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바로 두 사람에게 금란전(金鑾殿)에서 배를 올리도록 하였다. 예를 마치자 황제가 말했다. “너처럼 뛰어난 사람은 거지 중에는 물론이고 관리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과인이 그런 훌륭한 점을 보고서 어찌 발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지금 곧바로 이부에 명해 네게 청환(淸宦) 요직에 앉히려 한다. 백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거지들에게도 의를 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보는 풍조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궁불파’ 고개 숙여 절하며 말했다. “만세이시여, 다른 하사품은 얼마든지 감사히 받겠사옵니다. 단지 이 일만은 명을 받기 어렵나이다. 의관은 조정의 진귀한 기물입니다. 어찌 거지에게 쉽게 하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거지가 된 후 10년 동안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궁불파’가 유명한 거지임을 모르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단 관을 쓰고 띠를 둘러 벼슬아치 사이에 서면, 사람들이 관복을 더러운 기물로 보게 되고 봉록을 먹다 남은 찌꺼기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거지 중에 현자와 어리석은 자가 섞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에는 귀천의 구분이 없어지게 됩니다. 만일 현인군자가 관직을 그만 두고 숨어버리기 시작하면 만세께서는 누구와
사정을 이해한 ‘궁불파’는 급한 상황에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얼마 전에 굶어 죽을 뻔 할 때 목숨을 구해준 구명은인이 건넨 원보(元寶)를 꺼내어 부인에게 주었다. 원보를 배경으로 해서, 글쪽지를 가지고 거리를 다니면서 원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하라 하였다. 위에 큰 글씨로 “해내에 유명한 거지 ‘궁불파’가 딸의 몸값으로 10량을 의롭게 원조했다.”라고 써줬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지가 선수를 친 것이 못마땅했던지 거지가 준 원보의 내력이 불분명하다며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궁불파’는 어쩔 수 없이 구명은인이 건넨, 함부로 사용하지 말하고 한 금가락지와 새로 구걸해서 얻은 부수입을 함께 부인에게 건네주면서 몸값을 지불해 딸을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부인이 궁불파가 준 돈을 가지고 가 몸값을 지불하고 딸을 데리고 오려 할 때 그 향신이 내력을 캐묻고는 부인에게 이튿날 오라하였다. 다음 날, ‘궁불파’가 딸을 데리고 왔는지 확인하려고 부인 집에 갔을 때 한 무리가 달려들어 돈과 양식을 강탈한 강도라면서 부인과 함께 묶어 현의 아문으로 데리고 갔다. 알고 보니 반년 전에 고향현에서 돈과 양식을 경성으로 호송하다가
사납고 거친 거지를 만나면 첫 번째 하류 인물 부류와 비교해보면 된다. 마음 씀씀이를 보자.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강도나 도둑이 되어 깊은 밤에 남의 집에 뛰어든다면 집안 재물을 말끔히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 생명조차도 그들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 어찌 돈 1·2 문, 밥 한두 사발에 그치겠는가. 어찌 그들에게 은덕을 베풀지 않고 핍박해 강도가 되게 하는가. 사람마다 이런 마음으로 그런 부류를 관대하게 대우하여야 관계가 친밀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귀를 누릴 수 있으며, 후세에 거지가 되는 자손이 없게 되고 창녀와 배우들이 점점 적어지며 도적과 강도가 점차 희소해진다. ……하물며 예부터 거지 중에서 충신 의사가 많이 나왔고 문인 묵객이 그중에 숨어있었으니, 대충대충 봐서는 안 될 일이다.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후 혁명의 초기에 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 충신 목양국〔牧羊國, 소무(蘇武)〕, 의사 채미산〔采薇山,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 되고 문인 묵객이 갱유(坑儒)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았는가. 무릇 머무를 집이 없고 돌아갈 나라가 없는 사람은 이렇게 빌붙어 산다. 세상의 도의에 마음 있는 사람은 마땅히 초현납사(招賢納士)의 예로
대원수 팽덕회, 소년시기 걸식했던 옛 일을 잊지 않았다 역사는 결국 역사다. 허식으로 덮어씌울 필요가 없다. 이 점은 현대중국의 혁명가, 군사전문가 팽덕회(彭德懷, 1898~1974)의 공명정대했던 성격과 비교하면 사실과 평가 사이에 천양지차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원훈, 탁월한 영도자라 평가받는 팽덕회는 자신이 젊었을 때 구걸하고 다닌 거지 출신이라는 사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거지 생활은 그의 일생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팽덕회는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 내가 만 10세가 됐을 때 모든 벌잇줄이 끊어져 버렸다. 정월 초하루, 이웃 부잣집에서는 연일 폭죽을 터뜨리며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밥 지을 쌀 한 톨이 없었다. 둘째동생을 데리고 처음 구걸하러 나섰다. 유마탄(油麻灘)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진(陳)선생님 댁을 찾아가 구걸하였다. 선생님은 초재동자(招财童子, 민간에서 재물을 불러온다고 믿는 신)이냐고 묻자 나는 그냥 거지라고 대답하였다. 내 둘째동생 팽금화(彭金華)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밥 반 사발, 조그마한 고기 쪼가리를 얻었다. 우리 형제 둘은 황혼이 돼서야 집에 돌아갔지만 쌀 2승조차 구걸하지 못했다.
주원장이 3년 동안 구걸하며 지냈던 거지 생활이 그의 사상에 미친 영향은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주원장은 근신 송렴(宋濂, 1310~1381)에게 말한바 있다. “진시황(秦始皇), 한무제(漢武帝)는 신선을 좋아하고 방사를 좋아했다. 장생을 헛되이 바라다가 끝내 허사가 되었다. 그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나라가 어찌 다스리지 못할 바가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군(人君)은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욕심을 줄여 백성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먹을 밥이 있고 입을 옷이 있어 백성이 행복하게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선이다.” 주원장은 빈한한 농민 출신일 뿐만 아니라 3년 동안이나 걸식으로 삶을 엮은 경험이 있어 자연스레 하층민 백성의 마음을 잘 이해하였다. 그래서 황제 보좌에 앉은 후에 여전히 ‘비교적 소박한 생활을 하였고 절약을 강구했으며 술을 즐기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본래 구걸하는 행각승이었던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 같은 거지 출신인, 미친 도사 주전(周顚)을 중용하기도 했다. 주원장 본인이 편찬한 『주전소선전(周顚小仙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주전은 14세
중국의 역대 제왕 중에 거지 출신 황제가 있다. 바로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거지가 아니라 행각승 면모로 사방을 돌아다닌 어린 거지였다. 용의 씨, ‘용종’으로 대어난 북제의 고위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주원장의 행각 경력은 나중에 입신양명해 황제 보좌에 앉고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중요한 복선이 된다. 얻기 어려운 잠재된 기회였다. 주원장은 원나라 천력(天曆) 원년(1328) 9월 정축에 호주(濠州) 종리〔鍾離, 현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고장(孤莊)촌의 빈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봉양현은 중국역사상 가난하기로 이름난 마을이다. 지금까지도 화고희(花鼓戱)1)로 유명할 뿐 아니라 거지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러한 지리 문화 환경 속에서 거지 주원장이 나타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거지가 나중에 천자 자리에 올라 명 왕조의 개국 황제가 되었다. 중국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이요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보아야 할 사건이다. 지정(至正) 4년(1344)에 주원장은 17세였다. 당시 호주 지역은 심한 가뭄, 누리의 해, 돌림병 등으로 기아와 질병이 한꺼번에 닥쳤다. 농민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게
안영, 제경공에게 어린 거지를 거두어 기르라고 권하다 중국 역대 제왕 중에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혼용(昏庸)의 무리가 적지 않았으나 그래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대부분은 덕이 있는 정치, 어진 정치를 힘써 실행하였다. 혹간 하는 짓이 장식장 속 장식과 같은 수준에 불과하더라도 한번이라도 노력하기는 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고위는 특히나 어리석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춘추시기에 제(齊)경공(景公)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어린 거지를 보고는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구나 말했다고 전해온다. 곁에 있던 재상 안영(晏嬰)은 황제께서 계신데 저 아이가 어찌 돌아갈 집이 없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사람을 파견하여 저 어린 거지를 맡아 기르게 한다면 모두가 그 일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라고 권했다.(『안자춘추』) 무슨 뜻인가? 큰 힘을 들이지도 않고 어린 거지를 거두어 기른다면 백성의 찬양을 받게 되고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며 인정을 베푸는 국군이라는 미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다. 송 태종, 거지를 죽이는 계책을 실행하다 976년, 송(宋) 태종(太宗) 조경(趙炅)1)은 황위를 계승하여 국호를 태평흥국 원년으로 바꿨다. 그는 늘 어떻게 하면 내외의 사람을 자신에게 복
피난하다가 위(衛)나라를 경유할 때, 중이가 예전에 위나라가 건도(建都)하는 데에 진나라가 지지하지 않았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원조를 거절하였다. 중이의 무리가 오록(五鹿)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배고픔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민에게 구걸했으나 농민은 진흙을 담아 주었다. 어쩔 수 없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과 말 모두 지쳐 기진맥진하게 되었다. 중이가 지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여 수행인 앞에 쓰러졌다. 수행인들이 산나물을 캐다가 탕을 끓여 허기를 채우려고 할 때 개지추(介之推)가 자신의 허벅지의 살을 베어다 탕에 넣고 끓여 중이에게 바치자 감격해 눈물 흘렸다. 이후 그들은 또 여러 번 방랑하며 평탄치 못한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진목공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636년에 국군이 되었다. 바로 문공이다. 문공은 9년 동안 재위하면서 진(秦)나라와 결맹하였다. 역사상 유명한 ‘진진지호(秦晉之好)’다.1) 이후 왕자대(王子帶)2)의 난을 평정하고 주(周)양왕(襄王)을 받아들였다. 초(楚)나라를 치고 송(宋)나라를 구하여 춘추오패의 하나가 된다. 『좌전』은 ‘하늘이 도와’(天助)서 성공했다고 했으나 사실은 19년 동안 유랑하면서 구걸하고 남에게
중국역사에서 한동안 거지로 전락했던 제왕은 한둘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배경과 우연적 개인의 환경 아래서 제왕과 거지의 인연은 재미있는 조건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전기적인 일문(逸聞) 일사(逸事)가 발생하고 발전 변화하였다. 그런 사례를 통하여 역사를 증명할 수 있고 사회를 고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민족문화전통 중의 관념 전승과 개별적인 여러 가지 고유의 갈등, 모순을 분석하고 투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비교적 명확하면서도 깊게 새로이 사회를 인식하고 역사를 평가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역사와 문화를 심도 있게 다시 고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비정상적인 상태 속에서 근원을 판별하고 왜곡된 사실 속에서 바른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양하면서도 어지러운 사회세태 중 한 부분이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정사 기록이든 야사나 필기소설이든, 지금까지 진귀한 사료로 남아있다. 정사에서 다루어진 거지 문제와 상응하는 정책, 대책을 제정한 것 이외에 제왕과 거지의 일문 전설은 여러 가지가 뒤엉키어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간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인생살이에 있어 물질이나 정신생활 상의 빈부는 고정돼 있거나 불변하지 않는 게 아니다.
거지와 마의(馬醫) 전국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가난 때문에 곤경에 빠지자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가 미움을 샀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여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게 되자 거지는 전(田) 씨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마의(馬醫, 수의사)의 조수 일을 하면서 연명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비웃으며 말했다.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어먹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거지가 답했다. “천하에 거지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겠소? 내가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어찌 거지보다 못하다는 말이오?” 당시에 마의의 지위는 비천하였다. 봉건사회에서는 역대로 비천한 직업군에 속했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싫어해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되자 마의를 도와 노동하며 입에 풀칠하면서라도 살아가는 것은 원래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도 비웃음을 받고 조롱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거지를 다시 길거리로 내몰아 비럭질하며 살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거지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세속의 편견은 가난해 마의를 도우며 살 수밖에 없는 거지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열선전』 속 거지, 한음생 위진(
거지 구성원은 복잡다단하며 역사 속 거지 형상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색채 또한 각양각색이다. 불결하고 죄악으로 넘쳐난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곤궁에 있다.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여 목숨을 연명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다. 지금도 여전히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거지가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거지왕국 중 점점 많아지는, 신비한 죄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유혼(遊魂)은 거지 현상이 번식된 파생물이다. 거지 가사를 뒤집어쓴 범죄 무리로, 불량배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찌꺼기들이 거지 단체 중에 갈수록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거의 주체가 되다시피 했다. 걸식이라는 명목을 가진 불량배요 범죄 집단이다. 바로 ‘직업 거지’다. 정당한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면서도 직장을 구하지 않는다.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은 일부를 포함하는 ‘직업 거지’ 현상과 ‘거지 조직’의 형성은, 성격적으로 거지 집단을 완전하면서도 철저하게 사회문명이라는 유기체 내의 부스럼이요 악성 종기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런 악성 종기는 여러 가지 사회범죄와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함께 행동하고 의기투합해 인류문명사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회의 악이 되어 버렸다. 거지
‘이식위천(以食爲天)’,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이다. 옛 중국인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의식주가 부족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면 구걸하게 되고 거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거지에 관한 여러 가지 조사의 대부분은 이런 상황에 주의하고 있다. 현장에서 여러 가지 구걸하는 추태를 대면했을 때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구걸하는데, 가장 기초적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체면도 없고 염치조차도 필요 없다는 말이요?” 대답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 단순하고 명쾌하였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는데 체면을 살필 겨를이 어디 있단 말이요. 체면을 생각하면 굶어 죽고 얼어 죽게 생겼는데, 이런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체면이 뭐가 필요하오!” 이런 솔직한 대답을 들으면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논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동정하게 된다. 그런데 거지의 다른 면을 보면 어떻게 될까. 돈을 위해서는 어떤 나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돈이 생기면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다. 먹고 마시며 오입질도 하고 도박도 한다. 매우 많은 거지들이 때때로 놀랄만한 금액을 집에 붙이기도 한다.……말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