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 양제(煬帝 569-618) 양광(楊廣), 수문제의 아들로 12년 동안 재위했다. 즉위 후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켰다. 궁전을 건축했으며 운하를 파고 황제의 전용도로를 건설했다. 모든 공정에 인력과 물자를 너무 많이 소모해 국운이 점차 쇠했다. 도처에서 봉기해 결국 수 왕조는 멸망한다. 그는 강도(江都)에서 금군(禁軍)장군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해 목 졸려 죽었다. 일설에는 부친 수문제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고 하기도 한다. 수나라는 단명한 왕조다. 2세까지 전후 37년밖에 되지 않았고 문제나 양제 모두 비명횡사했다. 그래서 능묘의 규모에 있어 진한(秦漢) 능묘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한당(漢唐)의 황릉처럼 그리 장관도 아니다. 그리고 수양제의 능묘도 수양제를 안장한 묘지가 아니다. 그가 난세에 죽었기 때문에 몸과 머리가 다른 곳에 묻혔다. 현재의 능묘는 후세에 만든 것으로 황음무도했던 양무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수양제는 대단한 폭군이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데에만 눈독을 들였다. 성격이 잔혹하고 주변 나라들에 자신을 과시하는 데에 힘을 쏟아 주변 민족들에게 부귀만을 자랑했다. 수양제의 추악함과 폭정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
수(隋) 문제(文帝 541-604) 양견(楊堅)은 수 왕조를 건립했다. 581년에서 604년 재위했던 홍농(弘農) 화음(華陰, 현 섬서[陝西]) 출신이다. 북주(北周) 시기에 재상을 역임했고 대정(大定) 원년(581)에 정제(靜帝)를 폐하고 황위에 올랐다. 개황(開皇) 7년 후양(後梁)을 멸하고 이듬해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조 대립 국면을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재위 시 농경을 제창하고 관제를 고쳐 나라가 흥성했다. 인수(仁壽) 4년(604)에 죽었다. 태자 양광(楊廣)에 의해 피살됐다고 하기도 한다. “아내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현대인들이 농담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남자들이 자기 부인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봉건통치 시기가 부권 위주의 시기였기에 여인들은 가정에서 이렇다 할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중국어에 ‘嫁鸡随鸡,嫁狗随狗(가계수계,가구수구)’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른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여자는 출가 후에 싫든 좋든 일생토록 남편을 따라야 했다. 당시 남자는 한 집안의 주
고대 서역의 누란 왕국은 기원전후 비단길에 번성했다. 교역의 중심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국도는 누란성(현 위구르 로프노르 서북 공작하(孔雀河) 북쪽 기슭)이다. “사자(使者)들이 길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낙타 방울소리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방울의 물처럼 뜨거운 태양 속으로 증발해 버렸다. 1980년 4월 위구르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팀이 ‘새도 날지 않은 황사’ 속의 로프노르에서 탐사하다가 옛 누란 왕국의 철판하(鐵板河) 삼각주 지역에서 3800년 전의 여자 시신을 발굴해냈다. 미라 상태였다. 얼굴은 청수하고 짙은 눈썹에 큰 눈을 가졌으며 코가 높고 움푹 들어간 눈은 살포시 감고 있었다. 뾰족한 턱, 얇은 입술. 피부는 고동색이요 길고 긴 속눈썹, 몸에는 솜털이 나 있었다. 고고학자들이 그녀의 얼굴과 팔다리를 만져보니 탄력이 있었다. 황갈색의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땋아 어깨 위에 보풀보풀 드리워져 있었다. 머리에는 전모가 씌워져 있었다. 전모에는 기러기 깃털이 꽂혀 있었다. 상체는 직조된 모포로 감싸 있었고 가슴께 모포는 뾰족하게 깎
누란(樓蘭, Loulan)은 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 로프노르(방황하는 호수로 불렸던 내륙호) 주변에 번영했던 고대 왕국이다. 본래는 크로나이나(Kroraina)를 국명으로 했다. 누란은 중국어의 와전이라고 한다. B.C 2세기부터 그 존재가 알려졌다. 흉노와 한족 세력 간에 끼어있으면서도 교통로상의 중요성 때문에 번영을 구가했고 독자적인 문화를 쌓았다. 중앙아시아의 원주민과 티베트계와 이란계의 혼혈민족으로 그 위에 인도계의 지배층이 있었다고 한다. 누란 고성(古城)의 흥망성쇠는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란 오아시스는 왜 쇠퇴했는가? 누란 고성의 흥망성쇠는 어떻게 된 것인가? 누란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이런 문제는 천년을 내려오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누란은 신강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어 지세가 험하고 모래언덕이 종횡으로 교체한다. 풍식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야르당(Yardang)’이 파도처럼 펼쳐져 있다. 주변에는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담황색이요 담회색의 모래바다다. 생명이란 찾아보기 힘든 황량하고 적막한 세계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없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467-499)인 탁발원굉(拓拔元宏)은 탁발홍(拓拔弘)의 장자다. 재위기간 중 문치를 행했고 한족의 재원들을 중용하여 정사에 대해 질의했으며 여러 사람의 건의나 의견에 대해 언제나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독서를 즐겼다. 학식과 식견이 풍부해 통치기간 중 국가는 점점 부강해 졌다. 나중에 여러 차례 제(齊)를 공격했는데 군중에서 병사했다. 재위기간은 29년이다. 제왕(帝王)의 사랑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서한(西漢) 성제(成帝)와 조비연(趙飛연), 당 현종과 양귀비, 송 휘종(徽宗)과 이사사(李師師)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북위 효문제 탁발원굉과 풍(馮) 씨의 사랑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효문제가 친정 후에 계속 풍태후가 추진하던 개혁을 진행하고 선비(鮮卑) 성씨를 한족의 성씨로 바꿨으며 복식을 한족화하고 낙양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던 선비족들이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습속을 일신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효문제가 애정 생활에 있어 곡절을 겪은 것은 빛나는 업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일찍이 효문제는 임(林)
유욱(劉昱)은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463-477년)로 중국 남북조 시대 유송의 제8대 황제(재위 472-477년)다. 자는 덕융(德融)이며 소자(小字)는 혜진(慧震)으로 명제의 맏아들이다. 폐위당하여 시호가 없는 대신 후폐제(後廢帝)로 불린다. 창오왕(蒼梧王)으로 강등당해 창오왕으로도 불린다. 포악한 황제여서 그를 폐위하려고 몇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다. 제4대 황제 효무제의 28명의 아들 중에 아버지 명제가 황족 16명을 죽였고 남아 있던 황족 12명은 그가 모조리 죽였다. 15살 때 내시에게 피살당했다. ‘부복관태(剖腹觀胎)’는 칼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관찰하는 행위를 말한다. 현대인들도 이런 방식으로 임신부를 위해 태아를 검사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중국 고대에 기록돼 있는 잔인무도한 혹형(酷刑)이다. 남송(南宋) 시기의 황제 유욱은 상(商)나라 주(紂)와 같은 폭군의 대명사이다. 그는 포악하기 그지없었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잔혹 무비했다. 살인을 좋아하고 매일같이 거리로 나와 흉기를 가지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살인을 하지 않았던 날은 괴로워했었다고 한다. 한 신하가 간언을 하자 옆에 있는 다른 장수에게 명해
중국 고대 문인들의 취미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금기서화(琴棋書畵)’ 네 가지를 생각한다. 이것은 고대 문인들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외에 ‘휘파람’도 중국 고대 문인들의 취미 중 하나였다. ‘嘯(소)’라 하는데 ‘취성(吹聲)’(『설문』)으로 우리가 흔히 부는 ‘휘파람’이다. ‘휘파람’은 고대 문인 명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진(魏晉) 시대는 휘파람을 부는 풍조가 성행해 명사가 되기 위해 갖춰야할 아취(雅趣)였다. 완적(阮籍)은 위진 시기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명이었다. 완적이 휘파람 불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벽돌에 새겨진 그림뿐만 아니라 역사서에도 기록돼 있다. 『진서․완적전』에 소문(蘇門)에서 손등(孫登)을 만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완적이 손등과 학문을 논하려 했지만 손등이 응하지 않자 “완적은 휘파람을 불고 물러났다. 고개를 반쯤 내려왔을 때 난(鸞)새와 봉황의 소리가 들렸다.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손등의 휘파람 소리였다.” 이렇게 보면 손등의 &lsq
‘위진풍도(魏晉風度)’를 ‘위진풍류(魏晉風流)’라 하기도 한다. 중국 위진 시대 명사들의 품격과 도량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위진 명사들의 주정주의(主情主義)적 특성을 잘 반영한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대 문인이 즐겼던 ‘풍류’의 경지를 이해하려면 위진(魏晉) 시기의 문인들, 특히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이야기해야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위진 시기의 청담(淸談)과 유명한 청담가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이는 3, 4세기 ‘풍류’를 신봉하는 인물들을 묘사했다. 유영(劉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영은 늘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한다. 어떤 때는 방에서 알몸으로 있기도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그를 놀리자 유영은 ‘나는 하늘과 땅을 집으로 방을 속옷으로 하거늘 당신은 어찌하여 나의 속옷으로 들어오는 것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영은 쾌락을 추구했지만 일상적인 것을 초월했다. 이런 초월성을 가지고 있고 도가학설의 양심(養心), 즉 현심(玄心)을 가진 자는 반드시 쾌락에 대해 묘한 감상 능력을 가지고 있어 우아
도연명(陶淵明 : 365-427)의 자는 원량(元亮), 이름은 잠(潛)이다.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五柳)선생이라 칭하기도 했다.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사람이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됐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했다.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팽택현(彭澤縣)의 현령 직을 사임한 후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고 향리의 전원으로 퇴거했다.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해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했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 무릉(武陵)이란 곳에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작은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복숭아나무 숲에 들어서게 됐다. 숲은 강의 양쪽 기슭 안쪽으로 수백 걸음에 걸쳐 이어져 있었고 잡목 하나 없었다. 향기로운 풀이 싱싱하고 아름다웠으며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러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부는 무척 기이하게 여겨 다시 앞으
사마염(司馬炎 : 236-290)은 사마소(司馬昭)의 아들이요 사마의(司馬懿)의 손자다. 265년 아버지가 죽자 진왕(晉王)과 상국(相國)의 자리를 물려받고 부조(父祖)가 다진 세력에 힘입어 위(魏)나라 원제(元帝)의 선양을 받아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역사에서 말하는 서진(西晉)이다. 280년 남아 있던 오(吳)나라의 항복을 받아 천하를 재통일했다. 점전법(占田法),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고 세법으로서 호조식(戶調式)을 공포했다. 사회적으로는 세족(勢族)이 가난한 백성을 압박하는 귀족제의 모순이 강화됐고 북방 이민족의 침입도 시작됐다. 위나라가 종실(宗室)을 너무 억압해 왕실을 고립시키면서 실패를 자초했던 사실을 거울삼아 일족을 국내 요지의 왕으로 봉하고 병력을 맡겼는데, 이는 아들 혜제(惠帝) 때에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태시(泰始) 9년 사마염은 조서를 내린다. 공경(公卿) 이하 대신들 집안에 결혼 연령이 된 소녀들은 먼저 입궁해 간택에 참가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이듬해 간택 대상의 범위를 경성 내외의 부상(富商)과 궁중 관리들에게 까지 확대했다. 더욱 황당한
중국 한족 사찰에는 일반적으로 네 분의 보살을 모신다. 문수사리(文殊師利), 보현(普賢), 지장(地藏), 관세음(觀世音)이다. 불경에서는 관세음을 대자대비 보살이라고 한다. 고난에 시달리는 백천만억 중생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그 이름을 염송하기만 하면 “관세음보살이 즉시 그 소리를 듣고 해탈할 수 있다”는 데서 연유했다. 일반인의 마음속에 보살은 거의 남성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유독 관음보살만은 중국에서 ‘娘娘(낭랑, 여신)’으로 불린다. 왜 그럴까? ‘娘娘’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원칙대로라면 ‘낭랑’이라 불리기 때문에 분명 여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가 경전의 소개에 따르면 관음은 육관음, 칠관음, 삼십삼관음 등 총체적 명칭 외에 불교 중 현교(顯敎)의 일파에서는 아미타불의 제자로 여기고 있으며 밀교(密敎) 일파에서는 아미타불의 좌우에서 모시는 협사(脇士)로 여기고 있다. ‘제자’든 ‘협사’든 모두 여성에 대한 칭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관점에서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관음상은 대략 남북조시대에 시작돼 당나
중국 역사상 많은 황제들은 독실하게 불교를 믿었다. 불교에 귀의한 황제와 비(妃)도 한 둘이 아니다. 가장 유명한 출가 황제는 청나라 순치(順治) 복림(福臨)이다. 중국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武則天)도 비구니로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북조(北朝) 중후기 100여 년간 제후 17명이 출궁해 비구니가 된 것처럼 중국 불교역사상 전무후무하고 기이한 현상은 없다. 불교는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 낙양(洛陽)으로 전래되기 시작해 한나라 말기 조위(曹魏) 시기에 하남(河南) 지역에 초보적으로 전파됐다. 서진(西晉) 16국시기에 빠르게 전 지역으로 전파돼 흥성하게 되고 북위(北魏) 시기에 극성하게 됐다. 당시 탁발규(拓跋珪)는 외숙 모용수(慕容垂)의 도움을 받아 대국(代國)을 세우고 나중에 위(魏)라 개칭해 북위 왕조의 창시자가 됐다. 이후 외숙과 전투 중 어렵사리 우위를 점했고 또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연조(燕趙, 현재 북경[北京], 천진[天津] 북부와 산서[山西], 하남[河南] 북부, 내몽고[内蒙古] 남부의 하북[河北] 지역을 포함한다) 지역을 공략했다. 연조는 중원지역으로 비교적 문화가 발달돼 있었고 풍속과 자연환경이 탁발 씨의 대막 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