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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일의 '서복이야기'(4) 하나의 나라로 대접 받은 탐라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 어린 ‘서복(徐福)’의 이야기는 여전히 한·중·일 동북아 3국과 제주에서 회자되는 고대사 미스테리다. 사실관계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고, 역사적 진실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분분한 주인공이 바로 서복이다. ‘서복의 이야기’를 독특한 고대사 해석과 제주사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권무일 작가의 눈으로 소개한다. 4편으로 나눠 연속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돌이켜보면 제주사람들은 지금부터 1000년 전 자율권을 고려에 넘겨주고 나라 이름마저 ‘물 건너 고을’이라는 폄하된 의미인 제주(濟州)로 바뀌면서 온갖 착취와 굴욕의 역사를 살았기에 스스로 작아지고, 저 큰 바다를 경영하던 웅지는 어느새 축소지향적인 사고로 굳어졌고, 제주를 그 옛날 탐라시대까지 포함하여 한반도 국가들의 종속변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백제, 신라, 일본 등이 눈을 부릅뜨면 얼른 토산물을 갖다 바치는 그런 존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고대 탐라는 동아시아 해양문화권의 큰 고리로, 하나의 독립변수로 한반도의 국가들이나 중국이나 일본이 감히 하지 못한 항로를 개척하여 황해와 동지나해를 휘젓고 다녔다.

 

 

 

제주도에는 용담동, 광령, 외도동, 곽지, 안덕 등지에 고인돌 즉 지석묘의 유적이 산재해 있고 더러는 고인돌을 깨서 밭담을 두른 경우도 있다. 지석묘는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해안선을 따라, 즉 인도 남부해안, 말레이반도, 중국 절강지역, 일본의 규슈, 그리고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발해만을 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고창 이남의 영산강 유역, 한강 하류와 강화도, 그리고 평양 일원에 고인돌이 밀집되어 있고 영산강 유역에는 1만여 기가 남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바로 바닷사람들이 남긴 유산인 것이다. 특히 중국 절강지역의 지석묘와 탐라의 지석묘는 앞부분의 큰 지석이 거대한 지석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바 이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석기시대부터 탐라와 중국 강남지역 사이에 문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산강 유역의 지석묘군은 신석기시대 이후에 탐라와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그 무거운 돌을 떠서 운반하고 이를 들어 올려 시신을 매장했던 점으로 보아 바닷사람들은 떼를 지어 이동하면서 무역을 했고 그들 중에는 지도자가 있었고 지석묘는 지도자의 무덤이며 그들의 생활이 풍족했으며 잉여생산물을 분배했음을 알 수 있다.

 

탐라는 바닷사람들이 남중국, 말레이, 인도 또는 일본과 한반도로 다니는 길목이었다. 특히 남중국이나 일본 남부에서 한반도로 향하는 배들의 길라잡이를 숙명적으로 도맡았던 사람들이 탐라 사람인 것이다. 고대에, 적어도 삼국시대 말까지 한반도의 뱃사람들은 멀리 동지나해를 건너서 중국까지 가는 일은 상상도 못하였고 중국은 바다를 기피하여 죄 지은 자들 외에는 섬으로 나가지 않았고 일본은 아직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탐라사람들은 축적된 경험과 천문항법을 이용하여 중국 절강지역까지 오갔다. 더욱이 탐라의 배는 평저선으로 바람과 파도로 잘 파선되거나 뒤집혀지지 않았다. 최부가 『표해록』에서 제주 목사가 튼튼한 배를 만들어주어서 배가 침몰되지 않았다고 여러 번 언급한 것을 보면 제주의 배는 탐라국 시대부터 파도에 강한 배였을 것이다. 또한 고려 때 여몽연합군이 일본원정을 감행할 때 900척의 전선 중에 100척을 탐라에서 만들었던 점으로 보아 탐라사람들은 선박제조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망망대해를 지나 양자강 하류까지, 그리고 일본의 규슈와 유구로 바닷길을 개척한 사람들은 탐라사람들이다. 가을, 북동풍이 부는 계절에 돛단배를 띄우면 배는 남쪽바다인 동지나해로 절로 간다. 물론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돌풍에 휘말리기도 하여 배가 파선되어 목숨을 잃거나 표류하기도 한다. 의지할 지형지물이 없기에 낮에는 태양을 바라보고 밤에는 북극성을 올려다보며 뱃사람들은 전진한다. 별도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는 오래 축적된 경험과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탐라의 남해안에서 55km를 가면 마라도에 이르고 거기서 149km를 더 항진하면 이어도에 이른다. 이어도는 춘추전국시대에 쓴 『산해경』에 <소암초>라고 알려진 암초이면서 파도가 휩쓸고 나면 드러나는 섬이기도 하다. 탐라사람들은 이어도가 어디 박혀있는지 훤히 안다. 이어도를 벗어나 눈대중으로 짚어가면서 247km의 길고 지루한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면 절강성 동쪽의 주산군도에 이른다.

 

주산군도의 여러 섬, 특히 보타도에는 수많은 탐라사람들이 정착하여 가까운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기름진 들녘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주산군도 건너편이 해양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영파이다.

 

진시황이, 그리고 한무제가 서융을 점령하여 비단길을 뚫고 남만을 복속시켜 남지나의 진귀품을 얻고자 했지만 중국의 정세가 불안할 때는 그들이 수없이 등을 돌렸고 더욱이 투르크족과 신흥 이슬람으로 인해 국경이 무너지기도 했으므로 서역과 남지나와의 교역로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육로가 막히자 아라비아 등 중동의 상인들이 바닷길을 열기 시작했다. 소위 해양실크로드다. 아라비아, 또는 페르시아를 떠난 배들이 인도, 스리랑카를 지나 벵갈만을 가로질러 말레이반도에 이르고 다시 인도차이나를 에돌아 베트남, 광동해안을 거쳐 하문이나 영파에 이른다. 중동의 상인들이 구태여 영파를 찾는 이유는 영파가 남중국에서 볼 때 탐라와 지근거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하문 또는 영파에서 장안까지 무거운 짐을 수레에 실어 끌고 가는 길은 힘들고 고단한 길이며 강을 몇 번이나 건너야 하고 도중에 도적들을 만나 몽땅 털리는 수가 많고 대규모 운송이 곤란하기 때문에 바닷길을 택한다. 바닷길이라고 안전할 리 없지만 바다에 익숙한 바닷사람들은 큰 짐을 싣고 육로보다 몇 배나 먼 길을 항해한다.

 

절강의 영파는 중동과 인도, 남지나에서 찾아드는 상인들로 인하여 인종 전시장을 이루며 그들이 남지나해를 거쳐서 운송해온 각종 물자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탐라사람들은 중국, 한반도, 일본의 지배층들이 선호하는 진귀품을 조달하기 위해 동지나해를 건너다녔고 영파에서 구입한 물건은 탐라를 거치거나 바로 남해안 해양호족들에게 넘겨진다. 영파를 떠난 배에는 페르시아의 양탄자, 아라비아에서 채취한 석류석(에메랄드 원석), 인도의 유리제품과 상아, 고급가구로 쓰이는 자단과 침향목,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생산되는 청옥, 홍옥, 루비 등의 보석과 비취조의 깃털, 활과 고급가구의 재료인 물소 뿔 그리고 빗과 장신구를 만드는데 쓰이는 남양군도의 바다거북 등껍질이 실려 있다. 또한 중국 강서의 도자기, 광동의 벼룻돌도 들어있다. 이들은 중국은 몰라도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발견되거나 고문헌에 기록된 물목들이다.

 

어떤 물목들은 탐라에서 곧바로 일본으로 실려 간다. 탐라가 위치상 중개무역지로 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주시 산지항에서 발견된 오수전(기원전 8-23년 중국 왕망의 신나라에서 발행한 화폐) 등의 화폐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해양호족 중에는 막강한 재력과 튼튼한 배를 가진 탐라사람들이 다수 있어 영파까지의 항해를 주관하며 탐라에서 일본까지의 무역을 주도한다. 바야흐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 탐라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기원후 280년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주호(洲胡)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섬이다.‧‧‧그들은 배를 타고 중한(中韓)을 오가며 장사를 한다.(乘船往來 市賈中韓)

여기서 주호는 탐라를 의미한다. 중한(中韓)이라는 대목에서 어떤 학자들은 삼한 내에서 장사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한자의 원뜻을 모르는 소치다. 중한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는 것은 엄연히 중국과 한국(삼한)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는 뜻이다.
 

 

『진서(晉書』 「張華傳」에 나오는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동이 마한 신미(新彌) 제국은 산과 큰 바다에 의지하였으며 유주(幽州)와의 거리가 4천여 리나 된다. 역대로 내부하지 않았던 20여 개 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이에 먼 오랑캐들이 감복하여 사방경계에 근심이 없어졌다.
②춘정월 갑오일에 상서(尙書) 장화를 도독제군사로 삼았다. 9월에 동이 29국이 귀화하여 방물을 바쳤다.

 

위의 기사는 기원후 282년 장화가 유주 도독으로 있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며 앞의 기사와 동시대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신미국은 후술할 침미다례(忱彌多禮)와 동일한 뜻으로 탐라를 가리킨다. 산과 큰 바다에 의지한 신미국은 탐라임이 분명하다. 29국은 전남지역의 해양호족 집단이며 그 중 탐라가 맹주국임을 알 수 있다. 탐라는 탐라도(耽羅島)를 포함한 남해안의 강력한 세력집단으로 성장‧발전한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49년조(기원후 369년)의 기사를 보자.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에게 정예군사와 함께 사백‧개로를 보냈다. 그들은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였고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등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이동시켜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백제왕인 초고와 왕자인귀수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합류했다.

 

『일본서기』 신공조에는 탐라를 <침미다례(忱彌多禮)>라고 표기했는데 일본 옛날 발음으로는 ‘도미다레’라 읽는다. ‘도미’는 탐(耽) 또는 ‘두무’와 음이 통하고 ‘다례’는 나라, 들, 또는 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침미다례는 탐라 또는 두무악을 지칭한다. 신미국의 신미는 침미의 다른 음이다. <일본서기>의 다른 기사(508년)에서는 탐라와 침미다례의 음이 유사하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는 탐라를 남만(南蠻)이라고 지칭했는데 이는 남쪽 오랑캐라는 뜻으로 고려 초에도 남만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침미다례에 대하여 역사학계에서는 전남의 어느 지명이라는 설과 탐라라는 설이 갈라지는데 이병도‧이도학 등은 전남, 천관우‧이용현 등은 탐라라고 주장하며 일본학계에서는 대체로 탐라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제주도의 역사학자들은 아직 입장을 밝힌 바 없다. 필자는 여기서 신미국 내지 침미다례를 탐라로 확신하며 이 두 기사를 감안할 때 탐라는, 3세기에는 전남에 분포한 여러 호족세력의 맹주국이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전남 소국 내지 호족세력을 통합하고 탐라도(耽羅島)와 더불어 넓은 영토와 바다를 다스리는 당당한 국가였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평양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한 후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영산강유역을 비롯하여 한반도 남부를 차지한 탐라국은 항상 눈엣가시였다. 고구려를 멀리 밀어내고 국력을 강화시킨 근초고왕은 369년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신라, 가야, 탐라를 한꺼번에 치기 시작했다. 백제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도 군사를 보내 합세했다.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이 수륙 양면으로 가야를 공격해 7개국을 점령했고 백제의 목라근자(木羅斤資) 장군은 탐라를 직접 공격했다. 이후 탐라가 전남지역에서 완전히 패퇴했다기보다는 백제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의 문주왕 2년(476년) 기사에서 탐라에 대한 기록이 우리나라 문헌 중에서 처음 등장한다.

 

탐라국이 방물을 바쳤다. 왕은 기뻐하여 은솔의 벼슬을 주었다.(耽羅國獻方物 王喜拜使者爲恩率)

조공을 바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책봉 받았다고 해서 속국이 되었다거나 국가가 병합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원래 조공제도는 중국이 한나라 때부터 이민족을 통제하고 중국 나름의 국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제도였다. 중국의 주변국은 자국의 토산품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스스로 중국의 번국 내지 외신임을 자처하게 되며 중국의 황제는 조공국의 왕에게 중국식 벼슬을 내리고 회사품(回賜品)을 준다. 이로써 중국과 조공국 사이에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어 중국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 자국의 평화를 유지하며 주변국을 견제할 구실이 생긴다. 그렇다고 자치권이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벼슬을 책봉 받은 왕은 국내에서도 타의 견제를 막을 수 있었다.

 

은솔은 백제의 16개 관등 중에서 3품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 백제와 탐라는 중국과 주변국간의 관계처럼 조공과 책봉의 관계였지 백제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며 더욱이 백제의 속국이 된 것은 아니다. 탐라는 아직도 건재하여 그 후 통일신라와 일본에도 조공을 바쳐 왔기 때문이다.

 

해마다 백제에 조공을 바치던 탐라는 백제가 웅진 천도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되자 백제에 반발하여 공납을 거부하고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에 백제의 동성왕(498년)은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로 출동했다. 백제군은 웅진을 떠나 부여에서 금강을 건너 익산, 전주를 거쳐 무진주에 이르렀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탐라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아 왕이 친정하여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하니 그쳤다. 탐라는 즉 탐모라이다.(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乃止 耽羅卽耽毛羅)

 

이 대목에서 탐라의 영토가 섬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남해안 일대, 즉 강진, 해남 등지까지 지배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탐라가 남쪽의 섬나라였다면 동성왕은 금강하류에서 전함을 띄웠을 것이지 육로로 해서 무진주로 출동했을 리는 없고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사죄하여 군사를 멈추게 한 것은 먼 섬나라에서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탐라국은 삼국이 통일 될 때까지 하나의 국가로써 엄연히 존재하면서 탐라도(耽羅島) 뿐만 아니라 남해안까지 영토를 유지하고 있었다.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고 의자왕은 중국으로 끌려갔다. 백제 부흥군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일본에서도 2만7000명의 군사와 전함 400척을 보내 당나라군과 맞섰다. 그러나 부흥군은 패퇴하고 일본전함은 백강구 전투에서 불타버렸다. 이때 탐라가 부흥군에 합세하였고 결국에는 백제, 일본과 더불어 중국에 손을 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①인궤는 왜병과 백강 어귀에서 4번 싸워 4번 이겼다. 그때 배 400척을 불살랐다. 화염이 하늘에 닿았고 바다는 핏빛이었다.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도망갔다. 가짜 왕자 부여충승과 충지가 사녀, 왜의 무리 그리고 탐라사(耽羅使)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구당서)

 

②인덕 2년(665년) 당고종이 웅진도위 부여융과 신라왕 김법민에게 명하여 옛날 원망을 풀게 하였다. 8월 임자일에 그들은 웅진성에서 동맹을 맺었다. 유인궤는 신라, 백제, 탐라, 왜의 사절을 데리고 서쪽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자치통감)

 

위 두 기사에서 보듯이 당나라는 탐라를 백제의 일부로 여기지 않고 왜와 더불어 하나의 나라로 대접했다. 탐라가 그때까지 전남지역에 남아있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직후 탐라는 전남지역의 지배권을 신라에 넘겨주고 지금의 제주도(濟州島)로 철수했다. 그러나 탐라는 통일신라, 중국, 일본에 조공을 하며 등거리외교를 펼치고 동남아의 독립된 해양국으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다. 후에 장보고는 남해안의 해상세력들과 탐라사람들이 개척한 황해, 동지나해를 기반으로 그리고 더욱 해역을 넓혀서 현해탄까지 국제적인 해양무역을 더욱 펼쳐나갔다. 장보고는 『삼국사기』에 해도인(海島人)이라 표기했듯이 바로 해양세력의 후예인 것이다. <끝>

 

** '서복이야기' 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권무일은? = 경기도 화성 출신. 서울대 철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포스코 근무를 시작으로 현대그룹 임원, 실버종합건설과 흥선종합건설 대표이사와 국제조명 사장을 지냈다. 2004년부터 제주에 정착해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2007년 '문학과 의식'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해 장편소설 '의녀 김만덕(2008년)'과 '남이(2011년)'를 집필한 데 이어 '말, 헌마(獻馬) 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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