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는 틈만 있으면 사기 친다. 구걸할 때만 눈에 띠는 모습이 결코 아니다. 다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청나라 모 년 모 월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가마를 타고 종복과 함께 전당포에 갔다. 팔찌 한 쌍을 벗어 건네며 저당 잡히겠다고 했다. 주인이 받아서 자세히 검사해보니 누런 금색을 띠는, 진짜였다. 중량은 5량이었다. 팔찌 주인이 경전(京錢)1) 500관(串)을 요구하자 전당포 주인은 맡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다. 한 바탕 가격 흥정을 한 후, 300관에 저당하기로 하고 숫자대로 돈을 지불하는 전표를 발행해 주었다. 그 사람이 떠난 후 옆에 서있던 거지가 낡은 저고리를 벗어서 건네주면서 20관에 저당 잡히겠다고 하자, 전당포 주인이 고소한다고 난리를 쳤다. 거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짜 금팔찌를 300관이나 주었잖소. 내 이 저고리는 비록 낡기는 했어도 가짜는 아니잖소? 어찌 20관 가치가 없다는 말이오?” 그제야 전당포 주인이 의심이 들어 다시 팔찌를 꺼내 보았다. 금도금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알아챘소?” 거지가 답했다. “그 인물은 유명한 사기꾼이오. 그가 사는 곳까지 내가 알 정도니까.” 전당포 주인은 돈
1924년 9월 24일, 노신(魯迅)는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산문시를 발표하였다. 『야초(野草)』집에 수록된 산문시로 상징과 사실 수법으로 묘사하였다. 나는 벗겨진 높은 벽을 따라 부드러운 먼지를 밟으며 걸어간다. 나 이외에 몇몇이 제 갈 길을 걷는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벽 위로 솟아오른 높은 나뭇가지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잎을 단 채 내 머리 위에서 흔들거린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사방이 온통 먼지다. 한 아이가 나에게 구걸한다. 겹옷을 입었다. 슬프거나 근심스럽게 보이지 않는데 막아서며 절하고 쫓아오며 애원한다. 나는 그의 말투와 태도가 싫었다. 나는 슬프지도 않으면서 장난치 듯 하는 그가 싫었다. 나는 쫓아오며 애원하는 그에게서 진저리가 났다. 나는 길은 걷는다. 나 이외에 몇몇이 제 갈 길을 걷는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사방이 온통 먼지다. 한 아이가 나에게 구걸한다. 겹옷을 입었다. 슬프거나 근심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벙어리이다. 양손을 나란히 벌려놓고 손짓한다. 나는 그의 손짓이 싫다. 그리고 결코 그는 벙어리가 아니다. 구걸하는 방법일 뿐이다. 나는 희사하지 않는다. 희사할 마음도 없다. 나는 단지 자선가보다 높은 자리에서 혐오와 의
사기는 거지가 쓰는 상투적인 수법이다. 틈만 나면 상용한다.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사기 친다. 다음 사례를 보자. 나이가 많은 귀머거리 거지가 무릉(武陵) 성문 밖 번화한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문을 닫으면서 신호기를 올리며 징을 칠 때 즈음, 군선(軍船) 한 척이 정박하였다. 선실에 앉아있던 5품 관리가 고개를 내밀어 기슭에 있는 귀머거리 거지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선실로 데리고 오게 하였다. 선실에 들어서자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A씨의 큰아들 아니십니까? 이전에 저를 수양아들로 삼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공명을 얻어, 지금 관리가 됐습니다. 양아버지가 궁핍하게 되어 이런 지경에까지 전락했다니. 실로 저의 죄입니다!” 늙은 거지는 관리가 사람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직 맞장구 쳤다. “나는 나이가 들어 흐리멍덩해졌소. 지난 일은 모두 꿈속 같구려.” 5품 관리가 말했다. “이리저리 떠다니며 객지에서 고생했지만 모습이나 체격은 크게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그러고서는 사람을 시켜 거지에게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 군선이 외지고 조
옛날부터 지금까지 거지 무리가 저지른 가장 중심 되는 악행은 사기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세상은 늘 바뀌고 사기술도 변하기에 세상 사람은 결국 다시 속임수에 걸려든다. 그러니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거지 사기술은 약간의 노리기(노림술)일 뿐이다. 새로운 술수를 부리고 기발한 생각을 해내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자주 썼던 거지의 사기술 몇 가지를 보자. 청나라 때에 A씨가 타인이 일을 하는 데 중간에서 증인을 서주기로 하고 모두가 공소(公所, 동업자 조합 사무소)에 함께 가서 은량1)을 봉하여 저장하기로 하였다. 은량을 저울질할 때 마침 대나무 바구니를 손에 든 거지가 와서 구걸했다. A씨가 부스러기 은전 몇 개를 건네주었다. 거지가 적다고 했다. A씨가 화나는 척하며 거지가 들고 있는 낡은 옷으로 덮여있는 바구니에 원보를 던져주면서 질책하였다. “네가 바라는 것이 이거냐?” 거지는 질겁해서 말했다. “부자 어른께서 몇 푼 던져주고 싶지 않으면 주지 않으시면 될 일이지, 그렇게 화까지 내고 그러십니까?” 그러고는 바구니에서 원보를 꺼내어 탁자위에 올려놓고 다른 돈은 받지도 않고 떠났다. 나중에 피해자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거지가 있는 반면에 물에 빠져 죽은 거지의 시신을 부친과 남편으로 오해하여 상복을 입고 효경을 다한 경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청나라 때 남정원이 『녹주공안』에 기록한 내용이다. 남정원 본인이 광동 보녕(普寧) 현령으로 있을 때 친히 경험했던, 숨겨져 있던 일을 밝혀내어 고발했던 살인사건이다. 현민 정후추(鄭侯秋)의 처 진(陳) 씨가 어떤 사람이 자기 남편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현아(縣衙)에 고발하였다. 진 씨의 말은 이랬다 : 남편이 남동방(南董坊)의 보장1)을 담당하고 있을 때에, 소방무(蕭邦武)가 계약서를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숨기자 남편이 그것을 따지니 앙심을 품고 있었다. 소방무는 11월 13일에 폭도들을 데리고 정 씨 집으로 몰려가서 재산을 강탈했다. 남편은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중상을 입고 피할 데가 없어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시체는 지금 협산(峽山) 개천에 있다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죽은 사람의 아들이 배를 타고 가서 시신을 싣고 와서 현령에게 검시해 달라고 했다. 죽은 사람의 손톱에 진흙과 모래가 잔존한 것을 보니 익사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상흔 하나 없는 몸에 얼굴만 식별하기 어렵게 변해 있었다. 진 씨 모자는
거지 구성원 성분은 대단히 복잡하다. 예부터 그랬다. 이것이 거지가 자주 범죄에 연루되는 기본적인 원인이다. 송나라 때 정극(鄭克)이 편찬한 『절옥귀감(折獄龜鑑)』에 ‘위정람상(韋鼎覽狀)’의 일을 기술하고 있다. 위정(韋鼎, 515~593)이 광주자사(光州刺史)에 부임했을 때 손님으로 갔다가 주인집 첩과 사통한 사건이 벌어졌다. 손님이 돌아갈 때를 기다려 첩이 귀중한 재물을 훔친 후 야밤에 도망쳤다. 오래지 않아 죽임을 당하여 풀덤불에 던져졌다. 주인이 손님과 첩이 사통했다는 것을 알고 손님이 첩을 살해했다고 고발하였다. 현리가 심문한 후 손님과 첩이 간통한 죄상을 파악하고 손님을 사형에 쳐하도록 판결하였다. 사건 심리가 종결되어 주부에 보고하였다. 위정이 안건을 살핀 후에 말했다. “이 손님은 간통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모 사찰의 승녀가 첩을 기만하여 재물을 훔쳐오도록 한 후 사찰의 노예를 시켜 그녀를 죽이도록 하였다. 장물은 지금 모처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곧바로 손님을 석방하고 중을 체포토록 했으며 동시에 장물을 찾아내었다. 이때부터 관할 지역 내에 질서가 잡혔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청나라 때 장조(張潮)〔내산(山來)〕는 『우초신지(虞初新志)』 권5 『걸자왕옹전(乞者王翁傳)』에 고상한 품격을 지닌 거지를 기술하고 있다. 초군(樵郡)의 명족인 왕 씨의 선대가 거지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날, 거지 왕 씨는 구걸하다가 나구(挐口) 지방의 진(陳) 씨 장자의 집까지 가게 되었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아 어떤 집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계집애종이 물 대야를 들고 나와 물을 뿌렸다. 무슨 물건인지 물과 함께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살펴보니 금팔찌였다. 왕 모는 크게 기뻐하며 주워들고는 돌아서서 생각에 잠겼다. 이 금팔찌는 여주인이 세수할 때 대야에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계집애종이 모르고 물과 함께 뿌린 것이다. 여주인이 금팔찌를 찾지 못해 계집애종을 의심하면? 성급히 고문까지 하면? 분명 뜻밖의 사고가 생길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 이 가난한 사내놈이 횡재한 것이 행운이라고 만은 할 수 없지 않은가. 계집애종이 예측하지 못한 재난을 당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거지는 그곳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 지나니 그 집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꾸짖어 책망하는 소
중국어 ‘공안(公案)’이란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옛날 관부의 공문서 〔안독(案牘)〕, 심리 용도로 쓴 탁자, 안건이나 사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송대 화본소설과 희곡의 한 부류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시비를 판단하는 관청의 문서의 뜻을 빌어 선배 조사의 언행 범례를 가리키기도 한다. 청나라 옹정 연간(1723~1735)에 광동성 보녕(普寧)현 지현을 역임했고 나중에 조양(潮陽)현을 겸치한 남정원(藍鼎元)은 탄핵되어 관직을 잃은 후에 자신이 역임했던 시기에 판결했던 안건을 모아 『녹주공안(鹿洲公案)』 상하 2권, 24편을 편찬하였다. 남 씨는 자가 옥상(玉霜)이고 ‘녹주’는 호이다. 『청사고(淸史稿)』의 「순사전(循史傳)」에 그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를 다음처럼 평했다. “도적과 송사 대리인을 잘 다스렸다.” “신처럼 사건을 심리하였다.” “소송사건을 판결하면서 여럿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았고 논하는 데에 엄격하여 흠이 없었다.” 『녹주공안』 내용은 주로 불법을 저지른 아역(衙役)1)이나 소송 대리인 징치(懲治), 호강(豪强) 공격, 도적 숙청, 지방 치안질서 정돈, 미신 타파 등 지방 민사, 형사 사건이다. 여기에서 ‘거지와 공안’이라 제목을 붙
한번은 정주(鄭州)의 ‘바보(傻子)’가 서주(徐州)의 ‘절름발이(拐子)’의 돈을 훔쳐 공분을 샀다. 개방의 불성문의 규칙에 따르면 장애인은 존중받아야 했다. 더욱이 돈이라면 더 그랬다. 지금 ‘바보’의 행위는 ‘천조(天條)’를 어긴 것이기 때문에 징계를 주지 않으면 이후에는 더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두머리 ‘남양(南陽)제갈(諸葛)’이 졸개에게 눈짓으로 알려 곧바로 ‘바보’의 옷을 벗기고 수색하게 했다. 결국 바지통에서 돈을 찾아내어 ‘절름발이’에게 돌려주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여러 졸개에게 한 사람이 한 대씩 때리게 했다. 등에서 발까지, 층층이 ‘철사장(鐵砂掌)’이 내려 꽂혔다. ‘바보’는 아파 울부짖으며 연신 잘못을 빌었지만 아무 쓸모없었다. 매를 다 맞은 후 바지조차도 입지 못할 지경이 됐어도 여전히 땅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때 ‘남양제갈’이 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이후에 통지를 듣지 않는 자는 누구나 이처럼 처리하겠다.” 그때부터 감히 제멋대로 굴거나 ‘세금’을 바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더 무서운 일도 있었다. 인위적으로 불구자로 만드는 것도 부락을 통치하는 방법이었다. 요령을 부리는 거지가 이탈을 기도하면
어느 날, 14살이 채 되지도 않는 장동휘(張東輝)라는 소녀가 자무쓰(佳木斯)에서 심양으로 흘러들어왔다. 계모의 학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후 장님의 수중에 잘못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개명가(開明街) 음식점에서 ‘노대(老大)’(큰형님)가 상여금을 주면서 만남의 예를 올린 후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다. 식사 때 술을 곁들였다. 식사를 마친 후, ‘후 아버지’에게 이끌려 북시장(北市場)에 있는 여관방에서 ‘아버지’와 동침하였다. 알아야 한다, 후 장님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구걸하는 여자 거지 모두가 짐승 같은 작태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거지 왕국 탐밀』) 유사한 패거리가 있었다. 제남에 ‘영(零) 사령관’이라 부르는 거지 두목도 ‘탑 아래 사령관’과 같은 행태로 이름을 날렸다. ‘영 사령관’의 ‘영(零)’은 ‘탑 아래’가 아니라 탑 꼭대기에 거주하니, 개방 중에서 더 이상 그보다 높은 사람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영 사령관’도 현지인이었다. 40여 세로 관찰영(官札營) 거리에서 살았다. 별명은 ‘흑대개(黑大個)’였다. 그는 도둑질과 구타로 7년 형을 받았다. 만기 석방 후에 예전처럼 그냥 해이하고 방탕했다. 집안의 도구는 침대조차 남기
그 해 음력 7월 7일에, 여대요의 장 씨 두목이 대련의 흑석초(黑石礁) 밖에서 그에게 즉위 의식을 거행하였다.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낸 후 그가 관할할 27명의 거지 명단을 건네주었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4년여 만에 단동 개방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때부터 그는 역에서 잠을 청하지 않아도, 음식점 접시를 핥지 않아도 됐다. 비수 하나와 안테나선을 감아 만든 쇠 채찍 하나에 의지해 호의호식하였다. 구걸을 위주로 하거나 구걸만 하는 기존의 단동 개방의 생계 방식을 크게 바꿨다. 힘들이지 않고 남의 물건을 손에 넣는 방식이었다. 상대에 따라 방법을 바꾸고 구걸하지 못하면 훔쳤다. 개방의 규정을 제정하여 개방을 강성하게 만들었다. 점차 부하 중에 유형이 다른 용장 몇몇을 배양하였다. 예를 들어 ‘법야(法爺)’가 있었다. 50세 전후로 키가 컸으며 약간 곱사등으로 구레나룻이 나 있었다. 발 한 쪽을 좀 저는 귀주(貴州) 출신이었다. 일찍이 동족 형제 한 명과 아미산에서 왕노릇을 했는데 통행인에게 돈을 빼앗은 후 마침 ‘폭력배의 돈을 뺏는’ 무리를 만나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 반년 후에 길거리에서 구걸하면서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신선이 붙어 다닌다’고 핑계 대면
20년 넘게 구걸한 경험을 가진 거지가 말했다. “물고기에는 머리가 있고 뱀에게는 사정(蛇精)〔뱀 모양의 요괴〕이 있는 법이요. 개미에게도 주인은 있고 꿀벌에게도 왕은 있소.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도 보금자리가 있고 우두머리가 있소. 기질이 세고 횡포한 사람이 여럿을 통솔하는 것이오. 조 씨, 전 씨, 손 씨, 이 씨, 주 씨, 오 씨, 정 씨, 왕 씨, 가릴 게 없소. 우두머리에게는 한 근 밥을 얻으면 반 근으로 효경하고 빵 한 덩어리를 얻으면 절반 가까이 드려야 하는 거요. 담배는 공손하게 올리고 돈은 늘 드려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매를 버는 거지요. 초짜들은 산과 같이 엄한 법규를 모르지요. 누가 이곳의 주인인지를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심해야지. 눈 뜬 장님인가, 보고도 모르면 안 되지. 상대를 보면 눈을 부릅뜨고 성을 내거나 표정이 엄숙하거나 얼굴빛이 위엄이 서려있지. 패왕의 기질이 없다면 왕의 기색을 갖추었지. 그런 사람을 만나거들랑 기민하게 곧바로 달려가서 절해야 해. 어디서 왔노? 그러면, 뒤쪽에 있습니다. 어떻게 대관원에 왔노? 그러면, 저는 못해먹어서요, 얻지를 못해서요, 어른께서 관대히 봐주시고 저를 받아주십시오. 허, 이 녀석 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