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를 보는 관점에 모순이 존재한다. 복잡하고 여러 특징을 가진 사람이 모인, 모순에 가득 찬,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구성원이기에 그렇다. 신비한 조합이 모순된 관점을 가지게 된 원인이다. 각양각색의 거지 유형을 식별하면 그 일부를 알 수 있다. 거지의 여러 가지 걸식 방법으로 분류하면, 거지를 크게 11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 첫째, 지팡이를 짚고 그릇을 들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동냥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론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다니면서 동냥하는 거지, 그 다음으론 큰소리로 ‘동냥 줍쇼’ 외치며 다니는 거지가 많다. 여기에는 네 가지 부류가 있었다. 동항(東項), 서항(西項), 홍항(紅項), 백항(白項)으로 구분된다. 억지 부리며 강압적으로 구걸하는 거지는 홍항이고 애걸복걸하며 구걸하는 거지는 백항이다. 동항과 서항은 어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둘째, 전문적으로 경조사를 거행하는 점포, 매장, 가정에 가서 금일봉을 요구하는 거지다. 거지에게는 근거지가 있었다. 자기 경계를 넘지 못했다. 다른 근거지에서는 구걸하지 못했다. 규정과도 같았다. 금일봉 액수의 대소는 큰일을 치루는 가정의 크기에 따라 달랐다. 이외에 거지는, 신부를 맞을
청나라 때 A현에는 거지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다. 집이 여러 채였다. 사람들은 ‘거지촌’이라고 불렀다. 끼어들기 좋아하는 호사가가 거지촌에 대련 한 폭을 선물로 보냈다. 상련은 “비록 관리도 장사치도 아니지만”이었고 하련은 “오히려 와호장룡(臥虎藏龍)의 안채다”이었다. 한 마디로 거지 집단의 구성원이 무잡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나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악행을 감추어주는 장소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복잡다단한, 비열함을 간직한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청나라 때 거지에 대한 허가(許珂) 부녀의 관점1)은 근래 사람들의 거지를 대하는 일반적인 인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인구가 나날이 증가하니 생계를 꾸리기가 갈수록 어렵습니다. 외국 상품은 시장에 가득하고 국내 상품은 배제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업자는 더 많아졌습니다. 만약 국가 이익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멍을 막지 않는다면 나라는 더욱 빈곤해질 것이요, 백성도 더더욱 곤궁해질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런 지경이 계속되면 민족 공업은 쇠락하고 일용품조차 외국 상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전국이 거지가 되는 국면을 변화시키기 어렵게 됩니다.” 그녀가 집안
거지라는 이름으로 사기 치거나 도둑질하거나 건달이 되는 등 사회 치안을 해치는 범죄행위를 자행하는 사람이 많았다. 송나라, 원나라 이래로 그 해로움은 극심해 졌다. 화갑이 넘은 늙은 거지 노파가 사기에 골몰하기도 하였다. 청나라 말기에 항주(杭州)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당시 항주에는 야간에 승객을 태워 강을 건네주는 선박이 있었다. 한밤중에 100리를 가는데 남녀가 뒤섞여 건넜다. 남녀 승객이 머무는 칸 사이에는 판자 하나가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인화(仁和)현(縣)1)에 풍류를 즐긴다고 자처하는 장(張) 씨 성을 가진 경망스러운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소년이 배를 타고 부양(富陽)으로 가고 있었다. 옆 칸에서 자신에게 웃는 듯 마는 듯 주시하는 여인이 있었다.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아니면 뭐겠는가. 밤 12시 경이 되어 승객 대부분이 잠을 청할 때였다. 장 씨 소년은 판자 너머에서 자신의 하체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소년은 기뻐 아예 양물을 꺼내 어루만질 수 있게 하였다. 손을 뻗어 상대를 만졌다. 여인이 틀림없지 않은가. 몸을 일으켜 상대를 덮쳤다.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운우의 정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닭
한자어 ‘걸개(乞丐)’의 여러 명칭을 보면 거지의 본래 뜻은, 재물을 동냥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극빈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동냥하는 사람이 극빈자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부자도 기꺼이 빌어먹었다.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청나라 때에 상해(上海) 가정(嘉定)현 남쪽에 유명한 사찰 명칭에 따라 이름 붙여진 남상진(南翔鎭)이 있었다. 진의 동쪽에 큰 부자라고는 할 수 없어도 넉넉한 토지와 부동산을 가진, 그리 부족함이 없는 중산층 가정이 있었다. 자식과 며느리도 있어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홀연히 집을 떠나 거지가 되었다. 집안사람들이 그를 강제로 집에 끌고 가서 애걸복걸하며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그의 족제의 집안도 부유하여 그에게 100묘(畝)의 전지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가 가진 전지도 2경(頃, 약 2만여 평)이 넘으니 100묘를 더한다면 의식주에 걱정이 없었지만 그는 한사코 응하지 않았다. 부모도 외아들인 그에게 사정사정했다. 그는 부모에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천하에 거지가 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사해를 집으로 삼아 빌어먹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미 제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두 분께서는 손자를 곁에 두고
옛 한어(漢語)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단음사(單音詞), 즉 한 글자가 한 단어가 되는 경우가 많아 지극히 간략하였다. 거지의 뜻인 ‘걸개’를 ‘개(丐)’라고만 부른 고대 문헌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하급 관노, 머슴, 거지〔개(丐)〕 모두 부모의 무덤에 가서 성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거지〔개(丐)〕 무리가 에워싸 절하며 구걸하였다”1)라고 했는데 거지를 ‘개(丐)’ 한 글자로 표현하였다. 현대 한어뿐 아니라 청나라 말기 이전에 거지에 대한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책에는 ‘걸인(乞人)’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였다. “발로 차면서 주면 걸인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음력 11월에 걸인을 만나면 저고리를 벗고 그와 함께 하였다”, “만승의 주인은 길 위의 걸인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2)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어떤 책에는 ‘걸아(乞兒)’라고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범(范) 씨 문도가 길에서 걸아, 마의(馬醫)를 만나면 모욕을 주지 않았다”, “육장 옆에 파리매 모여들어 우레처럼 시끄럽고 걸아들이 다투어 짊어지고 사그라진 재로 향하네", “패루(牌樓) 높이가 20장 … 밑에 걸아 수백이 거처한다”3)라는 구절이 보
거지는 ‘남에게 빌어먹는 사람’이다. 한자어 개걸(丐乞), 걸인(乞人), 걸개(乞丐), 유개(流丐), 유걸(流乞), 화자(花子, 化子)가 같은 말이다. ‘거지’의 옛말인 ‘것 ㅸㅏ Δㅣ’는 15세기 문헌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거지’는 한자인 ‘걸(乞)’과 ‘어치’가 결합한 말로 ‘거러치’, ‘거러지’, ‘거어지’로 변했다1)고 해석하기도 한다. ‘빌어먹다’는 ‘돈이나 곡식, 물건 따위를 거저 달라고 빌다’ 뜻이다. 같은 말은 ‘구걸(求乞)하다’, ‘걸식(乞食)하다’, ‘동냥하다’이다. ‘동냥’은 ‘동령(動鈴)’이라는 불교용어에서 왔다. 동령은 번뇌를 깨뜨리고 불심을 강하게 일으키기 위해 흔드는 도구다. 여러 불교의식은 물론 스님이 걸식 수행의 한 방편으로 탁발하는 과정에서도 흔들었다. 이 동령이라는 말에 ‘거지 등이 구걸하는 행위, 또는 그렇게 해서 얻은 물건’이라는 속된 의미가 결부되었다. ‘동녕’을 거쳐 ‘동냥’이 됐다는 해석이다. 빌어먹는 사람의 상황이나 방법은 여러 가지가 뒤엉키어 복잡하다. 임시방편으로 시장 거리나 가게, 골목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기적으로 걸식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거지 신분으로 구걸은 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정말 쉽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라는 생각만 하면 된다. 어떤 사람도 나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는 생각만 하면 된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사람답게 사는 게 그리 쉽지 않다. 왜 그럴까.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 까마득히 오랜 세월 저편에서부터, 나만 살아남아야 하고 나만 더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유전자에 박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정과 학교, 나아가 사회에서 끊임없이 무한 경쟁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거기에 인격, 상식, 이성, 합리, 교양, 예의, 정서 등, 가장 인간적인 인간성보다는, 생존과 그에 대한 맹목만을 키워왔기 때문은 아닐까. 출세와 소유에 대한 집착과 강박에서, 잠시만, 아주 잠깐만이라도 벗어나본다면, 세상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볼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존, 이 단어를 떠올리면 ‘거지’〔걸개(乞丐)〕가 어른거린다. 거지를 알면 사회의 일면을 알 수 있다. 부자 동네에는 구걸하는 거지가 없다. 동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자보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동정심이 더 많다. 가난한 사람이 거지에게 더 동정심이 많다는 얘기다. 제2차
물론 시간은 늦을 때가 있고 빠를 때가 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시작점은 절대 늦거나 이른 때가 없다. 당신이 얼마를 잃었던지 당신이 그때 일어서기만 하면 그때가 새 삶을 얻는 시기다. 당신이 끝까지 견지해 나가기만 하면 인생의 밝은 문이 마침내 당신에게 열릴 것이다. “영원히 태만(怠慢)하지 않는다.” 이 신념이 천뢰(天籟)의 소리 같다면 수몰돼 있는 마음을 고취시켜 광명을 얻게 할 것이다.‘ 『주역』은 말한다. “‘곧으면 길하여 후회가 없어짐’은 뜻이 행하여진 것이다.” 정도를 지키면 길하다. 회한(悔恨)이 없어진다. 뜻이 실현된다. 일단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젊음이 한 번 가버리면 보충할 수 없다. 시기를 한 번 놓쳐버리면 되돌린 방법이 없다. 회한이 밀려오면 없애기 힘들다. 그렇기에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는 삼가고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야 한다. 그러면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없다. 현실생활에서 잘못된 일을 한 후 각성하여서는 자신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질책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에게 징벌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 고통스럽고 부끄러워하며 한탄하고 번뇌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정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 미제괘(未濟卦) 미제(未濟)는 아직 강물을 건너지 못한 것이다. 성공의 길에서 좌절을 맛보았을 때에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상심해서는 안 된다. 신념을 가져야 한다. 충만한 희망이 있어야 한다. 절대 나태해서는 안 된다. 한스러운 생각을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여 최후의 승리를 맞이하여야 한다. 몸과 마음이 태만하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인생이란 여행길에 서있는 사람은 누구나 필사적으로 싸운다. 공부에 심혈을 기울여 좋은 대학을 가려는 사람도 있고, 열심히 일하여 승진하고 좋은 월급 받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기능을 익혀 타인과 높낮이를 겨루려는 사람도……. 『주역』은 말한다. “미제(未濟)는 형통하니, 어린 여우가 거의 건너서 그 꼬리를 적시니, 이로운 바가 없다.” 무슨 말인가? 아직 일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계속해서 노력하여야 하고 끝까지 견지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어린 여우가 강물을 건너고 있다. 꼬리가 젖었다. 어쩌면 강 중앙에서 헤엄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좋지 않다. 그렇더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 멈추는 날에는 물에 빠져 죽기 십상이다. 그렇다. 꼬리가 젖은 여우가 강 중앙에서 멈추면 익사한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할 때 도중에서
마찬가지 이유다. 위기와 위험의 소멸은 이르면 이를수록 주동적 통제권을 얻을 수 있다. 전면적으로 맹렬하게 폭발하기 시작하면 위세는 이미 완성된 상태다. 그때에는 아무리 큰 힘이라도 국면을 만회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기에 시시각각 그 위기와 위험의 요인과 싹을, 진정으로 심혈을 기울여 통찰하고 예견해야 한다. 일단 요인과 싹을 발견하면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뿌리를 제거하고 완치시켜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거안사위’하지 못한다. 병이 난 후에 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쓴 약을 먹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 지금 쓴 약을 먹지 않으면 이후에 이보다도 더 쓴 일을 맛봐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직 병이 나지 않았을 때 의사가 이후에 병이 생길 수 있다고 쓴 약을 먹으라고 할 때에, 그럴 때에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십중팔구는 거절할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는 사람에게 의사가 건강에 좋지 않다고 권하면 끊어야 옳다. 그런데, 우리는? 결국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 술과 담배가 내 건강에 무슨 그리도 해가 된다고? 담배 피고 술 마시는 사람도 오래 살기만 하더구먼. 삶이 힘든데 술과
◆ 기제괘(旣濟卦) 기제(旣濟)는 이미 물을 건너 성공을 거뒀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성공도 실패의 어머니이다. 성공은 쉽지 않다. 성공하면 성과를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편안한 처지에 있을 때에도 위험할 때의 일을 미리 생각하고 경계하여야 한다.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여야 한다. 위기가 감춰져 있으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가는 길이 험하다.〔행로난(行路難)〕 인생의 길은 더 험하다. 인생은 바둑과 같다. 바둑 하나하나가 서로 연관돼 있다. 한 고리 한 고리 서로 꿰어 있듯이 한 단계 한 단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한 수에 전체가 엮어진다. 그렇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성공은 더더욱 어렵다. 영원히 보장되는 성공이 어디에 있으며 상존하는 청춘이 어디 있겠는가. 어렵고도 어렵다. 풍랑이 일지 않고 고요할 때, 무사 평온하고 일이 원만히 해결되어 유유자적할 때에는 위험할 때의 일을 미리 생각하고 경계하여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남이 고생해서 얻은 성과를 누려서는 안 된다. 자만하거나 나태해서는 안 된다. 삼가고 신중히 행해야 한다. 『주역』은 말한다. “조금 형통하고 곧음이 이롭고, 처음에는 길하고 끝에는 어지럽다.” 무슨 말인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융통성 하나 없이 일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여 나아가야 한다. 통념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일도 실제로는 정확할 경우도 있다. 작은 잘못은 인정하여야 한다. 작은 과실이 없이 어찌 일할 수 있겠는가. 작은 과실이 큰일을 성공케 하는 경우도 있다. 잘못은 영원하지 않는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시기에 적절치 않아 당시에는 맞지 않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타인에게 위해를 주지 않는 잘못이라면 나쁜 일이라고만 봐서는 안 된다. 한 번도 실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쉽게 실수한다. 나이가 어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기에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예를 들어 조심하지 않아 물건을 깨뜨리거나, 일시적 충동으로 타인에게 상처 주거나, 세심하지 못하여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그러한 일이 발생한 후에 아이가 고민하고 반성해서 결심을 한다면? 다음에는 조심한다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어 문제를 해결해 낸다면? 그렇게 도리를 깨닫고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일 수 있다. 1920년 미국, 11살 난 소년이 공을 차다가 실수로 이웃집 유리를 깼다. 이웃은 12.5달라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