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에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한 검 한 자루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칼을 지니고 강을 건너던 중에 실수로 그만 검을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 급히 뱃전에 칼자국을 내어 표시하였다. “칼이 떨어진 곳은 바로 여기다.” 배가 닿자 칼자국을 새겨 놓은 뱃전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칼을 찾았다. 아무리 표시해 두었다 한들 배가 움직여 강기슭에 닿았는데 강물에 빠뜨린 칼을 다시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 유명한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어떤 상황에서 얻은 경험은 실제이기는 하지만 상황 변화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 달라야한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초나라 사람이 뱃전에 표식을 해둔 것은 실제 상황과 맞다. 당시 상황에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시 실제 상황과 임무와 부합된다. 그런데 형세와 임무가 변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실제에서 얻어진 경험이라 할지라도 변화된 상황에서도 고지식하게 적용한다면? 뱃전에 새겨둔 기호와 다를 바 무엇이 있겠는가. 웃길 따름이다. 시대와 대면한 현실의 연관성이 떨어진다면, 아무리 깊은 기호를 새겼다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특정한 상황에서 거시적으로,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은 떠야한다.” 보고도 못 본 체 눈감아 줄 수 있어야한다.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면 놓아줄 것은 놓아주어야 한다. “물이 지극히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극히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¹는 말이 이 뜻이다. 반초(班超)²는 서역에 오랫동안 있었다. 조정에 상소를 올려 자기가 살아서 옥문관 안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피력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반초를 불러들이고, 교위(校尉) 임상(任尙)³을 파견해 반초의 직위를 대체하였다. 임무를 교대할 때 임상이 반포에게 말했다. “공이 서역에서 30여 년을 살았는데 오늘 제가 공의 직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임을 맡게 되니 고려하여야 할 문제가 많은데도 얕은 지식밖에 없습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합니다.” 반초가 말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새외의 관리와 사병은 본래 효자도 유순한 손자도 아닙니다. 죄를 범해 둔전에서 변방을 지키려온 수자리입니다. 외족 부락도 변방을 넘어오려
송(宋)나라 철종 원우(元祐, 1086~1094) 연간에 왕안석(王安石)¹의 변법(變法)이 실패한 후 옛 법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때 여급송(呂汲公), 양축지(梁祝之), 유기지(劉器之) 등 왕안석 혁신파 변법 추친 인물 30여 명은 가혹한 타격을 받았다. 폄적되기도 하였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동시에 조정은 그들 명단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그때 범순인(范純仁)²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원흉을 치도하는 것은 가하지만 협력해 따른 사람에게는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범순인은 탄식하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됐으니 우리도 보복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됐구려.” 나중에 형세가 급전직하해 혁신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범순인이 예측한 대로 구당파에게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왕무(王懋)³는 『야객총담(野客叢談)』에서 말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군자는 소인을 너무 과하게 다스리면 안 된다. 무절제하게 그들을 다스리면 나중에 그들은 더 잔혹하게 보복한다.” 상대를 가혹하게 처벌하면 상
그렇게 한 명 한 명 던져 죽이니 죽임을 당한 관리가 6명이나 되었다. 마지막에 시신을 시장에 걸어 시중토록 명령하였다. 그 일이 소주 지역 전체에 알려지자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소주 지역 백성들은 악습을 고치고 습속을 일신하였다. 그렇다고 황종이 일률적으로 엄형으로 법을 준수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인자할 때는 인자하고 엄할 때는 가혹할 정도로 엄했다. 엄격함과 관대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어느 날, 태수부(太守府)에 화재가 발생해 공문서가 모두 불타버렸다. 그 사고를 일으킨 자는 하급 관리였다. 대형 화재가 진압된 후 황종은 깨어진 기와 조각과 벽돌 부스러기가 널브러진 현장에서 화재를 일으킨 관리를 부른 후 곤장 100대를 치게 하고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라 명했다. 이후 황종은 급히 상주서를 친히 써서 황제에게 올렸다.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급 관리를 끄집어 들거나 죄를 돌리지도 않았다. 화재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하급 관리는 사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황종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은 본래 태수의 책임이다. 하급 관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rdquo
명(明)나라 때 황종(況鍾)¹은 낮은 관리에서 낭관(郎官)으로 발탁되었고 양사기(楊士奇), 양부(楊溥), 양영(楊榮)의 추천으로 소주(蘇州) 지주(知州)가 되었다. 황제는 조당에서 그에게 황제가 친히 서명한 문서를 하사하며, 상주해서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사무를 처리할 권력을 부여하였다. 황종이 막 소주에 도착하자 관리가 공문서를 가지고 와 바쳤다. 관리에게 사건 처리가 합당한지 안한지도 묻지도 않고 ‘됐다’고 판결하였다. 그러자 하급 관리는 황종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멸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아문에서 발생하는 폐단과 빈틈이 갈수록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통판(通判) 조(趙) 모 씨가 천만가지 계책을 세워 황종을 기만했지만 황종은 그저 응응거리기만 하였다. 1개월 후, 황종은 수하에게 향촉을 준비하라 명한 후, 예의(禮儀)를 관장하는 예생(禮生)도 부르고 모든 관원을 소집하였다. 황종이 모두에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 모두에게 선포하지 않은 황제의 조서가 있소. 오늘, 그 조유(詔諭)를 모두에게 선포하려 하오.” 관원들이 조서 중에, “소속 관원이
증국번(曾國藩)¹은 일찍이 용맹한 부장을 관리하였던 경험을 사람에게 전수하면서 예를 하나 들었다. 이세충(李世忠)은 강도였다가 항복해온 상군(湘軍)²의 장수였다. 나중에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일품 관직에 올랐다. 사람됨이 난폭하고 교활해 상관의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았다. 그 부하도 온갖 나쁜 짓을 자주 저질렀다. 그렇다면 증국번은 어떻게 그러한 부장을 대하였을까? 두 가지 방면에서 관용을 베풀었고 두 가지 방면에서는 엄격하게 대했다. 어떻게 관용으로 대했을까? 금전 방면에서 이세충에게 관대하였다. 결코 논란거리로 삼지 않았다. 자금이 충분할 때 몇 십 만을 떼어주기도 했다. 금은을 돌같이 보았다. 자금이 부족할 때 자신도 곤궁에 처했으면서도, 자기 재산을 털어 남을 도왔다. 두 번째는 그와 전공을 다투지 않았다. 함께 전투에 임해 승리를 거뒀어도 모든 전공을 그에게 돌렸다. 추천할 기회가 있으면 우선 그를 내세웠다. 어떻게 엄격하게 대했을까?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왕래를 최소화했고 교분을 맺으려 애쓰지 않았다. 빈번한 교류를 피했다. 왕래하는 서신도 간명하게 요점만 쓰고 내용을 번잡하게 하지 않았다. 두
복역을 하던 위(衛)나라의 죄수가 위(魏)나라로 도망치자 막 왕위를 계승한 위(衛)나라 국군은 큰돈을 주고 그 죄수를 돌려받으려 했으나 위(魏)나라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위(衛)나라 국군은 좌씨(左氏, 지명)¹라는 성읍과 죄수를 맞바꾸려고 하였다. 위(衛)나라 국군의 부하가 물었다. “성읍 하나와 노역에 동원되었던 죄수를 맞바꾸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위(衛)나라 국군이 답했다. “국가가 제대로 다스려지느냐 혼란하게 되느냐에, 크고 작은 것이 없다. 법률이 확립되지 않아 처벌을 하여야 하는 자를 처벌하지 아니한다면, 설령 좌씨와 같은 지역이 열 개가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법률이 확립돼 처벌하여야 하는 자를 반드시 처벌하면, 설영 좌씨와 같은 지역 10개를 잃는다하여도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이야기는 상앙(商鞅)²이 상으로 신의를 세운 이야기³와 비슷하다. 비록 사용한 수단이 다르다하더라도 동공이곡(同工異曲)으로, 얻는 효과는 같다. 모두 이미 정한 목적에 도달하였다. 어떤 때는 간단하게 조문이나 규장에 근거해 상벌을 집행
그렇다고 금령과 형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금령과 형벌은 기율을 정돈하고 사기를 북돋우는 수단의 하나다. 오기(吳起)¹는 말했다. “무릇 북과 징과 방울은 병사의 귀, 각종 깃발은 병사의 눈, 군령과 형벌은 병사의 마음을 통해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귀로 전달되는 소리는 뚜렷해야 하고, 눈으로 전달되는 색깔은 분명해야 하며, 마음으로 전달되는 형벌은 엄정해야 한다.”(『손자병법(吳子兵法)』「논장(論將)」) 무슨 말인가? 단체에게 지휘에 복종하게 하고 행동 일치를 보게 하려면 반드시 형벌, 금령으로 부하의 행동을 단속하여야 한다. 법을 집행하는 데에 반드시 공정하고 엄명하여야 한다. 만약 이 점을 이행하지 못하면 사기는 무너지고 나태해진다는 말이다. 월왕(越王) 구천(句踐)²은 오(吳)나라에서 귀국한 후 포로 생활의 치욕을 씻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사병들을 엄격하게 훈련을 시켰다. 어느 날 구천이 훈련장에 가서 문종(文種)³에게 물었다. “내가 오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가능한가?” 문종이 답했다. “가능합니다! 제가 평상시 훈련
사람의 심리는 사실 무척 간단하다 : “내가 너를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해주면 너는 내게 사례를 하여야 한다.” 상벌의 문제도 지출과 소득의 문제다. 상벌이 분명하지 않으면 자신이 지출한 의미에 회의를 품게 되어 적극성이 줄어들거나 심하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상과 벌은 사람을 관리하는 두 가지 큰 무기다. 상벌이 분명한 상황에서 명령이 내려지면 반드시 실행한다. 명확한 상벌은 타인의 적극성을 최대도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송연(宋燕)이 제(齊, BC1044~BC221)나라의 재상 자리에서 파면되자 부하 관원들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다른 제후에게 의탁하러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소?” 모두 질서정연하게 서서 조용히 바라만 보면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송연이 말했다. “정말 슬프구려! 사대부(士大夫)는 어찌하여 얻기는 쉬우나 쓰기는 어렵더란 말인가?” 진요(陳饒)가 대답하였다. “사대부란 얻기는 쉬우나 쓰기는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공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공이 쓸모가 없으니 사대부가 원망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목표를 추구하면서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 자기 실력이 모자랄 때 외부의 힘을 빌리거나 외력을 끌어들이면 승리를 거두는 지름길을 찾는 방법이 된다. 자기 힘이 부족함을 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장점을 강화시켜 적은 힘으로 큰 것을 이룰 수 있고 약함으로 강함을 이길 수 있다. 목표를 향하여 가는 교량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BC221) 때, 중산국(中山國, BC414~BC296)의 왕에게 두 명의 비(妃)가 왕후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한 명은 음희(陰姬)요, 다른 한 명은 강희(江姬)였다. 내시 사마희(司馬喜)가 양쪽 가운데에서 발붙일 틈이 있음을 보고 주동적으로 음희의 아버지를 찾아가 말했다. “음희가 왕후가 되면 자연스레 첫째 부인이 돼 비할 수 없이 귀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왕후가 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도마 위 고기가 돼 자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연루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음희가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나를 찾아오지 않소.” 그래서 음희의 아버지는 사마희를 찾아가 음희가 어떻게 하면 왕후가 되도록 도와 줄 수 있을 지를 물었다. 일이 성사되면 깊이 보답하겠다고도 말했다.
일하거나 생활할 때 권력에 알력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 명이 알력이 생길 때 누구에게도 미움 사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중간적 인물이 되고자 할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될까? 청(淸)나라 말기에 진수병(陳樹屛)은 강하(江夏) 지현(知縣)을 맡고 있었다. 당시 장지동(張之洞)은 호북성에서 독무(督撫)직에 있었다. 장지동은 무군(撫軍) 담계순(潭繼詢)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진수병은 늘 교묘하게 처리해 어느 한 쪽에서도 미움을 사지 않았다. 어느 날, 진수병이 황학루(黃鶴樓)에서 장지동과 담계순, 기타 관리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좌객 중에서 강 수면의 너비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다. 담계순은 5리 3분이라고 하자 장지동은 일부러 7리 3분이라고 하였다. 둘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어느 누구도 체면 때문에 지려고 하지 않았다. 연회의 분위기가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진수병은 둘이 트집 잡아 분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에게 불만이 많았고 시답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연회 분위기를 깰 수는 없었다. 그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태연자약하게 공수하며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강 수면의 너비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이 불 때는
두 개의 붓으로 동시에 그리다 ;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다는 뜻을 가진 쌍관제하(雙管齊下) 전고는 송나라 때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畫見聞志)』에서 나왔다. “당나라 장조(張璪)는 산수 송석(松石)을 잘 그리기로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다. 더욱이 소나무를 그리는 데에 의경(意境, 예술적 경지)이 특출하다. 손에 두 개의 붓을 들고 일시에 한꺼번에 내려, 하나는 살아있는 가지를 그리고 하나는 시든 가지를 그려낼 수 있다.” 정치하든 사업하든 서로 경쟁하는 데에는 실제적으로 역학 법칙을 따라야한다. 서로 다른 힘 가운데에서 어떻게 평형을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 자신에게 조력자와 방해자가 생기게 되는데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고려해야할 문제 중 하나다. 전국시대 때, 한(韓, BC403~BC23)나라의 공자 한구(韓咎, ?~BC273)는 왕위 다툼을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당시 한구의 동생은 주(周, BC1046~BC256)나라에 있었다. 주나라는 동생을 중용하면서도 한구가 성공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에 한구가 군주가 되지 못한다면 주나라도 다시는 그의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게 분명하였다. 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