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한필 객원논설위원/ 충청타임스 부국장 이순신 장군에게 1597년은 어떤 해였는가. 참담했다. 음력 2월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돼 서울로 압송됐다. 4월 풀려나 백의종군 길에 나섰다. 아산 고향집에서 어머니상(喪)을 당했다.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모두 잃었다. 10월엔 겉봉에 ‘통곡’이라고 쓰인 편지를 받는다. 갓 20살이 된 막내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불붙은 왜란은 이순신의 삶을 휘저었다. 왜적 속임수에 속은 선조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부산 앞바다에서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적진 앞 넓은 바다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적을 기다리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왕과 조정이 발끈했다. 유성룡까지 이순신을 비난했다. 선조는 1월 27일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며 통제사 교체를 결심했다. 이순신도 왕의 명령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 순 없었다. ▲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명량해전도 난중일기는 몇 개월 중단됐다가 옥문을 나
‘명량’이 대한민국 국민이면 꼭 봐야 할 영화가 돼 버렸다. 5000만명 중 1500만명이 이 영화를 봤다. 초고령층과 영유아를 빼면 국민 세 명 중 한 명이 본 꼴이다. 이 영화 한 편이 온 국민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되돌아 보는 계기를 갖도록 했다. 명량해전은 충무공에게도 벅찬 전투였다. 그는 난중일기에서 이 날의 승리를 “이는 진실로 천행(此實天幸)”이라고 결론지었다. 13척으로 왜선 133척과 대적했다. 좁은 물목이라 가능했다. 임진왜란 발발이후 연전연승을 거뒀던 충무공이지만 명량해전은 두려웠다. 전력상 너무 열세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전투였다. 부하들을 혹독하게 다그쳤다. 거제현령 안위가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왜선에 머뭇거렸다. 이순신이 다가가 소리쳤다.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간다고 살 것 같으냐.” 중군장 김응함에겐 “네가 중군장으로 대장(통제사)을 구하려 하지 않으니 그 죄를 면할 듯싶으냐. 당장 처형해야 하지만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마”라고 질타했다. 이 말을 듣자 두 사람은 적진으로 돌
민선 6기 제주도정이 출범한 지 이제 한달입니다. 이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 40 여개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옛날 나라의 지도자인 임금들은 세상이 흉흉해지고 백성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면 임금은 이를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돌려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에 석고대죄 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당시 지도자로서의 임금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원 도정은 제주 경제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도민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경제비전과 새롭고 과감한 성장전략을 마련해 강력한 추진력으로 제주 경제를 이끌고 가야 한다. 혁신적인 전략으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이전 세대로부터 넘겨받은 유산의 탕진과 더불어 빚더미를 우리의 자손 세대에 떠넘기게 될 뿐이다
민선 6기 제주도정이 출범한 지 이제 한달입니다. 이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 40 여개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제주 혁신, 도지사 본인과 주변 인물부터 먼저 해내야 ‘사회 지도층부터 바꿔달라는 국민 염원 들리는가’ 한 언론이 ‘국가 대혁신’에 대한 여론조사 후 내건 헤드라인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예상대로 사회 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국민은 사회 지도층이 보통사람들보다 무능하고 부도덕하며 전문성도 민간 부문보다 낮고 준법정신도 일반인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여기에서도 정치인과 공무원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서 어김없이 가장 꼴찌였다. 우리 사회의 공공성이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있다. 특히
▲ 조한필/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충청타임스 부국장 충남도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충남을 방문하면 기념품으로 ‘철화분청사기 어문병’을 선물할 계획이다. 도 관계자는 “교황의 검소한 이미지에 들어 맞고 충남을 홍보할 수 있는 대표적 기념품”이고 “물고기 문양은 풍요를 상징하며, 종교적으로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병이어는 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기적적 사건을 뜻한다. 그렇지만 교황 선물에 종교적 의미를 붙인다면 분청사기보다 옹기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더 소박·검소한 그릇인데다 특히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 역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주로 생업으로 삼았던 것이 옹기(질그릇) 굽는 일이었다. 교우들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며 생계와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택한 것이 서민들 그릇인 옹기 제작과 판매였다. 신자들은 파난처로 낯선 이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관군 습격이 있을 때 도주가 쉬운 곳을 골랐다. 여러 갈래로 도주
민선 6기 제주도정이 출범한 지 이제 한달입니다. 이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 40 여개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세월호 참사가 국가 혁신의 단초 제공해 원칙과 기본을 무시하고 변칙과 술수에 능한 사람들이 평가받는 한국사회의 민낯이 송두리째 실체를 드러냈다. 대한민국 시스템의 총체적 파산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동안 쌓이고 쌓여 누르고 눌려 있었던 비리와 부패와 허위와 관행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돌진형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절차와 과정은 무시한 채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성장 지상주의의 사회구조가 고착되면서 대형 참사는 예정되어 있었다. 성장 지상주의는 그 적폐를 은폐하는 가림막이었다. 그 여진이 아직도 깊게 이어지며
▲ 미국의 기록사진으로 본 한국전쟁. [National Archives]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1950년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대치했다. 하지만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북한군은 병력뿐 아니라 각종 탄약이나 보급품 지원에 애로를 겪기 시작했다. 때문에 북한군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피해를 무릅쓰고라도 정면공격을 감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 6·25전쟁에서 유엔군이 북한군에 공격을 먼저 시도한 첫 전투가 바로 ‘킨 전투’다. 이때 미 제 25사단은 병력 2만 4000여 명과 전차 101대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사단장의 이름을 따 ‘킨 특수임무부대(Kean TF)’로 명명했다. 이에 대적하는 북한군 제6사단은 병력 7500명 정도에 전차는 없는 것으로 추정됐다. 객관적인 전투력에서는 미군에 비해 상당한 열세였지만 그들은 산악 능선의 주요 지점을 장악하고 있다는 유리함이 있었다. 미군의 공격은 8월 7일 오전 6시 30분에 시작됐다. 그러나 산악 능선의 이점을 이용해 주요 목을 차단하고 있던 북한군에게 도로를 따라 공격하는 미군은 좋은 표적이 됐
공무원을 영어로는 public servant라고 한다. 공적인 머슴이니 곧 공복(公僕)이다. 조금 격상시켜 government official이라 쓰기도 한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서양에서도 당연히 시험을 친다. 오늘은 서양의 공무원 시험문제를 몇 개 입수해 풀어본다. 1번. 당신이 막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여자 분이 세금을 내러 들어왔다면 당신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If you are about to take your lunch break and a female taxpayer comes in, what should you address her?) (A)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Can I help you, madam?) (B) 저 쪽에 기다리세요. (Wait over there.) (C) 담당자가 출장을 갔네요. (The officer is out of town now.) (D) 점심시간이라 오후에 오세요. (It's a lunch time. So, please come again in the afternoon.) 정답은? 없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이므로 그 여자에게 말을 걸 필요가 전혀 없다. 시간에 맞추어 오지 않은 그 여자가 잘못이
제주도지사 선거가 끝났다. 새 인물이 취임하고 4년 동안 우리를 대표하여 제주도정을 이끈다. 새로운 미래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도지사 그러면 행정의 수반이라는 의미로만 여기게 되어 도백이라 하는 것이 친근하게 느끼는 까닭인지 ‘도지사’라 하지 않고 ‘도백’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때마다 이 명칭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궁금했다. 의미는 그 존재의 가치를 정하는 척도가 된다. 이름을 바로 세워야 의미가 곧게 되며 그에 따른 가치를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정명(正名)인 셈이다. 그래서 이 명칭의 유래와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어졌다. 먼저 ‘도백(道伯)’을 사전적으로 풀이를 하자면 ‘관찰사(觀察使)’를 한 도(道)의 장관이란 뜻으로 일컫는 말이라 돼있다. 그리고 덧붙여 ‘도지사(道知事)’를 예스럽게 일컫는 말이라 하였다. 관찰사는 감사(監司)․도백(道伯)․도신(道臣)․방백(方伯)․외헌(外憲)․도선생(道先生) 등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도백은 관찰사에서 비롯됐다는
▲ 제나라 '춘추오패' 환공(왼쪽)과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 영어 문맥에서 라이벌(rival)이라고 하면 선의의 경쟁자가 아니라 앙숙에 가깝다. 제주어로는 ‘돍광 지넹이’ 사이다. 사이가 이럴진대 감히 라이벌을 등용할 수 있는 포용력과 자신감을 가진 지도자는 흔치 않다. 2005년 미국의 사학자 도리스 굳윈(Doris Goodwin)은 책을 한권 펴냈다. “Team of Rivals"라는 제목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전기였다. 직역하면 “라이벌들의 팀” 정도가 될 것이다. 저자가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라이벌들을 내각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정치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투었던 정적(political opponents)들을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 재무장관(secretary of the treasury), 법무장관(attorney general) 같은 요직에 앉혔다. 가히 파격적인 인사였다.엄청난 반대에 대해 링컨은 이렇게 설득했다. “내각에는 당에서 가장 강한 분들이 있어야 합니다.
도지사후보마저 공항에서 발이 묶이던 2일 김포발 제주행 비행기는 한 대도 예외 없이 결항이었다. 암수술을 받은 아내를 동반하고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남편은 "5개월 전에 예약을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소리 나게 울먹였다. "서울에는 병원밖에 아는 곳이 없어 공항근처 찜질방에서 대기하겠으니, 제발 내일 아침에 비행기 좀 타게 해달라"는 남편은 새벽 3시부터 공항에서 대기하겠다고 사정한다. 그러고는 돌아서다가 갑자기 카운터로 다가가더니 "투표도 꼭 해삽니다. 제주도는 투표가 정말 중요해서 일부러 오늘 퇴원해수다"라며 제주도 사투리로 통사정을 한다. 다행히 새벽 6시 20분에 출발하는 첫비행기의 예약확인증을 받은 그는 상기된 얼굴에 안도의 웃음기를 머금었다. 어쩌면 투표보다 병색이 남아 있는 그의 아내를 위해 발휘된 순발력인지도 모르겠다. 온종일 제주도는 출발 133편, 도착 137편, 국제선 왕복 2편이 모두 결항돼 국내외 관광객과 도민 등 2만명에 가까운 이들의 발이 묶였다. 비좁은 제주공항은 오늘도 아수라장을 이루었을 것이다. 어쩌면 위급한 병이나 당면한 경조사, 사업이나 회의 등으
제주의 정치는 어떠한 감정을 담고 있었을까? 중앙정부가 제주도에 목사를 파견한 것은 고려 1295년(충렬왕 21)부터인 것으로 가늠된다. 이때를 기해 정부가 간헐적으로 제주를 집권해 왔으며, 이전에는 제주가 탐라국으로서 독립된 주권을 행사하였다. 참고로 탐라국(耽羅國)은 기원전 57년(탐라국왕세기에 의하면 기원전 2337년) 경에 시조 고을라왕(髙乙那王)이 세운 고대왕국으로 1402년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백제, 신라, 고려에 복속되었다가, 15세기 초반 조선에 완전히 병합됐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제주를 주호(州胡)라 칭한다. 기록된 바, ‘주호는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으로,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과 교역한’ 국가다. 조선이 건국된 후, 1397년(태조 6)에 제주목이 설치되었고, 이때부터 제주는 조선에 속한 영토로 중앙의 지속적인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하는 ‘탐라국 천년’의 역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문화재박물관). 홍순만의 ‘제주목사에 관한 서설’에 의하면, 조선시대(1392-1910)를 통틀어서 제주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총 286명에 달하며,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 정도다. 이는 미부임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