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목바다는 평대보다 비옥한 편이었다. 처음 시집 와서 물에 들었더니 그리 깊지도 않은 바위 주위로 전복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얼마나 신바람 나게 전복을 땄던지, 그 후로는 늘 그곳을 지날 때마다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전복은 떼고 나면 그 자리에 흔적이 남는데, 얼마 있다가 다시 가보면 새 전복이 붙어 있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은 돌이 되어버렸다’며 가리켜 주는 바위는 잿빛을 띄고 있었다. 한 번 내려가서 만져보라는 말에, ‘이때다’하고 얼른 숨비질해 들어갔다. 해녀학교서 배운 물질기량을 선보일 절호의 기회였다. 마치 허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울퉁불퉁한 혹을 붙인 바위는 손으로 만지자 푸석거리며 먼지를 날렸다. 생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주위에는 버려진 플라스틱 병들이 나뒹굴어져 있었다. ‘이제는 눈을 씻엉 촞아봐도 전복이 어서(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복이 없다). 한 물찌 넘어도 전복 구경하기가 어렵고. 구제기는 놈만 못해도 전복은 머정이 따라신디(소라는 남만 못해도 전복은 운이 따랐는데)... ’라며 등을 돌리는 멘토의 얼굴에 쓸쓸함이 일었다. 우리의 태왁 옆으로
멘토의 고향인 평대리는 평평하고 널따란 지대를 뜻하는 ‘벵디’에서 유래한 마을이다. 백사장 해안을 끼고 있어서 모래땅에서는 당근을 주로 생산하지만, 700가구의 주민들 중 130명이 해녀일 정도로 물질이 활발한 해촌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물질을 하지 않으면 돈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웬만한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바다로 나갔다. 딸로 태어났으면 어머니를 도와서 생활비를 버는 게 당연할 때였다. 누가 먼저 모래를 집어오는지, 돌멩이를 많이 주워오는지를 내기하는 게 놀이였다. 10살부터 어머니께서 만들어 준 소중이를 입고 바다에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발을 지그시 누르면서 “오래 숨벼보라” 하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속을 견뎠다. “저 메역 끊엉 와 보라” 하면 얼른 숨비질 해 들어가서 욕심껏 잡아채고 올라왔다. “우리 똘, 잘도 잘 햄저, 이 동네 일등상군 허키여”하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던지, 더 깊이 들어가서 더 많이 캐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가 숨이 다 끓어질 것 같아서 “후우∼”하고 가슴 터지게 내지른 것이 숨비소리가 되었다
▲ 법환좀녀마을 해녀학교에서 허정옥 교수(우측 두번째)가 소속된 흑조 팀원들과 찍은 사진. <사진작가 강길순 촬영>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 마지막 수업처럼 오늘은 우리의 마지막 수업일이다. 소설 속에서 프란츠는 여느 때처럼 공부보다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기분으로 학교에 간다. 그런데 교실에는 이상스레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뜻밖에 동네 어른들도 교실에 와 앉아 계신다. 선생님이 ‘우리의 모국어로 공부할 수 있는 수업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프란츠는 마음 깊이 ’자신이 프랑스어를 소홀히 배운 것‘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러한 아이의 마음을 읽으신 선생님이, "너는 이미 네 마음속으로 너를 반성하고 있구나. 나는 그걸로 만족한단다."라고 오히려 아이를 위로해 주신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 저 멀리 교회당 종탑에서 그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시고, 칠판에다 글을 쓰기 시작한다 .“Viva La France!(프랑스 만세!)”라고. 우리의 마지막 수업은 시험으로 이루어졌다. 졸업 후 인턴으로 보내기 위한 최소한의 해녀
이상하게도 물질 수업을 할 때마다 간혹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주인공인 해순(海順)이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바닷바람에 그을리고 조개껍질을 만지작거리면서 갯냄새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제주에서 원정물질을 떠나 부산 근처인 기장에서 물질을 하다가 결혼을 해서 해순이를 낳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않자 혼자서 물질로 딸을 키웠다. 그 딸이 열아홉 되던 해에 시집을 보내고 나서, 그녀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고향인 제주도로 떠나버린다. 해녀의 인생도 모전여전으로 대물림되는 것일까? 해순이의 남편도 원양어선을 타고 고등어잡이를 나갔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스물셋의 청상인 그녀는 재혼을 하게 되고, 산골 마을에서 콩밭을 매다가 바다가 보고 싶어서 산으로 마구 올라간다. 수숫대가 미역발 같고 콩밭이 바다처럼 보이는 해순이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매구혼이 들었다며 수군댄다. 결국 바다귀신을 쫓아내야 제정신이 돌아온다며 무당이 굿을 하는 사이, 그녀는 마을을 빠져나와 갯마을로 달려간다. 때마침 멸치떼가 들어와서 비릿한 갯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가는 갯가
오랜만에 좌혜경 박사의 해녀 노래와 무속신앙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해녀도 아니었고, 자신이 해녀를 꿈꾸지도 않았는데, 해녀를 위한 연구에 그의 생애를 바쳐 왔단다. 왜 그랬을까?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것은 순전히 그의 순수성 때문인 듯하다. 해녀 노래를 정리하기 위해 몇 개월씩 해녀할망들의 얘기를 듣고, 제주도 전역을 다니면서 해녀들의 생활상을 관찰하고, 그 문화를 집대성하는 일은, 정말 바보 같은 순수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로 하여금 그토록 해녀문화에 빠져들게 만든 그 무엇이 있다면, 국문학을 전공한 그에게 스며드는 해녀들의 노래소리가 아닐까 싶다. 숨비소리로밖에 내지를 수 없는 해녀들의 한, 열 길 물속보다 더 깊은 삶의 애환이 그녀의 심연을 흔들어 놓았음에랴. 해녀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유독 해녀박물관이 있는 구좌와 세화 일대 해녀들의 노래가 더 힘차고 투박하다. 특히 육지로 원정물질을 나가, 낯설고 물 설은 그곳 바다에서 노를 저으면서 목숨을 던져 놓고 잠수하러 가는 마음,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시퍼런 물에 떠 있는 두려움과 고단함, 운명에 대한 체념, 삶에 대한 애환과 아픔, 살아내야만 하는
오늘은 여성들에게 저열량의 다이어트 음식으로 잘 알려진 우미를 만들어보기로 하였다. 우미는 홍조류에 속하는 우뭇가사리로 여름철 시원하게 입맛을 돋궈주는 우무의 원료이다. 지금도 우미는 해녀들의 소득원 중 하나이지만 한때 동해안으로 원정물질을 나간 해녀들에게는 물질의 주력품목이기도 하였다. 우무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해서 우뭇가사리를 끓인 후 건져내고 난 다음 그 즙을 응고될 때까지 놔두면 된다. 이 응고된 우무를 다시 동결·융해 시키면서 탈수·정제하면 양갱제조 등에 많이 쓰이는 한천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우미를 만드는 작업이 오늘은 우리 해녀학교 학생들을 한 지붕 아래 다 같이 모여 사는 대가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여자교장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며느리, 딸, 손녀 등 집안의 모든 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우미 만들기’를 전수받는 광경을 그려보시라. 옛날의 그 어느 시대에 3대가 함께 사는 가정집에서 잔치음식을 만드는 풍속도를 말이다. 우미가 학교 마당의 냄비에서 저 혼자 끓는 동안, 우리는 2층 교실로 올라가 교장선생님의 어촌계장 활약상과 개교까지의 전쟁사를 들었다. 한 사람의 영웅이 새로운 역사를
오늘은 김녕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수업을 하는 날이다. 김녕으로 가는 길은 아주 멀고도 낯설었다. 해변을 따라 이리저리 꼬부라진 길을 달리면서 제대로 찾아갈까, 수업시간에 맞출 수나 있을까, 마음 한 구석에 근심이 들어왔다. 하지만 표선을 지나면서 전개되는 아름다운 해안길, 서귀포와 달리 드넓게 펼쳐지는 바다풍경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수업은 제주해녀들이 전개한 육지물질의 역사와 바다에 관한 해녀들의 민속지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수업은 우리 제주 해녀들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의 대마도에 이르기까지 원정물질을 나갔던 역사적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제주 해녀들이 왜 육지로 물질을 나가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다각적인 시각 등에 대해 학술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강사인 김수희 박사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적인 연구 결과는 그동안 제주해녀를 정서적, 경험적, 생활적인 견지에서 이해하고 생각해 왔던 내게, 객관적인 시각과 미래과제를 안겨주었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들의 시각, 특히 여성학과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독특하고 긍정적으로만 보아왔던 해녀 연구에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어서
오늘은 우리와 천생연분처럼 느껴지는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일일이 잠수를 해보라 하시고, 강평을 해주셨다. 우리 흑조는 모두가 장래의 상군 감들이란다. 이제라도 바다에서 해녀들이랑 물건을 잡을 수 있겠다고. ‘다들 예쁘고, 부지런하고, 열심이라서 마음에 든다’시며, 부지런히 성게를 잡아서 일일이 까시고는, 우리들 입속에 쏘옥 쏙 넣어주셨다. 마치 암탉이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먹이는 것처럼! 물질을 하는 것은 즐겁고 신나는 일이지만, 배가 고프고 지친 게 문제였는데, 오늘은 선생님이 공급해 주시는 고단백 성게 음식으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얼마나 물질에 힘이 생겨나던지..., 이런 날은 아마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 혜성처럼 천사가 나타나 우리를 날개에 태워준 날이다. 성게를 까주시는 사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 법환좀녀마을 해녀학교에서 허정옥 교수(우측 두번째)가 소속된 흑조 팀원들과 찍은 사진. [사진작가 강길순 촬영] (1) 해녀의 호흡법은 훈련이 필요한가요? “선생님,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물속에 들어가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나요? 저희들에게 해녀의 호흡법을
▲ 허정옥 교수가 물질을 마치고 태왁을 들고 바다에서 나오고있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우리 흑조의 선생님이 최고였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듯이 조심조심 다루셨다. ‘파도치는 곳으로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바다 속에 들어가서도 너무 오래 있지 말라’ 하시는 게, 마치 엄마 닭이 새끼들을 몰고 다니며 부리로 머리를 쪼아대는 잔소리와도 같았다. 또한 가장 약한 새끼에게 먼저 신경을 쓰고, 훈련의 수준을 제일 미숙한 새끼에 맞추는 모습이 안도의 한숨을 낳았다. 그러면서도 잘 하는 새끼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가르침의 지혜가 절로 미소를 일으켰다. “우리 반이 젤로 잘 햄신게. 하나는 벌써 상군이 다 되어서”라면서 옆 반이 들으라고 큰소리를 지르시는 모습 또한 우리 모두를 으쓱거리게 하였다. 가장 감명 깊은 것은, 새로운 기술이나 새로운 장소마다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냥 ‘알아서 한 번 해보라’고 말씀만 하실 법 한데도 말이다. 선생님의 시범에 따라 우리가 물질을 따라하면, 일일이 평가를 하시되, 언제나 칭찬으로 마무리를 하셨다. 뿐만 아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오늘은 생애 처음으로 ‘불턱체조’란 걸 해보았다. 불턱이란 해녀들이 겨울철에 물질을 마치고 나와서 오순도순 모여 앉아 불을 쬐는 장소다. 물론 사계절 옷을 갈아입고 물질을 준비하는 노천의 탈의장이기도 하다. 물질하는 틈틈이 휴식을 취하고, 작업 정보를 주고받으며, 공동체 문화를 함양하는 수련장 역할도 한다. 바람과 시선을 막기 위해 바위로 그늘이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우리는 16주에 걸쳐서 이론과 실습으로 구성된 총 80시간의 커리큘럼을 이수했다. 수업은 1주일에 두 번씩, 토요일 3시간과 일요일 2시간으로 이루어졌다. 토요일에는 이론과 실습, 일요일에는 실습 위주로 수업이 진행됐다. 수업이 끝나면 1주일에 한 번씩 실습일지를 작성해서 전담교수에게 제출했다. 이론 시험을 대체하는 리포트인 셈이다. 실기 시험은 마지막 수업 시간에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 법환좀녀마을 해녀학교 개소식. ‘너와 같이 1년만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는 어머니의 하소연을 못이기는 척 하고 돌아온 고향에서, 나는 운 좋게도 법환좀녀마을 해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해녀양성과정’이란 교육목적이 가슴 설레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내가 진짜로 해녀가 될 수 있을까? 두둥실 태왁에 몸을 싣고서