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이 늘 내 맘 같지는 않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자기 길을 가고 볼 일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전성기가 훌쩍 지난 릭 달튼은 끝내 퇴물의 마지막 행로인 이탈리아 ‘스파게티 서부극’에 출연한다. 그곳에서 지금 할리우드에선 받기 힘든 돈을 받고 결혼도 한다. 영화를 찍은 그는 친구이자 집사인 ‘스턴트맨’ 클리프를 해고한다. 그 무렵, 불행인지 행운인지 히피족들이 쳐들어온다.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한때 잘나갔지만 어느새 배우로서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오르막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지만 내리막길은 청룡열차처럼 정신없다. 달튼은 할리우드의 한 레스토랑에서 감독이자 ‘배우 중개업자’인 마빈 슈워츠를 만난다. 정리해고를 예감한 직장인이 헤드헌터를 만나 탈출구를 모색하는 장면이다. 혹시라도 우연치 않게 자신의 옆집으로 이사 온 스타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에라도 다리를 놓아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헤드헌터 슈워츠는 그런 동아줄은 내려주지 않는다. 대신 달튼에게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스파케티 서부극’에 출연하
영화의 스토리 전개 면에서 샤론 테이트의 역할은 의미가 거의 없다. 주인공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옆집에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기이한 동거를 하는 할리우드의 촉망받는 여배우일 뿐이다. 그럼에도 샤론의 등장 분량은 영화의 흐름을 끊어먹고 생뚱맞을 만큼 많다. 타란티노 감독이 의도했던 건 뭘까. ▲ 영화 속 샤론 테이트와 히피걸 ‘푸시캣’을 보여주는 장면은 의미하는 바가 많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속에서 샤론 테이트는 1969년 8월 8일 ‘그날’ 히피들에게 습격당한 릭 달튼의 ‘옆집 여자’였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론 1969년 ‘그날’ 찰스 맨슨을 추종하는 히피들에게 습격당해 밧줄로 목이 졸리고 온몸을 난자당해 죽은 여배우다. 영화와 실제가 달랐던 건 또 있다. 영화 속에선 히피 4명이 릭 달튼과 클리프(브래드 피트)에게 끔찍하게 죽지만 실제론 샤론 테이트와 4명의 동료들이 끔찍하게 죽어간 사건이었다. 할리우드를 사랑하는 타란티노 감독은 그렇게 끔찍하게 죽어간 샤론 테이트를 추모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참고: 영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소룡은 TV 드라마에서 그가 연기했던 ‘케이토’란 이름으로 불린다. 전성기가 지난 배우 릭 달튼은 한때 잘나갔던 배역 ‘카힐’로 기억된다. 어디 이게 영화 속 이야기만일까.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역할’일지 모른다. 당신은 이름으로 불리는가 직職으로 불리는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씨’라 통용되는가. ▲ 우리는 상대방을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역할’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장면❶ =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는 촬영장에서 무료하게 대기하던 중, 자신을 천하무적이라 떠벌리는 당대의 스타 브루스 리(이소룡)를 만난다. 클리프는 그를 ‘Bruce’라 부르지 않고 ‘케이토(Kato)’라고 부른다. 케이토는 당시 TV드라마에서 이소룡이 연기했던 천하무적 배역의 이름이다. 이소룡도
▲ 사이버 세계는 VR(Virtual Reality)의 세계다. 말 그대로 현실과 유사類似(virtual)한 세상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스턴트맨이자 운전기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클리프(브래드 피트)는 어느 날 촬영장에서 당시의 ‘핫’한 스타 이소룡과 만난다. 영화란 가상세계에서 이소룡은 천하무적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이소룡은 ‘알리도 이길 수 있다’며 허세를 떨고, ‘전쟁 영웅’ 클리프와 한판 붙는다. 현실세계에서도 이소룡은 무적이었을까. 릭 달튼과 클리프와 만났을 때 이소룡은 떠오르는 배우였다. 1960년대 인기 미드 ‘그린 호넷(Green Hornet)’에서 도시의 모든 악당을 족집게처럼 찾아내 ‘혼쭐’내주는 히어로 레이드(Reid)의 운전기사이자 이소룡표 쿵푸로 화끈하게 제압하는 일본인 조수 케이토(Kato) 역을 맡아 뜨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영화라는 ‘가상세계’에서 천하무적이라는 자신의 역할에 몰입한 이소룡은 클리프를 비롯한 스턴트맨들 앞에서 자신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문화충돌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듯하다. 1960년대 미국사회의 혼란기에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사회의 주류문화와 ‘히피’로 대표되는 미국사회의 비주류문화가 충돌한다. 그렇다면 히피의 반대주의(antism)는 1960년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문화충돌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듯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패권을 장악한 미국 사회는 자본주의 원칙이 우악스럽게 장악했다. 그 아래에서 과학기술 제일주의, 경쟁에 따른 성과주의와 업적주의, 금전만능주의, 문명을 향한 맹신에 가까운 찬양이 주류문화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이런 주류문화를 기반으로 사회는 극도로 보수화한다. 1960년대에 이르러 그에 따른 부작용과 반발이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1960년대 미국사회 주류문화에 불만 있는 모든 사람이 ‘히피’라는 빅텐트 속으로 들어오다 보니
‘once upon a time…’이란 문장은 대개 그 옛날의 신화나 전설을 퍼올리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우리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무릎에 앉히고 풀어내는 이야기 대부분이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단 이야기가 ‘옛날 옛날 한 옛날’이나 ‘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하면 ‘이건 구라구나’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역시 그렇다. ▲ 대선을 앞두고 소외된 계층이나 세대의 표심을 잡기 위한 각 대선캠프의 요란한 분석과 대응이 ‘찰스 맨슨 사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영화의 배경은 1969년 여름 할리우드에서 발생한 ‘맨슨 패밀리(Manson Family)’라는 광기 어린 범죄집단의 참혹한 살인사건이다. 맨슨 패밀리는 찰스 맨슨(Charles Manson)이란 희대의 이단자가 결성한 집단이다. 영화 속에서
영화 속에서 내리막길을 걷는 왕년의 스타 릭 칼튼과 그의 분신과도 같은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는 베이비 붐 세대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특히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히피족은 극혐한다. 그런데 모든 베이비 붐 세대에게 그런 건 아니다. 히피족과 똑같은 세대이지만 성공한 감독과 여배우에겐 존경을 보낸다. 성공한 사람의 곰보자국은 보조개로 보이는 모양이다. ▲ ‘성공’은 모든 비난의 화살을 막아주는 ‘아이언 돔(iron dome)’과 같은 역할을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 속에서 내리막길을 걷는 왕년의 스타 릭 칼튼과 그의 분신과도 같은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의 정확한 나이는 드러나지 않지만 대략 40대 중반에서 후반쯤 된 듯하다. 릭이 잘나갔던 시절은 19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클리프는 왕년의 전쟁영웅으로 등장한다. 그의 연배로 보아 그가 참전했던 전쟁은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은 아닌 듯하고, 그보다 앞선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이 아닐까 한다. 궁금하지만 감독이 얼버무리니 알 길이 없다. 영화의 배경인 1969년에 40대 중후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2019)’는 킬 빌(Kill Bill) 이후 잔혹하면서도 화끈한 복수극으로 명성을 쌓아온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9번째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2020년 92회 아카데미상에서 ‘기생충’과 경합하고 브래드 피트가 남우조연상을 수상해 친근한 작품이다. ▲ 세대갈등, 젠더갈등 등이 점점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사회문제가 돼가는 듯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타란티노 감독의 신작이라면 화끈하고 후련한 복수를 기대하고 마주하게 되는데, 기대와 달리 영화는 무척이나 ‘잔잔하게’ 흘러간다. 화끈한 ‘타란티노’를 향한 기대가 임계점에 도달하는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역시 타란티노’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날것’으로의 폭력이 화산처럼 폭발한다. 평범한 폭력과 살인이 아니라 타란티노류(流)의 ‘끔살’이다. 한물간 왕년의 스타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전속 스턴트맨이자 운전기사이며
영화의 배경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수우족의 근거지였던 지금의 사우스 다코타주와 미네소타주 어디쯤이 되는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862년 미국을 남북전쟁의 한가운데라고 기억하겠지만, 여기엔 다른 역사도 숨어 있다. ▲ 편견은 쉽게 ‘악마화’로 발전하곤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1862년. 미국 역사를 조금 아는 이들은 대번에 ‘남북전쟁’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1862년은 미국 선조들이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300년 가까이 계속된 인디언 전쟁(1622~1890년) 기간이기도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우족 대학살 연도도 1862년이다. 1860년대 미국은 대륙의 원주인을 완전히 축출하고 남북의 분열도 극복함으로써 세계 최강의 기틀을 다진다.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은 아마도 ‘미국 인디언=야만’이란 고정관념을 따르지 않은 거의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일 듯하다. 던바 중위가 내부자가 돼서 관찰한 인디언의 삶의 방식은 야만적이 아니라 대단히 문화적이고 합리적이다. 오히려 그 자신이 몸담았던 백인들
미국의 주(洲)와 도시 중 인디언 이름을 차용한 곳은 숱하다. 미군이 자랑하는 아파치 헬기도, 토마호크 미사일도, 미국 지프의 대명사 체로키도 사실 인디언 말에서 따왔다. ‘인디언’을 세상에서 사실상 없애버린 미국 백인들이 ‘인디언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뭘까. 우월감의 표징일까 인디언에게 보내는 오마주일까. ▲ 인디언을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것이 미국의 힘의 원천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세즈윅 요새에 홀로 부임한 던바 중위는 어느날 세즈윅 요새를 찾아온 ‘발로 차는 새’를 비롯한 수우족의 예고 없는 방문에 당황한다. 인디언 전쟁의 와중이다. 당연히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발로 차는 새’는 미군 던바 중위를 경계하지만 묻지 않은 채 달려들어 머리가죽을 벗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던바 중위의 커피 접대에 응한다. 처음 맛본 설탕 맛을 신기해한다. 던바 중위가 건네주는 설탕 봉지도 순순히 접수하고 돌아간다. 또한 며칠 후 다시 방문해서 설탕 선물의 보답으로 아무 말 없이 들소 가죽을 전달하고 돌아간다. 들소떼
던바 중위는 한밤중에 외로운 요새에서 홀로 잠들어 있다가 들소떼의 질주 소리에 잠을 깬다. 수우족 인디언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들소떼다. 인디언들에게 들소는 비에 버금가는 생명줄과 다름없다. 인디언을 몰아내려는 백인들은 이런 들소를 전쟁의 도구로 삼는다. 1860년대에 미국 대륙에서 들소 개체수는 이미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인디언들이나 백인들이 마구 잡아먹어서 아니라 백인들 ‘전략’의 희생양이 돼서다. 백인들은 온갖 당근과 채찍을 들이대도 자신들의 거주지역에서 물러나지 않고 저항하던 인디언의 특성을 알아냈다. ‘생명줄’인 들소떼가 사라지면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다는 거였다. 인디언들과 전쟁을 하기보다 들소를 몰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백인들의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둔다. 들소도 슬프고 인디언도 슬프다. 던바 중위는 한밤중에 말을 달려 인디언들에게 들소떼가 나타났음을 보디랭귀지를 총동원해서 알려준다. 수우족 인디언들은 환호한다. 곧바로 던바 중위를 앞세우고 전 부족이 들소 사냥에 나선다. 평원을 뒤덮은 어마어마한 들소떼를 발견하고 한 해를 넘기기에 풍족한 들소의 가죽
남북전쟁 중에 벌어지는 동족상잔에 질려버린 존 던바 중위는 어쩌다 영웅이 된 김에 사령관에게 특청을 넣어 ‘평화로울 것 같은’ 서부 지역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서부 지역의 평화는 던바 중위의 환상이었을 뿐, 그곳 역시 평화롭지 않다. 인디언들을 몰아내는 전쟁이 동부의 동족상잔보다 더 처절했던 시절이었다. ▲ 우리는 재일교포, 조선족, 사할린 동포라는 이름의 ‘그들’에게 적대적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존 던바 중위는 남북전쟁 당시 미국 영토의 가장 서쪽 지역인 사우스다코타 지역 사령부가 있었던 헤이스(Hays) 요새에 전입신고를 한다. 헤이스 요새의 사령관은 던바 중위를 관할지역의 세즈윅 요새에 발령한다. 헤이스 경찰서에 배속돼 세즈윅 파출소로 발령이 난 셈이다. 던바 중위는 동부전선에서 동족끼리의 학살에 염증이 나서 서부로 왔지만, 서부전선의 사령관 팜브로 소령은 인디언 학살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중이다. 팜브로 소령은 ‘전쟁영웅’이라는 던바 중위를 비웃는다. 묘한 표정으로 세즈윅 요새로 떠나는 던바 중위를 창밖으로 응시하다가 난데없이 &lsq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