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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회] 향현사·상현사·영혜사 ...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제주성지와 오현단을 다시 찾았다. 이번 방문은 향현사, 상현사, 영혜사 사당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여러 문헌을 대할 때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소개되고 있어, 상현사도 있고 영혜사도 있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상현사와 영혜사는 시대에 따라 달리 이름을 붙여 목사들을 모셔 제향하던 중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향현사와 함께 훼철되었다.

 

이후 향현사는 2007년 지금의 위치에 복원되어, 오현단 터의 주인이기도 한 영곡 고득종과 장수당 건의를 한 명도암 김진용을 모시고 있다.

 

복원된 향현사(鄕賢祠)

 

향현사를 세우기 전 이곳 오현단에는 조선시대 이름난 학자나 충신의 공적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들어서 있었다. 이후에 설치된 향현사는 조선시대 이름난 학자나 충신 등의 공적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다.

 

그러나 1841년(헌종 7년) 이원조 목사가 주목(州牧)을 지낸 사람은 향현이라 칭할 수 없다고 하여, 상현(象賢)으로 개명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장인식 목사가 다시 영혜(永惠)라 개명하고, 김정희가 제액(題額)하였다. 다음은 제주성지 내 복원된 향현사 앞에 있는 안내판의 내용이다.

 

향현사: 향현사는 1843년(헌종 9년) 제주목사 이원조가 조선조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靈谷) 고득종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831년(순조 31년) 제주목사 이예연이 김진용을 영혜사(永惠祠)에 배향하였다가, 1849년(헌종 15년)에 제주목사 장인식이 김진용을 향현사로 옮겨 (고득종과 함께) 병향(竝享)하였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이 서원·사우(書院·祠宇) 대동철폐령에 의하여 철사된 후 제주 유생들이 고득종과 김진용의 덕행과 공적이 후세에 깊이 묻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오현단 내에 향현사 유허비를 세우고 제향하였다.

 

상현사와 영혜사에 관하여

 

영혜사는 이인 목사에 의해 귤림서원에 모셔졌던 청백리 이약동 목사를 1675년(숙종 1년) 왕명에 의해 절위되어 서원의 동쪽 담장 밖에 집을 지어 모시다가, 1695년(숙종 21년) 이익태 목사에 의해 귤림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당을 짓고 이회 목사와 함께 합향한 것이 시초이다.

 

창건 당시에는 이약동과 이회를 배향하였는데, 1819년(순조 19년) 제주목사 조의진의 유장(儒狀)에 따라 이형상과 김정을, 1831년(순조 31년)에는 제주목사 이예연의 유장에 의해 진사 김진용을 추향하였다. 이후 이예연과 임형수를 추향하기도 하였으나 1871년(고종 8년)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처음에는 현판을 걸지 않고 추향하다가, 1841년(헌종 7년)에 이원조 목사가 상현(象賢)이라 명했다. 그의 탐라록(耽羅錄)의 상현사기(象賢祠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의 귤림서원 곁에 사(祠)가 있는데, 앞뒤로 온 목사로서 선정한 자를 제사 지낸다. 지방 사람에 알려 말하기를, “이평정 약동은 얼음과 황벽나무 껍질을 먹을 정도로 궁벽한 몸가짐을 가져 백성을 잘 어루만졌고, 돌아갈 때는 전복 껍질을 바다에 던지고, 채찍을 걸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채찍도 섬 물건이라 하여 관부에 걸어두고 떠났고, 배안에서 파도가 거칠어 선원인 섬사람이 세수그릇에 준 전복껍질을 가져오자 섬의 것이라 하여 바다에 버리니 풍파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만오(이회)는 처음으로 유교를 일으키고, 장수당(藏修 堂)을 세워 배움을 깨우치니 지금의 서원의 강당이 그것이다. 섬 풍속은 귀신을 숭상하고 명복을 얻고자 부처를 섬기어 귀신 사당과 절간이 온 지역에서 눈에 띄었는데, 병와 이형상이 쓸어 불 질러버려 서야 풍속이 비로소 바르게 되었다.

 

노봉 김정은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삼천재(三泉齋)를 세우고, 온 백성이 일어나 화북포구에 둑을 쌓아 뱃사람들이 입은 공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다. 이 고장 사람 참봉 김진용은 만오(이회) 목사 당시 유주(柳州)의 조덕의 역할을 하여 추가로 받들어 아울러 제를 지내고 있다.

 

내 생각에 이 사현(四賢)은 모두 동향(桐鄕: 선정한 관리를 추모하는 고장)의 사랑이 있어서 마땅히 초향(蕉享)의 배열에 올랐는데, 이 고장 사람이 서열을 연대로 (높이지는) 안 해야 할 게 아닌가.”라고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예” 하였다. 드디어 정리하여 바르게 고쳤다. 나중에 또 말하기를, “주목(州牧)을 향현(鄕賢)으로 부르는 것은 너희는 미안하지 않느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게 존경하게 된 것은 사정이 각각 특이해서이나, 어리석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상현사(象賢祠)라고 편액을 거니, 여러 유생이 내게 그 사실을 적어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옷깃을 여미어 다시 말하기를, “사현(四賢) 중에 영남 출신이 셋이니 고향으로나 혹은 관직으로나 모두 평소 높이 사모하던 바이다.

 

이제 이 주(州)에 와서 외람되게 여러 선배의 뒤를 밟으려니, 총명치 못하고 무능할까 그게 두려우나, 학문을 일으키고 풍속을 바로잡아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공(四公)과 같이 하여야 함을 장차 어찌 사양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정리하면, 이약동·이회·김정·이형상·김진용을 모신 사당 이 귤림서원의 별사(別祠)로서 이름이 없다가, 1841년(헌종 7년) 이 원조 목사에 의해 상현사(象賢祠)라 현액 되었으나, 1848년(현종 14 년) 장인식 목사에 의해 영혜사(永惠祠)로 이름이 바뀌고, 추사 김정희가 제액(題額)하였다.

 

제주 유생들의 진정서에 따라 1831년(순 조 31년) 김진용을 영혜사에 추가로 제향한 뒤 다시 1849년(현종 15 년) 장인식 목사는 이예연 목사를 추향하고, 김진용을 향현사로 옮겨 고득종과 함께 제향하였다. 그 후 임형수를 추향하다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이후 복원되지 않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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