간에 따라 움직이면서
마르코 폴로(Marco Polo, 馬可波羅, 1254~1324), 이탈리아 베니스 상인, 여행가이다. 1275년경에 이란을 거쳐 상도(上都)에 도착해 원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고 후한 대우를 받았다. 중국에 머무르는 10여 년 동안 중국 대부분을 여행하고 1292년에 유럽으로 돌아갔다. 『세계 경이(驚異)의 서(통칭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를 구술해 저술하고 동방의 풍족함과 문물의 창성함을 칭찬하였다. 이로써 동서양 교류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계기를 만들게 됐다고 평가받는다. 『동방견문록』이라 통칭되는 『마르코 폴로 여행기』는 서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세계 제일기서’라 칭송받았다. 유럽 최초의 동양을 기록한 역사지리 자료서이기 때문이다. 원 왕조 초기의 역사서로 화려한 문체를 사용해 동방의 문명을 소개함으로써 유럽인에게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렸다. 이 여행기는 베니스를 거쳐 유럽 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면서 각종 문자로 출판되었다. 이로써 마르코 폴로는 명성을 얻게 된다. 물론 지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마르코 폴로는 여행기에서 자신이 중국에 있을 때 네
유병충(劉秉忠, 1216~1274), 원래 이름은 간(侃), 자는 중회(仲晦), 형주(邢州, 현 하북 형태〔邢台〕) 사람이다. 인명사전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자호는 장춘산인(藏春散人)이다. 승려 때의 법명은 자총(子聰)이다. 박학다식하였고 특히 『주역』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정통하였다. 처음에 요(遼)나라에서 형태절도사부령사(邢台節度使府令史)를 지냈는데 얼마 뒤 사직하고 무안산(武安山)에 숨었다가 금(金)나라에 망하자 승려가 되었다. 내마진후(乃馬眞後) 원년(1240)에 쿠빌라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불러 고문으로 삼았다. 전한 초기 육가(陸賈)가 말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우면서 천하의 대계를 진언하였다. 태종11년(1239) 해운선사(海雲禪師)의 추천으로 쿠빌라이의 막하에 들어가 원나라 제도를 개혁하는 데 공헌하였다. 헌종(憲宗) 때 대리(大理)를 멸망시켰다. 항상 천지는 생명을 키우기를 좋아한다는 말로 황제를 격려해 많은 생명을 구해내었다. 즉위하자 옛 제도와 전범을 모아 조목별로 이해하도록 하였다. 중통(中統) 5년(1264)에 환속해 이름을
아릭부케(Ariq Böke, 阿里不哥, ?~1266),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Khubilai, 忽必烈)의 동생, 툴루이의 일곱째아들이다. 그의 형 몽케(4대, 헌종憲宗)가 죽은 후 카라코룸에서 먼저 비밀리에 즉위하면 쿠빌라이가 개평(開平)에서 즉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스스로 칸의 자리에 올랐다. 쿠빌라이와 막북에서 전쟁을 치렀으나 이듬해 대패하였다. 서쪽으로 옮겨 차가타이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실패한 후 지원(至元) 원년(1264) 7월에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했으며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개경(開慶) 원년(1259), 원 헌종(憲宗) 몽케가 남하해 송(宋)나라를 토벌하는 전쟁 중에 합주(合州)에서 죽는다. 생전에 저군(儲君, 황태자)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칸의 자리를 놓고 저군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시 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자는 몽케의 아들들 이외에 몽케의 동생들이 있었다. 쿠빌라이와 아릭부케〔아리크부카〕가 그들이다. 쿠빌라이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이 있었고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워 송나라 정벌에 앞장서고 있던 원수였다. 아릭부케는 카라코룸에 있었다. 황후와
원(元) 태종(1186~1241) 오고타이(Ogotai, 우구데이〔Ögedei〕, 窩濶台), 칭기즈칸의 셋째아들이다. 내성적이었고 깊은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포용력으로 처세하면서 부친에 의해 칸(Khan)에 선택되었다. 칸에 앉은 후 야율초재(耶律楚材)를 중용하고 금(金)을 멸망시켰다. 1236년에 바투(Batu, 拔都)를 파견해 서정하면서 세력이 유럽 중부에까지 이르렀다. 경제 정책을 중시해 ‘한족 법제’를 받아들이면서 몽골 제국을 더욱 강성하고 부강하게 만들었다. 원 태조 테무친은 몽골 보르지긴(Borjigin, 孛兒只斤) 귀족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곤궁한 삶을 살았으나 발분해 여러 영웅을 결집하고 권토중래하였다. 1200년에서 1206년까지 메르키트(Merkid), 타타르(Tatar), 케레이트(Kereit), 나이만(Naiman)을 차례로 정복하고 몽골 주요 부족을 통일한다. 개희(開禧) 2년 몽골 각 부족은 오논(Onon) 강변에서 ‘쿠릴타이(Khuriltai)’를 개최해 대칸에 오르고 칭기즈칸(成吉思汗,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이라 칭하면서 몽골 칸의
몽골(Mongolia)은 중국이 아니다. 현 중국 내에 몽골족이 소수민족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지만 역시 몽골은 독립국이며 세계사에 동방의 금자탑을 세웠던 위대한 민족의 나라다. 그렇기에 칭기즈칸을 여기 ‘중국, 중국인’에 게재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역사의 중심인물들을 여기에서 논의하는 것은 그들이 ‘원(元)’ 왕조를 세웠고 중국역사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사에서 ‘원’이 없으면 단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에 소개하는 인물들은 몽골의 위대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칭기즈칸(GenghisKhan, 成吉思汗, 1161~1227)은 몽골의 보르지기드(Borjigid, 孛兒只斤) 씨에 속한 예수게이 바아투르(Yesügei Baγatur, 也速該)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몽골(蒙古)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원(元)의 시조(재위 1206~1227)로 추숭되었다. 이름은 테무친(Temüjin, 鐵木眞), 칭기즈칸은 호이다. 1188년 몽골의 부족장이 돼 몽골
모택동(毛澤東)이 세상과 하직할 때 등소평(鄧小平)은 신체의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활동공간이 자신의 집으로 한정돼 있었다. 대문을 벗어날 수 없는 자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친히 중공중앙에 설치된 조문식장에 가 자신이 존경하였던 위대한 영도자이며 지도자에게 무한한 슬픔을 전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집안에 모택동을 애도하는 빈소를 마련하였다. 조화를 헌상하면서 모택동에 대한 자신의 참된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모택동에 대해 등소평은 시종일관 존경의 태도를 보였다. 비록 모택동과 등소평 사이에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에 있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치가 사이에 항상 존재해왔던 현상이 아닌가. 등소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택동을 위대한 영도자요 지도자로 보았다. 1980년 10월 25일, 등소평은 『건국 이래 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关于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 초안을 작성하고, 중앙 책임자들과 담화하면서 모택
강청은 늘 다른 사람의 말을 잘랐다. 마침 장춘교가 북청(北淸)대학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녀가 끼어들었다. “현재 북청대학에서 공작조와 제대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조반파(造反派, 반란을 획책하는 부류, 혁명파〔革命派〕의 반대 개념) 제2의 인물이 호창성(呼昌盛)이고, 무극근(武克勤)의 태도도 애매합니다.” 모택동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북경시위(北京市委)를 세웠어. 이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을게야.” 강생이 안경을 올리면서 말했다. “무극근은 그저 관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석께서 새로운 전략부서를 만들기만 하면 그녀는 곧바로 따라올 것입니다.” 모택동은 또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처음 대자보를 붙인 모든 혁명파(革命派)는 지금부터 어느 정도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호하도록 해.” 강청은 검은 테 안경 너머로 눈을 깜박이며 좌우의 동료들을 보면서 말했다. “주석께서 내리신 이번 지시는, 우리가 반드시 그대로 처리해야 해.” 진백달은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강생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장춘교, 요문원은 더더욱 연신
모택동이 그 회의장에 들어설 때 표면적으로는 영수로 대접했지만 유소기, 등소평과 그 그룹의 마음속에는 이미 ‘경이원지(敬而遠之)’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들은 의기투합해 있었다. 순서대로 하나씩 진행하고 있었다. 모택동이 들어오자 모두 곤란해 하는 게 분명하였다. 태도가 부자연스러웠다. 자신들을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자신들을 불신임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자신들을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즐겁게 놀고 있던 아이들이 집안어른을 갑자기 만난 듯한 태도였다. 어쩔 수 없이 존중은 하지만 뼈 속 깊이에서는 눈이 빠지게 자신들을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모택동은 당시 유소기 일당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읽었다. 사나운 얼굴빛과 목소리로 발언하는 도중, 내내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을 겉으로만 존중하고 있었다. 유소기는 내내 연필을 손등에 올려놓고 돌리고 있었다. 눈빛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면만 응시하였다. 등소평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말을 듣는 듯이 보였다. 때때로 고개를 숙여 손에 들고 있던 자료에 몇 글자 적기도 했지만 사실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준이회의(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중요한 편지가 한 장 있다. ‘문혁’ 초기 모택동(毛澤東)이 강청(江靑)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다. 1966년 7월 8일, 모택동이 소산(韶山) 적수동(滴水洞)에서 작성해 강청에게 보냈다. 모택동은 이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먼저 주은래(周恩來), 왕임중(王任重) 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주은래로 하여금 상해에 있는 강청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강청이 보고 난 후 주은래에게 또 그 편지를 대련(大連)에 있던 임표(林彪)에게 보내어 읽도록 하였다. 모택동의 일생 중 개인적으로 쓴 편지는 많지만 그렇게 길게 쓴 것은 없다. 그 편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감정을 써서 보낸 것이라 보기 어렵다. 모택동의 정견을 표현한 특수한 방법인 셈이다. 당시 중국 정치 형세에 대한 고민과 예측의 결과물이었다. 모택동은 그 편지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그리고 자기 내면의 남모르는 근심 등을 모두 써내려갔다. 모택동이 그 편지를 쓴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 이미 형성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사고의 방향을 강청에게 얘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로 &lsquo
비서 중 한 명이 주은래의 업무 스타일을 토로한 적이 있다. 주은래가 업무가 과중해 이틀씩이나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서 그 비서가 권했다. “총리님, 최고 지도자 중에 총리님이 가장 바쁘십니다. 이런 서류는 등소평 동지에게 보이시는 게…….” 주은래는 태양혈 위에 청량유를 바르고 계속 서류를 보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난 총리야. 이런 구체적인 일들은 내가 좀 더 처리해야 해. 등소평이는 더 큰 일을 처리해야지. 정책을 결정하는 일을 하여야 하는 거야.” 주은래가 위의 말을 한 시기는 신중국이 들어선 후 환란을 겪던 해였다. 그때도 주은래는 등소평이 “큰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통솔 능력이 있는 인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주은래가 처리하였던 일 중 어떤 일은 부장, 국장조차 거들떠 볼 가치도 없는 자질구레한 일도 있었다. 주은래는 관여하기를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세밀하였고 성실하였다. 모택동이 그런 사실을 듣고서는 많은 사람 앞에서 감격해하며 말한 적이 있었다. &ldquo
처음은 잡담 수준이었는데 점차 광범위한 내용까지 얘기하게 되었다. 주은래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고민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박일파 동지, 당신이 진기로예(晉冀魯豫, 산시성,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에서 유백승(劉伯承), 등소평과 함께 여러 해를 보냈는데, 그 두 명의 업무 처리능력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박일파가 말했다. “업무를 하는데 둘의 호흡이 참 잘 맞습디다. 확실히 한 마음 한 뜻이요, 융합이 잘 되었죠.” 주은래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내가 묻는 것은 그들이 협력했느냐가 아니고, 그들의 업무 방법이 어땠냐는 것이요?” 박일파는 농담 반 진담 반, 유머러스하게 스마트하게 반문하였다. “총리님, 당신은 경험이 많으신 지도자잖소. 그리고 그들과 알고 지낸지가 오래되었고. 총리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좋지.” 주은래는 시원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또 문제를 그대로 내게 되돌려 보내는구먼.” 박일파도 웃었다. “방울을 풀려면 방울을 단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