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했다. [사진=연합뉴스] 세계적인 역사학자 배리 스트라우스(Barry Strauss)는 미 육군 계간지 2005년 여름호에 ‘한국의 전설적인 장군(Korea's Legendary Admiral)’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기사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사람(풍신수길)은 역사에 자기 자리를 새겨넣었다. 다른 한 사람(이순신)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수군 장수였다. 그는 시련 많은 경력을 느리게 통과해서, 조선의 한 지방 해안을 담당하는 단순한 사령관이 됐다. 한 사람은 ‘오락관저(Mansion of Pleasure)’라고 불리는 자신의 호화로운 관저에서 일본의 국왕을 접대했다. 다른 한 사람은 군대의 밥을 짓는 세부기술을 손봤다. 한 사람은 거대한 육해군 침략을 시작했다. 다른 한 사람은 전쟁이 시작됐을 때 수하에 단 24척의 전선이 있었다. 한 사람은 신 같은 초연함으로 뒤에서 전략을 계획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어깨에 적탄을 맞을 만큼 부하들의 위험을 충분히 함께 나눴다. 하지만 초라한 지휘관은 섭정을 이겼고, 쉽게 따돌렸으
▲ 이순신은 전사한 38명의 이름을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모두 장계에 기록했다. 이순신이 직접 해전에 참여해 출동한 것은 16회였습니다. 한번 출동해서 한번만 전투를 한 적도 있고, 두번 이상의 전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23전 23승’을 했는지, 아니면 ‘30전 30승’을 했는지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쨌든 이순신은 임진왜란 동안 열여섯번 출동해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패배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도, 적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반면 원균이 당한 단 한번의 패배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칠천량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의 전부였던 256척의 군함이 침몰하고, 34척이 유실된 것입니다.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기간에 세운 전공은 8척의 일본 배를 불태운 것뿐이었습니다. 굳이 이순신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업적이었습니다. 이순신의 심신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든 백의종군 이전의 기록을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이순신은 임진년 1592년 4월부터 삼도수군 통제사의 직책을 잃
▲ 임진왜란 발발 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던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서거했다. [사진=연합뉴스] 왜군은 남해안의 한복판인 순천에서 오른쪽 끝인 울산까지 줄줄이 왜성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왜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해안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순천왜성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금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선 수군 때문에 남해바다 서쪽에는 왜군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은 여전히 왜군의 영향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왜군은 남해 섬들의 윗길과 아랫길로 퇴군하려고 했습니다. 노량해전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양력으로는 12월 16일이었습니다. 왜군은 겨울이 다가올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의 겨울은 일본의 겨울보다 훨씬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왜군은 관음포만 벗어나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7년 동안이나 백성을 유린한 왜군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섬멸돼야 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있었고 또다시 정유재란이 있었으니, 그들이 무사히 돌아간다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새벽에 벌어진 전투 도중, 한 무리의 왜군 선단이 관
▲ 남해 '이락사(李落祠)'는 충무공 이순신 서거를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다. [사진=연합뉴스] 「삼국지연의」에는 서촉을 정벌하던 방통이 적장 장임의 꾀에 넘어가 계곡에서 포위돼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곡에 들어선 방통은 ‘낙봉파(落鳳坡)’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그 순간, ‘아뿔싸! 내가 여기서 꾐에 빠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의 호는 봉추(鳳雛)였고, 낙봉파의 낙자는 떨어질 낙(落)자였기 때문입니다. 봉추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지명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겁니다. 이순신이 서거하신 관음포가 보이는 뒷산에 그분을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의 이름은 ‘이락사(李落祠)’입니다. 이충무공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합쳐서 만든 이름입니다. 이순신이라는 큰 별이 떨어진 곳임을 말없이 알려줍니다. 사당 옆길로 쭉 올라가면 첨망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 멀지도 높지도 않습니다. 조선시대 누각은 아니지만 크고 아름답습니다. 첨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들도 절경이죠. 이순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치밀한 전술ㆍ전략
▲ 물길이 좁고 수심이 얕은 관음포의 지형은 전투에서 변수를 만들어냈다. [사진=연합뉴스] 만약 임진왜란이 서양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승전국은 패전한 침략국에 거액의 배상을 요구했을 겁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연합국은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그 액수와 조건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어쨌든 무장강도가 내 집에 침입해서 재산을 갈취한 뒤 ‘이제 돌아갈 테니 더이상 싸우지 말자’고 하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도 결사반대했습니다. 백성을 짓밟은 왜군을 결코 보내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진린도 이순신의 호소에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명군은 왜군의 뇌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이순신의 수군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이순신의 절절한 호소에 감화된 것입니다. 그래도 일기 내용처럼 조선 수군이 포획한 왜선과 군량을 명군이 빼앗아가는 일이 드물지 않게 벌어졌습니다.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답답하고 비통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지막으로 출전(出戰)했습니다. 관음
▲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숱한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자,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전투다. [사진=연합뉴스] 어제 복병장(伏兵將)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趙孝悅)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무술년 10월 17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포함된 「난중일기」가 아니라 후손들이 보관해온 일기는 무술년 10월 12일에 끝납니다. 그 마지막 일기는 단 한 줄이었습니다. 나로도에 이르렀다. -무술년 10월 12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 마지막 일기를 남긴 다음날인 10월 18일,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노량으로 출진합니다. 19일 새벽부터 벌어진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숱한 전투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노량해전에서 이충무공이 순국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일기는 돌아가시기 48시간도 되기 전에 쓰였을 것입니다.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 원균이 부임한 후 계책을 도모하던 제승당은 애첩과의 밀회 장소로 전락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이 주둔하던 당시에는 제승당(制勝堂)이 아니라 운주당(運籌堂)이었습니다. 운주란 ‘계책을 운용하다’는 뜻입니다. 작전 본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순신은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운주당에 와서 의견을 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후엔 애첩과 밀회를 나누는 장소가 됐습니다. 회의와 협의가 중단됐고, 외부와의 교류와 내부 소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궤멸당하고, 운주당도 불에 전소돼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흐른 1738년(영조 15년)에야,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을 중건하고 제승당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처음 원균이 한산도에 부임하고 나서 이순신이 시행하던 규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을 보좌하던 장수와 사졸 등을 다 쫓아버렸다. 특히 이영남(李英男)은 자신이 패전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더욱 미워했다. … 원균은 사랑하는 첩과 운주당에
▲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의 유적계에 당한 왜군은 59척의 배가 침몰하고 6000명이 넘게 전사했다. [사진=연합뉴스]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포위돼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부터 왜선은 조선 수군의 함포에 두들겨 맞아 하나둘씩 박살났습니다. 때마침 해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 쪽에 유리하게 바뀐 데다, 학익진의 날개에 갇혀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서구의 모든 육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칸나에전투가 1800여년 후에 한반도 남쪽 바다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한산도대첩을 외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친다는 분들도
▲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는 학인진과 유사한 포위섬멸전을 사용해 대승했다. [사진=연합뉴스] 인터넷에 한산도대첩을 검색하면 진주대첩ㆍ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아울러 국제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전투라는 표현도 종종 등장합니다. 이순신의 학익진과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The Battle of Cannae) 전세계의 해군사관학교에서 한산도해전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거의 모든 사관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투가 있습니다.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군이 로마군과 맞붙었던 ‘칸나에 전투’입니다. 전투에서 압승하기 위해선 포위섬멸전이 가장 좋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해도 적군의 주력과 지휘관들을 놓치면, 언제든지 전열을 재정비해서 반격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해 전멸시키는 게 가장 유효한 전술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적을 포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속도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 이후로 기병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한신의 군대가 항우의 군대를 몇겹으로 포위해서 섬멸했던 초한전의 마지막 전투는 동양의 대표적인 포위
▲ 이순신은 철저한 정보 수집으로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전투 방식을 사용했다. [사진=연합뉴스] 배설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명령에 불복종해 최소한의 수군 병력을 지켜냈고, 한산도 통제영에 있던 막대한 군사물자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막아냈습니다. 전란 직후 처형됐지만 6년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돼 사면ㆍ복권됐습니다. 나름대로 억울했고 군인으로서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한산도대첩 : 세계 해전사(史)의 별이 되다 앞서 명량해전을 말할 때, 이순신의 전투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전투 방식은 철저한 정보 수집을 통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격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 육군은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순신의 수군은 피해조차 거의 없는 대승을 이어갔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일본은 원래 해전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수군의 주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수송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수군의
▲ 배설은 열두척의 배를 빼돌리고 한산도에 불을 놓았다. 이순신은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 8월 15일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됐습니다. 앞서 말했듯 통일된 지휘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로 내정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기 한달 전인 1593년 7월 15일, 이순신은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습니다. 한산도 통제영의 건축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이순신은 한산도 곳곳으로 진을 옮기며 왜군을 공격했습니다. 전라도로 가는 바닷길을 틀어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593년 3월 8일, “한산도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처음으로 「난중일기」에 등장합니다. 이때는 한산도에 시험적인 진을 설치해 활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개월 뒤인 6월 21일 한산도 망항포로 진을 옮겼습니다. 7월 10일에는 “한산도 끝에 있는 세포로 진을 옮겼다”고 일기에 나옵니다. 7월 14일엔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깁니다. 한산도에 지은 정식 통제영으로 진을 옮긴 것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에서 해임되고
▲ 한산도는 왜적이 도망가도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곳이 없는 섬이었다. [사진=연합뉴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할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청구영언」 영조 때 김천택이 유명한 글을 모은 문집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여섯척과 중선 스물네척, 소선 열세척 모두 일흔세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히게 될 것 같아 싸움하기 곤란했습니다.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해지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해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죽을 것이므로,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먼저 나온 적을 뒤쫓아 엄습할 기세를 보이니, 적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나왔습니다. 그러자 왜적도 따라 나왔습니다. 그때 장수들에게 명령해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시에 진격해 각각 지자ㆍ현자ㆍ승자 등의 총통을 쏘아 먼저 두세척을 깨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