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종결된 듯이 보여도 끝나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있다. 다 지난 과거의 일로 보이더라도 실상은 여전히 현실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일 수도 있다. ‘제주의 물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민선 1기 취임식을 마친 뒤 그의 재임시절 발매가 시작된 관광복권을 구입, 펼쳐 보이고 있다. 1996년 한진그룹 고 조중훈 회장과의 만남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그해 9월 말 조 회장과의 만남 직후 며칠 지나지 않아 제동흥산(현 한진그룹 계열 (주)한국공항의 전신) 측에선 공개적인 반응이 나왔다. 유상희 제동흥산 대표 등 임원이 공개기자회견을 통해 생수시판 의도가 전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제주도의회에도 출석, 그 내용을 공언하기도 했다. 제주지방개발공사의 생수공장은 1996년 11월26일 착공했다. 기공식이 있던 날 날씨는 매서웠다. 칼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현지주민을 포함해 1천여명의 하객의 몰려 ‘제주삼다수’의 앞날을 축하했다. 감개무량했다. 더욱이 공장이 세워지는 조천읍 교래리 산 70번지는 법정소송까지 갔던 한진그룹의 제동목장과 마주한 곳이다. 묘한 인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제
▲ 양성철/ 발행.편집인 제주엔 2개의 물공장이 있다. 한 곳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고, 또 한 곳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있다.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공장은 제주도 산하 지방공기업인 제주지방개발공사가 가동하는 공장이다. 또 한 곳은 한진그룹 계열사인 민간기업 (주)한국공항이 운영하는 곳이다. 한 곳에선 ‘제주삼다수’란 브랜드의 생수를 만들고, 또 다른 곳에선 과거 ‘제주광천수’란 이름에서 지금 ‘한진제주퓨어워터’로 이름을 바꾼 생수를 만든다. 교래리 공장은 1996년 문을 열었고, 가시리 공장은 그보다 앞서 12년 전인 1984년 문을 열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란 주소만 놓고 보면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생각되지만 현장에 가 보면 바로 이웃이다. 교래리 공장이 해발 420m고, 가시리가 해발 320m로 100m 차이가 날 뿐 두 공장 간 평면거리는 사실 1km 남짓이다.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지하에서 끌어올리는 물 자체도 같은 수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두 곳의 물공장은 운명적으로 신분이 다르게 태어났다. ▲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좌)와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가시리 물공장
▲ 서귀포소방서 대륜119센터 김문규 소방위 비상구는 건축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외부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문을 소홀히 생각해 대형인명피해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얼마 전 부산노래주점에서의 화재 발생으로 9명이 숨지고 25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해 주의를 안타깝게 했다. 이번 참사도 외부로 통하는 비상구 통로공간(부속실)을 영업용 시설로 불법개조 하고 2개의 통로에는 술박스 등을 쌓아놓는 바람에 인명피해가 더욱 커졌다. 보통의 경우 주 출입구 반대편에 비상구가 위치해 화재 발생시 안전하게 대피 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구를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건물관리자 및 다중이용업소업주등의 주의 깊은 관리가 필요하다. 평상시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류박스 등 적치물 및 장애물을 쌓아놓는 행위는 절대 금해야 할 것이다. 또한 비상구를 폐쇄 및 훼손 행위는 명백한 위법행위이다. 사막에 사는 미어캣 같은 동물은 뱀등 천적의 공격을 대비해 땅속에 굴을 팔 때 입구로부터 반대편이나 다른 방향으로 통로를 미리 만들어 놓는다. 만약에 천적이 침입하였을 때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위한 동물들의 지혜인 것이다. 비상구 통로 상에
1995년 첫 민선 지방선거인 6·27 선거에서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로 당선됐다. 진정성을 이해해 준 도민들이 무한히 고마운 것도 있지만 사실 당시의 당선은 검찰이 꽤 도와준 측면이 있다. 지금도 억울한 일이지만 그 당시 제주지검은 얼토당토 않은 사건을 엮어 사전선거운동으로 나를 기소했고, 그로 인해 오히려 도민들은 분노했다. 그런 제주도민의 감정이 오히려 나의 득표를 도운 기현상으로 뒤바뀐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차후 다루려 한다. 그보단 취임 이후 불거진 ‘물’에 얽힌 비사(秘事)를 이제 밝히려 한다. 6·27 선거에서 당선되자마자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공약으로 내세운 ‘제주공기업 발(發) 생수사업’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어느 날 점심 무렵 한진그룹의 소유하고 있는 제동목장 안의 별장으로 초대를 받았다. 조 회장 부부와 그의 장남 조양호(현 한진그룹 회장), 그리고 우리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맞댔다. 당선 축하와 더불어 ‘잘해보자’는 덕담이 오고 갔다. 더욱이 그는 내가 관선지사로 재임하던 1995년
‘부모 형제, 친구, 일거리 등등 너의 모든 것이 다 있는 서울을 놔두고 왜 제주도까지 오게 되었니?’ 내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떠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딱히 대답할 무엇이 떠오르지 않아 ‘섬이 그곳에 있으니까’ 하면서 트럭 같은 내 승용차를 떠올립니다. 아무 데서나 짐칸에 드러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자며 샀던 심신치유용의 자동차. 그러나 사 놓고 한 번도 그 산 목적대로 써보지 못했는데, 제주섬을 대충이지만 한 바퀴 둘러보고는 여기에 내 차가 적격이다, 싶었고 제주섬 초원에서의 밤하늘을 대낮에 상상하며 섬으로의 이주를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감상은 대체로 막연해서 실속을 챙겨주지 못 하는가 봅니다. 꼭 한번 그 목적으로 차를 몰고 나왔던 날, 엄청 불어대는 바람이 나의 소망과 희망을 한 순간에 날려버렸습니다. 눈 앞으로 제주목장이 훤히 트이는 교래리 근처에 차를 정박시키고 ‘saddle the wind’를 크게 틀어놨습니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둠보다 먼저 찾아와준 것은 바람. 태풍과도 같은 돌풍이었습니다. 어찌나 센지 노랫가락까지 심하게 요동을 쳐서 들어줄 수 없는 바이브레이
▲ 이기승/ 제주특별자치도감사위원회 감사위원, 전 연합뉴스 편집국 부국장, 제이누리 자문위원 신디 류(본명 金信姬) 워싱턴주 하원의원(민주.32선거구)님. 우선 저희 제주특별자치도감사위원회 미국 감사제도 비교연수단 일행의 미국 체제 기간 중(5월31일-6월9일) 베풀어준 지원과 협조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현지에 있을때 그 고마움을 마음으로 몸으로 느끼면서도 미련한 탓에 고마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귀국 후 하원의원님께 감사 편지를 쓰려다 불현듯 ‘어쩌면 우리의 하루 하루 일상이 역사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이 공적인 일일 경우 더 그럴 것이다’는 생각이 들어 언론을 통해 고마운 뜻을 담은 공개편지를 씁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미국 체제 중 우리의 공적 노력들이 찰나적이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그 조그만 노력들이 쌓여 개인이 발전하고 행정의 투명성이 확보되고, 국가의 미래 비전을 실현하는데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는 점에서 신디 류 하원의원님의 제주도 감사위원회 발전을 위한 헌신적 지원은 역사의 기록이 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신디 류 하원님은 제주도 감사위원회 마국 감사제도 비교연수단의 워싱턴주 킹 카운티 감사실과 시애틀시 감
1993년 12월 29일. 제주도지사로서 첫 출근을 했다. 1974년 농림부로 가면서 제주도를 떠난 이래 근 20년만의 귀향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제주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전진의 깃발을 올려야 된다는 것이 포부였다. 그만큼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은 중압감 또한 컸다. 출근한 첫날 난 비서실에 두 가지를 지시했다. 도지사 집무실의 응접용 탁자와 의자를 전부 사무용으로 바꾸도록 했다. 더불어 도지사 집무실과 접견실을 서로 맞바꾸도록 했다. 도지사 집무실은 화장실까지 갖춘 넓은 공간인 반면 도지사를 찾아오는 도민들을 만나는 접견실은 좁고 초라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도지사 출근시간을 오전 8시로 정하고, 결재나 보고가 필요한 직원은 오전 8시30분부터 도지사실로 와도 좋다고 말했다. 도정방침은 취임사의 내용에 맞춰 <1. 활력있는 제주산업, 2. 균형 있는 제주개발, 3. 자조하는 제주정신, 4. 헌신하는 제주행정>으로 정했다. 여기까지는 쉽게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됐다. 그런데 도정슬로건은 무얼할까를 망설였다. 집무실 벽에 새겨진 도정 캐치프레이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임 우근민 지사 시절 쓰던 슬로건을 보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
▲ 짐 선더스(Jim saunders) 지난 3월 추자도에서 경험한 일이다. 추자항을 따라 걸었다. 이날따라 바람이 몹시 거칠었다. 낚싯배들은 높은 파도에 출렁거렸다. 깃발들도 정신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지난밤 강한 폭풍이 있었다. 하늘은 파란데 춥고 바람은 거칠기만 했다. 풍랑주의보가 내린 것이다. 순간 ‘오늘 제주도로 돌아가긴 틀렸구나’고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내일은 월요일이어서 일을 해야 하는데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돌아가는 문제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 길, 바다 속에 보트가 가라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보트는 다른 배 밑으로 가라 앉아 머리 부분만 보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텔로 돌아가는데 침몰한 보트가 있는 항구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보트를 꺼내기 위해 주민들이 몰려온 것이다. 나는 따로 할 일이 없어서 옆에서 구경하기로 하고 앞자리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 추자도 추자도는 제주도로부터 45km 북쪽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42개의 군도로 이뤄진 추자도에는 4개 섬에는 사람이 살지만 38개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그 중 상추자와 하추자에 많
▲ 조한필/ 충청타임스 부국장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 지난주 방송된 TV드라마 ‘무신’에서 최우(정보석 분)가 김준(김주혁 분)이 노예출신이지만 최고 지위까지 오를 수 있음을 내비치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실제는 당시 반란을 일으킨 노비 만적이 동료들을 선동하면서 한 말로 봉건적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폭탄 선언이었다. 고려 무신정권(1170~1270) 100년은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였다.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수시로 뒤엎었다.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25세 청년장수 경대승은 73세 상장군 정중부를 살해하고, 최충헌도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했다. 같은 시기 천민ㆍ노비들도 들고 일어났다. 망이ㆍ망소이의 난, 진주 노비들의 난, 최충헌의 노비 만적의 난 등. 하극상의 연속이었다. 당시 하극상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뒤흔드는 변혁의 역동성을 제공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최씨 집권자 등 무인들은 타락했다. 몽고 침략군의 말발굽 아래 백성을 내팽개치고 강화도로 도망쳐 바닷길로 온갖 물자를 공급받으면서 사치를 누렸다. 문신 귀족들 토지를 빼앗아 새로운 대토지
▲ 임기범 제주도청 정책기획관실 주무관 제주화장품기업협회(이하 협회)에서 5월 18일 성명서 발표를 통해서 선도전략산업 과제 선정에 대해 문제 삼은 지 벌써 3주가 되어 갑니다. 처음 문제 제기를 접한 후, 본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로서 오늘 현재까지 고민하고 자료를 점검했습니다.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불공정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평소 공직사회의 혁신과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전국공무원노조 제주지역 본부장으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불이익을 감수한다는 각오로 제주-세계7대자연경관 선정과 관련한 공무원 동원에 대해서 도지사님께 공개적으로 쓴 소리까지 했었습니다. 본 업무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는 바입니다. 왜냐 하면, 사실이 제대로 도민들께 전달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직자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업무를 처음 접한 것은 2012년 2월 정기인사 시 정책기획관실 광역경제담당부서에 배치되었을 때입니다. 선도전략산업 기획과제를 발굴하고, 최종 확정하여 지식경제부에 올리고 절충하는 일을 했습니다. 특별히 지역기업을 위하여 지
위기의 순간엔 기회도 다가온다고 했던가? ‘6공의 황태자’ 박철언에게 찍혀 미국으로 쫓겨난 내 처지는 너무도 초라했다. 하지만 그 1년의 시간은 후일 제주도정을 책임지게 된 나에게 ‘금쪽 같은’ 자양분이었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 자리를 얻은 난 아내와 함께 워싱턴 외곽 버지니아주의 펄스처치(fallschurch)란 조그만 도시에 거처를 마련했다. 허름한 원룸 아파트였다. 그곳에 살면서 난 학교를 오갔고, 아내는 집안 일을 돌봤다. 농림부 소속인 신분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눈길이 가서 난 조지타운대 근처에 있는 미국 농무성 산하의 경제조사연구소(ERS: Economic Research Service)를 자주 들렀다. 세계의 농업현황에 대한 자료가 풍부해 그곳에서 참 많은 자료들을 들춰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제주출신이어선지 그곳에서 세계 오렌지시장 현황에 대한 자료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생과와 가공용 오렌지의 원산지와 수·출입 실태를 많이 탐독했다. 제주도지사 시절 감귤정책은 이때 알게 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내 머리를 감싸 쥐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물&rsqu
▲ 반기성/ 제이누리 기상전문위원 1896년 일본 동북부 지방의 산리쿠 해안에 높이 25~35m의 지진해일이 덮쳤다. 가옥 5만 채가 파괴되고 주민 2만6,000여 명이 몰살당했다. 먼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돌아온 어부들은 흔적도 없이 휩쓸려 가버린 고향마을을 보며 망연자실해 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곤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어부들뿐이었다. 어부들은 자신들의 마을과 사람들을 휩쓸고 가버린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만 해도 파도 한 점 일지 않는 더 없이 좋은 날씨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기상현상은 ‘쓰나미’라고 불리는 지진해일로 밝혀졌다. 바다의 파도가 높아지는 해일 현상은 대개 태풍과 지진으로 발생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한 해일은 지진에 의한 해일이다. 일명 ‘쓰나미’라고 부른다. 쓰나미가 먼 바다 한 가운데서 일어날 때는 그 강도가 아무리 커도 파장이 160km 정도여서 바다 한가운데에서 해일의 파고는 고작 1m에 지나지 않는다. 산리쿠 해일 당시 파도도 없고 날씨도 좋았다는 어부들의 증언처럼 바다 한가운데 배 위에서는 지진해일이 일어난 지를 전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